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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말하다: 그의 정치적 신념과 한국 민주주의 

 

인터뷰 진행=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 번역 및 축약=배영대 문화선임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마지막 인터뷰에서 자신이 정말 이루고 싶었던 것은 ‘민주주의의 진보’였다고 밝혔다.
김형아 교수(이하 김)_ 대통령님의 탈권위주의 정치 리더십이 정부 구조나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노무현 대통령(이하 노)_ 그런 부분을 저는 가장 회의적으로 봅니다. 사실 저는 내가 대통령이 된 것 자체를 하나의 진보, 역사적 진보의 중요한 사건이자 기적으로 여깁니다. (…) 돌아보면 저는 무엇이 진보인지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요즘 하는 생각은 ‘대통령은 어떤 일을 하는가’ ‘리더는 역사의 진보를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을 하는가’입니다.

김_ 남북 분단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보수 지배의 역사를 넘어 진보 측 리더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회의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어떤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까?

노_ 제가 정말 이루고 싶었던 것은 ‘민주주의의 진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진보를 이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권력층의 자기통제와 법의 지배가 문화로 자리 잡기를 바랐습니다. (…) 많은 사람은 독단적 권력에 의한 정치 대신 규칙과 상식에 의한 정치가 사회적 문화로 자리 잡았으므로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탈권위주의는 정확히 그런 것을 의미해야 하지만, 저는 얼마나 많은 진보가 이뤄졌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아주 적은 사회적 균형만 존재할 뿐, 그조차 거의 진보하지 않은 듯합니다.

김_그것은 대통령님만의 생각입니까? 아니면 모든 한국인이 그렇게 받아들입니까?

노_ 양쪽 모두라고 생각합니다.

김_ 저는 어느 누구도 한 대통령의 임기 5년 동안 권위주의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노_ 그것은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사회의 공정성이나 균형 측면에서는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저는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거의 발전이 없었습니다. (…) 저는 민주주의란 통합의 시스템이며, 그 안에서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고, 토론과 경쟁 혹은 투쟁을 통해 사회통합이 이뤄지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훌륭하다고 여겼습니다. 저의 정치인생 전 기간에 걸쳐 이러한 정치적 가치를 가장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러한 가치는 지역감정이라는 형태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 경력을 훼손하면서까지 지역감정을 조금이라도 없애기 위해 계속 싸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열린우리당 창당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한국 정치는 완전히 옛날의 지역대결 구조로 돌아갔습니다. (…) 그래서 매우 실망했으며, 제 임기 동안 민주주의가 얼마나 진보했는지 의심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성취가 없었습니다.

김_ 대통령님을 인터뷰하고 싶었던 이유는, 주로 대통령님의 임기 동안 한국사회와 외국에서의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는 한국 민주주의에 많은 진보가 있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학자가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라고 말합니다.

노_ 저도 그 점에 대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민주주의 발전의 목표치가 너무 높았던 것일 수 있겠죠. 보수들은 실제로 위기를 느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보수적 가치와 기득권에 대한 위기감. 그들은 보수주의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피해를 받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보수적 가치가 위기에 직면했고, 그래서 그들의 기득권이 위협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득권에 대한 위협은 진보적 이데올로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진보로 인한 사회의 투명성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좌파 때문에 위협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진보진영이 세 가지 중요한 중첩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진보진영이 자신들의 능력을 벗어난 목표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들이 내부적 경쟁, 매우 적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제가 중도실용주의의 요청에 광범위하게 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후퇴한 것은 아니었고, 자유무역협정(FTA)을 받아들이는 정도였습니다. (…)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결합하면서 저에 대한 불만이 커갔습니다. 불만은 반드시 제 책임으로 설명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2007년 대선 패배의 책임을 제 리더십의 결점으로 돌렸습니다.(…)

한 나라에서 10년 만에 행정부의 교체가 이뤄지는 것이 저는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 대선은 새로운 후보에 대한 평가이지, 전임자에 대한 평가가 아닌데, 두 가지는 자주 혼동되고 있습니다. 진보진영이 저를 경멸하고 모든 책임을 제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김_ 왜 진보진영이 대통령님을 경멸하나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대북정책이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따르고 확대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10월 9일 방북을 마치고 돌아온 노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를 초청해 방북 결과를 설명했다.
노_ 제가 방금 세 가지 요소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저에 대한 진보진영의 부정적 평가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 요인이 적대적 분위기를 조성했을 뿐 아니라 대선 패배의 모든 책임을 제게 돌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선의 결과가 재임 중인 대통령에 의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반인이 자신이 느끼는 대로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학자라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김_ 민주주의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노_ 저는 민주주의의 첫째 요소는 권력에 있는 사람들이 규칙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의 지배’입니다. 일반인이 법에 복종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이 법과 원칙을 존중하는 사회를 말합니다. (…) 민주주의란 ‘권력의 자기통제’라는 것입니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는 민주주의의 두 번째 요소입니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자유와 평등은 진보와 결과, 공평한 사회, 사회적 평등의 관점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 중 어느 것도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

제게도 몇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목표로 했던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피할 수 있었던 몇몇 갈등상황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디어와의 싸움. 저는 시장에 참여하는 강한 기업들에 힘이 있고, 언론권력은 시장권력과 손잡고 있으며, 정치권력 또한 시장과 현실 속에서 성공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언론의 힘을 제거하고 싶었던 이유입니다. 언론의 벌거벗은 진실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그것은 제게 벅찬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루기 힘든 몇 가지 일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통합 정당을 만들려는 시도를 너무 많이 했습니다. (…) 계획은 너무 앞서 나갔고, 범진보진영, 특히 민주당 지지자들 내부에서도 불만이 나왔습니다. (…) 저의 언론과의 투쟁은 대중을 걱정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국회의 구조는 우호적이지 않았고, 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부담스러운 투쟁에 연루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진보진영)는 결국 심하게 분열됐고, 저는 언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한미관계에 대해 | “용산의 미군부대 재배치, 양자의 입장이 잘 반영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미관계에서 상호 적절한 타협을 해나갔다고 강조했다. 2002년 12월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효순·미선양 추모집회.
노_ 남북관계에서 교류가 상당히 증가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교류가 증가하면서 남북 간 긴장은 많이 줄었습니다. 이는 제가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따르고 더욱 확장시켰기 때문입니다. 저의 대북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름을 바꿨는가? 북한이 ‘햇볕’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를 불편해 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불편해 하는 이름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북한은 ‘햇볕’이 자신들이 옷을 벗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같은 정책에 ‘평화와 번영’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남북관계에 대해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부시 행정부가 결국 클린턴 대통령이 8년 전 남기고 간 곳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모두 폐기되었는데, 8년이 지난 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 우리는 미국의 관점에서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북·미 관계를 우리 입장에서 중재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10년 동안 우리가 해낸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는 달랐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미국과 불편한 문제가 없었습니다. 비록 의견차이는 많았지만,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미국은 일방적으로 문제를 다루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우리의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우리 또한 일방적으로 미국에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존중했고, 많은 것이 미국이 원했던 방식으로만 되지는 않았습니다. 용산의 미군부대 재배치가 양자의 입장이 잘 반영된 경우입니다. 우리는 이미 돈을 들였고, 또 남은 비용도 우리가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비용으로 다시 재배치하기를 원했고, 미국으로서는 서울 도심에 부대를 두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양자의 이해가 맞아떨어졌습니다. 제2 보병사단을 남쪽으로 옮긴다는 결정은 저의 정치적 입장과 미국의 전략적 입장이 맞아떨어진 결과였습니다. 양자의 입장은 일치했습니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는 적절한 타협의 결과였습니다. 워싱턴이 전략적 유연성을 제시했을 때, 우리는 동북아시아는 예외가 되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나 ‘노(No)’라고 말하기에 앞서, 이 문제는 남한정부와 먼저 논의해야 한다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저는 동북아시아 문제에 관하여 [그 합의는] 결정이 일방적으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남한과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며, 적절한 타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개념계획 5029(C o nc e pt Pla n 5029)’를 ‘작전계획 5029(Operations Plan 5029)’로 전환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분명하게 반대했습니다. (…) 작전계획 5029는 전쟁상황을 위한 것이며, 미국이 지휘권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저는 한국이 전시작 전지휘권(Wartime Operational Control- OPCON)을 회복하기를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미국은 처음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결국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김_ 왜 미국이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하십니까?


▎2007년 9월 7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노_ 만약 미국이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반미운동이 시작됐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에 OPCON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했을 때, 미국은 처음에는 반대하다, 나중에 동의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인의 자존심과 연결된 중요한 문제이자 정치적 갈등으로 번질 수 있는 원인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예스(yes)’ 한 것입니다. (…) 작전상황을 우리가 통제하는 것은 남한·북한·중국 사이의 관계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오랜 미해결 과제였는데, 우리가 끝냈습니다. 우리는 모두 완성했습니다.(웃음) 미국은 어떤 부분은 좋아하고 어떤 부분은 싫어했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아주 많이 존중했습니다. 갈등은 저와 조지 부시 대통령 사이에 있다기보다 저와 ‘네오콘’ 사이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양쪽은 합의에 이르렀고, 내가 부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됐기 때문에 잘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미국 쪽의 몇몇이 반복적으로 단어를 왜곡했고 변형시켰습니다. 그러한 불평은 미국정부 내부와 주변의 불만에 가득한 네오콘들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언론은 그것을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인 것처럼 포장해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과 미국 정부 사이에 갈등은 없었습니다. 타협은 순조롭게 만들어졌습니다. 나는 많은 것을 양보했고,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저는 미국이 대사관을 옛 경기여고 자리에 지으려고 했을 때 많은 것을 협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계획은 문화재청의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그래서 대신 미국이 요구한 용산의 8만평을 승인했습니다. 미국의 체면을 살리기에는 충분한 넓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국의 요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심각한 정치적 문제로 떠오른 반환되는 미군기지 지역의 환경오염 문제도 정치적으로 다루기보다 법과 규칙에 따랐습니다. 한·미 간 기존 협정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했다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갈등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해결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한국 정부가 사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김_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것을 수용했다는 말씀이지요? 하지만 이런 노력은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과의 갈등으로 인해 많은 왜곡이 있었던 듯합니다.


▎김관진 당시 합참의장과 비비 벨 주한미군 선임장교가 2007년 6월 28일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계획’에 합의하고 서명했다.
노_ 시민단체는 물론 환경부도 오염된 미군기지의 반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결정했습니다. …( )

부시 행정부에 대해 | “갈등과 불평은 미국 네오콘들 사이에서 나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개성공단 같은 경우는 한 번 닫히면 다시 열리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현재 개성공단은 남한 정부의 전면 폐쇄 결정으로 남한 기업들이 완전히 철수한 상태다.
김_ 미국이 양보한 것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무엇인가요?

노_ 전략적 유연성과 ‘개념계획 5029’의 폐기를 들 수 있습니다. 미국의 대북정책은 불가피하게 여러 가지 기복이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의 입장을 매우 존중했습니다. 대신 우리는 이라크에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김_ 하지만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은 버시바우 (미국) 대사가 이라크 파병에 대해 다르게 말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김경수(대통령 비서)_ 버시바우 대사는 노 전 대통령이 대북정책에서 미국의 유연성을 대가로 이라크에 군대를 보냈다고 하였고, 비록 노 전 대통령의 목표가 미국이 추구한 바와 달랐지만 결국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습니다.

노_ 맞습니다. 버시바우가 그렇게 말했다면 정확합니다. 우리는 미국의 입장을 많이 받아들였고, 우리가 받아야 할 것들을 모두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한미관계는 실용적으로 처리됐다고 저는 믿습니다.

김_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정부와 부시 정부는 많은 갈등을 빚었으며, 대통령께서 네오콘과 특히 심한 갈등을 빚었다고 생각할까요? 왜 그들은 대통령께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생각할까요?

노_ 양국 정부가 타협했을 때, 미국에서 어떤 사람들은 다르게 말했습니다. 미국 정부 내 혹은 정부 주변의 강경파나 네오콘들이 특히 항상 합의된 것과 다르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한국의 우파 일간지가 이것을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갈등을 부채질했습니다. 우리도 또한 미사일방어체계(MD)와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 우리의 입장은 확고했습니다. 반면 한미 양국 정부는 우호적으로 동의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 주변의) 불만족스러운 사람들은 양국 정부의 관계가 나빴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김_ 어제 6자회담이 열렸는데, 회담이 열렸는지조차 모를 정도입니다. 대통령께서 수행했던 역할을 고려할 때,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북미 관계는 계속 좋아지고 있다는 보도가 있고, 버시바우 또한 노무현 정부와 다르게 이명박 정부와는 매우 협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노_ 미국이 [이명박 정부에] 매우 만족한다는 사실은 한국이 많은 것을 잃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 한국이 현 관계에서 미국과 갈등을 일으킬 것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해 노무현 정부의 입장과 미국의 입장은 결국 일치했습니다. 조금 차이가 있었겠지만, 미국은 본질적으로 대북 화해정책으로 돌아섰습니다. 북·미관계가 순조로울 때 한국 정부가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서울이 워싱턴과 갈등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욱이 서울은 현재 북·미관계에서 워싱턴을 지지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기 때문이고, 미국은 이에 대해 좋게 생각합니다.

남북관계에 대해 | “개성공단 같은 사업은 한번 닫히면 회복 어려워”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손을 맞잡아 들어올리고 있다.
김_ 하지만 북한은 이제 남한을 상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어떻게 끝나리라고 보십니까?

노_ 북·미관계가 해결되면 남북관계도 해결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가서 남한은 그동안 해왔던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자 한다면 남한은 북한의 요구를 더 많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결국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겠지만 돌아오는 것은 훨씬 적을 수 있습니다. 현재 남북관계가 점점 움츠러들고 있다는 것이 걱정입니다. 남북 간 채널이 하나둘 잇따라 막히고 있습니다. 그중 어떤 것들은 쉽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금강산관광은 쉽게 재개할 수 있습니다. 다른 관광사업들도 회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개성공단 같은 사업은 한 번 닫히면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북한은 현재 위험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원인제공을 했든 남북관계는 양쪽 모두의 엄격하고 거친 외교방식으로 인해 빠르게 악화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회복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회복되지 못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정부 간 신뢰가 중요합니다. 개성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회사들이 남북관계를 불신하고 북한의 태도를 불신한다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이익을 내는 견고한 회사들은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 북한이 경제를 회복하는 데 실패하거나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이는 남한의 부담이 될 것입니다.

북한의 개방은 한국경제에 가장 이로운 상황입니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개방했을 때 누가 먼저 기회를 잡을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구의 기술, 규제, 시스템, 기준, 거래행위들이 북한의 시장을 차지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남한은 북한 시장을 차지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놓칠까 걱정됩니다. (북한의 개방에 대비해) 중국과 한국은 경쟁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북한이 개방하지 않는다면, 북한의 위협은 그 자체가 모든 점에서 우리에게 부담입니다. 어떤 경우든, 남북관계는 순조롭게 풀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양쪽이 거칠고 예측할 수 없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김_ 무엇이 덜 거친 외교일까요?

노_ 바로 햇볕정책입니다. 문제가 있더라도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고 양보하며 신뢰를 쌓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외교의 열쇠입니다. 적성국에 대한 강경한 외교는… 부시 행정부의 8년 동안의 강경한 외교정책은 실패했습니다. 미국은 강경하게 나왔고, 남은 것은 미국의 리더십 손상, 오직 손실뿐이었습니다. 외교에서는 어떤 거친 것도 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많이 참았고, 신뢰를 쌓기 위해 많은 것을 양보했습니다. 신뢰가 핵심입니다. 남북관계에서 제 목표는 북한이 남한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을 때까지 그들을 압박하는 것입니다. 남북 교류에서 신뢰가 형성돼야 비로소 북한은 남한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을 것입니다. 더욱이, 서로 생명선을 잡는 것과 같은 가스 파이프라인을 북한에 건설하는 것은 신뢰가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신뢰를 그 수준까지 쌓는 것이 대북정책에서 저의 목표였습니다. 저는 외교가 그러한 전략적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외교의 상호주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외교란 이를테면 치고받는 맞대응이나 보복 같은 상호주의 개념에 기반을 둬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결국 상대방의 굴복을 목적으로 합니다. 외교는 분명한 전략적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목표가 있었고, 그것이 외교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_ 가스 파이프라인이 북한으로 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노_ 가스 파이프라인은 러시아에서 시작해 북한을 지나 남한까지 오는 것입니다. … 북한이 그 선을 끊는다면 우리에게는 치명적입니다. 반면 우리가 전기 공급을 중단한다면 북한에 치명적입니다. 그런데 양쪽 모두 여전히 전기를 보내고 가스를 받고 있습니다.

김_ 그래서 서로 상대방의 넥타이를 쥐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군요. 거기까지 가는 것이 전략적 목표였다면, 대북정책에서 비전은 무엇이었습니까?

노_ 10월 4일 남북공동선언의 첫 기념식 기조연설에서 저는 “평화의 가치가 통일을 앞선다”고 분명하게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평화 우선. 평화 정착은 가능하고, 통일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통일에 앞섭니다. 물론, 결코 통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 평화를 먼저 구축하고, 그 다음으로 경제와 문화를 통합하는 것이 현실적인 계획일 수 있고, 통일은 목표이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신뢰를 쌓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전시작전통제권(OPCON) 회수를 추구했던 이유이자 ‘개념계획 5029’의 ‘작전계획’으로의 전환과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을 끝까지 반대한 이유입니다. 그런 조치들은 우리가 북한을 침공하거나 체제의 붕괴를 꾀할 의도가 없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대화가 어떤 지점에 도달하면 우리가 북한에 대한 다른 나라의 공격 시도를 막아줄 수 있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그것을 조심스럽게 실천했습니다.

김_ 김정일과 개인적 신뢰를 쌓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시나요?

노_ 김정일은 제게 의심 없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대화할 때 상대방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계산을 가지고 말하는지, 솔직하게 말하는지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김정일은 저와 대화할 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조짐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매우 개방적으로.

한·일관계에 대해 | “일본은 경제력 있지만… 국제공동체의 미래 비전 없어”


▎2007년 11월20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ASEAN+3’ 회의에 참석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일본의 후쿠다 전 총리가 정상회담을 열고 양국 간 현안을 논의했다.
김_ 일본인들은 위안부 문제가 핵 위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한· 관계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노_ 일본의 한계는 국가가 비전과 결정 없이 스킬에 의해서만 운영된다는 점입니다. (…) 경제력 덕분에 일본은 움직입니다. 국제공동체, 동북아시아 혹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어떠한 미래 비전도 없고, 경제력으로만 국제사회에서 위신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역사적 결정을 내릴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한·일관계는 경제와 기존의 민족주의, 협소한 국가주의의 틀안에서 때때로 갈등을 계속 보여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 한국인의 꿈은 “우리도 할 수 있다” “한 번 해보자”와 같은 국가적 자신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조금 속도가 늦춰졌지만 그러한 방식은 아주 오래전 박정희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불을 지핀 이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제무대에서는 모두 한국을 칭송합니다. 저는 임기 동안 외교적 업무로 해외에 갈 때마다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한국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국가는 도움을 요청했고, 어떤 나라는 우리가 부유해진 노하우를 배우려 했으며, 또 어떤 나라는 한국의 경제와 민주주의를 일종의 존경심을 가지고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일본도 부자이기 때문에 좋은 대접을 받지만, 저는 일본이 한국인들과 같은 부러움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본은 대체로 수표를 씀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미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국인의 자신감은 계속될 것인가? 그것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한국 내부에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의 주장은 한국이 미국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미국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입장은 무엇인가? 저는 유럽 방식을 선호합니다.

한국의 미래 방향에 대해 | “동북아 평화질서 구축 위해 6자회담을 적극 추진하려 했는데…”


▎2002년 12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 당선자가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김_ 왜 유럽식인가요?

노_ 꿈이 있는 유럽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성공을 위해 미국으로 갔고, 미국이 여전히 기회의 땅이며 세계질서를 주도한다고 여깁니다. 강자의 논리가 끊임없이 성공 신화를 추구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또한 미국이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미국은 모두가 행복을 공유할 수 있는 통합사회로 나아가고 있는가? 미국은 성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비전이 있는가? 세계 사람들이 모두 미국인들처럼 많이 소비하는 것이 옳은가? 미국은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주먹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방주의가 세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지 질문하는데 미국은 이에 대해 대답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 하는 것이라고는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세금을 줄이고, 시장이 결정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 반면 유럽은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유럽연합(EU)이 하나의 실례입니다. 인류의 공존 혹은 지속가능한 공존사회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유럽은 지구에서 인류의 생존을 지속하기 위한 대안을 열심히 찾으면서 동시에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

아시아, 특히 동북아에서 한국·중국·일본은 유럽이 추구하는 이슈들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아시아는 “우리도 미국처럼 부자가 되고 싶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은 가장 뚜렷하게 미국에 가까이 가 있습니다. 그들(일본 상대자)은 만날 때마다 항상 ‘자유와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을 공동선언이나 보도자료에 포함하자고 제안합니다. …( )

그것이 현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동북아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의 문제는 동북아 국가들이 어떻게 함께 번영을 추구할 수 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협력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앞서 중견국가의 역할에 대해 질문했는데 [그 답은] 9월 19일 선언(다자안보협력체를 만드는 아이디어)에 언급돼 있습니다. 그 선언의 한 문장은 ‘6자회담이 성공하면 그 탄력을 받아 다자안보협의회 혹은 영구적 안보협력체가 동북아 미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설립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한국의 제안으로 포함됐습니다. 저는 평화롭고 번영하는 동북아 시대를 실현하는 것을 우리 정부의 목표로 정했습니다. 참여민주주의, 함께 사는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는 저의 정부정책의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다자안보협력체를 설립하는 제안은 제가 구체적인 글의 형식으로 남긴 것입니다. 그 제안은 6자회담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북아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저는 6자회담을 대화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지만 2005년 9월 19일 선언 이후 뒤집어졌는데, 방코델타아시아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2007년까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 우리는 일본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저는 일본의 비전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아시아의 미래는 걱정스럽습니다. 저는 지속적으로 국방비용을 늘렸습니다. 국가 재정의 전체적 증가와 비교할 때 국방비 증가는 평균보다 약간 높습니다.

김_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정책이었나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마지막 인터뷰에서 ‘권력의 자기통제’와 ‘법의 지배’가 문화로 자리 잡기를 바랐다고 밝혔다. 취임 직후인 2003년 4월 9일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검사들의 질의에 답변하는 노 대통령.
노_ 그렇습니다.

김_ 그 목표가 무엇이었나요?

노_ 중국과 일본이 헤게모니 다툼을 벌이면 한국은 심각한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한국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입장이어야 합니다. 한국은 동북아의 평화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주도해야 합니다. 일본과 중국이 군비경쟁을 할 때, 한국이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게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중요한 독립체가 되어야 합니다. 조선 왕조(1392~1897) 말기에 그들은 서로 싸웠고, 그들에게 한국의 의지는 존재하지 않았고, 설사 존재했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똑같은 일이 미래에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선택이 무게가 있어야 합니다.

김_ 이 아이디어는 박정희 대통령이 주장했던 것과 비슷한가요?

노_ 방향은 매우 다릅니다. 대외정책의 영역에서, 저는 적대적 정책을 지지하지 않지만, 한국이 절대 약한 나라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군사력에 관한 문제에서도. 누군가가 정복하지만 지배하지는 않는 시대에 이미 들어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든,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가 중요하지 않은 개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국방과학에 막대한 투자를 한 이유입니다.

김_ 대통령선거 직전에 반미정책을 강하게 주장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노_ 대선 기간에 말한 것들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이 그렇게 그려냈습니다. 반미주의는 위험하고, 한국이 반미주의에 연루되면 심각한 문제에 빠질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언론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다면 우리가[한국인들이] 반미주의를 채택하면, 그것이 우리를 망칠까?(…)”라고 단지 묻기만 했습니다. 저는 반미 노선을 표방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반미주의자인 것처럼 많은 비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반미주의는 그냥 반미주의일 뿐이다. 왜 그것이 문제인가?”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한 번도 반미주의자 입장 같은 것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미선·효순양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촛불시위가 벌어졌을 때 이회창[신한국당 대통령 후보]은 거기에 갔습니다. 저는 가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가지 않았다고 해서 엄청난 조롱을 받았습니다. 조롱은 너무 강력해서 캠프 안에서도 미국을 방문하지 않으면 대선에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지배적 분위기였고, 국내 언론들 또한 이에 대해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반미주의이기 때문에 미국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항공요금 혹은 비행기 티켓이 없었고, 사실은 미국에 가야 할 일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고, 그래서 간 적이 없을 뿐입니다. (웃음)

노무현의 대선 승리와 대중운동, 그리고 시민 캠페인 | “저는 대선까지는 잘했지만 그 후엔 그러지 못했습니다”


▎2009년 5월 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되고 있다.
김_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서, 특히 ‘탈권위주의적’ 방식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노무현 정부가 없었다면 무슨 일이 발생했을지 궁금합니다.

노_ 저도 탈권위주의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핵심은 ‘법의 지배’와 ‘권력의 자기통제’입니다. 아,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전에 말했듯 저의 승리가 가장 중요한데, 비록 제가 그 중요성을 키우지는 못했지만, 저의 승리가 대중운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요소들도 있지만, 저의 승리는 대중운동과 선거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선거 참여 캠페인-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연장으로서-의 결합으로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의 중요성을 임기 5년 동안 강조했어야 했는데, 완전하게는 할 수 없었습니다. …( )

김_ 만일 다른 누군가였다면 어땠을까요?

노_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웃음) 저는 대선까지는 잘했지만 그 후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시민들의 역량을 계속 동원하고 조직하지 못했습니다. (…) 저의 행정부는 시민들의 조직과 참여에 의해 탄생했으므로 그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사명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진보입니다. 민주주의를 더 진전시켰어야 했는데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저의 전략적 선택뿐만 아니라 상황적 요소도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부분에 대해 상실감을 느낍니다.

(…) 우리는 혁명의 추동력이 바로 민주주의의 추동력으로 번역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혁명은 권력을 잡자마자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혁명도 체제의 통제권을 얻음으로써 대안적 세상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권력이 전복될 수 있고, 권력 또한 뒤이은 권력투쟁과 대중투쟁에 의해 전복될 수 있지만, 더 정확하고 전문적인 권력투쟁은 다음 단계에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권력투쟁은 대중운동의 연장으로 진행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 무엇이 권력의 원천이고, 무엇이 추동력인가? 그리고 권력투쟁을 이끌어가는 능력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에 대답해야 할 시간인 듯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고, 답을 찾고, 연구해야 하는 시간인 듯합니다.

김_ 이제 우리는 철학적 영역으로 들어섰습니다. 무엇이 새로운 권력투쟁의 원천인가? 무엇이 추동력이고, 능력인가? 그 답을 찾으신다면 내년 이맘때쯤 다시 방문하고 싶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 “국가주도 경제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관련 “발전국가 모델에 대한 모든 게 권위주의적 통치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집무 중인 박정희 전 대통령.
노_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발전국가론에 관한 몇 가지 책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서, 그리고 몇몇 학자들 사이에서 이 이론은 소위 빠른 성장을 이룬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국가 주도의 발전 모델을 가리킵니다. 경제와 관련해 우리는 자유시장 시대에 살고 있으며, 국가주도경제는 마치 범죄인 것처럼 다루어집니다. 하지만 국가주도경제조차 필요하다면, 필요한 것이고, 부작용은 부작용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는 국가주도경제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문제는 발전국가 모델에 대한 모든 것이 권위주의적 통치를 하는 국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제적 성취는 권위주의적 통치국가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그런 국가들에는 또 다른 공통의 요소가 있는가? 이러한 것들은 제게 수수께끼 같은 문제들입니다.

어떤 저자에 따르면, [그리고] 제2공화국(1960년 6월~1961년 5월)의 기록을 읽었는데,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이승만 대통령 시기에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 대통령이 “이 제안은 공산주의를 하려는 것인가?”라고 질문하면서 그 계획은 중단되었습니다. 그것은 3개년계획으로 변경돼 제2공화국의 장면 내각으로 이전됐습니다. 미국을 방문하면서 그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5·16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취소되었고, 계획은 다시 수정됐습니다. 자본을 모으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바뀌었지만, 전략과 계획의 내용은 동일하게 하기로 합의되었습니다. 자본을 모으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가 알기로] 조금 다르게 진행했던 듯합니다. 그런데 5·16 군사쿠데타가 없었다면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이 민주당 체제 아래서 실행될 수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이 점에 대해 저는 확신이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련해 저는 정치가이기 때문에 어떤 쪽이든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 ) 또 우리가 대만과는 다른 중화학산업화의 길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만은 어떠한 가요?

김_ 대만은 매우 심각한 내부갈등을 겪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경제에 관련해서는, 한국만큼 어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노_ 문제는 독재가 발전국가와 경제개발과 분리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소기업과 경공업에 집중한 경제발전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는 대만과는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결과와 관련, 사람들의 삶에 차이가 있나?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고 싶지만 너무 바쁘고 능력이 없어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 )

김형아 - 호주국립대학교 아시아·태평양학과 교수. 한국 정치와 역사 전공. 중앙대를 거쳐 호주국립대에 유학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 받았다. 논문 제목은 ‘박정희의 자립 이데올로기, 1961~1979: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근대화와 민족중흥’. 저서로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 유신과 중화학공업>(일조각, 2005)이 있다.

201702호 (2017.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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