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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중 교수의 ‘그리스 문명의 결정적 순간’(마지막 회)] 파르테논 신전, 왜 아테네 예술의 절정인가 

생성과 존재가 하나로 융합되다 

김승중 캐나다 토론토대 희랍미술고고학과 교수 seungjungkim@gmail.com
수학적 정확성과 형언할 수 없는 엘레강스의 현묘한 세계… 페리클레스가 자부한 그리스 정신에 대한 최강의 표현

파르테논 신전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아름답다. 이 경이로운 존재는 향후 모든 건축의 디프 스트럭쳐(deep structure)가 되었다. 이 예술품을 전 인류의 유산으로 후대에 남겨준 영웅은 페리클레스다. 이 놀라운 신전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되어 마땅하다.


▎남서쪽에서 바라본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현재도 복구작업이 한창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이끄는 연맹국들 사이에서 벌어진 그리스 내전 성격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진 첫 해인 BC 431년! 그때까지 전사한 아테네의 병사들 모두를 위해 아테네의 정치 및 군사 지도자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429)가 전달한 유명한 추도 연설이 있다. 그 당시에도 유명했던 이 연설은 고대 역사학자 투키디데스에 의해 고스란히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고대 그리스 전성기의 시대정신을 대표적으로 표현했다고 일컫는 이 추도연설문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매우 특징적이다.


▎페르시아 침략군이 아크로폴리스를 약탈하고 남기고 간 유물들이 한꺼번에 묻혀있는 것을 고고학팀이 발견했다. 1865년에 찍은 사진.
“여기 전몰자의 미덕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나 같은 한 사람이 연설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좌우될 수는 없다. 그들의 위대함에 대한 찬사보다는 우리의 전사들이 죽으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우리의 선조들의 정신자세와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어준 정체(政體)와 생활방식을 언급해야만 하겠다. 우리의 정체는 이웃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남을 모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왔다. 우리 정체가 민주주의라 불리는 것은 소수자가 아닌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나라가 통치되기 때문이다. 시민들 사이의 사적인 분쟁을 해결할 때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 그러나 주요공직 취임에는 개인의 탁월성이 우선시되며, 추첨보다는 개인의 능력이 중요하다. 가난 때문에 능력자가 공직에서 배제되는 일은 없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도시 전체가 헬라스의 학교다. 우리 시민 개개인은 인생의 다양한 분야에서 유희하듯 우아하게 자신만의 특질을 개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아테네 이 도시의 힘이다!”

“사생활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참을성이 많지만, 공무에서는 법을 지킨다. 그것은 법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일이 끝나면 힘들게 시달린 우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온갖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일년 내내 사시사철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운동경기와 축제, 아름답고 운치 있는 건축물,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환경은 평상시의 근심과 전쟁의 슬픔을 쫓아낸다. 우리 아테네 도시국가의 위대함 때문에 온 세상에서 온갖 상품이 모여들어, 우리에게는 외국물건을 사용하는 것이 자국물건을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


▎<페리클레스의 추도 연설>. 화가 필립 폰 폴츠가 1856년 그린 유화 작품이다.
“내가 여기서 아테네의 위대함을 논하는 것은 전몰자의 위대함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군사정책에서도 우리 도시는 온 세계에 개방되어 있으며, 적에게 유리할 수 있는 군사기밀을 사람들이 훔쳐보거나 알아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외국인을 추방하지 않는다. 우리는 비밀병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용기와 기백을 더 믿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시인의 찬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 도시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여기 전몰자와 이들과 같은 분의 용기와 무공이다. 이 분들의 인간적 가치가 아테네를 빛낸 것이다. 이들의 불굴의 용기는 장광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히려 여러분이 날마다 우리 도시의 힘을 실제로 응시하고 우리의 아테네라는 도시국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도시가 영광의 황홀경 속에서 위대하게 보이면, 이 장엄한 도시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모험심이 강하고,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고, 의무를 다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 사람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공익을 위하여 자신의 귀중한 목숨을 최상의 아름다운 제물로 이 도시국가에 스스로 바친 그들을 기억하라! 여러분은 이들을 본받아 행복은 자유에 있고, 자유는 용기에 있음을 명심하고, 전쟁의 위험 앞에 망설이지 말라! 이분들의 자녀는 어른이 될 때까지 국비로 부양될 것이다.”(Thucydides,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35~2.46 부분부분을 합성해 의역)

페리클레스와 아테네 문명의 개방주의


▎1. 파르테논 신전의 평면도. 바깥쪽 기둥을 둘러싸는 영어 설명은 각종 조각상의 주제를 나타낸다. 2. 파르테논 신전 건축에 쓰인 두 가지 건축양식인 도리아 식(왼쪽)과 이오니아 식(오른쪽)의 구조. 기둥(column) 위의 부분을 엔타블라쳐(entablature)라 부르는데 그곳에 주요한 조각이 다 들어있다.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적 충정을 극도로 토로하는 위대한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피상적으로 보면 전사자를 추모한다는 명목 아래 단지 아테네 국수주의를 선양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아테네가 진정으로 위대한 이유가 무엇인지와 지켜야 할 아테네만의 위대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군사적 과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라는 것을 역설했다는 의미에서 그는 참으로 명 연설가이며 진정한 정치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화신이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페르시아 대제국과의 몇 십 년 전쟁이 남긴 상처가 겨우 아물고, 아테네가 고대 그리스 역사상 최상의 정점에 다다랐을 즈음에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진 것이다. BC 480년 페르시아 침략으로 초토화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하기 시작한 것은 BC 447년이었다. 위대한 성전이 재건된 지 불과 15년 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기에, 페리클레스의 힘찬 연설은 찬란한 아테네문명을 건설한 이후 전쟁의 충격을 새삼 겪게 된 아테네 시민들의 자부심을 고양시킴으로써 고대 그리스적 아레테(arete), 그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들이 지켜야 할 민주적 개방정신을 명확하게 선포한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테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땅에 쳐들어온 페르시아 군을 물리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BC 478년, 아테네를 맹주로 하여 이른바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을 결성한다. 모든 동맹국이 헌납한 군사자금을 모아 델로스 섬에 보관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 동맹은 원래 페르시아가 다시 침범할 것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차츰 아테네의 권력이 강해지고 페르시아 제국의 위협의 수위가 낮추어지면서, 델로스 동맹은 원래 목표를 명목상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돋우는 정치적인 도구로 변질되어갔던 측면도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페리클레스의 영도 아래 이 동맹의 금고는 BC 454년에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로 이동되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실질적으로 종결된 BC 450년 이후, 동맹의 기금은 아테네를 재건하고 미화하는 데 소비되었다. 이 기금으로 건축된 고대 그리스의 최고 문화재가 다름아닌 파르테논 신전(Parthenon, BC 447~432 건축됨)이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아름답고 향후 모든 건축의 디프 스트럭쳐(deep structure)가 된 이 예술품을 전 인류의 유산으로 후대에 남겨준 이 기적 같은 사실은 페리클레스의 수많은 업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그동안 고대 그리스 문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문명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벌써 마지막 회에 이르렀다. 정치, 철학, 예술, 종교, 문학 등 모든 방면의 문화적 유산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인이 꿈꾸는 신화적 유토피아에서부터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일까지, 소크라테스가 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희극에서부터 물 뜨러 가는 이름 없는 아낙네를 그린 도기화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찬란하고, 섬세하며, 깊게 정치적이며, 또한 철학적인 에토스(ethos)가 종합적으로 담긴 고대 그리스의 최대 작품이라 함은 두 말할 나위 없이 파르테논 신전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동-서쪽에서 보이는 9대 4의 비율. 이 비율은 위에서 보거나, 남-북쪽으로 보았을 때에도 같은 비율을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크로폴리스는 페르시아 군들이 다녀간 BC 480년에 완전히 황폐화되어 있었다. 고고학적인 발굴 작업을 통해 전쟁으로 인한 파괴층(destruction layer)을 식별하였고, 그 층대에 속하는 수많은 조각상이 함부로 깨지고 파괴된 채 여기저기 모아져서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는 페르시아 군들에게 짓밟히고 부러진 신성한 조각상과 예물들을 정리해서, 경의를 표하는 듯 일부러 그 자리에다가 묻은 것일 확률이 높다. 물론 그들이 페르시아로 가져간 귀중한 예술품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전에 소개한 티러니사이드 동상(The Tyrannicides: BC 6세기 말에 아테네 조각가 안테노르가 민주주의의 설립을 기념하여, 독재자 히피아스를 전복시키는 계기를 제공한 두 사람의 모습으로 제작한 동상)도 이 중의 하나로 알려졌다. 현재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지방 전반에 걸쳐 벌어지고 있는 흉악한 파괴와 반출이 연상될 것이다. 건축물을 폭파하고 조각상을 때려 부수며 전통을 파괴하는 장면들! 전통을 파괴하고 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를 통해 방영하고 있는 끔찍한 IS(Islamic State)의 프로파간다를 보게 되면 몇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인류의 야만은 달라진 바가 없다는 회한이 서린다.

테르모필레 전투 이후 초토화된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며 페르시아의 악랄한 행위를 잊어버리지 않고 되새기기 위해 한동안 재건을 금지했다는 공적인 서약(플라테아 선서, Oath of Plataea: 이것은 실제적 정황을 왜곡한 아테네인들의 신화적 발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으나, 어차피 아테네인들의 복구사업은 한참 지난 후에 이뤄진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30년이 지난 BC 447년, 페리클레스 치세 때에 이르러 드디어 파르테논 신전은 착공에 들어갔고 9년 뒤인 BC 438년에 완공을 본다. 지금 보이는 파르테논 신전이 이때 지어진 것이지만, 페르시아가 침략하기 10년 전에 이미 그 자리에 거의 같은 크기의 신전을 짓고 있었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고, 그 이전에는 훨씬 작은 스케일의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는 흔적도 뚜렷하다. 같은 자리에 신전을 몇 차례 재건한다는 것은 그만큼 전통의 중요성과 종교적인 의미가 특정한 위치에 부여되었다는 뜻이다.

페르시아 전쟁이 가져온 미학적 스타일의 변화


▎1. 파르테논 신전의 시각 보정효과를 눈으로 보이게 과장하여 그린 사례 도면. 2. 파르테논 신전의 바닥곡선은 정확하게 포물선을 그린다. 그 가장 높은 곳이래야 3㎝ 정도 높은 것인데 그것이 전체적으로 ㎜ 치수로 세밀하게 계산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페르시아 전쟁이 가져오는 고고학적인 증거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BC 480년 전과 후로 미학적 스타일의 차이가 있다. 뻣뻣하지만 추상미가 넘치는 아르케익 스타일(Archaic Style)과 자연적인 우아함과 시간적인 정확함을 자랑하는 클래식 스타일을 가르는 경계선이 바로 아테네가 초토화된 시점인 BC 480년인 것이다. 이 발견은 바로 아크로폴리스에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페르시아 전쟁의 파괴층에 해당하는 예술품들을 분석한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정확히 왜 아크로폴리스를 초토화시킨 페르시아의 침략을 경계로 이러한 급격한 예술양식의 변화가 생겨났는지는, 아직도 다양한 학술적인 의견이 제출되고 있지만 일치하는 바가 없다.

파르테논 신전은 건축양식으로 볼 때 참으로 간단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70m의 길이와 31m의 너비의 이 거대한 구조는 간단한 직사각형의 모양의 3층 플랫폼(제일 마지막 위층을 일컬어 스틸로베이트, stylobate라 한다)이 그 전체 기초다. 그 기초 위에 기둥(column)들이 일정 간격으로 동서남북 사면을 둘러싸고 있고, 그 기둥 내부에 셀라(cella) 혹은 나오스(naos)라고 불리는 방이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구성이 갖추어진 평면도의 형식을 페리스타일(peristyle: 기둥이 사면을 둘렀다는 의미)이라 한다. 이 나오스를 둘러싼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지붕 아래 있는 모든 상부구조를 엔타블라쳐(entablature)라 하는데, 이곳이 주로 조각상들로 장식되는, 가장 호화롭고도 복잡한 부분이다. 엔타블라쳐는 주로 기둥 바로 위에 놓여진 프리즈(frieze)와 지붕을 받드는 건물의 앞뒤 면을 표시하는 삼각형의 박공인 페디멘트(pediment), 이 두 부분으로 대개 나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고대 그리스 신전의 건축양식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끈질기게 불변하는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한결같다. 로마시대에 발명된 아치를 이용하여 건축공학적으로 진화된, 그리고 형식적으로 다양해진 이후의 건축사에 비하면 답답할 정도로 일정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 인상에서 유래하는 오해일 뿐이다. 그리스 양식의 건축 디테일을 살펴보기 시작하면 지루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수학적 정확성과 형언할 수 없는 엘레강스의 현묘한 경이의 세계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만화경의 아름다움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물론 파르테논 신전이 페리클레스가 자부한 그리스 정신의 최강의 표현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단 그 비율을 살펴보자! 파르테논 신전에 전반적으로 적용되는 비율은 정확하게 9:4이다. 위에서 보거나, 앞에서 보거나, 디테일에서 보이는 건물의 모양이 모두 9:4 비율의 치수를 보인다. 그리고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와 각 기둥의 두께도 정확하게 9:4 비율을 하고 있다. 게다가 9와 4라는 숫자의 관계는 2n+1이라는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9=2x4+1이라는 뜻이다). 앞뒤 면에 8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고, 옆면에는 17개의 기둥이 있다. 이 또한 2n+1이라는 같은 공식으로 표현이 가능하지 않은가!

파르테논의 모든 직선은 곡선이다


▎1. 파르테논 신전의 모든 조각은 대리석을 유니크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것이다. 언뜻 같아 보이는 조각들도 앞에서 언급한 보정효과 (refinement)를 내기 위해 모든 조각이 차이 나게 설계되었다. 2 도리아식의 외부기둥 사이로 안 벽의 이오니아식 프리즈가 보인다.
파르테논을 논할 때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가 황금 비율(golden ratio, 1.61:1)이 쓰여졌다는 의견이다. 아직까지는 절대적으로 파르테논 신전 건축에 황금비(100 년 후 인물인 유클리드에 의해 처음으로 정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가 적용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온 건물의 치수들이 어떤 일정하고 정확한 비례를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수학적인 계산의 중요성과 신비주의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정신은 바로 그 당시에 유행했던 피타고라스의 철학과 그가 상징하는 종교적인 전례와 상관지어 볼 수 있다. 그의 교리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파되었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수학적인 업적보다는 더 신비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색깔이 짙다. 만물의 우주와 인간의 세계가 모두 수적인 정의로 이해될 수 있다는 좀 이상한 교리를 이들은 제시하는데, 예를 들어 4라는 숫자는 공정함(justice)을 뜻하고 7은 기회(kairos)를 나타낸다고 믿었다.

모든 우주의 사건은 수라고 주장한 이들은 물론 피타고라스 정리를 비롯하여 복잡한 수학적인 업적도 남겼다. 음악 이론을 체계화한 것도 이들의 업적이다. 이들은 오르피즘(Orphism) 종교와 연관된 생활습관을 고집했다. 불교의 윤회사상과 비슷한 교리를 믿으며 채식주의를 택했다. 콩을 먹지 말라든가, 떨어진 것을 줍지 말라든가, 흰 수탉을 만지지 말라든가, 심장을 먹지 말라든가 하는 등등의 이해하기 어려운 생활상 터부도 많았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 아테네 여신의 전당을 짓는데 들어간 신비주의적인 복잡성을 음미할 수 있고, 동시에 수학적인 정신이 깃든 일종의 실증주의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은 언뜻 보기에 모든 모서리가 정확한 직각이고 모든 평면이 직선으로 설계된 것 같다. 그러나 알고 보면 파르테논에서 보는 모든 직선은 실은 곡선이고 모든 각도는 직각이 절대로 아니다. 모든 기둥이 살짝 안으로 기울어졌으며, 이들 기둥의 모양새도 배가 나온 것처럼 살짝 볼록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가장 믿기 힘든 사실은 플랫폼을 비롯하여 지붕까지의 모든 건물의 평면이 살짝 위로 볼록하다는 것이다. 정밀하게 보면 퍼펙트한 포물선의 치수를 보이는데, 이는 두 사람이 보자기를 펴서 양단 끝을 두 손으로 잡고 펄럭거리며 땅에 놓았을 때 가운데가 볼록 올라오는 곡선을 생각하면 된다. 더더욱 신기한 것은 이 보정효과의 미세함과 정교함이다. 70m 길이의 플랫폼을 생각해 보라. 그중 가장 높이 뜬 중간 부분이 양끝보다 단지 3㎝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보정효과들 때문에 파르테논 신전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블럭이 모두 유니크 하다는 것인데, 건물 전체를 이루는 블럭의 수가 1만5000개 이상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 신비로운 설계의 마술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같이 거대한 3차원적인 퍼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 정부 지원 아래 많은 건축가와 고고학자가 열심히 달려들었어도 아직 그 수수께끼를 완전히 풀지 못했다. 1만5000개의 블럭 조각을 재조립하는 데 컴퓨터 및 기중기들을 사용하면서도 몇 십 년째 현재도 공사가 지속되고 있다. 하물며 아무런 기계도 없이,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이 복잡하고 거대한 건축사업을 9년 이내로 완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1. 피디아스가 조각한 유명한 아테나 파르테노스. 파르테논 신전 나오스 안에 위치한 컬트 신상이었다. 이 사진은 토론토 박물관 소장의 1대 10 모형이다. 2.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들 중 카산드라가 레서 아이아스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을 그린 도기화.
고품질 대리석으로 알려진 펜텔릭 마블(Pentelic Marble: 아테네 근처 펜텔리콘 산에서 채석된 품질이 아주 고른 대리석)이 처음 건축재료로 파르테논 신전에 쓰였다. 그리고 이 작품의 건축양식상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이 당시 고대 그리스의 건축 양식은 도리아식(Doric Style), 그리고 이오니아식(Ionic Style)의 두 가지로 양분되는데, 그 양식 형태에 따라 기둥의 모양뿐만 아니라 그 위에 올려진 프리즈의 형식 등에도 많은 차이점이 있다. 특히 이때까지는 도리아식이나 이오니아식의 양식의 건물은, 각기 항상 하나의 정해진 양식에 따라 건물 전체의 형태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파르테논 신전은 역사상 처음으로 이 두 가지의 양식을 혼합하여 표현하였다. 겉에는 도리아식, 안에는 이오니아식을 채택하여 두 종류의 기둥모양과 비례, 그리고 다른 형태의 양각부조 장식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 의미는 형태의 다양성을 넘어서 그 양식 각각의 역사적인 유래와 관련되어 있다.

정치적인 이상을 반영한 신전 조각상


▎1. 미국 테네시주 내시빌에 지어 놓은 1대 1 스케일의 파르테논 신전 안에 있는 아테나 파르테노스 여신의 조각상. 2.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하는 이오니아식 프리즈. 아테나 여신에게 바칠 페플로스를 잡는 장면이다.
도리안(Dorian)이라 함은 그리스 본토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그리스어 중 도릭 방언(Doric dialect)을 썼다. 이오니안(Ionian)이라 함은 현 터키 서해안에 자리잡은 ‘동부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들의 방언을 이오닉(Ionic Dialect)이라 불렀고, 그 지방을 이오니아(Ionia)라 불렀다.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 건축양식은 바로 이 두 지방에서 비롯된 문화적 유산이고, 그 모양새의 차이점은 각각의 문화적 특징에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다. 남성답게 심플하고 직선적으로 강력한 모양은 도리아식이다. 그리고 가늘고 곡선적이며, 우아한 여성미가 넘치는 스타일은 이오니아식 양식인 것이다.

섬세한 건축기술의 정화, 그리고 심오한 철학적 의미의 함축체인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하는 조각상들 또한 최상의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적인 이상을 나름대로 반영한다. 파르테논의 조각상들은 그들의 기능과 위치에 따라 대개 네 가지 종류로 나뉜다. 제일 안쪽에서부터 시작하겠다. 첫째로는 신전 내부에 나오스 안에 세워진 아테나 여신의 컬트상(cult statue)이다. 이를 아테나 파르테노스(Athena Parthenos: 처녀 아테나라는 뜻)라고 지칭했기에 그녀를 모신 성당 전체의 이름을 파르테논 신전(처녀신전)이라 부른 것이다. 5m가 넘는 이 거대한 신상은 바로 피디아스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크리스엘레판타인(chryselephantine) 조각이라 하여 금과 상아로 만들어졌다. 신전의 어둑한 내부는, 기독교의 성당을 들락거리듯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창문이 없는 나오스의 내부는 단지 얇게 깎은, 반투명한 하얀 대리석의 기와지붕을 뚫고 들어오는 빛이 전부였다.

매일 새벽 동쪽 입구에서부터 뜨는 해가 비치는 기나긴 광선이 직접 아테나 여신의 황금빛 모습을 조명했을 때를 생각해보라. 눈부시게 찬란한 그녀의 모습은 곧 에피파니(epiphany), 즉 아테나 여신 자신이, 성스러운 신상 매개체를 통해 눈앞에 직접 출현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 신성한 컬트 조각상과 직접적인 접촉이 있으면 그 신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믿었다. 트로이의 막내공주 카산드라가 소(小) 아이아스에게 강탈당하는 장면을 도기화에서 흔히 접하는데, 그녀가 아테나 여신상을 목숨을 걸고 꽁꽁 붙잡고 있는 불쌍한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카산드라를 강탈한 소(小) 아이아스는 바로 아테나 여신을 직접 모독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그도 결국에는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신전에서 섹스행위를 하는 것은 엄중한 신성모독이었다. 더구나 처녀신상 앞에서!

둘째로 살펴볼 조각상의 형태는 바로 다음 단계인 나오스 외면에 위치한 이오니아식의 프리즈다. 이 프리즈는 양각이 되어 건물의 사면을 끊김 없이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 소재는 바로 우리가 몇 차례에 걸쳐서 살펴본 판 아테나이아 행진이다. 우리는 이를 판 아테나이아 프리즈라고도 부른다. 4년에 한 번씩 행해지는 대행진은 아테나 여신의 생일을 기념하며, 특별히 선정된 어린(7~11세) 아가씨들이 오랫동안에 걸쳐 정성 들여서 짜놓은 페플로스(peplos: 양모로 짜인 여성의 전통적인 의복)를 아테나 신상에게 바치는 것으로 종료가 된다. 거대한 파르테노스 여신상이 아닌, 사람 크기의 올리브 나무로 된 아테나 폴리아스(Athena Polias: 도시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아테나라는 뜻) 신상이 따로 존재했었다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 북쪽에 위치한 에렉테이온(Erechtheion)에 보관되던 이 신상은 거의 알아볼 수 없는, 형태가 불확실한 나무 덩어리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주 오랜 옛적에 하늘에서 떨어진 신성한 조각이라고도 한다. 바로 이 신상에다 입힐 옷을 4년마다 한 번씩 새로 만들었던 것이다.

서쪽 페디먼트 조각상들은 거의 모두 파괴돼


▎파르테논 신전 외부를 장식하는 도리아식 프리즈인 메토프. 몇몇 신전에 남아있는 메토프들은 손상이 많이 되었고, 후대 기독교인들이 일부러 이미지를 파괴하기도 했다.
이 전 회에도 바로 이 페플로스를 접는 장면을 우리는 열두 명의 올림포스 신과 함께 목격했다. 허나 거기에 다다르기까지는, 건물 서쪽 남단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 입구까지 주욱 양쪽으로 전개되는 그 기나긴 행렬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전성기 고전시대 특유의 우아하고 다채로운, 그리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이 부조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말들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보이는가 하면, 말을 멋들어지게 타고 있는 병정들이 보인다. 희생시킬 동물들을 끌고 가는 도살꾼, 머리에 항아리를 이고 가는 이방인들, 신성바구니를 든 아가씨들, 그리고 대머리가 까지고 수염이 긴 노인 어르신네들…. 이 모든 이가 참가하는 판 아테나이아의 행진은 진실로 페리클레스가 연설에서 생생히 언급했던 아테네 직접 민주주의 문화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었고, 진심으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휘황찬란한, 그 이웃의 어느 누구에게도 꿀릴 것이 없는 풍요로움과 공동체 정신의 화려한 전시였다.

조금 더 밖으로 나와 서면 도리아식의 기둥들이 보일 테고, 그 기둥들 위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양식의 프리즈가 있다. 이는 도리아식 프리즈라 하여 메토프(metope)와 트라이글리프(triglyph)가 번갈아가며 장식이 되어 있다. 양각으로 된 조각상을 선보이는 메토프들의 소재는 동서남북 면이 모두 다르다. 그렇지만 한 가지 공통된 점은 모두 전투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올림포스 신들과 기간테스(Gigantes)와의 원초적 싸움, 아마존 여전사들(페르시아인들을 빗대어 형상화 한 것)과 아테네 조상들과의 전투, 켄타우로스(Centaur)들과 라피트(Lapiths)들과의 싸움, 그리고 트로이 전쟁의 장면 등의 네 가지 소재를 다루고 있다. 생동감 넘치는 이 메토프들은 모두 신화적인 내용을 다루는 특징이 있지만, 한결같이 이들은 질서와 혼돈, 선과 악, 혹은 그리스 측과 외국 야만인들의 대립을 보여준다.


▎1. 희생될 황소를 억지로 끌고 가는 사람들. 파르테논 신전의 이오니아식 프리즈에 그려졌다. 2. 켄타우로스와 라피트의 전투를 나타내는 메토프들. 영국 박물관 소장.
마지막으로 살펴볼 조각상의 형태는 바로 지붕 밑에 동서 쪽에 위치한 페디먼트 조각상들이다. 이들을 흔히 ‘엘긴 마블(Elgin Marble)’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18세기 영국 대사인 로드 엘긴이 악명 높게도 이 조각상들을 신전에서 뜯어 내어서 영국으로 가져갔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어찌 되었건 동서쪽에 삼각모양의 페디먼트에 놓인 조각상들은 파르테논 신전의 가장 빛나는 초점이며, 그 주제도 아테나 여신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이벤트를 그린다. 동쪽 입구에는 그녀의 탄생을 나타내는 조각이고, 반대로 서쪽에는 아테나와 포세이돈과의 대결을 보여주는데, 안타깝게도 서쪽의 페디먼트 조각상들은 거의 모두 파괴되어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자료는 고대 작가들의 설명과, 17세기의 어느 프랑스 아티스트가 남긴 스케치가 있을 뿐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독주로 달려간 인류의 비극


▎1. 동쪽 페디멘트의 조각상들. 왼편에서부터 헬리오스의 마차가 지평선에서 떠오르고 있다. 디오니소스 옆에 두 명의 여신 데메터와 그의 딸 페르세포네가 소식을 전하려고 뛰어오는 아이리스를 맞이한다. 2. 달의 여신 셀레네(Selene)의 마차를 끄는 말이 지평선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동쪽 페디멘트의 가장 오른쪽 조각상으로 살아남았다.
동쪽 페디멘트의 조각상들 역시 탄생장면을 나타냈던 가장 중요한 중간 부분의 조각들이 파괴되었지만, 그나마 탄생장면을 목격하는 몇몇의 신의 조각이 양 옆으로 보존되어 그 원래의 모습을 생생히 재건한다. 그 오랜 세월 동안에 살아남은 이 몇몇의 조각상이, 실은 서양역사상 최상의 미적 달성을 이룩한, 고대 그리스의 클래시컬 스타일의 본보기로 생각되어 왔다. 역사상 처음으로 앳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디오니소스 신. 표범가죽 위에 한가하게 누워 기댄 그는 한 손에 술잔을 들며 떠오르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마차가 지평선 위로 뜨는 장면을 본다. 디오니소스는 아직 아테나 탄생의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메신저 여신 아이리스(Iris)가 망토를 펄럭이며 부리나케 그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대편에 그 못지않게 유명한 섹시하기 그지없는 여인들. 제일 오른쪽에 가장 호화롭게 누워 기댄 여인은 에로스의 여신 아프로디테다. 그녀가 입은 옷자락들이 제멋대로 몸을 휩싸며 살아 숨쉰다. 돌로 새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옷자락을 확 잡아 미친 듯이 당겨보고 싶은 충동이 우러난다. 그리고 그 옆에 무르팍에 아프로디테를 사랑스럽게 받쳐주고 있는 또 하나의 여인은 그녀의 어머니 디오네(Dione)다. 이들 역시 아테나 탄생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들 옆에 있는 여신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하는 눈초리다. 아프로디테가 편안하게 뻗친 발 밑에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달의 여신 셀레네(Selene)의 말이 보인다. 헬리오스가 동쪽에서 뜨면 셀레네는 서쪽에서 진다. 즉, 동이 트는 새벽의 한 모멘트가 아테나 여신의 탄생이라는 카이로스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모멘트의 시간적인 흐름이 시각적 공간을 통해 퍼져나가고 있다. 그 가장 중요한 테마는 아테네 여신의 탄생이라는 소식이다. 후대 예수의 탄생이라는 유앙겔리온, 즉 복음의 주제도 이러한 테마를 재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탄생과 함께 아테네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된다. 그리고 이 순간의 포착은 신성한 영원성을 함축한다. 인간의 역사와 신성한 이데아가 조화를 이루는 첫걸음, 그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Becoming)과 파르메니데스의 존재(Being)가 하나의 지평에서 융합되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이 조화를 깨고 파르메니데스의 독주로 달려나갔다는 데에 그 비극이 있었다.

김승중 - 서울대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했다. 프린스턴대 천체물리학과에서는 우주론을, 콜롬비아대학 예술사고고학과에서는 희랍미술을 전공해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콜롬비아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에는 버지니아대학에서 미술사학 석사코스를 밟았다. 이 시기 다양한 현지발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고고학의 생생한 지식을 얻었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희랍미술고고학을 가르치고 있다.

201703호 (201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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