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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연구] 박근혜의 운명 그는 어떤 길을 걸을까 

호위 정치세력 규합, 연정 국면에서 특별사면 노린다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먼 훗날의 진실보다 구속이나 실형 피하는 것이 목전의 과제…사저정치 통해 갈등 조장한다면 영원히 죽는 길로 갈 것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금부터 필사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입장이다. 보수세력 전체가 그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래서 더 어려운 전쟁이다. 자신도 살고 국가도 살리는 길이면 좋겠지만, 그 길은 어렴풋이 잘 보이지 않는다.


▎2011년 9월 5일 홍대앞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사진. 처음으로 찍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뒷모습이다. 얼굴에 있는 흉터를 부각하자고 제안하자, 박 전 대통령은 “어차피 제 인생이 상처투성이인데요”하며 승낙해 촬영한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울 삼성동 사저로 돌아갔다. 전직 대통령이 됐다. 정든 삼성동 집에서도 휴식은 없다. 검찰 수사, 재판, 그리고 어쩌면 실형 선고와 감옥살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정말 피하고 싶은 절차이나,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그도 잘 안다. 음울한 표정을 짓거나 비탄에 빠져 있을 여유조차 없는 상황이 그의 운명의 비극성을 더해준다.

‘비극적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해서 그간 수많은 사람이 그를 동정했다. 5년 간격으로 부모를 흉탄에 잃은 최고권력자의 딸이 박근혜다. 세상에서 찾기드문 비극의 주인공이다. 정치적 수직상승의 배경에도 그에 대한 국민적 연민이 작용했다. 그가 속한 정파가 선거 때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에도 그에 대한 국민적 동정심이 자리했다. 지금은 그런 연민보다 분노와 환멸의 국민적 감정이 우세해졌다. 사람들은 말한다.

“자업자득이지 뭐가 비극이냐!”

자업자득이라는 말은 평범해 보이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사람의 폐부를 찌른다. 냉정한 뉘앙스를 담고 있다.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네가 책임지고 처리하라는 뜻이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성을 고려할 때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은 놀라운 일이다. 대한민국은 기본적으로 보수독점사회이기 때문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그 근거를 역대 대통령선거를 통해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1987년 이후 지금까지 영남 출신 보수 후보는 낙선한 적이 없다. 100% 당선됐다. 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 모두 영남 후보였다. 충청 출신인 이회창만 떨어졌다. 호남 출신 김대중 후보가 승리한 데는 네 개의 요인이 겹쳐졌다. 외환위기, DJP연합, 이인제 탈당, 경쟁자가 보수정당 최초로 영남권 후보가 아니라는 점. 이런 네 개의 요인이 합쳐졌으니 김대중 후보가 거의 완승해야 했음에도 그는 단지 1.6%포인트, 39만 표밖에 못 이겼다.”

거짓말하면 정상참작의 여지 사라진다


▎3월 1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 주재로 열리고 있다.
영남 출신 보수 대통령이 낙마한 사건은 합리적 보수세력에게는 실망스럽고 충격적 사건이다. 그들은 박 전 대통령이 보수가 지켜야 할 체제를 흔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탄핵 이후의 사법처리 수순에 대해서도 냉정함을 유지한다. 한 보수 언론인은 이런 칼럼을 썼다.

“대통령으로서 파면당하는 것 이상의 불명예와 더 무거운 처벌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박 전 대통령을 불구속 수사해 불구속 재판을 받게 하자는 의견도 일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계속 대부분의 국민과 동떨어진 인식을 보여주면서 거짓말로 사태를 호도하려 든다면 검찰이나 법원이 정상을 참작할 여지도 사라져버린다.”

박 전 대통령은 지금부터 필사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처지다. 보수세력 전체가 그의 처지를 동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래서 더 어려운 전쟁이다. 탄핵 인용으로 이미 직과 명예를 잃었다. 사저로 돌아오며 발언한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그의 주장에는 어딘지 공허한 울림이 배 있다. 먼 훗날 밝혀질 진실보다 당장 구속이나 실형을 피해야 하는 것이 목전의 과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를 지내다 최근 개업한 도진기 변호사는 이런 말을 들려줬다.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게 있다. 검찰이나 법원이 굉장히 여론에 민감한 기관이라는 점이다. 지금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을 구속하지 않고 수사나 재판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민석 영장담당판사가 우병우 전 민정수석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을 기각한 것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 오 판사가 원래 선비기질이 강한 사람이라 아마도 강단 있게 기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영장을 기각할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그만큼 여론의 분노 게이지가 높다는 거고, 사법부도 그런 여론의 흐름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특검에서 발표한 대로 뇌물죄가 적용되면 최대 무기징역까지, 유기징역을 택할 경우에는 45년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법률 분석도 이미 나와 있다. 물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것이다. 뇌물죄에 대해서는 다툼의 여지가 크다. 검찰도 뇌물죄 적용에 대해서는 확신할 정도는 아니다. 직권남용이나 강요에 해당하는 공소 사실의 경우는 5년 이하의 징역이다. 그밖에 공무상 기밀 누설이 2년 이하, 외교상 기밀 누설이 5년 이하 징역이다. 그러나 특가법상 제3자 뇌물죄가 인정된다면 형량은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대폭 늘어나게 된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하 특수본)는 이미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수본의 한 관계자는 “증거인멸의 가능성도 물론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구속수사 사유는 사안의 중대성일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대선을 7개월이나 앞당겨 치러야 할 만큼 나라가 발칵 뒤집혔는데, 그 파문의 핵심인 박 전 대통령을 구속수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치열한 법리전쟁 예고된다


▎김수남 검찰총장이 3월 14일 오전
검찰 1기 특수본과 박영수 특검 팀은 ▷미르·K스포츠재단 774억원 강제모금 ▷삼성그룹에서 433억원 뇌물 수수 ▷청와대 문건 유출 지시 등의 혐의를 이미 적시한 바 있다. 이 모두 구속을 피하기 어려운 중대사유라는 것이 검찰 관계자들의 대체적 견해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과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 비서관, 뇌물 공여자로 되어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이 모두 구속기소된 상황도 박 전 대통령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를 불구속 기소하면 형평성 시비가 일 수밖에 없다. 20명에 달하는 공범이 모두 구속됐는데, 주범 격인 박 전 대통령을 구속하지 않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는다”고 했던 사저 도착 발언도 신중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헌재 탄핵판결에 대한 항의를 담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혐의를 부인하는 뉘앙스다. 오히려 구속 쪽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이었다는 것이다. 검찰 출신 한 변호사는 “엄중한 상황이라 발언 하나 하나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 박 전 대통령의 처지”라며 “헌재에서 지적한 수사 기피 등과 유사한 처신을 되풀이해서는 향후 수사와 재판에서 결코 유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국정농단 수사의 마지막 ‘퍼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련자 전체의 형량이 정해지는 동시에 이 사태에 대한 법률적 평가, 나아가 헌정 사상 유례 없는 대통령 탄핵에 대한 역사적 평가마저 담보한다. 뇌물죄 등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질 경우 대통령 탄핵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마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검찰과 박 전 대통령 측이 치열한 법리전쟁을 벌여야 하는 이유와 배경이다.

검찰 특수본과 특검 수사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무려 13개의 혐의에 관여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 ▷삼성으로부터 받은 433억원대 뇌물수수 의혹 ▷미르·케이(K)스포츠재단을 통한 강제모금 ▷블랙리스트 작성 지시 ▷청와대 문서 유출 등 4가지가 핵심 쟁점이다.

검찰이 확보한 핵심 증거는 안종범 전 수석의 업무수첩과 정 전 비서관의 휴대전화 녹음 파일, 각 기업과 정부부처 조사를 통해 확보한 진술 등이다. 박 전 대통령은 명백한 증거가 뒷받침된 혐의도 부인하는 상황이다. 자신이 ‘엮인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 과연 검찰에서도 통할지 의문이다. 최순실 씨와 안 전 수석,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핵심 공모자들과 대질조사할 가능성도 물론 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거부로 성사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이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일방적 주장을 되풀이할 경우에도 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 측이 가장 두려워하는 혐의는 삼성의 433억 원대 뇌물의혹이다. 법원이 이 혐의를 인정할 경우 형량은 최소 10년형에 이른다. 특검은 박 전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3차례 독대하는 과정에서 경영권 승계를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았다고 봤다. 두 재단과 최씨 등에게 433억원을 지원하도록 한 것이 그 대가라는 것이다. 물론 박 전 대통령 측은 특검의 이 같은 수사 내용을 전면 부인한다. 특검이 적용한 최씨와의 ‘경제적 이익 공유’ 주장에 대해서도 박 전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강력 부인한 바 있다.

재단 강제모금과 관련해서도 검찰과 박 전 대통령은 전혀 다른 주장을 내놓고 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이 사익을 챙기기 위해 두 재단을 세웠다고 보지만, 박 전 대통령은 “기업에 돈을 강요하지 않았고, 최씨가 관여된 것도 모른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미 이재용 부회장이 특검 조사에서 강압에 의한 모금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어 검찰이 박 전 대통령의 주장을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검찰은 특검 수사 결과를 이어받아 뇌물죄 적용을 위한 보완수사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견해차이가 너무 커 법정에서는 일대 격론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 전 대통령 쪽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및 지시 의혹에 대해서도 전면 부인한다. 특검은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김기춘 전 실장이 블랙리스트 작성 전반을 주도한 것으로 봤다. 박 전 대통령 쪽은 “청와대비서실과 문체부 등에 작성 지시를 내린 적도 없고, 어떤 보고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김 전 실장이 법정에서 자신의 주도를 인정하고 주군이었던 박 전 대통령을 적극 보위할 수 있을지도 관전 포인트다.

뇌물죄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1960년대의 박정희 대통령 일가. 만 11세 10개월에 박근혜는 청와대에 들어갔다. 아버지 박정희·어머니 육영수 여사와 동생 근령·지만과의 청와대 생활은 유복했다.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을 통해 최씨에게 청와대 문건을 유출한 의혹에 대해서는 일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핵심 내용은 부인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이 2013년 1월 정부 출범 직전부터 지난해 4월까지 정부 인사안, 대통령 말씀자료 등 총 180건의 문건을 전자우편을 통해 유출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 쪽은 “연설문 작성 등에 국민 눈높이에 맞도록 최씨의 도움을 받았을 뿐”이며 “다른 문건들은 유출 지시도 하지 않았고 유출 경로도 알지 못한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범죄사실에 포함되지 않은 연설문 유출만 인정하고, 정부 인사안 등 비밀 문건은 관련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박 전 대통령의 주장은 정 전 비서관의 증언에 의해 그 진실성이 이미 상당부분 무너진 상태다. 검찰은 다른 것은 몰라도 문건과 기밀 유출에 관한 사안은 명백한 물증이 뒷받침돼 공소 유지에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이 뇌물죄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가 수사 및 재판 국면의 하이라이트다. 그런데 그 올가미는 단순 구조가 아니다. 특검 조사 때는 삼성의 뇌물죄만 집중수사했지만 검찰 특수본은 삼성 외 대기업 수사의 첫 타깃을 CJ·SK·롯데로 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수본은 각 기업에 3~4명씩의 검사를 배치해 박영수 특검팀에서 넘겨받은 수사기록 검토에 돌입한 상태다.

당연히 이들 기업 관계자들에게 적용할 혐의는 뇌물공여 죄다. CJ에 대한 수사는 초점이 이재현 회장에 대한 특별사면 건이다. 지난해 1월 문화창조융합벨트(K컬처밸리) 사업에 1조4000억원을 지원키로 하는 등 박근혜 정부의 문화창조 사업에 전폭적으로 협조한 대가가 바로 이 회장의 특사라는 것이다. SK 그룹의 경우도 최태원 회장의 사면 건과 관련돼 있다. 김창근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2015년 7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을 서울 삼청동 안가에서 만나 당시 수감 중이던 최태원 SK 회장의 사면을 논의한 의혹을 받고 있다. 면세점 인허가 관련해서도 SK는 대가성 여부를 의심받고 있다.

롯데는 면세점 사업자로 선정되기 위해 K스포츠재단에 70억원을 추가로 출연했다 돌려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2015년 11월 면세점 특허 심사에서 탈락한 롯데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해 3월 14일 박 대통령을 독대한 뒤 지난해 12월 면세점 사업자로 추가 선정됐다. 지난해 5월 이미 미르·K스포츠재단에 45억원을 출연한 롯데는 K스포츠재단에 추가로 70억원을 출연했다가 검찰이 롯데를 압수수색하기 전에 돌려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삼성 뇌물죄 관련 혐의를 벗더라도 CJ·SK·롯데 등의 뇌물죄 성립 여부를 줄줄이 조사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대가성이 인정되면 10년 이상 무기까지 형을 받을 수 있는 중죄에 해당된다.

기각을 확신하는 부정확한 보고


▎자유한국당 서청원(왼쪽)·최경환 의원이 지난 3월 12일 서울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박 전 대통령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다.
운명은 성격이 결정한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의 운명을 결정한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자폐적 기질이다. 그는 항상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세상과 사물에 대한 객관적 판단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헌재 탄핵심판에서도 그가 기각을 확신했다는 징표가 곳곳에서 발견됐다. 박 전 대통령의 이 같은 판단 미스에는 대리인단을 중심으로 한 참모들의 잘못된 정보 입력도 큰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 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 개신교 목사는 월간중앙과의 전화 통화에서 “민정수석과 변호인단 중 그 누구도 기각 가능성에 대해 직언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은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경향이 강한데, 그 책임의 대부분은 참모들에게 있다”고도 했다. 그는 또한 “검찰, 특검, 헌재 조사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나, 김평우나 서석구 변호사 등의 비이성적인 변호 태도에 휘둘렸던 것 등이 그나마 남아 있던 기각의 가능성을 날려버렸다”고 한탄했다.

실제로 탄핵 심판 전 청와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참석 마지막 점검회의에서도 기각을 확신하는 부정확한 보고가 이뤄졌다. 이 자리에는 민정수석과 대리인단 전원이 참석해 무거운 토론을 벌였지만 탄핵이 인용됐을 경우의 후속대책은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도 헌재가 탄핵을 인용한 결정적 이유로 박 전 대통령 대리인단의 ‘이상한 변론행태’를 꼽았다. 박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했어도 제대로 반성했다면 인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면서 “김평우·서석구 변호사가 지지세력을 과신해 선동해도 된다는 오판을 하는 바람에 탄핵이 인용된 것”이라 지적했다.

박 전 대통령 본인의 폐쇄적 성격, 좀처럼 직언을 하지 못하는 참모들의 나약함이 그녀의 운명을 더욱 고단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수사와 재판에 임하는 박 전 대통령의 전략은 단순하다. 요약하면 이렇다. ‘진실은 하나다. 최순실의 죄는 있을지 몰라도 나는 없다. 나는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럴 의도조차 없었다.’

‘돈을 편취한 사실이 없는데 그것이 어떻게 죄가 되며, 최순실이 나를 기망한 것이지 나는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하소연이 되풀이될 전망이다. 이 같은 주장이 증거 불충분과 버무려지면 뇌물죄 대목은 법정에서 뜨거운 다툼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재판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대중의 분노가 다시 폭발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박근혜 재판 역시 여론의 악화와 정권 교체 분위기의 영향권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시대의 정서와 정권 교체의 의미를 포만감 있게 보여주는 것이 박근혜 재판의 본질이 될 가능성이 있다. 냉정한 단죄가 이뤄지리란 전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의 운명은 가혹한 것이다.

여기서 박근혜의 운명은 두 가지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정치적 재기의 모색, 둘째는 치밀한 법리적 다툼으로 형량을 최소화하고 차기 대통령에게 특사를 받는 길이다. 정치적 재기는 박 전 대통령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TK 자민련’식 정치적 부활을 노리는 길이다. 지지층을 중심으로 진지전을 펴며 내년 지방선거, 3년 뒤의 총선을 겨냥해 장기적인 친박 정치의 부활을 도모하는 시나리오다. 그 지역적 중심지는 역시 박근혜의 마음의 고향 대구·경북이다. 동교동·상도동계를 잇는 이른바 삼성동계의 출현이다.

그러나 그 같은 정치재기론은 현 단계에서 거의 희극과 같은 상황설정인지 모른다. 정두언 전 의원은 “사법처리를 앞둔 박 전 대통령 처지에서 나가도 한참 나간 이야기다.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과거 친노무현계 정치인들이 자신을 ‘폐족’이라 규정하며 자중했던 것과 너무도 비교되는 오만이라는 진단이다.

TK 중심으로 한 소수정파로도 살아 남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최종 선고일인 3월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국역 사거리에서 보수단체가 탄핵기각을 촉구하며 집회를 하고 있다.
서양호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소위 삼성동계 진박 의원들이 “의리를 명분으로 정치적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고 본다. 박 전 대통령의 희생양 이미지를 이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저정치를 활용하리라는 전망이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교수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됐지만 진박 의원들에게는 여전히 비빌 언덕”이라고 말했다. 차 교수는 “친박 지지층의 결집도가 10%를 넘는다면 보수 재편의 주도권을 잡거나 적어도 TK를 중심으로 한 소수정파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근혜의 운명을 냉정하게 응시할 때 최선의 방책은 역시 차기 대통령에 의한 ‘특별사면’이 될 수밖에 없다. 특수본의 모체인 검찰은 대통령 박근혜 시절의 검찰이 아니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검찰은 전직 대통령과의 인연을 챙길 정도로 훈훈한 조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검찰의 이 같은 생리를 알았을 리 없는 박 전 대통령이다. 자신을 최순실과 공범으로 간주한 1차 특수본에 대해 분노와 배신감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는 그야말로 칼 같은 수사, 추상 같은 재판이 이뤄질 게 분명하다. 도저히 기다릴 수 없는 ‘세월의 중형’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역시 최후의 순간에 기대할 수 있는 건 특별사면이다. 특사를 노리는 박 전 대통령의 전략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피해자로서의 정치적 연출, 둘은 진보정권에 가장 치열하게 맞서는 친박 보수 정치세력의 재건이다. 현실적으로는 두 가지 전략의 병행으로 사면 분위기를 한껏 부풀리는 일련의 과정을 밟을 듯하다. 박 전 대통령은 3월 12일 저녁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와 아래와 같은 최초의 메시지를 대외에 공표했다.

“제게 주어졌던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를 믿고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리라 믿고 있습니다.”

박근혜의 자택 복귀의 변은 향후 전개될 자신의 처신을 강하게 암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지자들의 성원과 집결을 더욱 강하게 요구하며, 장차 다가올 사면국면을 준비하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인지능력은 약하지만 정치가 뭔지는 본능처럼 아는 사람이다. 비슷한 의미로 “통치력은 없어도 저항력은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사저정치·농성정치· 진지전정치·옥중정치까지 다 해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2007년 대선 때 세 번째 출마한 이회창의 득표 15%가 한국 진성 보수의 집합이라고 할 때, 박 전 대통령이 특사를 노린다면 이 세력이 자신을 중심으로 뭉치는 상황이 좋다.

박근혜 정치는 대선 전까지 ‘펄펄’ 살아 있어


▎1. 3월 14일 서울 강남구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한 지지자가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 2. 박근혜 전 대통령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그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아 어떤 결단을 할지 관심이 쏠린다.
그러나 특별사면은 쉽게 이뤄지는 게 아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은 더욱 그렇다. 그 행위 자체가 엄청난 정치적 갈등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대화합의 카드로 쓰기엔 폭발력이 너무나 강하다. 그래서 박근혜의 사면은 대연정의 분위기 속에서 싹틀 가능성이 크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문재인보다 안희정이 당선돼 대연정을 추구하려 할 때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특별사면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안 지사는 사면의 ‘사’자도 꺼낸 적이 없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그 같은 상황을 미리 예상한 듯 안 지사에 대한 견제구를 날렸다. 대연정에 대한 비판을 박근혜 사면과 연결시킨 것이다. 그는 지난 3월 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지난 100일 촛불이 우리에게 던진 가장 큰 교훈은, 국민을 믿으면 100석도 두렵지 않을 것이며, 국민을 믿지 못하면 200석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안 지사는 부디 새누리당 세력과 대연정 주장을 철회해 달라. 대연정은 탄핵 기각의 반역사적 세력에 힘을 주고 나중에 박근혜를 사면하겠다는 정치적 복선을 내포하기에 더더욱 위험하다.”

국민의 15% 정도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했다. 탄핵 직후 시위에서 사망자가 3명이나 나오는 등 혼란이 야기됐지만 탄핵 반대세력이 폭력으로 정국을 혼란에 빠뜨릴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헌법재판소라는 국가기관의 결정에 대한 불복 역시 체제에 대한 도전이다. 탄핵 반대세력은 체제에 도전할 명분도, 이유도, 수단도 없다. 탄핵 반대세력의 현실적 선택은 폭력시위가 아니라 60일 뒤 치러질 대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어느 정당, 어느 후보가 박 전 대통령의 명예를 회복시켜줄 것인지 따져보고 표를 몰아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가 고주파의 정치적 파장을 부를 전망이다. 박근혜 정치가 적어도 대선 전까지는 펄펄 살아 숨쉬고 있다고 봐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 의견서에서 “앞으로 어떠한 상황이 오든 소중한 우리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갈라진 국민의 마음을 모아 지금의 혼란을 조속히 극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나가겠다”는 말도 했다. 선동과 통합의 양 갈래 길에서 그가 전직 대통령으로서 체면과 직분을 지킬 수 있는 선택은 분명하다.

김형준 명지대 교양학부 교수는 “강성 친박들이 정무·법률·공보·수행 등으로 분야를 나눠 박 전 대통령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겠다고 한다. 사저정치를 통해 보수층을 결집해 검찰 수사에 대비하고 대선에도 영향을 미치겠다는 의도로 보여진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이 마지막 정치행위로 통합의 길 위에 서주기를 고언했다.

“박 전 대통령의 3월 21일 검찰조사를 앞두고 또다시 ‘찬박대 반박’, ‘보수 대 진보’로 갈라져 나라가 두 동강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더구나 박 전 대통령이 사저정치를 통해 이런 갈등을 조장한다면 영원히 죽는 길로 가는 것이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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