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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코리아-마을이 답이다’(2)] ‘잘 노는 마을’에서 ‘수다’ 떨기 

주민 속으로 들어간 리더들은 누구?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 공석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고유 전통에서 마을 정체성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자신을 노출하고 함께 고민하며 대안을 궁리하는 협동의 삶 필요

마을공동체를 다시 건설한다며 풀뿌리의 리더는 간과한 채 국가차원의 리더만 논의하는 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기초가 허술한 리더십 구조는 온전할 수 없다. 온전한 리더십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뭔가? 올바른 리더를 세우기 위해 풀뿌리 마을/지역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야 하는가?


▎제주 가시리마을은 지난 10여 년에 걸친 정부지원사업 결과 전국적인 부러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가시리마을 전경.
리더의 출발은 풀뿌리에서 시작된다.

지난 몇 달간 한국사회에 휘몰아친 탄핵정국은 리더와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 온 국민이 절실하게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잘못된 리더를 세우면 국민이 겪어야 할 고통이 얼마나 큰지 실감하게 됐다. 국민은 용납할 수 없는 리더의 부정과 불의에 더는 리더십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민 80%가 대통령 교체를 주장하고, 4개월여 동안 1500만 명 넘게 광장으로 나와 헌법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외치며 시민의 권리와 책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한 몸짓이었다.

새로운 리더와 리더십에 대한 아래로부터, 그리고 평화적 방식으로 변화와 교체를 요구하는 모습은 어느 사회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매우 소중한 자산이며, 시민사회의 강한 건강성과 역동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시민권력의 파노라마를 우리는 공동의 기억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후손에게도 자랑할 만한 민주주의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는 감동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자부심과 동시에 우리는 왜 국가 수준에서 리더와 리더십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는가에 대한 성찰이 절실히 요청된다. 우리 사회에는 오랜 시간 아래로부터 검증된 리더를 발굴해 성장시키는 경우가 희박하다. 왜 우리와 함께 사는 이웃이나 마을주민의 관계 속에서, 즉 풀뿌리 수준에서도 리더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가? 국가차원의 리더를 논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마을/지역공동체가 직면한 구체적 삶의 문제를 다루는 주민 속 리더도 올바르게 형성돼야 한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풀뿌리의 리더는 간과한 채 국가 차원의 리더만 논의하는 것은 모래성과 같이 기초가 허술한 리더십 구조가 아닐 수 없다.

마을/지역 단위의 리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이들 리더십은 어떤 요소를 갖추어야 하는가? 올바른 리더가 세워지기 위해 마을/지역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야 하는가?

이런 견지에서 2016년 12월에 있었던 제주 가시리(加時里)마을의 이장선거는 마을단위의 리더십을 세우는 새로운 민주주의 실험으로 주목할 만하다. 가시리는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의 한라산과 성산 사이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다. 전통적으로 목축업과 귤농사로 풍족한 살림살이를 유지한다. 그렇지만 가시리만의 장점은 마을 공동목장을 지켜내면서 목장영농조합을 중심으로 250만 평에 달하는 목장 부지를 마을 발전을 위해 활용해왔다는 것이다.

가리시마을 이장선거는 풀뿌리 리더십의 새로운 실험


▎가시리마을은 공동목장을 지켜내면서 목장영농조합을 중심으로 250만 평에 달하는 목장 부지를 마을 발전을 위해 활용했다. 가시리 마을목장에 건설된 풍력발전단지.
물론 마을 주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민주적 절차가 제대로 작동했는가는 좀 더 면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지난 10여 년에 걸쳐 가시리마을이 정부지원으로 추진한 사업, 즉 농촌마을권역개발사업·체험휴양마을·디지털생태 문화마을사업 등은 가히 가시리를 전국적인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2011년과 2014년에는 농림수산식품부의 ‘색깔 있는 마을’과 ‘행복마을 만들기’를 수상했고, 2015년에는 KCTV 지정 ‘디지털 문화생태마을’로 지정됐다.

어떻게 인구 1200명의 소규모 마을 주민이 짧은 시간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가시리를 특색 있는 마을 만들기에 성공했는지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것이 정부 지원금에 의존한 사업 주도의 외적 성공인지, 이 사업을 통해 주민 스스로 지역 사안을 주체적으로 풀어가는 튼실한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평가하기 이르다. 그렇지만 마을 이장선거는 이러한 평가를 위한 몇 가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리 연구자들은 2016년 11월 14~16일 가시리마을을 방문했다. 그때만 해도 가시리는 지난 10년간 추진한 다양한 사업을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유지 발전시킬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상황이었다. 특별히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해 진행함으로써 초기에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창작지원센터와 조랑말체험공원 및 박물관 운영 등이 그들이 떠난 후 마을 스스로 지속적 수익을 내면서 유지할 수 있는지 내부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이었다. 어쩌면 지난 10년간 앞만 보고 달려온 사업들에 대해 숨고르기를 하면서 진지하게 내부 역량을 확인하고 향후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시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로운 수혈 통해 마을 리더십 세워야


▎초고령화가 진행되는 가시리에는 최근 외부인이 조금씩 유입되고 있다. 2016년 건설된 16가구 규모의 오시리가름협동주택.
그런데 지난 2월 25일 가시리마을을 다시 방문했을 때 우리 연구진은 가히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것을 확인했다. 바로 마을 리더인 이장 교체였다.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우선 왜 후보가 세 명이나 나오게 되었을까?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 때문일까? 그 후보들은 그동안 마을에서 진행되는 정부지원 사업들에 대해 어느 정도 공통된 관심, 그리고 상호 이해와 합의가 있었는가? 후보들은 정부지원사업보다 주민의 삶의 질, 즉 문화복지의 욕구를 좀 더 잘 반영하기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선거에 나왔을까? 이들 궁금증은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한 심층 인터뷰나 참여관찰 없이 명확한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을 동시에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선 기존의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이장을 상호 합의해 추대하지 못하고 왜 후보가 세 명이나 나오게 됐는지 궁금했다. 마을 단위에서는 최초로 후보자토론회가 마을 문화센터에서 진행됐고, 이것이 지역방송으로 생중계된 점은 분명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풀뿌리민주주의를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진 것이다.

사실 2015년 가시리마을에서 진행된 디지털생태문화마을사업을 통해 마을 내 각 가정은 케이블방송 채널을 갖추었고, 이런 마을방송 채널을 통해 주민들은 후보토론회를 지켜볼 수 있었다. 또 생방송을 못 본 주민들을 위해 토론회를 녹화 방영해 주민들이 후보자를 충분히 검증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 이처럼 가시리마을 이장선거는 대선이나 총선 못지 않게 열기가 대단했고, 풀뿌리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지역공동체의 발전 과정에서 리더가 어떤 비전과 전략을 가지고 있는가를 고려할 때, 가시리 이장선거에 세 명의 후보가 나올 정도로 과열현상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특히 후보들이 기존 마을사업과 어떤 연계를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이번 이장 선거에 나온 세 후보는 모두 기존 마을사업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물론 세 명의 후보자도 간접적으로 마을사업을 경험하고 조금은 거리를 두고 지켜보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지난 10년간 가시리마을 발전을 위해 다양하게 추진된 사업을 어떻게 연계할 것이며, 그 사업이 지역과 마을 발전에 어떤 가치가 있으며, 장기적인 마을 발전 원칙과 어떻게 결합 혹은 조화를 이루는지 공유하는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마을의 유명세를 타고 생태문화체험마을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만큼 혹시 이들이 관련 수익사업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분명 존재한다.

지난 몇 년 동안 가시리 공동목장 부지에는 풍력발전단지가 건설돼 마을에 유의미한 수익을 제공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풍력발전기 아래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가시리마을을 찾는 많은 사람은 과거 그대로 유지되는 목장 경관을 보고 싶어 오는데, 그 경관을 태양광단지가 해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런 환경과 개발 문제에 대해 새로운 리더십은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주목된다. 특히 기존에 외부 전문가들이 주도했던 조랑말체험공원이 그들이 떠난 이후 개점휴업 상태인데 이를 어떤 방식으로 재개할지도 관심의 대상이다.

주민 속으로 들어와 도움을 주던 외부 리더들이 떠난 자리가 이번 가시리마을 방문에서 크게 느껴진다. 물론 마을 주민들 속에서 주체들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가시리마을에서도 초고령화가 진행되고 있기에 이러한 사업을 모두 주민 스스로 담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도 많은 외부인이 가시리에 들어와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몇 년에 걸쳐 가시리마을 문화축제에 참여했던 한 젊은 부부는 최근 마을에 카페를 차리고 마을 주민 속으로 조금씩 들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2016년에는 몇 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마을에 16가구의 협동조합주택(제주 오시리가름 협동조합주택)이 들어왔다. 16가구 전체가 이사를 마친 것은 아니지만 이들 이주민이 주민 속으로 조금씩 들어갈 때 마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도 역시 흥미로운 사안이다.

리더의 다수는 시민사회활동가


이러한 이주민들을 마을 주민과 연결시키는 일은 가시리마을의 큰 과제다. 새로운 수혈을 통해 마을에 리더십을 세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아쉽게도 가시리는 지난 10년간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면서 미래세대 리더의 발굴과 육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내부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렇지만 가시리마을은 이제 시작이다. 주민 속으로 들어온 리더들이 떠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조금씩 들어오는 상황에서 어떻게 균형 잡히고 지속가능한 지역 발전을 지향하는 리더와 리더십을 구축할지 주목된다.

현재 다수의 시민사회활동가가 여러 마을 단위 사회적경제 영역의 리더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 주민 속으로 들어간 리더들은 어떤 사람일까? 한국사회는 그동안 급속도로 확대되는 사회적 양극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찾기의 일환으로 사회적경제 활동에 주목해왔다. 지역 단위에서 마을기업·사회적기업·협동조합이 다양하게 실험적으로 운영됐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법적, 제도적, 물적 지원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시민사회 진영의 리더들이 사회적경제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우선 지난 2년여 동안 우리 연구자들이 지역을 방문해 만난 38명의 리더를 중심으로 그들의 특성을 스케치해 보았다. 이들 리더의 인구학적 특성을 보면, 여성보다 남성이 두 배 이상 많았고, 연령대도 40대가 주를 이뤘다.

이러한 성별 분포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유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에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현장으로 들어가 보면 사회적경제 영역에서의 여성 파워를 확인할 수 있다. 리더 중 남자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실제 사업을 수행하는 데서는 여성의 역할이 다른 부문보다 훨씬 두드러진다. 특히 근속기간 면에서 남성의 이직률이 여성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마을 리더 가운데는 경제적 이유로 가난한 마을로 이주해 돈을 번 후 떠나려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눌러앉은 경우도 있다. 낙후했던 부산 반송동의 변화한 모습.
전수조사를 실시하지 않아 정확한 통계치는 얻을 수 없지만, 현장에서 만나는 중간간부 이상의 경우 여성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은 최소 10년 이상 활동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지역 단위에서 생활밀착형 사회적경제 활동에서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성들이 낮은 보수에도 사회적 가치를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함축한다. 아직까지는 가구 생계를 책임지는 남성들이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적정한 보수를 받지 못하기에 이직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첫 과제는 주민들의 삶과 전통 존중


리더들의 연령별 분포를 살펴보면 다수가 40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지역에서 만난 리더 대부분이 10년 넘게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 전문성을 확보하고 지역 내에서 리더십을 인정받기 시작한 경우다. 이들은 교수·의사·법조인·종교인 등 시민사회 진영에서 기존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리더로 영입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경제 활동영역 내에서 스스로 전문성을 구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지역/마을 공동체로부터 인정받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리더 개인으로서는 헌신적 자기계발 노력과 지역공동체 안에서 상호 협력과 연대를 통해 신뢰를 구축하는 매우 지난한 과정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이유에서 아직까지 20대나 30대가 지역 리더로서 사업을 주도하는 경우는 매우 희박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들 리더의 사회학적 특성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 특성을 출신 지역과 활동경력 두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리더들의 해당 지역 출신 여부를 확인해본 결과, 예상대로 타 지역 출신 리더들이 해당 지역/마을로 들어간 경우가 다수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 혹은 수도권에서 시민사회단체·노동조합·생활협동조합·연구자로 활동하다 대안의 부재, 조직 매너리즘, 건강 위기, 도시 탈출 등을 이유로 지역으로 내려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처음부터 지역에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우선 휴식시간을 가지면서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에 대한 비전과 미래사회에 대한 구상 등을 고민하다 사회적 경제 활동을 오래전부터 꾸준히 전개해온 지역에 정착하는 경우가 하나둘 생겨났다. 이것이 일종의 유행이 되어 2000년대 들어 많은 시민사회활동가가 꾸준히 지역으로 내려갔다. 동시에 수도권에서도 중앙 중심의 활동보다 기초단위 마을로 들어가 공동체 안에서 협동의 삶을 구체적으로 이뤄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리더들이 이렇게 지역 속으로, 주민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결코 자연스럽고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농촌에 대한 환상은 쉽게 깨졌고, 농업이 삶에 체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농촌지역 마을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이해한 농촌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과거의 직업·학력·전문지식 등 자신의 계급장을 다 떼어놓고 겸손하게 주민들의 눈높이로 다가간 경우에만 조금씩 지역 주민의 마음이 열리면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마을 리더들이 주민 속으로 들어가려면 농업이 삶에 체화해야 한다. 전북 진안 봉곡마을의 귀농귀촌공동체
어떻게 보면 주민 속으로 들어가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은 리더들은 시민사회활동가들이었다. 기존의 운동방식으로 지역주민을 가르치려 하고, 조직하려 하고, 앞서 이끌려는 방식은 지역에서 결코 통하지 않았다. 지역/마을공동체의 일원으로 겸손하게 그 지역을 오랜 기간 지켜온 주민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소중히 여길 때에야 비로소 주민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간이 최소 10년은 걸렸다는 것이 주민 속으로 들어간 리더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이런 견지에서 지역의 리더로서 가장 적합한 경우는 해당 지역 출신으로 지역 주민과 꾸준한 상호 협력을 통해 주민과 신뢰를 구축한 리더들이라 하겠다.

지역의 사회적경제 활동 리더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다수가 시민사회·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하다 지역/마을로 들어가 사회적경제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과거 학생운동·노조활동·시민사회활동 경험이 없이 평범하게 회사원으로 지내다 지역/마을공동체의 사회적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우가 둘째로 높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자유주의 경제의 세계화 위력이 우리 삶 구석구석에까지 미쳐 약육강식·적자생존·각자도생·승자독식 등의 가치가 지배하고 사회적 양극화가 더욱 확대되는 것을 일반 시민들도 체험하면서 삶의 대안 찾기에 나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평범한 주부로 살다 마을기업·사회적기업·협동조합 등에서 열혈 활동가로 변신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부산 반송동 ‘희망세상’의 김영미 사무국장의 이야기는 사회적경제 활동을 통해 평범한 주민에서 지역공동체의 활동가로 올곧게 다시 서는 대표적 사례다. 김 사무국장은 경제적 이유로 가난한 마을로 잠시 이주해 열심히 돈을 벌어 하루속히 그 동네를 떠나기로 계획했지만, 그 지역의 다양한 마을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변모해 지역을 사랑하게 되고 결코 지역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 규슈(九州) 미야자키(宮崎)현 아야(綾)정의 고다 미노루(鄕田 實)와 같은 리더는 한국사회에서는 나올 수 없는 환경인가? 아직 수십 년의 경험이 축적되지 않았기에 아야정과 같은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여기한 사람을 소개한다. 전북 임실군 지속가능발전협의회 김정흠 운영위원장이다.

운동가의 물빼기로 시작해야


▎전북 임실 중금마을은 에너지 자립마을을 목표로 쓰레기 분리수거, 체험학습과 함께 태양광방앗간도 운영한다.
김 위원장은 전북대를 졸업하고 농촌을 살리고자 맨손으로 이 마을로 들어왔다. 김 위원장은 이후 농민회 활동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농업·농촌·농민의 위기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고 꾸준히 대안을 모색했다. 농업에서 답을 찾다 뜻밖에 그 해답을 기후변화에서 발견했다. 전 지구적 차원의 기후변화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결코 농촌과 농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김 위원장은 “왜 이제야 기후변화 문제 속에서 답을 찾게 됐는지 후회스럽다”고 고백한다. 그는 ‘기후정의(climate justice)’라는 마스터 프레임 위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이나 방향은 물론 지역의 발전까지 새롭게 해석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더욱 촉진한 사건이 바로 2011년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 사고였다.

김 위원장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임실 중금마을을 에너지 자립마을로 변화시키기 위해 자그만 실천, 즉 마을 주민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바꾸는 프로그램을 몸소 실천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후쿠시마는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다’라는 모토를 내걸었다. 쓰레기 분리수거, 마을도서관, 에너지자립 체험학습장, 태양광을 이용한 마을방앗간 운영 등을 위해 필요한 기구를 개발하고 자비로 기후변화 교육공간을 만들었다. 풀뿌리 주민에서 시작해 마을-지역-국가, 그리고 전 지구적 차원으로 기후정의를 구현하는 지구시민으로 거듭나자는 것이 그의 비전이었다.

사실 김 위원장은 임실군 지속가능발전협의회 운영위원으로 8대 마을 의제를 선정하고 마을 만들기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큰 한계를 경험했다. 돌이켜보면 위로부터 주도하는 많은 정부의 마을 만들기 사업은 마을 주민을 주체로 세우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그 이유는 마을 단위에서 진행될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지방정부와 현장주민 사이의 거리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이 사업을 왜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않고 참여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비록 마을 단위 마을 만들기 사업이더라도 기후변화와 지속가능발전이라는 프레임 위에서 식량 수급체계 위기, 안전한 먹을거리 위기, 친환경적 삶의 양태로의 복귀 등을 해석하지 못한 채 마을 만들기 사업을 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중금마을 리더인 김정흠 임실군 지속가능발전 협의회 운영위원장(왼쪽).
김 위원장은 어떻게 이렇게 내공 있는 진단과 평가를 할 수 있었을까? 그의 30년 넘는 농촌·농업·농민 살리기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동안 20년 넘게 추진된 마을 만들기 사업은 풀뿌리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성과가 거의 없었다고 그는 일갈한다. 수천 개의 마을 만들기를 시도했지만 성공사례는 5% 미만이라는 것이다. 이 통계조차 소득, 판매량, 관광객이 늘어난 것만으로 평가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진정한 의미의 농촌마을공동체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에 허구적 평가라는 것이다. 심지어 협동조합 사업마저 겉으로는 공동체·공유경제·사회적경제를 강조함에도 풀뿌리 차원에서 협동조합의 씨를 뿌릴 수 있는 기반이 너무 약해 결국 활성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 김 위원장의 쓴소리다.

그렇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김 위원장이 추구한 대안은 무엇인가? 김 위원장은 뜻밖에 소득 창출보다 잘 노는 마을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기를 강조한다. 마을 고유의 전통에서, 마을의 정체성을 찾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힘주어 말한다. 사실 농촌마을의 정체성은 ‘잘 놀고 서로 존중하는 것’이다. 또한 ‘깨끗한 우리 마을’과 같은 자원순환마을을 김 위원장은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농업은 과거 자원순환에 기초했지만,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화석연료에 의한 인위적 생산구조로 바뀌었다. 최근 기후변화로 인해 에너지 자립마을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삶의 구조와 방식 전체를 에너지 자립과 연계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김 위원장은 농산물의 생산·유통·판매 구조에서도 저탄소를 지향하며 기후변화에 대응할 것을 강조한다. 물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을 주민들의 생태적 가치관으로의 전환, 그리고 삶의 태도와 에너지 소비 습관 등의 변화가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김 위원장은 이를 위해 전국 1호 마을도서관을 만들어 어린아이부터 다양한 친환경교육 실천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어릴 적부터 자연과 생태, 환경과 공동체, 농업이라는 가치를 생활 속에서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문에 도서관에 대한 투자를 계속하는 것이다. 특히 노인들의 쓰레기 분리배출 노력이 중금마을의 지구시민으로서의 미시적 실천을 추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시골에서 어떻게 하면 분리배출을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80대 할머니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꾸준히 설득하고 함께 노력한 결과, 이제 중금마을은 기후정의 및 에너지 자립을 위한 작은 실천을 꾸준히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임실 중금마을을 에너지 자립마을로 탈바꿈하는 데는 김 위원장의 헌신과 노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 위원장의 노력이 일본 미야자키현 아야정의 고다 미노루처럼 중금 마을을 친환경적이고 윤택한 마을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풀뿌리 사회적경제 활동영역에서는 시민사회활동가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그들이 지역에서 올바른 리더로 성장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주민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오래 걸리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운동가의 색깔을 빼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시민사회활동가 출신들은 기획력이 뛰어나고 운동가적 기질이 강해 위로부터 주민을 이끌려는 엘리트적 사고가 강한 것이 문제다. 주민들은 이들의 말에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몇 대에 걸쳐 지역을 지켜온 그들이기에 역사·문화·전통, 그리고 기억의 공유를 쉽게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우선 주민 속으로 들어가 리더가 되려는 사람들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들이 변하는 것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주민의 변화를 재촉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들 지역 주민과의 만남과 신뢰 구축 과정에서 우리는 여성들의 리더십에 주목하고자 한다. 남녀 간 큰 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지역에서 추진된 많은 마을 만들기 사업을 조사해보면 주로 남성들은 문제를 일으키고 여성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역의 문제들은 생활밀착형 문제가 많기 때문이고, 이들 문제를 시시콜콜 따지는 것은 여성들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함께 모여 지역문제를 소소하게 따지면서 함께 대안을 궁리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자신의 삶을 더욱 자연스럽게 공유하게 된다. 일종의 ‘수다 리더십’이 마을 단위에서는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노출하지 않게 되면 그것이 어느 순간 곪아 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자존심 등을 이유로 자신의 문제를 잘 공유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를 건강하게 발전시키는 가장 핵심적 작동 기제는 자신을 노출하고 드러난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궁리하는 협동의 삶이다. 중금마을이 에너지 자립 마을을 추진하는 과정도 바로 이러한 상호 노출과 공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울 마포구의 성미산마을도 이러한 공동의 고민과 궁리의 과정이 진행되었기에 쉽게 대안을 모색할 수 있었던 곳이다.

여성 리더십에 주목하자


▎마을의 리더는 먼저 자신을 노출하고, 드러난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대안을 궁리하는 협동의 삶도 추구해야 한다. 마포 성미산마을도 이러한 공동의 고민과 궁리의 과정을 거쳐 대안을 모색할 수 있었다. 성미산마을의 성미산밥상.
마을에서 여성 리더십이 돋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생활밀착형 이슈에 대해 수다를 떨며 공유해야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수다 과정에서 함께 공감하고 체휼하는 리더십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멀찍이 서서 팔짱을 끼고 머릿속으로만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결코 지역과 마을 리더의 자세가 아니다.

주민 속으로 들어간 많은 리더가 이런 덕목과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을까? 맨땅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초고령화와 급격한 산업화·도시화로 인해 우리 농촌지역의 많은 마을공동체는 이미 붕괴했다. 이런 마을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리더의 수혈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과거와 같은 운동가적 방식으로는 오히려 공동체를 더 망칠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한다. 이상적으로는 마을에서 성장한 리더의 출현이 가장 자연스럽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당장 이를 기대하긴 어렵다. 다행히 사회적경제 활동이 주목받고 활성화하고 있는 지금 이때가 마을공동체를 새롭게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문제는 이를 위해 바깥에서 마을과 주민 속으로 들어간 리더들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다. 이들의 노력 여하가 앞으로 공동체를 다시 세우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판가름할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리더와 리더십은 결코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풀뿌리부터 생애주기적 관점에서 연속적인 교육·훈련·체험 등을 통해 리더와 리더십을 세워가는 과정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일본 농촌지역에서 발견한 비전과 전략을 갖춘 헌신적 리더가 형성되는 과정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한국사회는 이제 열정과 헌신으로 무장하고 비전과 전략을 구비한 지역/마을공동체의 리더와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리더들이 우리 삶의 터전으로 공동체의 복원이라는 소명의식을 갖고 통찰력·책임감·전문성을 통해 마을과 지역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 이들이 신뢰·공유·창출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체화하면서 세상을 바꾸는 디자이너로서 혁신하고 실천할 때 우리의 농촌·농업· 농민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임현진(林玄鎭, Hyun-Chin Lim) hclim@snu.ac.kr - 서울대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실련 공동대표, 사회과학협의회장, 서울대 사회과학대장, 아시아연구소 창립소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글로벌 NGOs> <세계화와 반세계화> <지구시민사회의 구조와 역학> <뒤틀린 세계화> <글로벌 패러독스> <아시아의 부상> 등 50여 권이 있다.

공석기(孔錫己, Suk-Ki Kong) skong@snu.ac.kr -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경희대 공동대학원 겸임교수. 환경경운동연합 국제협력위원회와 서울시 공정무역위원회 위원.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미국 하버드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글로벌 NGOs> <인권으로 읽는 동아시아> <인권사회학> <뒤틀린 세계화> 등이 있다.

201704호 (2017.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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