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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비정신의 미학(15)] 선정(善政)의 표상 금계(錦溪) 황준량 

왕에게 군민의 10년 세금을 감면받다 

글 송의호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단양군수 시절 백성의 피폐함 보고 공납·군역 등 ‘적폐’를 고쳐달라는 상소문 올려… 목민관의 애민정신으로 정치의 근본을 제시했다는 평가받아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양정사에 모인 황준량의 후손들. 앞줄 맨 왼쪽이 금계의 16대 종손인 황재천 씨.
5월 9일 문재인 새 대통령이 뽑혔다. 대통령 보궐선거는 헌정사상 처음이다. 새 대통령은 더욱이 조선시대 반정(反正)처럼 재임 중인 최고 권력자가 끌어내려진 뒤 들어섰다. 국민들은 한 표로 권리를 행사하면서 한 번쯤 정치가 무엇일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 근본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해 통치자의 자격과 행정의 각론을 제시했다. 다산은 ‘목민관(牧民官)’으로 명명했지만 북한학자들은 이를 통치자로 번역했을 정도로 당시 목민관은 크든 작든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로 보았다. 이제 조선시대 한 목민관이 걸어간 길을 통해 정치의 근본을 반추해 본다.

1557년 5월 7일. 지금으로부터 460년 전 단양군수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63)은 명종 임금 앞으로 상소문을 올린다. 단양 고을이 처한 피폐함을 알리고 대책을 호소하는 이른바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다. 조정은 앞서 파산한 단양을 회복시킬 적임자로 그를 발탁했다.


황준량은 부임해 관할 구역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변방은 주민 수 십 호가 겨우 남았고 백성들은 병든 채 고초를 겪고 있었다. 그는 주민들의 하소연을 들은 뒤 “관(官)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여러 폐단 때문에 우리 백성이 살아갈 수 없으니 어떻게 관아라 할 수 있겠느냐”고 탄식했다. 그리고는 5000자가 넘는 상소문을 써내려 갔다.

“(…) 부역에 나갈 수 있는 가구가 40호도 되지 않고, 한 집이 100호의 부역을 부담합니다. 힘껏 밭 갈고 농사지어도 세금과 부역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자는 병들어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흩어져 땅은 텅 비었습니다. 농토와 마을을 버리고 이슬을 맞으며 산속에서 살다가 승냥이나 살무사에 죽더라도 돌아오려 하지 않으니 (…) 온 고을이 폐허가 돼버렸습니다.”

부역에 나갈 수 있는 가구가 40호도 안 돼


▎<금계집>과 이 문집을 찍은 목판. 퇴계 이황이 일일이 문집의 편차를 정한 뒤 간행했다.
단양의 온 고을이 무거운 세금과 힘든 부역을 피해 집을 버리고 산속으로 숨어든 것이다. 황준량은 이어 “마을은 가시덤불로 덮이고 인가에 연기가 나지 않아 전쟁이 난 뒤보다 더 참혹하다”며 “슬퍼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진다”고 읍소했다.

수령은 임금께 실상을 전한 뒤 파격적인 수습책을 진언한다. “앞으로 10년 동안 단양 고을에 각종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주소서.” 월(越)나라 구천(句踐)이 인구를 늘리는 데 10년이 걸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게 어렵다면 아예 군(郡)을 현(縣)으로 강등시키라며 그는 배수진을 쳤다.

그리고는 고쳐야 할 공납과 부역 등 10가지를 조목조목 밝힌다.

첫째로 꼽은 폐단은 재목이다. 공납해야 할 서까래와 나무가 400개에 이르고 약간 못한 재목은 수만 개가 배정돼 감당할 수 없었다. 40가구가 나무 때문에 험한 산을 넘고 깊은 골짜기를 건너 운반하느라 기진맥진하고 소와 말도 따라 죽는 등 고생이 극도에 이른다는 것이다.

사냥의 폐단도 지적했다. 1년 공물이 노루가 70마리에 꿩이 200마리가 넘었다. 백성들은 쟁기를 놓고 그물과 활로 새 한 마리 잡기 어려워 곡식을 팔아 사서 바치는 실정이었다. 그는 이외에도 종이와 가죽·약재 등 공납과 군역의 문제 등을 일일이 언급한다.

모두 오랫동안 쌓인 폐단으로,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지적했던 이른바 적폐(積弊)였다. 그리고 황준량은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 지방을 보아 각 도를 미뤄 살피시라”며 소를 맺는다.

상소는 뜻밖에도 주상의 마음을 움직였다. 명종은 친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며 10년을 한정해 20여 가지 공납과 세금을 특별히 감면했다.

전례가 없던 일이다. 황준량의 애민(愛民) 정신이 하늘에 닿은 것이다. 그때부터 흩어졌던 단양 백성들이 하나둘 다시 모여들었다. 고을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정약용은 “백성의 삶을 돌보는 일이 바로 통치자의 첫 번째 임무(誠牧民之首務)”라고 했다.

4월 29일 취재팀은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금선계곡의 금선정(錦仙亭)을 찾았다. 동양대 앞을 흐르는 금계천을 따라 2㎞쯤 거슬러 올라간 위치다. 황준량의 호(號) 금계도 여기서 유래한다. 황재천(60) 금계 선생 16대 종손이 금선정으로 안내했다.

1781년(정조 5)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금계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다. 황준량은 생전에 금선정 아래 너럭바위를 즐겨 찾았으며, ‘금선대(錦仙臺)’로 명명했다. 계곡 양쪽으로 수백 년을 지켰을 노송들이 도열해 있었다. 계곡 물은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맑다. 비경(秘景)이다. 일대는 조선의 십승지 중 하나로 추정되는 곳이다. 정자의 ‘금선정’ 편액이 검게 칠해져 잘 보이지 않는 건 까닭을 알기 어려웠다.

금선정을 둘러보고 나올 때였다. 계곡 바위에 자리 잡고 금선정을 스케치하는 초로의 여성이 보였다. 나이 70이 다 됐다는 김술희 화가였다. 위쪽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스케치 여행 중인 미술인들이다. 단양에서 왔다고 했다. 연유를 물었더니 금계 선생 이야기를 줄줄 풀었다.

“이곳이 고향인 황준량이란 분이 단양군수를 할 때 세금을 10년간 면제시켜 우리 단양 인구를 늘린 은인이다.” 그래서 벌써 세 번째 찾아와 그 흔적을 더듬는다는 것이다. 목민관의 선정(善政)은 500년이 지나도 이렇게 기억되고 있었다. 땅은 사람으로 인해 명승지가 된다더니 금선계곡은 황준량의 계곡임이 분명했다.

신녕에선 채무 없애고 관련 문서 불태워


▎유림과 후손이 금계를 기리며 세운 금선정.
금선계곡 뒤로 소백산 자락이 보인다. 도로 옆 ‘금양정사(錦陽精舍)’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산속으로 길이 이어진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콘크리트길이다. 조심스레 가파른 길을 오르자 산 중턱에 금양정사란 제법 널찍한 강학 공간이 나타났다. 관직 생활을 하던 황준량이 노년을 보내려고 죽령(竹嶺) 아래 금계에 일찌감치 마련했던 배산임수 터다. 금양정사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지어졌다.

그 왼쪽에는 ‘욱양단소(郁陽壇所)’가 있었다. 1987년 금선계곡 상류에 농업용 저수지 ‘금계호’가 축조되면서 욱양서원이 물에 잠기자 사당만 옮겨진 것이다. 퇴계 이황과 금계 황준량의 위패가 돌에 새겨져 있다. 단소로 남은 욱양서원은 당시 인재 선발방식 등에서 소수서원과는 정반대였다. 소수서원이 입학 자격을 과거시험에 대비해 초시 급제자로 제한한 데 비해 욱양서원은 인격 도야를 더 중시하는 개방형이었다. 교육 개혁을 실천한 서원이다.

황준량은 1540년 문과 급제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20대 중반부터 10년 동안은 공조·호조·병조의 좌랑 등 중앙부처에 있었다. 30대 중반 이후 부모 봉양을 위해 지방관을 자원한 뒤 신녕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 등을 거치며 10년 넘게 목민관을 지낸다.

신녕현감 시절에는 백성들이 흉년을 만나 굶주리자 성심껏 진휼해 살려냈다. 또 전임 수령이 남긴 채무를 절약으로 보충한 뒤엔 관련 문서를 태웠다. 후일 백성을 다시 옭아맬 수 있는 족쇄를 아예 불살라버린 것이다.

거기다 금계는 학문 진흥과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신녕현에는 백학서원을 세워 서적을 보관하고 전답을 배치했다. 성주목에는 공곡서당과 녹봉정사를 신설했다. 그가 창건한 학교만 4곳에 이른다. 교육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 것이다. 특히 성주목에서는 공무를 마치면 오건 등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 몸을 해칠까 염려하자 금계는 오히려 “글을 읽는 것은 본래 마음을 다스리고 기운을 기르는 것인데 어찌 독서로 인해 질병을 초래하겠는가”라며 안심시켰다.

1561년 성주목사 시절 금계는 스승 퇴계가 기다리던 임무를 완수한다. 퇴계가 심혈을 기울인 주자(朱子)의 편지와 상소문 등을 모아 요약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발문을 쓴 것이다. 금계는 발문에서 “장차 이 책이 간행되면 <근사록(近思錄)>과 함께 사서(四書)로 올라가는 계단이 될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는 퇴계의 대표 저작인 <주자서절요>를 처음으로 간행한다. <주자서절요>는 이후 조선 성리학의 필독서로 자리 잡는다. 황준량을 퇴계학파의 중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까닭이다.

성주목사 4년째인 1563년 봄 황준량은 병을 얻어 사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간다. 죽음을 직감했던 것일까. 황준량은 귀로에 서찰로 퇴계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린다. 타계하기 하루 전이다. 그리고 중도인 예천에서 끝내 죽음을 맞는다. 겨우 47세였다. 과로사였을 것이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스승 퇴계가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 밝히는 계기가 된다.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의 마음은 그 끝을 알 길이 없다.

퇴계, 제자의 죽음에 행장·제문 지어


▎현지를 찾은 김술희 화가가 스케치한 금선정.
황준량이 죽자 스승 퇴계는 그의 관을 덮을 명정(銘旌)을 썼다. 그리고는 슬픔을 억누른 채 행장(行狀)을 지어 그의 일생을 기록한다. 퇴계가 제자의 행장을 쓴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사건이었다. 퇴계는 일생 7편의 행장을 남겼다. 그가 행장을 쓴 인물은 정암 조광조, 농암 이현보,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 명종 임금, 퇴계의 아버지가 전부였다. 여기에 제자의 행장이 보태진 것이다. 황준량의 이야기로 오늘날 전하는 상당부분은 여기에 근거한다. 퇴계는 또 제문을 지어 아들 준을 통해 보냈다.

“아, 슬프다 금계여!… 어찌 생각이나 했을까! 영결하는 말이 부고와 함께 이를 줄을! 실성하여 길게 부르짖으니 물이 쏟아지듯 눈물이 흘렀다네. 하늘이여! 어찌 이리도 빠르게 이 사람을 빼앗아 가시나이까….”

스승은 제자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도 살폈다. 황준량이 공을 들인 금양정사가 그의 사후 완공되자 퇴계는 1566년 현장을 둘러보고 풍기군수에게 특별한 배려를 당부하는 글을 쓴다. 또 제자가 남긴 시문과 저작을 수년 동안 일일이 넘기며 편차를 정하고 간행한다. 황준량의 <금계집> 초판본이 1566년께 일찌감치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종호(62) 안동대 한문학과 교수는 “제자를 애틋하게 어루만지는 스승의 따스한 정이 담긴 문집”이라고 말했다. 스승은 그렇게라도 제자의 여한을 풀어 주고 그의 족적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했다. 스승의 날에 다시 돌아볼 사제의 관계다.


▎금선정 인근에 세워진 금계 탄생 500주년 추모비.
올해는 마침 금계가 태어난 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취재팀이 금양정사를 찾은 날 ‘금계 황준량 탄신 500주년 기념사업회(회장 이용태)’는 5차 실무회의를 열고 있었다. 후손 10여 명이 모여 올가을로 예정된 기념행사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9월 22일엔 영주시민회관에서 기념 학술대회를 열고 10월 14일엔 금계종택에서 고유제를 지낸 뒤 기념비를 제막한다. 기념사업회는 발기문에서 “선생을 두고 일부 학파에서 평가가 다르기도 했다”며 “500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정신을 있는 그대로 보이겠다”고 말했다. 목민관의 인연으로 단양·칠곡·성주군수도 사업에 참여했다.

황준량은 짧은 생애였지만 사관(史官)으로서, 문사(文士)로서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550년 호조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중종실록>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는 “사관(史官)의 임무를 띤 사람이 학식만 있고 재능이 없으면 직분을 감당할 수 없고, 재능만 있고 절개가 없으면 그 임무를 다할 수 없다”며 사관의 엄중함을 강조했다.

문사로서 그가 남긴 한시는 1000수에 가깝다. 또 처조부였던 농암 이현보가 ‘어부사’를 쓸 때는 관련 노래를 수집해 주기도 했다. 논쟁적인 글도 남겼다. ‘균전의(均田議)’는 그가 경제 개혁에도 관심이 지대했음을 보여 준다. 균전은 정전(井田)과 같은 맥락이다.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농민이 토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전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청혁양종소(請革兩宗疏)’에서는 불교의 폐해를 지적한다. 금계는 “천민으로서 노역을 싫어하는 무리나 사대부 자손으로서 무식한 자들이 다투어 중이 되는 일을 영예롭게 여기고, 점차 그 흐름을 좇아 마침내 안락만 추구하고 고된 일은 회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모두 유행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 나라는 텅 비어가고 있다”며 불교로 인한 군사력 결손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면서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부활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승과(僧科)를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금선계곡에 탄생 500주년 추모비 세워져


▎금양정사 왼쪽에 들어선 욱양단소. 욱양서원이 수몰되면서 사당의 위패를 돌에 새겨 옮겼다.
금선정 인근엔 금계종택이 있었다. 전통 한옥이 아니다. 조촐한 요즘 건물이다. 한동안은 금양정사를 종택으로 같이 쓰다가 40년 전쯤 종택 기능만 산 아래로 내려왔다. 마당 한쪽에 수백 년을 지켰을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다. 뒤쪽에는 불천위 금계 선생 사당이 있었다. 사당은 옮겨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종손과 함께 참배했다.

종택 오른쪽으로 자동차 10여 대를 세울 만한 널찍한 공간이 조성돼 있었다. 금계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비석이 벌써 세워졌다. 한국국학진흥원장을 지낸 김병일(72) 도산서원 원장이 글을 썼다. 김 원장은 “퇴계 선생은 금계가 제자였지만 그를 학문의 동지처럼 여기고 아꼈다”고 말한다. 김 원장은 추모비의 마지막을 짧은 시로 매듭지었다. ‘아 소백산 우뚝하고/ 금계수 도도히 흐르는 곳/ 그의 향기 이 비석과 함께/ 영원토록 우러러 뵈이리라.’

이제 새 대통령이 탄생했다. 지난해 거리를 달군 ‘촛불민심’을 딛고서다. 일종의 시민혁명으로 조선시대 반정(反正)을 떠올리게도 한다. 혁명도 반정도 그 자체가 곧 성공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은 오히려 우리 역사에서 가장 굴욕으로 기억되는 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

촛불 이후 국가 리더십의 공백은 길었다. 할 일은 쌓여 있다. 갈라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고 미뤄둔 국민의 살림살이를 챙기는 일이 시급하다. 백성의 눈높이로 아픈 곳을 살핀 황준량을 지금 돌아본 까닭이다.

- 글 송의호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박스기사] 의류가 그의 관을 채우지 못했다’ - 공직자 자세로 청렴을 첫손으로 꼽아


▎스승 퇴계는 먼저 세상을 등진 제자 금계를 안타까워하며 제문을 썼다.
황준량은 관직에 있는 20여 년간 몸소 청렴을 실천했다.

퇴계 이황은 자신이 쓴 황준량의 행장에서 그의 청빈함을 이렇게 증언한다.

“운명하던 날에 이르러서는 이불과 속옷 등이 구비되지 않아 베를 빌려 염(斂)을 했는데 의류가 관을 채우지 못했다. 그런 뒤에야 사람들이 그의 청빈함이 이와 같아서 거짓으로 꾸며 스스로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음을 알았다.”

황준량은 공직자가 지녀야 할 자세로 청렴을 맨 먼저 꼽았다. 그는 ‘벼슬살이하며 지켜야 할 4가지 잠언(居官四箴)’을 아래처럼 정하고 잠언마다 실천 방법과 의의를 4언절구 8행시로 다짐했다. 오늘날 공직자도 곱씹을 만한 내용이다. 이 잠언은 최근 고향에 세워진 탄생 500주년 추모비에도 새겨져 있다.

<거관사잠(居官四箴)>

①지기이렴(持己以廉, 청렴으로 자신을 지키고)

한번 더러워지면 깨끗해지지 않으니/ 물들여진 실은 다시 희어지지 않는다네/ 명절(名節)은 지키기 어렵고/ 신명(神明)은 속일 수 있다네/ 일을 덜고 욕심을 줄여/ 정신과 덕을 길러야 하리/ 사지(四知)에 거문고 하나/ 고금에 맑은 바람 부네

②임민이인(臨民以仁, 사랑으로 백성을 대하며)

하늘과 땅의 큰 덕을 생(生)이라 하니/ 인자한 마음에서 싹 튼다네/ 친척부터 친애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외물과 봄이 된다네/ 굶주리거나 물에 빠진 백성을 자기같이 여기고/ 아프거나 가려움도 똑같이 보아야 하네/ 무슨 어려움도 참지 못하랴/ 백성들은 파리한데 제 몸만 살찌웠네

③존심이공(存心以公, 마음은 공익에 두고)

공무를 들음이 명확해야 하니/ 한쪽만 믿으면 어둠이 생기네/ 마음을 고르고 자기를 비워/ 선행에 머물러야 하네/ 지모를 쓰고 사심에 따르면/ 사악과 아첨이 빈틈으로 밀려드네/ 본래 해와 달을/ 욕망으로 먹게 하지 마라

④이사이근(莅事以勤, 부지런히 일하라)

백 리 땅으로 근심을 나누니/ 음식 풍성하고 의복 사치스럽네/ 한 올의 실과 한 톨의 쌀도/ 백성의 힘 다해 생산했네/ 사무를 게을리하고 벼슬자리 비우면/ 마땅히 소찬(素餐, 벼슬자리 차지하고 녹만 축낸다)이라 풍자하네/ 둥근 베개로 경계하니 등에 땀이 나네/ 공무에 임하여 감히 게을리하랴

송나라 조변(趙弁)은 부임할 때마다 거문고와 학을 대동했다고 한다. 그는 벼슬을 물러날 때도 똑같이 거문고와 학만 데리고 나갔다는 고사가 전한다. 황재천 종손은 “그래서 금계 선조는 거문고를 청렴을 상징하는 단어로 시에 자주 썼다”고 설명했다. ‘거관사잠’의 ‘지기이렴’에 등장하는 거문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201706호 (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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