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집중분석] 서훈 체제 국가정보원의 새 진로(進路) 

안보와 대화 사이의 균형 잡기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정치 중립 등 내부 개혁에 남북 화해 미션 더해져 ... 정상회담 손 떼고 보안·방첩에 전념해야 한다는 지적도

▎문재인 대통령이 6월 1일 청와대에서 서훈 국가정보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환담을 나누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2005년 9월 16일 오전 평양 번화가인 창광거리에 자리한 고려호텔 로비. 16차 남북장관급회담에 참석한 남측 대표단이 시내 참관을 위해 북측이 준비한 차량에 오르기 시작했다. 수석대표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구형 벤츠에 올랐고 다른 국실장급 간부와 취재진 등 수행원들은 일제 미쯔비시 미니버스에 나눠 탔다. 준비를 마친 걸 확인한 서훈 국가정보원 국장(당시 직책)은 인원 점검 등을 보고받은 뒤 출발 사인을 내렸다.

그런데 서 국장은 남측 대표단 차에 타지 않았다. 행렬 후미로 이동한 그는 북측이 마련한 최신형 벤츠 차량에 몸을 실었다. 북한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보위성)의 고위 간부가 서 국장의 카운터파트로 옆 자리에 올랐다.

이 장면은 남북회담 현장과 대북협상에서 잔뼈가 굵은 서 국장이 북한 측 인사들과 얼마나 스스럼없이 교감하고 어울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남북회담 수석대표(북한은 단장이라고 호칭)보다 더 최신 모델의 차량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건 막후에서 실제로 회담을 움직이고 조율하는 양측 정보기관 책임간부들의 역할이나 위상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지난 5월 서훈 국장은 국가정보원의 수장에 지명됐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정원장으로 대한민국 대북 정보수집과 보안·방첩 분야를 총괄하게 된 것이다. 서훈 원장은 국정원의 대표적인 대북통으로 꼽힌다. 임동원·김만복 전 국정원장과 김보현 전 3차장, 서영교 전 국장 등 국정원의 대북라인을 잇는 인물 중 핵심이란 얘기다.

서훈 원장은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과 2007년 10월 2차 정상회담의 막후에서 사전 접촉과 회담 준비·진행에 깊이 관여해 남북 정상 간의 교감 내용과 내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북한과 이뤄진 여러 차례의 공식·비공식 접촉에서 실무 역할을 맡았고, 이 과정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가장 여러 번 만난 남측 인사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국정원 근무 중 대북 경수로 발전소 건설 지원을 위한 기구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금호사무소(함경남도 신포시)에 2년 간 파견 갔던 서 원장은 귀환 직후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한 간의 비밀접촉에 임하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또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대북 특사 역할을 맡았던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을 수행해 중국 베이징 등지에서 북한과 극비 접촉을 했다.

“팔이 잘려나갈 수도 있다. 많은 상처 입을 것”


▎16차 장관급회담이 열린 지난 2005년 9월 16일 평양 고려호텔 앞에서 포착된 서훈 국가정보원 국장(현 국정원장). 회담 운영을 막후에서 총괄 지휘하던 서 국장은 남측 대표단 차량이 아닌 최신형 벤츠승용차에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간부와 함께 올랐다 / 사진·이영종
이를 시작으로 2000년 9월 박재규 당시 통일부 장관의 김정일 면담과 2002년 임동원 전 통일장관의 김정일 특사 접견, 2005년 정동영 당시 통일장관의 김정일 방문 등에 모두 배석하면서 남북 간 접촉의 흐름을 가장 잘 아는 인물로 꼽혔다. 노무현 정부 때도 이런 기류는 이어져 국정원 3차장을 맡고 있던 2007년 10월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사전 방북한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의 대북협상을 보좌하기도 했다.

서훈 원장은 2007년 12월 대선으로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게 되자 28년간 몸담았던 국정원을 떠났다. 이후 이화여대 초빙교수 등으로 활동하던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권에 도전한 2012년 선거대책위 ‘미래캠프’에서 남북경제연합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남측 수석대표인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탄 구형 벤츠.
국정원 업무와 관련해 문 대통령의 ‘과외교사’ 역할을 해왔다는 게 캠프 관계자의 전언이다. 국정원장에 지명된 직후 청와대가 “국정원이 해외와 북한 업무에 집중하도록 이끌 최적의 인물”이라고 밝힌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청와대는 또 “국정원의 국내 정치 관여행위를 근절하고 순수 정보기관으로 재탄생시킬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타냈다.

서훈 국정원장은 취임사를 통해 즉각 화답했다. 6월 1일 서울 내곡동 국정원 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서 원장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원 개혁과제를 선보였다. 그는 가장 먼저 국내 정보 담당관인 이른바 I.O.(intelligence officer) 제도를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폐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정원은 문재인 정부 임기 내에 완전히 새로워지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기관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후 국민들로부터 평가 받겠다”는 언급과 함께 실천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서 원장의 지시는 당일 즉각 이행에 들어갔다. 국정원이 각 부처와 기관·단체, 언론사에 출입시키며 정보수집이나 조정 업무를 맡겼던 담당관들은 모두 철수했다.

서 원장은 국정원 개혁에 대한 결기를 “역사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로 표현했다. 또 “우리는 지금 어려운 길에 들어서려 한다. 팔이 잘려나갈 수도 있다. 필연 많은 상처를 입게 될 것”이라며 “그러나 지금은 상처 없이 다시 설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며 개혁의 절박성을 강조했다. 이어 “이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도태될 것이고 규정과 질서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응분의 조치를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단 한 번만의 과오에도 국정원 조직에서 퇴출시키는 “무관용의 원칙이 적용될 것”이란 말도 했다. 이와 함께 국정원 내에서의 조직이나 활동에서 지연·학연과 관련한 대목은 척결하고 철저하게 능력과 헌신만으로 평가할 것이란 점도 제시됐다. 서 원장은 실제 모든 직원의 인사카드에서 출신지를 지울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 같은 서훈 원장의 단호한 개혁 드라이브는 문 대통령과의 교감 속에서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실제 문 대통령은 서 원장에게 “국가정보원의 궁극적인 완전한 개혁 방안은 앞으로 좀 더 논의해서 방향을 찾아야 하는데, 그때까지 우선으로 국내 정치만큼은 철저하게 금지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6월 1일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다. 문 대통령은 “국민에게 여러 번 드렸던 약속이니만큼 꼭 좀 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런 대통령의 언급에 서훈 원장이 국내정치 개입 중단과 관련해 상징적이고 즉시 시행할 수 있는 기관 출입 담당관제를 없애는 것으로 첫발을 뗀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언제 우리가 정치개입하겠다고 나선 적 있나?”


▎서울 내곡동의 국가정보원 정문에 박힌 로고. 새 정부 들어서 국정원에는 강한 개혁 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과 서 원장의 국정원 조직 개혁과 쇄신에 대한 강력한 의지표명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게 정부 안팎의 지적이다. 무엇보다 대통령 직속기관이란 한계와 조직의 독립성을 인정받지 못해온 그동안의 발자취로 볼 때 환골탈태의 모습을 보이기는 한계가 있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국정원 조직 내부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국내정치 개입이나 여타 개혁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흘러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정원 직원은 “일단 대통령과 신임 원장이 서슬 퍼런 개혁 일성을 내놓았으니 몸조심하자는 분위기”라며 “I.O. 출입제도 폐지 등 일부 가시적인 변화가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국내파트의 한 실무 간부는 “언제 우리 실무 하급직원들이 정치개입하고 부정·부패하겠다고 먼저 나선 적이 있었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국정원 조직을 망가트리고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킨 건 일부 원장과 정무직 인사, 정권에 줄대기를 해서 낙하산으로 내려오거나 요직을 차지했던 몇몇 고위 간부였다는 얘기다.

I.O. 제도의 폐지도 이미 수차례 써먹은 낡은 카드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국회 국정원 개혁특위는 다른 국가기관이나 정당, 사회단체, 언론기관 등에 대한 국정원 요원의 파견이나 출입을 금지시키기로 합의해 시행에 들어갔지만 흐지부지됐다.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 문제도 수차례 떠들썩하게 제기됐고 많은 다짐이 이뤄졌지만 결국 구두선에 불과했다는 지적이다. 노무현 정부 후반인 2006년 11월 임명장을 받은 김만복 국정원장은 취임사에서 “다음 대선(2007년 12월)은 우리의 정치적 중립 원칙이 확고히 정착됐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지만 결국 대선 과정과 이명박 정부 출범을 전후한 시기 국정원은 또 한번 큰 내홍을 치러야 했다.

서훈 원장이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국정원 댓글 사건’이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등 과거 논란이 됐던 사안에 대해 조사할 뜻을 밝힌 데 대해서도 국정원 내부의 의견은 엇갈리고 있다. 서 원장은 “댓글사건은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법적인 논란을 거듭하고 있어 전직 국정원 차장을 역임했던 사람으로서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여러 가지 국가 차원의 물의가 있던 일에 대해 사실관계를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또 남재준 전 국정원장 시절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에는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서 원장이 “취임하면 국민 신뢰를 잃게 만든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언급한 만큼 이에 대한 내부 감찰이나 진상조사 차원의 작업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국정원 내부 직원들은 과거의 잘못된 사건이나 관행을 바로잡으려 한다면 보다 균형 잡힌 접근이 이뤄져야 할 것이란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내고 있다. 그래야 모든 직원이 공감할 수 있고 설득력을 가질 것이란 얘기다. 문재인 정부가 이른바 ‘적폐’라고 제기하는 문제점들은 비단 보수정부에서뿐만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 아래서도 나타났고 아직도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성 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일부 주장도 나온다.

그 가운데서도 남북정상회담 관련 사안은 국가 정보기관으로서의 국정원 정체성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사례라고 국정원 전현직 직원들은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무엇보다 김대중 정부 당시 첫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북한에 천문학적 규모의 달러를 대북송금 형태로 비밀리에 건넸고, 이 과정에서 국정원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 지적된다. 국가정보기관으로서의 위상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국민의 신뢰를 잃게 만든 범죄행위였다는 반성이다.

정보기관이 북한 정권에 뒷돈 대주는 행동대 역할


▎국정원은 대선 때마다 갈등의 진원지로 등장했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국정원 직원들이 올리고 있다는 제보가 문 후보 측에 접수된 뒤, 당 관계자들이 경찰과 함께 해당 직원이 상주하고 있다는 서울 강남 오피스텔 현장에 출동했다.
국정원의 이 같은 행태는 2003년 노무현 정부의 대북송금 특검 과정에서 그 실상이 드러났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국정원 대북전략기획국장을 맡고 있던 김보현 국정원 전 3차장은 특검 조사에서 “북측이 군사비로 전용할 우려가 있다는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며 대북송금의 문제점을 국정원이 사전에 인지하고도 불법적인 행위에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시인했다. 김 전 차장은 “(북한에) 돈을 직접 주는 것은 국민적 비판여론을 감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그 당시에는 1억 달러 정도를 주더라도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해빙무드를 조성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송두환 특검팀은 2003년 6월 25일 수사결과 발표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현대 측이 북한에 보낸 4억5000만 달러는 대북경협의 대가이자, 정상회담과도 연관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이 중 1억 달러는 김대중 정부가 북측에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나 정부 측 요청으로 현대가 대신 지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북송금에 대한 사법적인 판단은 2004년 3월 마무리됐다. 대법은 이 사건으로 기소된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 등 4명에 대한 상고심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대로 유죄를 확정했다. 현대에서 불법 비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박지원 비서실장을 비롯한 관련자 7명 모두가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 개최 과정에서 피고인들이 재경부·통일부 몰래 북한 측에 4억5000만 달러를 보낸 행위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국민적 동의가 없는 상황에서 북한에 비밀리에 송금해 국론이 분열되고 현재까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면서 “다소 진통이 있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적 합의과정을 거친 뒤 실정법 범위 내에서 북한에 돈을 보내고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이 정치적 선택의 한 방법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국정원 조직과 원장을 비롯한 핵심 간부들이 자금세탁을 맡아 대북송금의 창구이자 환전소 같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국정원 차장 출신 한 인사는 “북한을 상대로 치열한 체제대결과 정보전을 전개해야 할 국가정보기관이 북한 정권에 뒷돈을 대주기 위한 행동대 역할을 했다는 건 국정원 역사에 치욕으로 기록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점을 반면교사 삼아 노무현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 추진에 상대적으로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도 결국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만남이란 정상회담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국정원이 나선 대북 비밀접촉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난 건 대선을 불과 2달여 앞둔 2007년 10월 초였다. 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을 두고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이란 논란이 일면서 국민여론이 극심한 분열을 겪는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당시 회담에 관여했던 정부 고위 당국자는 “2000년 첫 정상회담이 선불제였다면 노무현 정부의 2차 정상회담은 후불제인 셈”이라며 “대북송금이란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지만 국민과 국가경제에 부담을 떠안기고 북한 정권에 천문학적 규모의 돈이나 물자를 지원해줬다는 건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풀이했다.

국정원 대북 접촉 S라인의 부활


▎국정원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 대상으로 거론돼왔다. 내부 직원들은 이번에도 몸을 한껏 낮춘 분위기다.
문제는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과정에서 국정원이 주도하거나 깊숙이 관여했고 서훈 원장 또한 핵심실무자로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서 원장을 비롯한 대북 라인이 최고 권력자의 의중에 따라 남북 정상회담 추진이란 성과를 이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국정원 조직은 그에 따른 부담이나 부작용을 고스란히 감내할 수 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도발을 사전에 예방·제어하는 건 물론이고 치열한 대공첩보전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에서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이 북한 최고지도자나 노동당 고위 간부들과 어울려 비밀접촉과 회담을 주도하는 게 적합한 행동이냐 하는 문제의식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서훈 원장은 3차 정상회담 추진에 상당한 의중을 드러내고 있다. 국정원장에 지명된 5월 10일 그는 청와대 브리핑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정상회담이 필요하고, 필요하다면 평양에 가겠다”며 정상회담 얘기를 먼저 꺼냈다. 서 원장은 “지금 남북정상회담 얘기를 꺼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면서도 “그럼에도 남북정상회담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서 원장이 3차장에 대북전략실 출신 김상균 전 처장을 임명한 것도 정상회담 성사를 염두에 둔 포석이란 진단이 나온다. 김 전 처장은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한 사이에 합의된 모든 문안의 실무 작업을 도맡아 온 인물로 꼽힌다. 서훈 원장이 과거 북한과의 비밀접촉을 주도하던 시절 국정원의 대북라인을 일컫던 ‘S라인’의 부활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정책보좌관이던 홍익표 민주당 의원은 “우리는 서훈 국장의 대북 접촉을 ‘S라인’이라고 불렀다”고 회고했다. 홍 의원은 “회담에 국정원도 개입한다는 걸 저쪽(북)은 너무 잘 알고 있다”며 “큰 방향은 통일부 장관이 협의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S라인에서 내부 조율을 밤샘하며 벌였다”고 말했다.

정상회담 추진이 국정원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족쇄가 된다는 지적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화 상대인 북한을 자극 않고 회담 성사에 공을 들이다 보면 북한의 눈치를 보거나 입맛에 맞추는 행동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국정원이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심각한 갈등을 빚은 건 대표적인 사례다. 1997년 2월 탈북·망명한 황장엽 전 비서와 김덕홍 전 여광무역 총 사장 일행은 김영삼 정부의 환대를 받았다. 정부는 그가 한국에 오면 자유로운 북한 체제 비판 활동을 보장하고 저술·강연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1997년 말 대선에서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김정일 체제 비판을 위한 황장엽의 활동은 발과 입이 봉해졌다. 미국·일본 등지에서 의회 증언과 강연 요청이 쇄도했지만 DJ 정부는 여권 발급과 경호를 핑계로 미적거렸다. 황 전 비서를 챙기던 국가정보기관도 태도를 돌변했다. 남북 정상회담 5개월 뒤인 2000년 11월 국정원은 황 전 비서가 짠 ‘북한 민주화 구상’을 일축했다. “편협한 북한 붕괴론적 시각에서 냉전적 사고를 확산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이라며 비판하는 공개 입장까지 낸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5개월 만인 2003년 7월 황 전 비서 일행을 국정원 안가에서 내쫓았다. 당시 보도자료에는 존칭을 뺀 채 ‘황장엽’으로 폄하하는 표현이 담겨 세상을 놀라게 했다.

황장엽 전 비서는 2010년 10월 자신의 집 욕조에서 쓸쓸히 숨졌다. 황 전 비서의 서울행에 공을 세웠다며 줄줄이 훈장을 탔던 국가 정보기관의 간부들은 바뀐 정권 입맛에 맞추려 그를 길바닥에 내몰았다.

문재인 정부 출범과 서훈 국정원장 체제의 등장으로 “태영호 전 북한 공사가 제2의 황장엽이 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온다. 태 전 공사가 지난해 7월 탈북·망명하자 국정원은 “권력의 주축이라 할 이른바 ‘빨치산’ 혈통들과 엘리트 그룹이 앞장서 김정은 체제에 등을 돌리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는 국내외 언론과의 회견과 강연·발표 등을 잇달아 내놓았다.

태영호가 공개활동을 중단한 이유


▎2007년 참여정부 시절의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사진)을 2013년 남재준 전 원장이 공개한 데 대해 서 원장은 5월29일 국회 청문회에서 “대단히 부적절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직후부터는 공개활동은 사실상 중단됐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 연구기관 박사는 “정보기관이 청와대와 대통령의 눈치보기에 열중한 나머지 탈북인사의 행보를 놓고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문제”라고 꼬집었다. 국정원 안팎에서는 태영호 전 공사의 한국행이 황장엽 탈북·망명의 데자뷔(Deja-vu)가 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부터 남북대화와 대북지원 재개에 공을 들이고 있다.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김정은 정권을 국제사회가 압박하고 있지만 대화를 통한 해결도 병행하겠다는 취지다. 그 정점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간의 정상회담이 놓여있는 듯하다.

하지만 부담스런 요소가 곳곳에 포진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선대(先代) 지도자인 김정일과 달리 훨씬 호전적이고 통제불능이란 점도 문제다. 10대 시절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를 5~6년간 다닌 김정은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 서방세계를 경험했다. 절대권력에 도취된 ‘조기유학파’ 수령은 핵에 대한 집착과 미사일 도발로 국제사회의 질서를 뒤흔들어 버렸다. 서울을 향해서는 통제불능의 오만함과 증오를 토해내고, 워싱턴 쪽으로는 과대망상적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도 드러난다. 문제는 폭주기관차 같은 그를 멈추게 할 브레이크가 없다는 것이다. 고모부 장성택까지 무참히 처형하는 장면을 목도한 노동당과 군부 간부들은 서른세 살 청년지도자 김정은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런 김정은 정권과 문재인 정부의 첫 만남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도 꺼림칙한 대목이다. 문 대통령은 5월 17일 첫 부처 방문지로 국방부를 택한 뒤 “우리 군은 적의 어떠한 도발도 용납하지 않고, 적이 무력도발을 감행한다면 즉각 강력히 응징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을 적으로 지칭한 것은 물론 ‘응징’이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대북 대응태세를 군에 주문한 것이다. 취임 나흘 만인 5월 14일 벌어진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12형’ 발사 때문에 소집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 문 대통령은 김정은 정권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난마(亂麻)처럼 얽힌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 하는 게 문재인 정부의 고민거리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약으로 ▷북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 ▷대북제재와 대화의 병행 ▷굳건한 한·미 동맹 ▷개성공단 확장을 포함한 교류협력 확대 등을 강조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다. 첫 정상회담과 금강산 관광 등의 풍성한 대박 아이템으로 남북관계의 절정을 누린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이어받았던 노무현 정부 시절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런 답답한 국면을 간파한 듯 북한의 대남라인은 문재인 정부를 향해 압박의 고삐를 당기고 있다.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6·15 공동선언 17주년을 하루 앞두고 낸 성명에서 “현 남조선 집권자가 진실로 촛불민심의 대변자라면, 민족자주와 인연이 없는 주접스럽고 가긍한 노릇부터 그만둘 용단을 내려야 마땅할 것”이라고 비난의 날을 세웠다. 앞으로 상당기간 김정은 정권과의 신경전이 불가피할 것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내부 조직개혁과 남북관계 돌파구 마련이란 두 가지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서훈 체제 국정원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201707호 (2017.06.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