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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2)] 사막의 삶과 예술, 나의 만트라 

도시의 백일몽, 허망하게 스러지다 

글·사진 김미루 예술작가
양변기 사용과 샤워를 할 수 없는 사막생활로의 진입…서구 문명의 자기중심성을 극명하게 깨닫게 되는 거친 광야의 일상

입안에서 씹히는 모래, 그리고 걸레 같은 맛이 나는 향료, 그리고 꾸득꾸득 말라빠진 양고기의 역한 냄새가 뒤섞인 음식에 질색을 했다. 그러나 나는 태연자약 그 음식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넣었다. 이 음식을 먹고 저들이 아프지 않다면 나도 아프지 않으리라.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페스티벌에 가기 위해 낙타를 타고 있는 필자. 안장에 앉는 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아바(Aba)이고, 낙타 입을 잡고 있는 사람이 낙타 조정사인 지두(Jidou)다. 낙타 타기가 처음에는 결코 쉽지 않았다.
나는 드디어 예약해놓은 호텔 사하라 패션(Hotel Sahara Passion)에 도착했다. 말이 호텔이지 실상인즉 평범한 단층집에 불과했다. 그 단층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신둑은 나를 그들의 안방으로 데려갔다. 안방이라고 해봐야 모래바닥 위에 카페트를 몇 개 얹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팀북투의 집들은 기초라는 개념이 없다. 습기가 없기 때문에 모래 위에 칸막이 흙벽돌만 쌓아 올린 것이다. 그 거실은 신둑의 아내와 자녀들의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필자와 비용과 관련한 협상을 하기 위해 호텔방에 앉아 있는 신둑. 그는 확실히 포스가 있어 보이는 인물이다.
온라인상으로 전통의 가족윤리적인 친절과 환대에 관한 뚜아렉철학을 엿듣게 된 나는 그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상당량의 선물을 잔뜩 준비해갔다. 큰 단지에 든 양질의 꿀,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약품, 뉴욕의 유기농 슈퍼마켓에서 살 수 있는 다양한 생필품을 많이 싸갔다. 나는 그것들을 꺼내 진열하면서 백 하나를 전부 비웠다. 끈끈한 가족애를 과시하리라고 확신하면서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우선 신둑의 캐나다 부인 미란다는 내가 늘어놓는 물건들을 아주 재미없게 쳐다봤다. 그 여자의 무거운 얼굴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이 지루한 땡큐를 한두 마디 뇌까렸을 뿐이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그들이 선호하는 선물이란 무조건 현금이었다. 돈은 돈이고, 선물은 선물이지 않은가?


▎아라비아 사막 한복판에서 낙타와 함께 유유히 거닐고 있는 필자. 자연과 인간이 공존의 틀 안에서 같이 호흡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신둑은 곧바로 나와 비즈니스 협상에 착수했다. 아주 완곡한 방법으로! 솔직한 비즈니스 거래라는 것은 그들의 문화에 존재하지 않은 듯했다. 핵심에 도달하기까지 아주 긴 시간 고생을 해야만 했는데, 신둑의 부인 미란다가 남편이 하는 말을 한 문장 한 문장 고집스럽게 영역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신둑은 나에게 불어로 말했고, 나는 그 불어를 완벽하게 알아들었다. 그리고 나는 불어로 대답했는데도, 그녀는 영어통역을 고집했던 것이다. 하여튼 신둑의 말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장 가는 길. 그토록 많은 사람이 올라탄 트럭을 처음 보았지만 팀북투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
“내가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당신이 보통 관광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소. 당신이 날 접촉했을 때, 나는 때마침 공교롭게도 나의 옛 친구 한 사람으로부터 소식을 들었소. 그는 사막에 사는 한 성자요. 나는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한번 방문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소. 그는 낙타와 기타 다른 동물들과 밤낮으로 같이 살면서 특별한 영력(靈力)을 획득한 대 성인의 손자요. 나는 당신을 그의 캠프로 데려가려 하오. 당신이 달성하고자 하는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반드시, 페스티벌 부근의 엉터리 캠프가 아니라, 믿을 만한 정통의 로컬 뚜아렉 캠프로 가야만 하오. 그리고 나는 당신을 항상 낙타에 태워 뚜아렉 인사이더로서 페스티벌에 데려갈 것이오. 나하고 같이 행동하면, 당신이 제시한 짧은 기간 동안에도, 나는 당신에게 보통 관광객이 1년 체류해도 못할 경험을 충분히 누리게 해줄 수 있소. 나는 나의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우연을 신의 은총으로 간주하오. 나는 내가 당신을 안내한다는 것을 상업적으로 생각하지 않소. 당신이 기증하는 모든 기금은 나의 마을의 종족이 사용하는 음식과 물 값으로 활용될 것이오.”

120달러에 바가지 쓴 뚜아렉 전통의상


▎필자가 입을 뚜아렉 복장을 만들고 있는 현지 시장의 재봉사. 옷값은 무려 120 달러가 청구됐다
신둑은 한 마을의 추장이라고 했다. 그는 한 종족부락의 추장으로서 권위를 지니고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러한 식의 화술이야말로 나에게 가능한 한 많은 돈을 긁어내기 위하여 동원된 조용한 협박이었다.

그는 돈의 액수를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곧 딜레마에 빠졌다. 과연 이 사람과 거래를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런데 이 사람은 매우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표정이나 그의 언변의 장엄한 스타일이 이 사람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비위를 건드릴 수 없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고립된 먼 지역에서의 나의 안전은 이 사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여기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 한 부락의 추장이라는 것은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 그의 애민(愛民)적 의도를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좌우지간, 신둑을 우선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현명한 처사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타주의적 의도에 관해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부인 미란다를 옆으로 끌고 가서 내가 과연 얼마를 내야 하는지 그 정확한 액수를 가르쳐달라고 말했다. 미란다는 끝내 나에게 어떠한 액수도 말하지 않았다. 남편에게 매우 굴종적인 여인이었다. 그리곤 그것은 내 예산에 달린 문제라고만 반복해서 말했다. 그녀의 그런 태도는 나를 더욱 당황케 만들었다.


▎신둑은 필자를 어느 상점에 데려가 터번을 씌워주면서 길이를 재보았다. 그랑부부도 이 집에서 처음 옷을 입어보았는데, 옷감은 모두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이날 오후 2시경, 나는 신둑과 함께 남성 뚜아렉 복장을 사기 위하여 시가지 중심에 있는 시장으로 갔다. 머리에 두르는 터번은 나의 머리를 몇 번 감아 싸는 하나의 긴 흰 천에 불과했다. 신둑은 나에게 맞는 그랑부부(Grand Boubou)라는 것을 하나 추천해주었는데, 그것도 머리와 팔을 밖으로 내놓을 수 있는 구멍이 뚫린 커다란 직사각형의 천이었다. 이것을 뒤집어쓰게 되면 사이즈가 큰 판초우의와 같은데 후드 없이 발목까지 내려뜨려진다. 그리고 신둑은 내 옷 한 벌을 만들 수 있는 푸른 옷감을 끊어 재봉사에게 맡겼다. 그것은 몸빼 스타일의 바지와 기장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소매 웃옷이었다. 신둑은 푸른색은 물과 하늘, 사막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바이탈한 두 요소를 상징한다고 가르쳐주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뚜아렉이 뭔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들의 삶으로 침투하기 위하여 그들의 독특한 의상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의상을 입고 살아보아야 비로소 조금이라도 그들의 삶의 느낌이 나에게 밸 수가 있다. 나는 평생 입어보지 못한 색다른 옷을 입었을 때 느끼는 흥분 속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한 순결한 흥분은 갑자기 물을 끼얹힌 듯 지저분한 감정으로 전락했다. 신둑이 나에게 그 옷 한 벌 값으로 미화 120달러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천도 내가 원하는 고급스러운 면소재도 아니었고, 물감도 전통적 천연염료가 아닌 싸구려 화학염료였다. 도대체 이 사막 한복판의 작은 시장에서 사는 평범한 합섬소재의 토착민 한 벌 옷값이 120달러라니,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불만을 표명했더니, 신둑은 여기 토착민이 와서 사도 같은 가격이라고 계속 우겨대는 것이었다. 원래 비싼 옷이라는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바가지였는데, 그때 나는 신둑을 믿었기 때문에 120달러라는 가격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나는 정말 순진한 아이였다.

사하라 패션에는 독방이 없었다


▎팀북투 중심가의 시장. 먼지가 날리고 소란스러웠지만 활력이 넘치는 곳이다.
내가 얼마나 순진했나 하는 것은, 그 순간에 신둑이 떠벌이는 특별한 성자에게로의 투어에 대한 특별한 ‘기부금’을 그 옷 한 벌의 가격에 기준하여 산정하면 되겠다고 결심한 것으로도 입증된다. 나는 나의 존재의 모든 용기를 불러 모아 단전에 힘을 주고, 그에게 최종적 가격을 제시했다. “어때요? 500달러!” 사실 나 같은 어린애의 입에서 “500달러”의 오퍼가 나왔다는 것은 그에게 기대 이상의 떡고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완전 교활한 장사꾼이었다. 신둑은 한참 동안 심사숙고하는 척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대답했다. “오케이! 합의본 것으로 합시다! 600달러!” 아~ 그 마지막 순간에 또 100달러를 올리다니,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나의 적나라한 본성 속에서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나는 양순한 얼굴로 “오케이!” 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내가 주는 돈으로 그의 마을에 1톤의 수수를 보낼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언약을 믿기로 했다. 나는 실상 돈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내가 짠 예산으로 사는 가난한 예술가라는 것을 설득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팀북투는 지난 몇 달 동안 관광객이 급격히 감소하여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단신으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나의 편이 아무도 없었다. 내 말을 거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곳의 사람들에게 나는 걸어다니는 ATM, 즉 자동현금인출기로 보일 뿐이다.

이날 뮤직 페스티벌에 가기 전에 나는 내가 묵을 곳과 화장실을 점검해야 했다. 나는 독방을 요구했다. 그런데 사실 이사하라 패션에는 독방도 없었다. 단층건물에 여러 침대가 들어있는 한 방의 합숙시설만 있었다. 그들은 나를 지붕에 설치해놓은 텐트로 데려갔다. 그것이 나의 독방인 셈인데, 화장실을 쓰기 위해서는 불가불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그 합숙시설 방에는 아주 심술궂게 생긴 늙은 네덜란드 관광객이 투숙하고 있었다. 그 더치 노인은 내가 화장실을 쓸 때마다, 문을 쾅쾅 치면서 나를 좌불안석케 만들었다. 내가 너무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다는 것이다. 두루마리 휴지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나는 바마코에서 두루마리 휴지 하나를 집어왔던 것이다.


▎페스티벌로 가는 길. 필자가 낙타 안장 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저 멀리 페스티벌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 깨알처럼 보인다.
팀북투에서 맞이한 첫 밤, 나는 페스티벌에서 매우 늦게 돌아왔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 화란인 노인네가 그의 방문을 아예 잠가버려서, 그 방 안에 있는 화장실로 갈 길이 차단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원에 설치된 옥외변소를 써야만 했다. 물론 전등이 없어 캄캄했다. 그런데 그 변소는 땅바닥에 플라스틱 파이프를 하나 박아놓고 흙벽돌만 둘러친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천정이 없었기 때문에 별이 쏟아졌다. 파이프는 직경이 15㎝ 정도 되는 작은 구멍이었으며 옆으로 두 개의 널빤지가 놓여있기는 해도 모든 것이 동일평면상에 있었다. 그리고 구멍이 벽 쪽으로 치우쳐 있어 쭈그려 앉기도 불편했다. 이것은 여성의 소변방식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괴이한 구조였다. 똥을 눌 때와 오줌을 눌 때 몸을 움직여가면서 구멍에 조준을 해야 하지만, 그 조준이 빗나갈 확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변소바닥 전체가 지린내가 진동한다는 사실로 추론하건대 완벽한 조준은 애초부터 요구 사항이 아닌 듯했다.

이 사건은 나에게 변소마루와 똥통이 층별로 분리되어 있는, 같은 원시상태이지만 정갈한 우리나라 옛 변소의 위대함을 상기시켰다. 똥통이 따로 있고, 그 똥 위에 재를 뿌려 냄새와 벌레를 제거하고 퇴비를 생산했던 우리 변소는 ‘생명의 순환’이라는 에코 시스템을 전제로 한 예지의 소산이다. 그러나 사막에서는 농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퇴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똥이나 오줌이나 나의 몸으로 배출되는 순간, 나에게서 단절되는 것이다. 나에게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 파이프 속은 단절의 구멍일 뿐이다. 서구인들의 사유의 일방성·절대성·타자성·신비성·초월성이 모두 이러한 사막의 삶의 양식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구멍 속이 지옥이든 천당이든 그것은 모두 단절적 사유의 소산일 뿐이다. 순환 그 자체가 궁극적 신비라고 하는 사유가 사막에서는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페스티벌에서도 변소의 사정은 나을 게 없었다. 단지 나의 불평을 들어줄 수 있는, 체험을 공유하는 국제사회의 참석자들이 있어서 좀 마음이 편했다. 나는 곧 캐나다, 미국, 유럽, 뉴질랜드에서 온 몇몇의 음악가와 친구가 되었다. 며칠 동안 토착민들과 혼자 씨름하다가 내 곤궁을 이해할 수 있는 동질의 인간들을 만나 푸념을 늘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이고 삶의 위로인지, 그런 정황을 처음 느껴본 것 같다. 올해만 해도 아프리카 외부로부터 오는 국제참석자들은 테러리스트 납치사건들로 인하여 반으로 절감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300명 정도가 참석했다. 그리고 이 모래언덕에 모여든 지역 사람들과 여타 아프리카 국가에서 온 사람들은 6000여 명에 이르렀다.

뚜아렉 복장으로 낙타를 타고 등장했던 페스티벌


▎여성의 소변 방식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괴이한 구조의 옥외 변소.
방문객의 대부분은 음악가였고, 음악과 관련된 기술진이었고, 음악평론가,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었다. 사흘 동안 열린 페스티벌의 오후마다 나는 매번 뚜아렉 복장으로 낙타를 타고 등장했다. 처음에는, 그러한 복장을 입고 낙타를 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곧 딱딱한 나무 안장과 덜거덕덜거덕 하는 폭이 큰 낙타의 동작리듬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복장의 거추장스러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비디오를 찍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다. 긴 겉옷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머리는 이집트의 미라처럼 싸 둘러맨 채, 모래 위를 걷는다는 것도 과히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뚜아렉 의상을 하루 종일 입는다는 나의 고집도 어리석은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문명을 체험과 순응을 통하여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토착민 남장은 나에게 많은 실리를 가져다주었다.

자유롭게 군중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비디오를 돌려대도 아무도 나에게 시비 걸거나 주목하는 자가 없었다. 나의 얼굴 전체가 항상 가려져있기 때문에, 나의 존재는 군중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갔다. 경비경찰도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외국인들이 신청하면 주는 외신기자 배지도 나는 마지막 날까지 찰 필요가 없었다.


▎푸른색 뚜아렉 복장을 입은 필자. 처음에는 좀 어색했지만 자유롭게 군중 사이를 돌아다니기에는 편한 복장이었다.
며칠 동안의 수없는 연습을 통해 나는 내 머리 터번을 나 홀로 거울을 보지 않고 두르르 말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때부터인가 지나가는 남자들을 보면 터번만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감았으며 어떤 옷감을 사용했는지를 파악하게 되었다. 내가 뾰족구두를 사려고 하면 맨해튼 전체에 깔려있는 것이 뾰족구두를 신은 여자인 상황과 비슷하다.

석양이 깔리면 음악공연이 메인 스테이지에서 시작된다. 그러면 관중석은 지역 젊은이들로 꽉 들어찬다. 뚜아렉족, 쏭하이족, 풀라니족, 그리고 내가 구별할 수 없는 많은 다양한 종족이 모여 환호했다. 뚜아렉과 쏭하이가 팀북투에 사는 인종의 대표적 그룹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양한 언어를 말한다. 말리국에서만도 40여 개의 다른 아프리카 언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뚜아렉족만은 여타 종족으로부터 쉽게 구분된다. 예외 없이 터번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상 밖으로 뚜아렉의 여성들은 그렇게 무거운 두건으로 치장하지 않는다. 얇은 천 하나로 머리를 살짝 가리고 얼굴은 편하게 노출시키며, 머리카락도 부분적으로는 드러나 있다. 이것은 뚜아렉족이 본질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에 예속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뚜아렉의 남성이 입을 가려야만 하는 이유


▎아프리카 최고의 록밴드 티나리원의 모습. 맨 앞에 앉은 사람이 그룹의 리더 이브라힘 아그 알하비브다. / 사진제공·티나리원, 촬영·Thomas Dorn
그들은 7세기 움마야드 칼리프(Umayyad Caliphate)가 도착해서 이슬람으로 전향하기 전에는 베르베르족 신화(Berber mythology)에 기초한 자기 고유의 제식과 습속과 장례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티피나그(Tifinagh)라고 하는 고대문자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뚜아렉이 이슬람문화를 아프리카대륙 북부에 전파하는 데 공헌하기는 하였지만 상당히 여유롭게 무슬림의 제식들을 받아들였다. 특히 여성들은 그들의 고유한 모계사회 풍속, 여신숭배, 땅의 경배, 월경문화, 풍요의 제식 등을 고수했다.

뚜아렉의 남성들은 터번을 이마에 여러 번 감고 반드시 입을 막고 얼굴 전체를 둘러싼다. 공적인 상황에서는 항상 그들의 눈만 빼꼼이 보일 뿐 전체가 가려져 있다. 신둑의 설명에 의하면 남성이 입을 가려야만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남자의 입술은 여자의 젖꼭지만큼이나 섬세하고 섹시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것을 항상 부드럽고 아름답게 간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남자들은 진리만을 말해야 하므로 말을 줄이기 위해 입을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이유의 허황함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나중에 첨가된 이론인 것 갈다. 하여튼 자기들의 풍속을 외부인에게 신비롭게 만들기 위하여 고안된 설명인 것 같은데, 남성의 입술을 여성의 성감대와 동일한 그 무엇으로 감지한 몸의 인식체계는 그 나름대로 누적된 문화적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페스티벌에서 공연된 음악들은 모두 나에게는 생소한 것들이었다. 나는 말리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 문화를 조사해보기 위한 숙제의 일환으로 티나리원(Tinariwen)이라 불리는 한 밴드의 노래 몇 개를 들은 적은 있다. 티나리원은 뚜아렉족의 토착적 밴드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가장 유명한 록 그룹이다. 아마도 아프리카대륙의 뮤직 그룹으로서는 가장 잘 알려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명성은 이 그룹이 제54회 그래미상(Grammy Awards: 아카데미상이 영화에 주어지는 상이라고 한다면, 그래미상은 음반에 주어지는 상으로서 영어문화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1회상은 1959년 5월 4일에 있었고, 제54회 그래미상은 2012년 2월 12일에 있었다) 중에서 베스트 월드뮤직 앨범상을 받았다는 사실로 써도 입증된다.


▎비틀스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진 세기적인 록밴드 유투(U2)의 보노가 이 페스티벌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은 뜻밖의 사건이었다. 보노는 단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았다.
여기 ‘월드뮤직(World Music)’이라는 말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월드뮤직’은 “세계음악”이라는 일반 명사가 아니다. 영어문화권에서 ‘월드뮤직’은 하나의 음악장르를 가리키는데, 우리가 보통 ‘민속음악’이니, ‘포크뮤직’이니, ‘토착음악’이니, ‘전통음악’이니 하는 따위의 말을 많이 쓰는데, 그런 모든 함의를 아우르는 말이다. 서구세계에 국한되지 않은 ‘전 세계’에 어디든지 그 토착적 음악이 있게 마련 이라는 의미로 ‘월드뮤직’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이다. 이 말은 1960년대 초 민속음악자인 로버트 브라운(Robert E.Brown, 1927~2005)에 의하여 최초로 발명되어, 1980년대부터 비서구 전통음악을 지칭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하여튼 월드뮤직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쓰는 민속음악이나 전통음악보다는 더 진취적인 개념인 것 같다. 그런데 월드뮤직에서 대체로 강세를 보이는 것은 아프리카 음악이다.

티나리원은 1979년 알제리아 타만라세트(Tamanrasset)에서 결성되었는데, 그 시조가 되는 인물인 이브라힘 아그 알하비브(Ibrahim Ag Alhabib)는 네 살 때 뚜아렉 반란지도자였던 아버지가 1963년 말리항거에서 처형되는 것을 목도하였다고 한다.

어린 아그 알하비브는 주석 깡통과 자전거 브레이크 와이어를 모아 자신의 기타를 제조했는데, 그는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어느 미국의 서부영화에서 기타로 싸우는 주인공의 이미지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그는 평생 권총 대신 기타로 싸우는 사막의 자유투쟁 용사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뚜아렉 종족의 전설이 되었다.


▎한밤중의 페스티벌의 열기는 뜨거웠다. 아프리카 음악의 다양성과 위대함을 느끼게 해준 멋진 공연이 펼쳐졌다.
그들의 음악은 ‘사막블루스(desert blues)’라는 장르로 분류되는데, 처음 들을 때는 단순한 전통 음악적 멜로디의 구성이 그렇게 파워풀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중독성의 매혹에 빠져들어간다. 실상 그들의 음악은 문화적으로 매우 복합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토속적 멜로디와 음색으로 노래 부르며 꼭 전통적 의상을 입고 연주한다. 그런데 또 미국의 현대적인 블루스록 스타일의 음악을 일렉트릭 기타로 연주해댄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그들의 음악에 대한 동경이 어렸을 때는 엘비스 프레슬리로 시작했고, 결국에는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1942~1970)의 광팬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좀 김이 샜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미국의 블루스라는 독특한 음악형식이나 느낌이 바로 아프리카의 이 지역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지미 헨드릭스의 광기나 또 그 광기를 흉내 낸 티나리원의 리듬은 돌고 도는 문명사의 한 고리일 뿐이라는 아이러니를 되씹어보게 된다. 페스티벌에 등장한 연주자들은 실로 재미있는 그룹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본시 음악에 나의 관심의 초점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 관하여 자세한 메모를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여튼 나는 그때 페스티벌 참가를 통해 아프리카 음악의 현주소, 그 다양성과 위대함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

오후가 되면 축제는 낙타 레이싱으로부터 시작하여 아주 여유로운 토속춤의 향연이 계속된다. 그리고 메인 음악공연은 저녁 7시 반에 시작하여 새벽 2시에 끝난다. 마지막 날만 티나리원이 피날레를 장식했기 때문에 새벽 3시까지 주공연이 지속되었다. 공연된 모든 음악의 절반 가량이 뚜아렉 음악이었고, 나머지 반은 국제적 음악이었는데 대부분 아프리카 대륙의 인접한 다른 나라에서 온 것들이었다.

나에게 인상 깊게 기억된 사람으로는 말리의 그리오(griot:전승되어 오는 민담 시인) 음악인 아브둘라예 디아바테(Abdoulaye Diabate, 1956년생의 음유시인이며 기타리스트)가 있다. 풍부한 성량으로 판소리처럼 계속 뇌까린다.

유투(U2)의 보노가 나타났다!


▎페스티벌을 즐기기 위해 모인 청중 속에서 필자를 쳐다보며 웃음짓는 귀여운 뚜아렉 소년.
마틴 스콜세지가 ‘블루스의 원조 DNA’라고 규정한 말리의 전설적 가인이며 기타리스트였던 알리 파르카 뚜레(Ali Farka Tour, 1939~2006)의 아들인 뷰 파르카 뚜레(Vieux Farka Tour, 1981년 생)의 기타와 노래도 퍽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말리의 솔로 싱어이자 송 라이터이며 탁월한 기타리스트였던 하비브 쿠와떼(Habib Koit, 1958년 생)도 출연하였는데, 그의 음악은 내 귀에는 거의 스페인풍의 플라멩고(집시의 춤에서 유래)처럼 들렸다. 하여튼 이 모든 음악인은 한결같이 달인이었고 고유한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정말 놀라게 한 것은,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진 것처럼 예고 없이 나타난 세기적 거물 유투(U2)의 보노(Bono, 본명은 Paul David Hewson, 1960년 생)의 출현이었다.

20세기 팝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비틀스를 뛰어넘는 유일한 록그룹으로서 많은 사람이 유투를 꼽는다. 비틀스는 1960년 영국 리버풀에서 결성되어 10년 만에 깨져버렸지만, 유투는 1976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결성되어 오늘날까지 40여 년 동안 그 오리지날 멤버가 유지되고 있으며, 그 리더인 보노는 의미 있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비틀스는 가볍고, 귀엽고, 일상적이고, 내성적이지만 유투는 무겁고, 다면적이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를 계속 뽑아내고 있다. ‘원(One)’이라는 노래는, 가사의 추상성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다양한 개인적 해석을 내리고 있지만, 그 핵심은 동·서독의 통합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동구라파의 몰락도 인류는 하나라고 하는 박애정신 속에서 품에 안아야 한다는 함의를 안고 있다. 파바로티와 같이 부른 ‘미스 사라예보(Miss Sarajevo)’도 보스니아 내전을 견디어 내는 사람들의 참혹한 삶의 실상을 아주 추상적인 아름다운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보노는 세계사적 우환의식을 지닌 액티비스트이며, 진정한 진보정신의 예술가이며, 또 박애주의를 실천하는 자선사업가이기도 하다.

그러한 보노가 이 사하라 사막의 모래언덕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는 무대 위에서 “투우~ 투우~ 팀북투”를 계속 반복하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는 실상 아무런 준비를 해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노래보다는 기부를 하기 위해 온 것 같았다. 그가 만든 자선재단은 아프리카의 질병이나 가난의 퇴치를 위하여 매우 조직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팀북투에서 나의 둘째 날 아침, 나는 합숙방에 딸린 변소를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누군가 그 합숙방 전체를 단일 유니트로 하여 전용권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나는 그 방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것은 결국 양변기를 쓸 수 없음은 물론이고, 비록 얼음처럼 차디차기는 하지만 샤워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내고 또 정성스럽게 선물까지 주었는데 나를 옥상 위 텐트로 뻥 차버리다니! 나는 텐트 속에서 내가 챙기고 온 슬리핑백을 써야만 했고, 잘 때도 추워서 재킷을 입고 자야 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옥외 변소를 써야만 했다. 나는 불평도 못하고, 하도 억울해서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에 엉엉 울고 말았다.

최근까지 내가 사귀던 남자는 돈이 많은 사업가 집안의 막내였는데, 카드로 쓰는 돈은 돈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자기 아버지가 자기 하는 일에는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스위밍 풀과 사우나가 딸려있는 5성급 이상의 호텔이 확보되지 않으면 여행할 꿈도 꾸지 않았다. 몇 주 전만 해도 나는 그 남자와 비싼 호텔과 식당만을 골라 다녔다. 최근 상하이 그랜드 하야트 82층 스위트에서 퍼질러 자고 먹곤 했던 그 고급스러운 안락의 이미지가 나의 의식에 번뜩였다. 그러나 옥외 변소간의 문을 여는 순간, 그런 백일몽은 허망하게 스러지고 만다. 누적된 지린내의 콱 쏘는 냄새가, 파리가 앉아있는 내 얼굴을 화악 덮어버렸던 것이다.

변소만이 나의 유일한 불편은 아니었다. 마당에서 제공되는 음식 또한 고행의 하나였다. 식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마당의 큰 모래박스 한켠에 낡아빠진 카펫을 깔아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 위에 큰 쟁반이 하나 놓이는데 쟁반 속에는 항상 쌀밥이나 곡식 모양의 파스타(수제비라고 생각하면 족하다)가 올리브 오일이나 다른 양념과 비벼져서 수북이 쌓여있다. 그 밥 위에는 태양에 몇 날 며칠을 말려지느라고 파리로 덮여있던 양고기가 요리되어 얹혀져 있다.

음식을 먹으며 만트라를 중얼거리다


▎필자는 현지인이 먹는 거친 음식을 똑같이 먹었다. 그럼에도 여행 기간 내내 위장에 탈이 생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직 하나의 쟁반만 놓이게 되면 그 집에 속한 모든 사람이 둘러앉아 손으로 꾹꾹 눌러 집어 먹는다. 물론 자기 접시도 없고 한 쟁반 내의 같은 음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가장 많이 쓰이는 향료는 내가 잘 알 수 없는 잎사귀를 말려 간 것인데, 꼭 걸레를 씹는 맛이었다. 짐짐하고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진짜 오묘한 팀북투의 향료는 모래였다. 모든 음식에 모래가 안 들어있는 상황은 전무했다. 내 입안에서 지금지금 거리는 모래, 그리고 걸레 같은 맛이 나는 스파이스, 그리고 꾸득꾸득 말라빠진 양고기의 역한 냄새가 뒤섞여 나의 후각을 자극할 때 처음에는 정말 구역질이 나서 바로 토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태연자약 웃기까지 하면서 한참 씹은 음식의 복합체를 꾸욱 목구멍 아래로 꾸겨 넣었다. 나는 티베트 승려들처럼 계속 만트라를 중얼거렸다.

“저들은 아프지 않다. 저들과 한 상, 한 그릇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 나 또한 아프지 않을 것이다.”

만트라 덕분일까? 나는 아프지 않았다. 여행 전 기간 동안 나는 위장이 뒤틀리거나 설사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비샤야 비샤야 스바하!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201707호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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