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7)] 조선의용군의 근거지였던 타이항산을 가다 

“왜놈 상관 쏴 죽이고 조선의용군 찾아오시오” 

글·사진 윤태옥 다큐멘터리 제작자, 작가
김원봉과 젊은 항일 영웅들, 1938년 독립군 부대 창설… 곳곳에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 흔적, 그날의 결기 생생

▎타이항산에는 조선의용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타이항산은 베이징의 시산에서 허난성·산시성에 걸쳐진 위우산까지, 남북으로 400여㎞에 이르는 산맥이다.
조선의용군의 흔적은 타이항산(太行山)에 많이 남아 있다. 창설 당시 조선의용대란 명칭은 타이항산 시절에 조선의용군으로 바뀌었다(1942년 7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도, 일본군 점령 지역을 드나들면서 지하 활동을 전개하던 중심지도 바로 이곳이었다.

타이항산은 베이징의 시산(西山)에서 허난성(河南省)·산시성(山西省)에 걸친 위우산(玉屋山)까지, 남북으로 400여㎞에 달하는 산맥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깊어 중국의 전통 북방 산수화가 타이항산에서 태어났다고 할 정도로 절경이 많다. 타이항산의 서쪽으로는 해발 800m 이상의 황토고원이 시작되고, 동쪽은 해발 평균 50m의 화북평원이 펼쳐진다. 타이항산의 동서에 있다고 해 산둥성(山東省)이고 산시성이다.

아직은 추위가 남아 있던 겨울 끝자락에 상하이를 거쳐 항공편으로 허베이성(河北省)의 수도 스자좡(石家庄)으로 갔다. 중국에서도 공기가 가장 나쁜 곳으로 꼽히는 도시다. 자연이 만들어 내는 연무(煙霧)와 사람이 만들어 낸 오염이 뒤섞인 스모그가 역사를 덮은 느낌이었다.

스자좡에서 택시 한 대를 하루 동안 전세 내기로 했다. 우선 짠황현 황베이핑촌(赞皇县 黄北坪村)에 있는 조선의용군 네 전사의 무덤을 찾아보고, 그들이 전사한 위안스현 후자좡촌(元氏县 胡家庄村)을 들러서 돌아오기로 했다.

황베이핑촌은 도로변에 커다란 바위로 마을 표지를 세워놓아 쉽게 찾았다. 마을 입구에서 마주친 두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다. 답변이 참 친절하다. 마을 한복판의 좁은 길을 통과해서 뒷산으로 올라 차를 세우고는 야산을 조금 더 올랐다. 능선 위로 베이지색 정자와 그 주변의 비석들이 보였다. 전망 좋은 자리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기분이 시원해졌다.

네 개의 무덤 앞에 비석 두 개가 세워져 있다. 오른쪽이 ‘조선의용군 타이항산 지구 항일전 순국선열 기념비’고, 왼쪽은 ‘국가안위 노심초사, 전사불망 후사지사, 한중 우의 영원무궁’이라고 새겨진 추모비다. 기념비의 뒷면에는 비명이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1938년 중국 우한에서 의병 독립군 의열단의 정신을 계승하여 창군된 독립군으로서 중국 군민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 다대한 전과를 거양하였으나 희생 또한 컸습니다. 석정 윤세주, 진광화 선열 및 중국 팔로군 전선총참모장 좌권 장군, 베이징 일본군 헌병대에서 소위 군사정보정탐 죄목으로 순국한 이원대 등 금일의 대한민국과 중국의 관계를 있게 한 선열의 공훈을 기리고 한중 우의 증진을 위해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이곳 황베이핑촌에 안장된 박철동, 이정순, 손일봉, 최철호 선열의 묘소를 새로운 장소로 천묘 단장하고 본 기념비를 건립하는 바이다. 2002년 12월 26일. 대한민국 순국선열 유족회, 중국 짠황현 황베이핑촌 인민정부”

세월을 말해주는 묘비 위 흙먼지


▎조선의용군 간부와 독립동맹 간부(연안파)는 해방 4개월 뒤인 1945년 12월 초 입북했다. 연안을 출발하기 직전 조선 혁명군정학교 교관과 학생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네 기(基)의 무덤 묘비에는 그들의 일생이 간략히 기록돼 있다.

최철호는 ‘1935년 중국 망명, 1938년 조선의용군 창군요원으로 참여, 1941년 12월 26일 허베이성 싱타이(邢台) 지구의 대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 1993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라고 쓰여 있다. 이정순은 ‘1933년 망명, 의열단 간부학교 2기생으로 졸업, 1938년 조선의용군 창군 요원으로 참여’, 손일봉은 ‘1931년 망명, 윤봉길 투탄 의거 공모자의 1인으로 활동, 1940년 민족혁명당원으로 조선의용군에 입대’, 박철동은 ‘1931년 망명,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같은 해 푸젠성 취안저우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일본에서 3년간 옥살이, 옥살이 후에 다시 중국으로 망명, 1939년 조선의용군에 입대, 1941년 12월 12일 후자좡 전투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순국’이라 기록돼 있다.

이국의 시골에 묻혀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현지인들과의 교감 속에 안장됐음을 추측하게 한다. 소박하게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마다 정성이 담겨 있고, 그 위에 쌓인 흙먼지는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다.


▎황베이핑촌에 있는 박철동·이정순·손일봉·최철호 선열의 묘.
이들이 전사한 곳은 후자좡촌이다. 무덤에서 직선으로 27㎞, 차량으로 이동하면 55㎞를 가야 한다. 산을 몇 개나 넘어야 하는 곳이다. 당시 무장선전 공작에 나섰던 조선의용군과 팔로군은 중국인의 밀고로 인해 일본군에 포위당했다.

새벽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포위를 뚫고 추격도 뿌리쳤다. 그러나 네 사람이 전사했다. 일본군이 물러가자 주민들은 시신을 수습해줬다. 주민들은 시신 네 구를 타이항산 깊은 곳의 팔로군에 옮겨주려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통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중도에 매장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후자좡 전투는 중국의 소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영웅적인 전투였다. 도로 공사로 인해 이장을 해야 했다. 연고자도 없는 외국인이었으나 마을 주민한 사람이 자기 땅을 내줘 이장한 게 지금의 네 무덤이다.

당시 이 지역은 팔로군이 일본군과 맞선 치열한 전선이었다. 도시는 일본군이 장악했고, 산악과 농촌에서는 팔로군이 유격전을 벌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주야로 양측의 군대가 들고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전선에서 네 구의 시신을 수습해 산을 몇 개씩 넘은 것만 해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팔로군과 조선의용대는 현지인들의 마음을 얻고 있었다.

찬찬히 둘러보고는 차를 돌려 후자좡촌으로 갔다. 해는 중천에 떠 있었으나 안개비까지 내린다. 속도를 낮추고 한 시간 넘게 가야 했다. 후자좡촌은 타이항산 능선을 향해 서쪽으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산길에 있었다.

후자좡촌 전투 기념비도 도로 옆에 설치돼 있어 찾기 쉬웠다. 세 개의 비가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후자좡 전투 기념비이고, 좌우로 두 개는 김학철과 김사량의 문학기념비였다. 전투기념비는 위안스현 인민정부가 2012년에 세운 것이다. 비명은 중국어와 한글 두 가지로 쓰여 있었다. 전투를 잘 설명하고 있었다. 그 옆에 김학철 문학기념비가 있었다.

김일성·마오쩌둥의 독재에 반대했던 김학철


▎김원봉·박차정 부부. 박차정은 1931년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해 의열단 핵심 구성원으로 활약했다. / 사진제공·여성가족부
1941년 12월 12일
새벽 일본군의 기습 포위공격
어둑한 골짜기, 자욱한 총소리
그날, 조선의용군 네 전사
그들을 구하려던 팔로군 열두 청년
이곳에서 전사하였거니
이 보리밭 머리에
태항산의 돌을 깎아 비를 세우노라.
위안스현 인민정부, 중국 옌볜작가협회,
한국 실천문학사 김영현
2005년 8월 5일

김학철은 이곳에서 중상을 입고 일본군의 포로가 됐다. 일본으로 끌려가 재판을 받았고 일제가 패망하고야 석방됐다. 그러나 총상을 당한 허벅지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다리를 하나 절단한 채 귀국했다. 그는 옌볜에서 작가로 활동했다. 김일성뿐 아니라 마오쩌둥의 독재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로 인해 큰 고초를 겪었다. 훗날 그가 남긴 회고록 <최후의 분대장>은 우리나라에서도 출간됐다.

또 하나의 문학비는 김사량이다. 김사량은 일본군에 의해 보도반으로 끌려왔다가 탈출해 팔로군 지역에 들어가 조선의용군에 합류한 청년 문학가다. 29명의 용사가 서로 엄호해 가며 내달려 올라가 진지를 잡았다는 호사산은 말이 없고 이끼 앉은 바위에는 낙엽만이 쌓여 있었다. 1945년 5월 김사량은 희생된 조선의용군 용사를 위해 <노마만리(駑馬萬里)>를 써내려 간다. [김사량(1914~1950)은 평양 출생으로 일본 동경대 졸업, 1945년 타이항산에서 항일활동, 작품으로는 <노마만리> <태백산맥> <풍상> 등을 남겼다.]

1938년 10월 10일 이곳과 800㎞나 떨어진 우한에서 창설된 조선의용대는 왜 이곳에서 전투를 하게 됐을까. 조선의용군은 조선의용대라는 이름으로 창설됐다. 총대장은 김원봉이었고, 100여 명의 대원으로 출발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단체 가운데 중도와 좌파를 거의 망라한 조선민족전선연맹 휘하의 무장대오로 창설됐다.

지휘권은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에 있었다. 지도위원회는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정치부에서 관할했다. 위원은 조선인과 중국인 4명씩, 그리고 군사위 정치부 주임 등 총 9명으로 구성됐다. 위원 구성만 봐도 한·중 연합에 의한 군사대오라는 게 확연하다. 자금과 무기는 중국이 제공했고, 운영은 조선인들이 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 합동작전을 펼치는 군대로 창설된 것이다.

조선의용대는 창설 이후 1940년 말까지 중국과 합의한 대로 분대급으로 분산돼 중국군의 각 전구(戰區)에 배치됐다. 핵심 임무는 최전선에서 정치 선전이었다. 그러나 실질 임무와는 달리 조선의용대는 전투부대가 돼 화북을 거쳐 만주로 북상하고자 했다. 이를 동북노선이라 한다. 화북과 만주에 조선인이 많았고 그들을 기반으로 전투력을 확대해 조국으로 진군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동북노선이 아니라 관내의 정치 선전에만 투입되자 의욕이 쇠퇴했고, 장제스의 항일 의지에 대해서도 회의(懷疑)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삼국동맹을 맺자 미국·영국이 중국을 끌어당겼고, 국민당 정부는 미·영의 후원에 기대면서 반공으로 다시 우경화하기 시작했다. 충칭(重慶)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박해가 암암리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도와 좌파를 아우른 조선의용대를 국민당 지구에 그냥 둘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국공합작이 깨지는 순간 국민당에 충성 맹세를 하지 않은 진보적 인사들은 도륙당할 위험이 있었다. 1927년 4월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1차 국공합작을 깼을 때, 상당수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죽임을 당했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국공합작 깨지자 타이항산으로 들어가


▎우즈산 조선의용군 유적지. 조선의용군은 주로 깊은 계곡에서 활동하며 조국 해방을 위해 힘썼다.
조선의용대의 하부에서부터 전위동맹 계열의 대원들이 동북 노선을 다시 제기했고,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주력이 비밀리에 북상하는 것을 승인했다. 각 지역에 분산돼 있던 조선의용대는 1941년 초부터 뤄양(洛陽)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국민당 군대에 들키지 않고 팔로군 지역으로 넘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김원봉과 본대는 충칭에 그대로 남기로 하고, 조선의용대 주력 80여 명은 그해 6월 황하를 건너 타이항산 지역의 중국 공산당 팔로군 지역으로 무사히 진입했다. 조선의용대의 일부 30여 명은 최창익이 주도해 이미 1939년 옌안을 거쳐 타이항산 지역에 와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조선의용대를 자신들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으로 생각하고 상당히 공을 들였다. 충칭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조선의용대의 북상을 김원봉에게 적극 설득하기도 했다.

조선의용대는 이곳에서 40일간의 대토론을 거쳐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1구대, 2구대를 화북지대로 개편했다. 조선의용대가 충칭의 본대의 지휘를 받는 형식은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주도권이 김원봉에서 진광화·최창익 등 사회주의 운동가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1942년까지 무장선전과 치열한 전투 그리고 일본군 지역에서의 조선인 지하조직 활동이 전개됐다. 무장선전 수행 중에 바로 이들 4인이 전사하고 김학철이 부상당한 후자좡 전투가 발생했던 것이다.

1942년 5월 일본군의 대대적인 팔로군 소탕전을 벌이는 가운데 팔로군 지휘부와 조선의용대가 포위되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조선의용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여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팔로군 참모장 쭤취안(左权)과 조선의용대 진광화·윤세주가 전사했다. 조선의용대 지휘부였던 진광화와 윤세주에 대해 팔로군은 성대한 추모대회를 열었고, 후자좡 전투는 중국의 소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공산당 측에서 큰 의미를 부여했다.

두 사람의 묘는 허베이성 남부의 한단시(邯郸市) 열사공원에 있다. 스자좡에서 한단까지는 고속열차로 이동했다. 시속 300㎞로 달리니 30분 조금 넘어 도착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한단, 어둑해지는 시간이었으나 숙소에 배낭을 던져놓고는 진지루위(晋冀鲁豫) 열사능원을 찾아갔다. 진지루위는 각각 산시·허베이·산둥·허난 네 개 성의 약칭이다. 1949년 신중국이 성립한 이후 최초로 세워진 대형 열사능원이다.

진지루위 열사능원은 남원과 북원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북원에는 이 열사능원의 주인공인 쭤취안 팔로군 총참모장의 기념관과 묘가 있다. 쭤취안 묘 양옆으로 잘 꾸며진 6기의 묘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진광화(1911~1942)다. 상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묘비명에는 김창화라는 본명으로 시작해 서른두 살에 전사한 젊은이의 일생을 기록해 두고 있다. 진광화는 조선의용대가 북상해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온 다음 조선의용대의 정치위원이 됐다. 그리고 1942년의 일본군의 소탕전에서 전사했다.

“원명 김창화, 평안남도 대동군 1911년 출생, 1931년 국내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반일 정열로 중국에 유학, 1937년 광저우에서 중산대학 교육계를 졸업했다. 한국국민당 조선청년전위단과 중국청년항일동맹에 참가했고, 1936년에 중국 공산당에 참가했다. 38년에 화북 타이항산 항일 근거지에서 중공 북방국 진기로예구 당부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았다. 1941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창설하고 영도했고 1942년 5월 28일 타이항산 반소탕전에서 산시성 볜청 화위산(花玉山)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진기로예 변구의 당정군민과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열사의 공적을 기억하면서 묘를 쌓고 비를 세우고 잊지 않고자 한다. - 중화민국 31년 10월 10일”

윤세주(1900~1942)의 묘는 진지루위 열사능원의 남원에 있는 인민해방군 열사묘역에 있다. 가로 1m 정도 되는 비에, 세로 3m는 됨직한 석판으로 덮은 묘가 예사롭지 않다. 윤세주는 김원봉과는 생가부터가 앞뒷집인 고향 형제와 같은 사이였다. 둘 다 의열단 창단에 참여했다. 윤세주는 창단 직후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다가 검거되는 바람에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1932년 이육사와 함께 난징으로 가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로 교육을 받았다. 육사는 귀국했고, 윤세주는 난징에 남아 군정학교 2기의 교관을 맡았다. 이후 민족혁명당을 거쳐 조선의용대에 이르기까지 김원봉의 복심이라 할 정도로 좌우합작 운동이나 의용대 창설 작업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지금도 윤세주를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열사능원의 기념관에도 두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반소탕 전에 희생된 간부들을 소개하면서 ‘걸출한 국제주의 전사’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의 전사 경위를 알려주고 있다. 1942년 7월 18일자 신화일보의 관련 기사도 전시돼 있다.

‘마지막 주둔지’였던 윈터우디촌


▎조선의용군의 핵심이었던 윤세주의 구묘. 석판으로 만든 묘가 이색적이다.
필자는 다시 길을 이어갔다. 한단시에서 버스를 타고 서쪽으로 80여㎞를 가면 서현(涉县)이다. 이 서현에 북북서 방향의 산시성 쭤취안현(左权县, 쭤취안을 추모해 그의 이름으로 개칭한 지명)으로 가는 213번 성도를 따라 가면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의 사적지들을 연이어 만날 수 있다. 조선의용군 주둔지 두 곳과 군정학교 유지 그리고 팔로군의 총부 기념관과 129사단 구지 등이다.

윤세주와 진광화가 전사한 곳을 먼저 찾아가기로 했다. 두 사람이 전사한 곳은 헤이룽둥(黑龙洞)과 좡쯔령(庄子岭)이라고 하는 타이항산의 깊고 깊은 산골이다.

1942년 봄 일본군은 황협군(일본의 중국 괴뢰정부 군대)과 함께 대대적인 팔로군 소탕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213번 성도를 따라 남진하면서 5월 24일 마톈(麻田)에 있는 팔로군 총사령부를 삼면에서 포위했다. 팔로군 총사령부는 뤄루이칭(罗瑞卿)이 지휘하는 경위부대 이외에는 비무장이었다.

조선의용군도 마톈에 가까운 윈터우디촌(云头底村)에 100여 명의 전투원과 40여 명의 비전투원이 집결해 팔로군 총사령부와 함께 동남쪽의 볜청 방향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폭격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의 추격으로 팔로군 총사령부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조선의용대의 박효삼 지대장이 뤄루이칭에게 전투에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조선의용대는 서쪽에서, 경위부대는 동쪽에서 각각 고지를 점령해 적을 막고 비무장 대오를 이동시켰다.

쭤취안 팔로군 총참모장이 스쯔령이란 산등성이에서 폭격을 당해 전사했다. 계속 탈출로를 열어가던 두 전투부대는 헤이룽둥에서 일본군과 조우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조선의용대는 조선인 비전투 대오 호위하고 볜청진 북동쪽의 화위산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4개 조로 나누어 움직이기로 했다.

5월 28일 아침 윤세주·진광화·최채 세 사람은 김두봉과 여성 대원 등 자기 조의 비무장 인원을 숲에 숨게 하고 적정을 살피다가 일본군에 발각되고 말았다. 세 사람은 비무장 대오를 숨기기 위해 숲에서 뛰쳐나와 좡쯔령 산비탈을 향해 질주했다. 최채는 산비탈 위로, 윤세주는 중턱으로, 진광화는 아래로 각각 흩어져 뛰었다. 적의 총격은 분산되고 추격전이 벌어지면서 비무장 대오는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진광화는 총에 맞고 벼랑에서 추락해 전사했다. 윤세주는 허벅지에 총을 맞고 쓰러졌고, 최채는 산 위의 작은 석굴에 은신했다. 일본군은 물러났고 비무장 대오는 무사했다. 다음날 최채가 중상을 당한 윤세주를 찾아내 좡쯔령의 움집에 뉘었다. 일본군의 수색이 계속되는 바람에 최채는 밤에만 움집으로 와서 윤세주를 간호했으나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6월 1일 저녁에 움집을 다시 찾았을 때 윤세주는 움집을 나와 다락밭으로 굴러 떨어진 채로 발견됐다. 그렇게 전사한 것이다. 최채는 근처의 마른 땅을 손으로 헤치고 시신을 수습했다.

서현에서 택시 한 대를 전세 내어 아침에 출발했다. 213번 성도를 타고 북으로 가다가 청진(偏城镇)으로 빠졌다. 그다음 산길을 넘고 넘어 칭타촌(青塔村)을 거쳐 다옌촌(大岩村)을 지났다. 이곳부터는 차 두 대가 교행하기도 힘든 산길이었다. 그 끝에 다다르면 좡쯔링 풍경구란 허름한 패루가 나온다. 그 안에는 여름에나 피서객 몇몇이 올 것 같은 민박집 몇 개가 있는 계곡이다.

주차장에서부터 걸어서 산의 능선을 타고 올랐다. 이 능선 어디선가 윤세주가 죽었다. 죽어가는 시간이 긴 것도 고통이요 불행이다. 윤세주는 총상을 입고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하다가 밖으로 기어 나와 다락밭에 떨어져 절명했다. 좡쯔령의 황량한 산길에서 전사 상황을 상상해보면 더욱 가슴이 미어진다. 나라를 망쳐서 잃어버린 것은 누구이고, 그걸 되찾겠다고 목숨을 던지는 건 누구란 말인가.

인민해방군 군가 작곡한 정율성 고거(故居)도


▎조선의용군의 마지막 주둔지였던 윈터우디촌.
진광화·윤세주가 전사하고 그해 7월 조선독립동맹(화북조선 청년연합을 확대 개편한 후신)과 조선의용군이 공동으로 열사 추도대회를 열었다. 7월 말에는 중국 공산당 중앙이 직접 나서서 조선의용대 7인의 열사를 기념하도록 하달했다. 이에 따라 9월 18일 타이항산 모처에서는 합동장례식을 치렀고, 다른 지역에서는 열사들의 공적을 보고하고 3분간 묵도를 했다. 이들의 생전 경력과 공적을 학교 교재에 싣고 전사교본을 만들도록 했다.

팔로군 총사령부의 지시로 윤세주·진광화·쭤취안·하윈(신화일보 사장) 등의 유해를 함께 수습해 서현 스먼촌(石门村)의 롄화산(莲花山) 뒷산에 이장했다. 1942년 10월 10일 안장식 또한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들은 한단시 진지루위 열사능원으로 1950년 다시 이장됐고, 지금은 빈 묘지가 원래대로 남아 있다. 좡쯔령에서 돌아오는 길에 스먼촌을 들러 진광화·윤세주의 구묘를 찾았다. 석판으로 만든 묘가 특이하다.

다음날은 서현의 남쪽 우즈산(五指山)으로 갔다. 이곳 역시 타이항산의 일부이고 풍경구로 조성돼 있다. 풍경구 안에 조선의용군 구지(舊址)가 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의 고거(故居)도 있다.

구지 진열관에는 정율성이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타이항산의 조선의용군 유적지를 답사한 베이징의 한국 유학생 단체 사진도 전시돼 있어 당시의 항일 공동전선과 오늘의 한·중 문화교류를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다. 윤세주와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시는 한단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매년 답사단을 보낸다. 이들 답사단 사진도 눈에 띄었다.

우즈산 가는 길에 난좡(南庄)이란 마을이 있다. 마을 중앙 광장에 중조우의기념대라는 무대도 설치돼 있다. 조선의용군 총부와 조선독립동맹이 이 마을에 있었고, 무정이 거주하던 집도 있다.

무정의 고거는 조선의용군의 중요한 역사를 말해준다. 조선의용군이란 명칭은 1942년 7월부터 사용했다. 이전에는 조선의용대였다. 말뜻으로야 대보다 군이 약간 더 정규군 뉘앙스가 강하지만, 그 이상의 커다란 변화가 담겨 있다. 1938년 조선의용대가 처음 창설될 때는 말하자면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였다.

이때 김원봉 이외에 영향력이 있는 또 한 사람이 최창익이었다. 조선의용대를 창설할 때 본대와 1구대, 2구대로 편성했는데, 2구대 41명은 최창익의 조선청년전위연맹 대원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다. 최창익은 1939년 일부 의용대원을 이끌고 국민당 지구를 벗어나 옌안으로 갔다. 그들은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을 거쳐 1940년 초 이미 타이항산에 와 있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타이항산 지역으로 들어가면서 이들은 최창익 등과 다시 합류했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화북조선 청년연합회에 가입하고, 40일간의 대토론을 거쳐 화북조선 청년연합회의 행동대라는 새로운 위상을 정했다. 1, 2, 3지대로 돼 있던 편제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통합 개편했다.

이때만 해도 조선의용대 본대는 충칭에 있었고 총대장인 김원봉의 지휘를 받는 것으로 형식상 연결은 돼 있었다. 김원봉의 복심이라고도 하는 윤세주와 같은 ‘김원봉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최창익의 조선의용대’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타이항산 지역에서 1년 넘게 팔로군과 합작해 무장선전 투쟁과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의 지하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던 조선의용대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하면서 1942년 7월 화북조선독립동맹의 무장대오라고 공식 선언했다. 이때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한 것이다. 김원봉의 복심이라는 윤세주도 전사했으니 김원봉의 영향력은 거의 끊어진 셈이다. 기존 충칭의 본대와 갖고 있던 형식적 관계도 단절된 셈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말 구호들


▎윤세주·진광화· 쭤취안·하윈 등의 유해가 묻혔던 스먼촌. 지금은 빈 묘지만 남아 있다.
1943년 또 한 번의 질적인 변화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조선의용대를 자신들의 중국 혁명을 위한 귀중한 국제정치 자산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대장정의 동지’ 무정을 타이항산에 보냈다.

무정은 1942년 8월 팔로군 포병 연대장직을 사임하고 조선 혁명에 전념하기 위해 타이항산으로 이동했다. 그는 1943년 소위 중국 공산당의 정풍운동을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적용해 조선민족전선연맹 이전부터 이어져온 최창익의 영향력을 배제해 나갔다.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이란 지위를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동방각민족반파시스트동맹(반파쇼대동맹)의 무장대오로 변경해 조선의용군에 대한 지휘권도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것으로 변경해버렸다. 김원봉에서 최창익을 거쳐 이제는 ‘무정의 조선의용군’으로 전환된 셈이다. 그 무정이 살던 집이 난좡에 남아 있는 것이다.

서현에서 213번 성도를 타고 북으로 33㎞ 정도 가면 허베이성을 벗어나 산시성 쭤취안현의 윈터우디촌(雲頭低村)이 있다. 조선의용군 화북지대가 머물렀던 곳이다. 마을 입구에 2002년 세운 ‘조선의용군 타이항산지구 항일전 순국 선열전적비’가 있다.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와 좌권현 인민정부가 함께 세운 것이다. 대한민국과 중국의 국기도 함께 새겨져 있다.

마을 입구의 허름한 민가 한 채에 조선의용군 구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 집에 특별한 전시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 할머니가 열쇠를 갖고 있어 관람객이 오면 문을 열어주는 정도다. 막상 시골집 중앙의 정방에는 재신상을 모시고 있으니 문패만 조선의용군이고 내용물은 서낭당이라고나 할까.

윈터우디촌 남쪽 끝으로 가면 담장에 조선의용군 시절 담장에 써놓았던 우리말 구호가 아직도 남아 있다. 새로 덧칠을 해서 선명했다. 우에서 좌로 가는 횡서로 써놓은 터라 뒤집힌 것 같아 보이지만 당시의 작풍이 느껴지기도 한다.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는 것도 있고 “왜놈의 상관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라는 구호도 있다.

윈터우디촌에서 조금 더 북으로 올라가면 마텐에 팔로군 전방총사령부 구지가 있다. 1941년부터 45년까지 사령부가 있었던 곳을 기념관으로 조성한 것이다. 마텐에서 다시 북쪽으로 15㎞ 정도 가면 상우촌(上武村)이 있다. 이곳에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주둔 기념비와 순국선열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1943년 말 조선의용군 주력은 해방에 대비하기 위해 타이항산 지역을 떠나 옌안으로 갔다. 조선독립동맹 역시 1944년 2월 옌안으로 갔다.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미·영·중·소 4개국 정상은 한반도의 독립을 약속하기에 이른 것이다. 국제 정세는 이미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조선의용군의 3대 활동은 간부 양성, 무장선전, 적구(일본군 점령 지역) 조직활동이었는데, 이제 해방에 대비한 간부 양성과 적구 조직활동 두 가지에 집중했다. 두 가지 모두 독립을 위한 기반을 다지고 확대하는 것이었다.

간부 양성의 일환으로 옌안에 조선군정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이번 답사여행의 모티브가 된 옌안 뤄자핑(罗家平)의 조선혁명군정학교 표지가 바로 그것이다. 타이항산 지역의 난좡과 산둥성 분교가 있었고, 신사군 안에도 군정학교를 개설해 간부 교육을 했다.

이와 함께 기존의 간부에 대한 심사도 강력하게 실행했다. 간부 심사란 조선의용대와 조선독립동맹 안에 침입해 있는 일본 밀정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고통스러운 분반토론과 군중집회를 통해 12명의 밀정을 잡아냈다.

北 권력투쟁에서 밀려 대부분 숙청돼


▎허베이성 한단시 진지루위 열사 공원에 세워진 조각 작품.
적구공작은 무정의 지휘 아래 화북 각 도시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다. 1945년 5월 당시 카이펑·쉬저우·지난·민취안·청더·린펀·위츠·훠셴·타이위안·스자좡·순더·신샹 등에 거점이 만들어졌고, 각 거점에 3~4명씩의 비밀요원이 활동했다.

농촌 지역은 도시보다 더 활발했다. 허베이성 동부의 16개 조선인 농장이 주요한 공작 대상이었다. 만주 쪽으로도 조직을 확대했다. 하얼빈으로는 진출했으나 남만주 지역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44년 6월에는 무정이 그의 옛 동지였던 여운형에게 공작원을 밀파했다.

여운형은 무정의 조선독립동맹과 접촉한 다음에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무정은 여운형의 건국동맹을 독립동맹의 국내 지부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이나 여운형을 독자적인 조직이라고 했다. 독립동맹은 국내에 연결하기는 했으나 일본이 예상 밖으로 일찍 항복을 하는 바람에 국내 조직을 제대로 구축하지는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조선의용군은 일제가 패망하자 어찌 됐을까. 이들은 중국 공산당 주더(朱德)의 6호 공개명령으로 조국을 향한 행군을 시작했다. 옌안 등지에서 출발해 동북으로 진군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의용군의 귀국길이면서 동시에 중국 공산당의 만주 점령 선발대 역할도 겸한 것이다. 1945년 11월 선양에 조선의용군 1000여 병력이 집결하고 군인대회를 열기까지 했다.

민간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독립동맹은 북한으로 먼저 귀국했으나,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조선의용군의 귀국을 제지했다. 이에 조선의용군은 만주의 조선인 자원자들을 받아들여 병력을 늘려가면서 만주 지역으로 분산 배치됐다. 셋으로 나눠 1지대는 남만주로, 3지대는 북만주 하얼빈으로, 5지대는 동만주 옌볜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만주의 조선인을 보호하면서 국민당 잔당을 소탕하는 전투에 참여했다. 그리고 1946년 2월 동북민주연합군으로 통합하면서 조선의용군이란 명칭은 해소됐다. 1지대는 166사단으로, 3지대는 164사단으로 편성됐다.

조선의용군은 1949·1950년 북한으로 입국했고,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주력 부대가 됐다. 그들은 미국이 점령한 남한을 해방시킨다는 ‘조국해방전쟁’에 나섰고, 그 결과는 우리 민족 최악의 비극인 동족상잔이었다. 휴전 이후 1956년과 그 이후 북한의 권력투쟁에서 김일성에게 밀려 거의 대부분이 숙청돼 역사에서 사라졌다. 일부는 중국으로 돌아가 망국노가 아닌 망명객으로 살기도 했다.

다시 심경이 복잡하다. 남에서는 동족상잔의 남침 주역이란 이유로 외면당하고, 북에서는 숙청이란 정치적 쟁투에 의해 아예 삭제당했다. 식민지 다음이 곧장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고, 그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상처는 가면 갈수록 깊어진 탓이다.

항일은 물론 전쟁조차 직접 겪지 못한 나는, 조선의용군을 탓할 것인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탓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무너진 끝에 청나라와 일본, 미국과 러시아에 휘둘려 나라를 망쳐먹은 조선 왕조부터 탓할 것인가, 그도 아니면 그런 리더십을 머리에 이고 살아온 나를 포함한 백성들의 무지를 탓할 것인가.

윤태옥 - 중국 인문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자. 2006년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7부작)>(MBC플러스)을 기획, 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매년 6개월 정도 중국을 여행하면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거나 중국 문화와 역사에 관한 글을 쓴다. 저서 <개혁군주 조조 난세의 능신 제갈량> <중국식객> <중국민가기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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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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