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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한·미 FTA 재협상의 급소 

트럼프의 주먹은 중국을 향한다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한국과의 통상협상 바탕으로 대중국 압박에 본격 착수할 가능성…FTA 개정은 중국과의 무역전쟁에 대비한 미국 제조업 확충 과정

▎지난 8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에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영상회의를 하고 있는 가운데 참석자들이 내용을 경청하고 있다. / 사진제공·산업통상자원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핵 도발이 아주 제한적이고 일시적이나마 한국을 이롭게 하는 역설을 낳기도 한다. 바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존폐 논의가 그렇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9월 2일(현지시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미 FTA 폐기 여부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협정 폐기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는 현지 언론 보도와 맞물려 ‘경제 동맹’인 한·미 FTA가 ‘한 방에 훅 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에 충분했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한·미 FTA 재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계산된 발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반도 리스크 관리도 벅찬 마당에 동맹국과의 경제 협상까지 떠안아야 하는 한국 정부는 일순간 긴장 모드로 접어들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와중에 북한이 9월 3일 6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어서는 위험천만한 도박에 나서자 한·미 FTA 폐기 문제는 일단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나아가 미국의 의회·학계는 물론 행정부 내에서조차 반대 여론이 고개를 들면서 한·미 FTA 폐기 문제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에 이르렀다. 안보 위기에 몰린 동맹국을 경제 이슈로 궁지에 몰아선 안 된다는 여론에 백악관도 한 걸음 물러선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이 뜨겁게 달궈질 수도 있었던 한·미 FTA 폐기 이슈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박태호 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런 급반전의 순간을 피부로 느꼈다. 그는 당시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공동으로 개최한 ‘2017 한·미 전략포럼’(9월 5~6일)에 참석차 미국 워싱턴을 방문 중이었다. 미국으로 출국할 당시만 해도 한·미 FTA는 가장 핫한 이슈였고, 그 역시 이 행사의 한·미 FTA 관련 세션에서 사회를 보기로 돼 있었다. 핵실험 뒤 분위기가 표변했다. 법무법인 광장 산하 국제통상연구원장이기도 한 박 전 교수는 “증폭되던 한·미 FTA에 대한 관심이 북한의 핵실험 이후 쑥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고 현지 분위기를 돌이켰다.

한·미 FTA 개정과 내년 11월 중간선거


▎서울 송파구 가락동농수산물시장의 배추 매장. 미국은 8월 한·미 FTA 공동위원회에서 농산물 시장 개방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 민간자문위원으로 일한 김익태 변호사도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FTA 폐기를 실제로 밀어붙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쪽이다. 김 변호사는 미국 통상 정책의 방점이 종래의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다자간 협약에서 FTA 같은 쌍무 협약 쪽으로 이동하는 현실에 주목한다. 그는 “FTA는 WTO의 후신이자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는 대안의 성격이 강하다”며 “이익을 남기는 쪽으로 재협상을 할지언정 FTA를 폐기하는 무리수는 두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어쨌거나 발효 5주년이 지난 한·미 FTA는 새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비록 백악관이 이 협정 폐기 관련 논의를 당분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한·미 FTA 재협상을 공약한 상태다. 협상 테이블에 다시 올라오는 건 시간문제인 셈이다.


▎미국이 한·미 FTA 개정 협상을 공식화하면서 한국 자동차업계에 시름이 깊어졌다. 현대자동차 야적장에 주차된 미국 수출용 자동차. / 사진·연합뉴스
트럼프의 자서전 를 보면 협상에 임하는 그의 스타일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는 “무지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죄”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지는 실패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갖고 있는 지식을 한데 모으고 최고를 목표로 하는 팀을 만들 때 비로소 프로젝트는 성공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일에 접근한다.” 리스크를 대하는 기본 입장도 언급했다. “위험도 없으면서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란 거의 없는 법. 위험을 무릅쓸 각오를 해야만 한다. 마냥 안전하게 가지는 말라. 그러나 위험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은 물론 해야 하며, 내가 얼마 정도를 잃을 수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런 기조에 투영해 본다면 한·미 FTA 재협상도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기반으로 해 저돌적으로 밀어붙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한국이 협상에 임하는 전략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박태호 전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운동 때부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한·미 FTA 두 개를 꼭 집어 나쁜 협상이라고 한 대목을 떠올렸다. 박 전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이유로 선거 국면에서부터 그런 말을 했는지, 또 왜 지금 한·미 FTA 폐기 문제를 끄집어냈는지 의아해하는 미국 전문가가 적지 않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트럼프의 FTA 때리기가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목표를 아는 게 이번 사안의 핵심일 것 같다.”

이를테면 무역역조 규모로 따지면 한국은 중국·독일·일본 등 미국에서 엄청난 달러를 뽑아가는 나라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다. 미국 대외무역 적자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을 비롯해 독일·일본 등을 제쳐두고 왜 한국에 시비를 거는 걸까? 박 전 교수는 다음과 같은 추론을 제시했다. “일단 한국과 멕시코는 다자 조약이든 쌍무 조약이든 FTA를 체결한 나라다. 노련한 협상가 트럼프는 FTA를 지렛대 삼아 가시적인 성과를 조기에 내려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NAFTA가 23년 동안 이행된 협정이다 보니 미국·캐나다·멕시코 이 세 나라가 너무 긴밀하게 결합돼 있다. NAFTA를 폐기하거나 개정하는 건 아주 복잡한 문제이므로 발효 5년밖에 안 된 한·미 FTA로 먼저 눈길을 준 건 아닐까?”

‘이익의 균형’과 ‘등가 교환’ 관철해야


▎트럼프 대통령이 9월 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공화당 주요 인사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백악관은 한·미 FTA 폐기 논의의 중단을 의회에 통보했다.
한·미 FTA 개정 협상에서 무역 역조를 줄이는 성과를 도출한다면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의 한 동력이 됐던 ‘러스트 벨트(쇠락한 중공업 지역)’ 등 제조업이 몰락한 지역의 중산층·서민층 백인의 지지세를 규합하기 쉽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FTA를 걸고 넘어진 건 궁극적 타깃인 중국으로 넘어가는 수순으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게 박 전 교수의 분석이다. 9월 워싱턴 2017 한·미 전략포럼에 참석한 몇몇 미국 전문가도 트럼프 대통령이 비교적 상대하기 쉬운 한국과의 재협상을 조기에 매듭짓고 중국과의 무역 재협상으로 넘어가려는 포석으로 풀이했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박 전 교수는 “만약 트럼프가 중국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한·미 FTA 재협상을 신속하게 진행하는 게 한국에 유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협상이 늘어지면서 한국이 미국의 덜미를 잡는 모양새로 간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협정 폐기 등 더 거칠게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양쪽이 윈-윈하는 방법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고도 했다. 이를테면 미국이 바라는 자동차 환경·안전 기준, 원산지 검증 등을 들어주고 미국도 반덤핑 판정 시 한국과 사전 협의하도록 한 협정문을 준수하는 쪽으로 주고받기를 모색해볼 수 있다는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무게중심이 한·미 FTA 폐기가 아닌 중국과의 무역 교섭에 있다면 조기에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게 한국에 이로운 선택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규범을 준수하지 않는다며 중국을 대놓고 비방해왔다. 그에게 중국은 수백만 개 미국인의 일자리를 앗아간 나라이자 모든 방면에서 불법적인 무역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부이며, 금지된 통화조작과 지적소 유권 침해가 횡행하는 공룡 경제와도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바로잡고자 WTO 제소와 미국 무역법 301조 발동 등 가용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겠다고 선거운동 과정에서 공언했다. 한·미 FTA 협상 너머의 중국 변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협상의 첫 단추를 꿰자면 미국의 속내를 읽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미국이 한·미 FTA, NAFTA를 걸고 나온 이면에는 무역 역조 해소 수준을 넘어서는 국가안보가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최 교수는 분석한다. “미국이 철강과 기초 소재 같은 품목을 지금처럼 해외 수입에 의존하다가는 비상시 대응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 자동차·철강·석유화학 등의 분야에서 수입 의존 비율을 줄이고 자체 생산능력을 갖추자는 의도는 아닐까?” 한·미 FTA 재협상 요구가 향후 있을지도 모를 중국과의 무역전쟁에 대비한 자체 제조업 기반 확충 과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최 교수의 진단이다.

최 교수는 외무고시 출신으로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이 기존 입장을 접고 먼저 요구한 재협상인 만큼 한국 정부가 ‘이익의 균형’과 ‘등가 교환’을 관철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통상 이슈는 그 자체로 등가 관계를 성립시켜야 하며, 안보나 군사 같은 다른 요소가 개입하도록 해선 안 된다”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미국이 어떤 가치와 이익을 따져 한·미 FTA 개정을 원한다면 한국은 그와 동등한 가치를 챙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원래 FTA라는 게 두 나라 이익의 균형에서 출발한 것이고, 미국이 일방적 필요에 의해 고치자는 것이므로 우리의 대가 요구는 정당하다. 안보나 다른 이슈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그런 원칙을 선언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트럼프 한·미 FTA 발언이 생뚱맞은 이유


▎8월 24일 오후 서울 강남구 한국무역협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한·미 FTA 개정 민간대책회의. / 사진·연합뉴스
국내 경제계도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FTA 관련 발언이 생뚱맞다는 반응이다. 한·미 FTA 폐기가 한·미 동맹과 한반도 안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렇다고 말한다. 심지어 한·미 FTA 폐기가 경제적으로 미국에 꼭 이롭다고 할 수 없다고 정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무역통상본부장은 반박한다. 정 본부장은 “우리가 분석한 바로는 한·미 FTA를 개정한다고 해서 무역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는다”며 “일방적인 한·미 FTA 폐기는 미국에 더 큰 손해를 안긴다”고 주장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한·미 FTA가 폐기되는 겨우 양국의 모두 수출이 줄어들지만 미국의 감소 폭이 더 큰 것으로 전망됐다. 한국의 대미 수출이 13억2000만 달러, 미국의 대(對)한국 수출이 15억8000만 달러 감소하면서 결과적으로 한국의 대미 무역흑자가 2억6000만 달러 증가하는 효과를 낳는다는 것. FTA가 종료될 경우 한국에 적용되는 최혜국대우(MFN) 관세율(4%)이 미국의 MFN 관세율(2.3%)보다 높기 때문이다. 농산물 분야의 관세 절감 혜택도 미국은 연간 7천7000만 달러 줄어드는 데 반해 한국은 2000만 달러 감소하는 데 그친다. 미국에서 수입되던 농산물 중 일부가 한국의 FTA 체결국(유럽연합·호주·뉴질랜드·캐나다 등) 쪽으로 수입선을 바꾸게 된다고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밝혔다.

정철 본부장은 “한·미 상품 무역수지 적자에 과민한 트럼프 정부가 불균형 해소 차원에서 한·미 FTA 개정을 요구하지만 전문가들은 협정 개정으로 무역 역조가 해소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고 했다. 지난 8월 한·미 FTA 공동위원회 회의에서 한국이 FTA 효과에 대한 공동조사와 분석을 제안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덧붙였다.

한국무역협회도 지난 5월 미 상무부에 한·미 교역과 무역수지에 대한 비슷한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다. 한·미 무역수지 불균형은 FTA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경제구조와 산업구조의 차이, 경기 사이클의 차이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짚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FTA 폐기 논의 방침을 밝혔다는 보도가 나온 9월 3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정책국 직원이 휴일에도 근무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먼저 미국은 높은 소비 성향으로 인해 저축률이 투자율을 꾸준히 밑돌고 있어 경상수지 적자를 불러오지만 한국은 정 반대로 저축률이 높아 흑자를 기록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큰 전형적인 선진국 산업구조인 데 비해 한국은 상대적으로 제조업에 비교우위를 확보한 상태다. 그래서 상품 수지에서는 한국이, 서비스 수지에서는 미국이 흑자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미국은 대한국 무역 적자의 절반에 가까운 100억 달러 이상의 흑자를 서비스 수지에서 내고 있다. 경기 순환 요인만 하더라도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는 회복세를 보이면서 수입이 증가했으나 저성장 기조에 접어든 한국은 수입이 위축되면서 양국 간 무역수지 적자가 확대된 측면에 유의해야 한다는 게 무역협회의 설명이다. 무역협회 산하 국제무역연구원의 이동복 통상연구실장은 “한·미 FTA가 설령 폐기된다고 해도 우리에게 큰 손해는 없다”며 “따라서 재협상에도 당당하게 임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다만 기존 한·미 FTA 틀 속에서 한국이 이익을 보는 것은 사실이므로 미국의 적자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 재협상에 임하는 방안도 함께 고려돼야 한다고 그는 부연했다.

최근 줄어드는 무역 흑자 폭도 재협상의 지렛대로 활용 가능하다. 올 상반기 미국의 대한국 무역 적자는 122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43억 달러 줄었다. 미국 무역 적자 상위 10개국 중 가장 큰 폭의 하락세를 보였다. 당연한 결과지만 미국 무역 적자 순위에서 지난해 6위에 올랐던 한국은 올 상반기 10위로 내려앉았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대미 무역수지는 2015년 사상 최고치인 258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가 지난해 232억 달러, 올 1~7월엔 95억 달러로 줄어드는 추세다. 무역협회는 “대미 무역 흑자 감소 추세는 올 들어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미래 지향 모델로 FTA 말 갈아타야 할까?


▎2007년 6월 30일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이 수전 슈와브 미국 USTR 대표와 미국 하원 캐넌빌딩에서 한·미 FTA 협정문에 공식 서명했다
이번 기회에 한국이 지향할 미래 산업구조에 부합하는 FTA 모델로 말을 갈아타자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를테면 문재인 정부 정책 기조인 소득주도 성장, 일자리 중심 성장, 혁신 성장, 경제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구현할 장치를 협정문에 획기적으로 반영하자는 것이다. 현 정부가 역점을 두는 양극화 해소나 친환경 정책이 한·미 FTA와 충돌한다고 송기호 변호사는 설명한다. 우선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같은 정책은 한·미 FTA 시장 개방화 조항에 반할 소지가 크다. 저탄소 차량을 보급하고자 자동차세를 배기량 기준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 기준으로 바꾸려는 시도 또한 한·미 FTA 벽에 가로막힌다. 한·미 FTA가 배기량 기준 자동차 세제를 채택한 탓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국제통상위원장이기도 한 송 변호사는 “미국이 집착하는 철강·자동차 재협상을 수용하는 대가로 한국은 양극화 해소를 가로막는 FTA 조항의 전면 개정을 받아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는 미국과의 협상에 앞서 국내 산업정책 우선순위에 관한 토론과 여론 수렴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송 변호사는 “한·미 FTA를 손본다면 미국과의 협상에 앞서 우리 내부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전제했다.

최원목 교수도 정부가 한·미 FTA를 완전히 새로 뜯어고칠 각오로 협상에 임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현상 유지에 집착한 나머지 처음부터 소극적인 자세로 나가서는 FTA를 지켜낼 가능성이 더 희박해진다는 이유에서다. “서로 치고받는 과정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게 트럼프의 실무 협상 스타일이다. 우리만 치고받을 생각 없이 뒤로 빠져선 미국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말 것이다. 한·미 FTA를 새로 쓴다는 자세로 다양한 요구사항을 내세울 때 역으로 FTA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재협상이 이뤄진다면 ‘국가 주권 손상’ 논란을 불러온 투자자국가소송제(ISD) 조항을 삭제하는 쪽으로 논의를 가져 가야 한다는 주장도 고개를 든다. <한·미 FTA, 소송당하는 대한민국>의 저자 김익태 변호사는 “ISD 조항은 미국의 투자 자본에 유리한 장치로, 한국의 사법주권을 침해할 여지를 안고 있다”며 “한·미 재협상의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5조원대 ISD 소송 말고도 미국 투자자와 한국 정부 간 분쟁이 발생한 사례도 두 건에 달한다. 앞으로도 사법주권을 침해하는 ISD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는 게 김 변호사의 관점이다. 그는 “국내 재개발사업에 강제 수용당한 외국인이 국제투자중재센터 등에 ISD 소송을 제기하는 등 복병이 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201710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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