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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코리아-마을이 답이다’(7)] 마을공동체가 일자리를 만든다 

선진국은 농업국이다 

글·사진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 공석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귀농·귀촌 연령도 동기도 천차만별…초기 정착에 천착한 지원대책으론 농촌 살리기 어려워

경험 없는 귀농은 위험하고 사람 없는 농촌은 공허하다. 이주민과 토착민을 경제적·문화적으로 묶어내는 사회적경제 플랫폼이 필요한 이유다. 협력의 기억은 일시에 그치지 않고 축적돼 농촌을 다시 한 번 정주 가능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것이다


▎귀농·귀촌은 익명의 개인을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이다. 경북 봉화군 비나리마을의 귀농인들이 농사일을 하던 중 활짝 웃고 있다. / 사진제공·공정식
2009년 농림축산식품부는 ‘귀농귀촌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도시의 유휴인력을 농촌으로 보내 일자리 문제를 완화해보자는 발상이었다. 정부는 ‘귀농귀촌 종합센터’ 설립을 시작으로 갖가지 정착지원 정책을 쏟아냈다. 이것이 베이비부머들의 ‘농촌으로(브나르도)’ 인구이동의 촉매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2005년 전국서 1000여 가구에 불과했던 귀농·귀촌 가구는 2016년 기준 33만5383가구로 늘어났다. 농사를 목적으로 이주한 가구는 1만2875가구, 농사 이외 목적으로 이주한 가구는 32만2508가구로,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통계청은 이런 증가세가 앞으로도 이어진다면 2034년에는 귀농·귀촌 인구가 3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귀농·귀촌 인구 증가를 정부의 지원정책 공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농촌에 남아 있는 풀뿌리 문화가 도시의 무한경쟁에 지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농촌은 30~40대들에게는 새로운 사업기회의 공간이기도 하다. 농촌이 삶의 도피처를 넘어 대안처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선진국들은 농업국이다. 프랑스·독일·스위스·네델란드·덴마크 등을 돌아보면 자연이 살아 있다. 비록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는 것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그들은 잠시 도시를 경험할 뿐 농촌을 잊지 않고 돌아온다.

독일 농민이 자신이 묘비에 “나는 자랑스러운 농부였다”라고 적어 달라고 한 유언은 우리에게도 강한 감동을 준다. 옛날 아버지의 직업란에 농부라고 쓰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이 기억난다. 어른이 되면 결코 아버지와 같이 고생만하고 가난하게 사는 농부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우리 기성세대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면 과장일까.


▎이탈리아 트렌티노 주(州)는 ‘협동조합의 성지(聖地)’로 불린다. 53만 명 인구의 40%인 22만7000명이 협동조합에 참여하는데 소득은 EU평균보다 20%나 높다. 트렌티노 주도(州都)인 트렌토 시 전경.
어떻게 독일 농부는 그러한 자부심을 갖게 됐을까? 농업을 단순히 경제적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않는 국가의 농정철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를 돌아볼 때 농민이 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주인공이었다.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서구의 협동조합은 바로 농촌, 농업 그리고 농민들이 견지해온 공동체정신과 협동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도 유사한 방식으로 공동체의 삶을 살았고, 협동과 상생의 문화를 이루어왔고, 그리고 그것이 농촌에 배태돼 있기에 그것을 농업을 통해서 다시 살려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지원정책은 농촌 주민의 수를 늘리는 데 방점이 찍힌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농사는 물론 농촌 지역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길게는 10여 년이 소요된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과도한 노동시간 및 고된 노동 강도, 농사의 전문성 부족, 그리고 농사소득의 부족과 기존 원주민과의 갈등 등의 이유로 역귀농을 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정부의 지원금에 눈이 멀어 귀농·귀촌 유치홍보에 열을 올리는 지방자치단체와 농촌지역 주민들도 책임이 있다. 귀농·귀촌인에게만 정책 및 예산이 집중되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는 원주민들의 시기와 편견은 농촌으로 유입된 이주민들이 마을공동체 활동을 활성화하는 새로운 동력이기보다는 갈등 제공자로 낙인 찍기로 확대되기도 한다.

농촌의 공동화 및 고령화로 쇠락한 농촌을 재생하기 위해선 귀농·귀촌·귀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일자리 문제로만 접근하는 시각은 단편적이다. 관건은 어떻게 이주민들이 어떻게 원주민과 함께 상생 방법을 터득하고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는 가다. 이를 궁리하는 과정에는 원주민, 이주민, 중간 지원기관, 지자체, 중앙정부 등이 수평적인 관계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농업국이다’라는 결론은 이런 과정 속에서만 얻어낼 수 있다.

농촌정책에 사람이 없다


▎전북 완주군은 군내 2곳에 농산물 가공센터를 세워 농가소득 향상을 꾀하고 있다. 2015년 완주군 구이면에 건립된 제2호 농산물 가공센터 모습.
귀농·귀촌·귀향에 대한 정부의 지원정책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귀농 개념을 다시 정의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귀농이란 단순히 직업의 전환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이다. 농촌 지역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리려면 생태환경에 대한 이해와 함께 존중감이 우선돼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귀농을 협소하게 바라본다. 통계청은 귀농인을 ‘통계작성 기준일(11/1)로부터 1년 전 주소가 동(洞)지역이고, 현주소가 읍·면(邑·面)지역인 자 중에서 농업경영체, 축산업등록명부, 농지원부에 농업인으로 신규 등록한 자’라고 정의한다. 또한 농어촌에 이주한 사람이라도 ‘회사원, 교사 등 별도의 직업을 갖고 있는 경우’는 귀촌인으로 따로 분류한다.

농촌에는 농사짓는 사람만 사는가? 농촌에서도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인가? 귀농이란 개념에는 농사짓는 일을 넘어 농촌이라는 마을 지역에서 산다는 의미를 포함해야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으면 농촌 지역 구성원 중에 누구는 지원 대상이고 누구는 지원을 받지 못하게 돼 서로 시기하고 편을 가르기 십상이다. 협동은 고사하고 불신의 골만 깊어져 상생하는 지역공동체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각인될 것이다.

이제 귀농·귀촌 이주를 지원하는 정책은 좀 더 다양해지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준비되고 있다. 예전에는 귀농·귀촌의 유형을 일본 사례연구에 비추어 U-turn(고향농촌-도시-고향농촌으로), J-turn(농촌-도시-다른 지역 농촌으로), I-turn(도시-농촌으로) 나누어 ‘농사를 짓는 사람이 누구인가’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귀농·귀촌의 동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경제·생계형, 대안가치 추구형, 개인생활 효용형 등으로 나눠 지원정책의 차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실제 동기는 더욱 다양하다.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영농승계로 어쩔 수 없이 내려온 경우 등이 그렇다. 귀농·귀촌 가구형태도 가족 전부가 내려오는 경우 말고도 부부끼리나 단독으로 내려오는 사례가 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는 동시에 이들이 장기적으로 농촌지역에 뿌리 내리고 공동체에 결합할 수 있는 단계적 지원정책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원정책은 아직도 초기 이주단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전국적으로 ‘농촌마을 만들기’ 또는 ‘농촌지역 개발사업’이 진행된 곳이 3000여 곳이 될 정도로 지원 사업이 급속히 증가했다.

귀농·귀촌인의 실패는 거리두기 탓이다


▎진안군 좌포리에 ‘좌포교회’를 세운 한명재 목사는 2009년 귀농인과 원주민이 함께하는 배추 작목반을 꾸렸다. 좌포교회 전경.
그런데 사업이 끝난 지금 어떤 상태인가? 지원 사업이 끝나고 남은 유휴시설이 너무 많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그 시설의 50% 정도가 폐쇄된 상태이며 지역 현장을 다니다 보면 80~90%가 정지된 느낌을 받는다. 초기 이주단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장기적인 정착과정에 대한 지원정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정부가 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실제로 이주민들과 부대끼는 ‘마을사람’들을 정책과정에서 복원해내야 한다. 결국 사람이 문제다.

지난 10여 년의 귀농·귀촌 경험을 돌이켜볼 때 지원 사업이 실패하는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농사, 농민, 그리고 농촌정책 등을 얕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태도로 인해 함께 소통하고 협력하고 존중하며 다가서야 할 사람과 농사에 거리를 두게 되는 점이다. 이러한 얕봄과 거리 두기가 이주민과 원주민 간 협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됐다. 이는 마을 공동체 및 사회적 경제 활동 관련 정책의 실패로 이어지곤 했다.

우선 이주민과 원주민의 관계에서 원인을 살펴보자. 귀농 혹은 귀촌을 계획하면서 농업을 잘 모르면서도 이를 얕보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짧은 지식과 경험 그리고 인터넷에서 얻은 얕은 정보만을 가지고 배운 척을 하면서 지역 주민과의 거리를 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농사가 얼마나 어려운지 체득하게 된다. 또한 안정적인 사업소득을 위해선 작목에 따라 전문적인 지식과 노하우를 쌓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고된 농사일에 몰두하다 보면 새로운 농사기술을 학습하기 어렵기도 하다. 여러 지자체에서 예비 귀농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귀농인의 무모함은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농사의 가치와 농업의 소중함을 우리 모두가 깨닫기까지는 아직 멀어 보인다.

몇 대에 걸쳐 그 지역을 지켜온 원주민을 무시하는 것은 계산할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인 땅·자연·문화·공동체를 간과하는 것이다. 귀농·귀촌을 하고서도 자기들의 주거공간에 간섭하지 말라는 태도는 지역공동체를 해치는 이기적인 자세다. 그 마을을 지켜온 원주민들을 존중해야 한다. 지역 농민을 모르면서 그들을 얕보며 배운 척, 아는 척, 가진 척을 하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많은 귀농인이 은퇴 자금을 가지고 농사부지와 빈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주의하지 않아 거래 사고를 경험한다. 또는 집성촌에서 비롯되는 씨족 권력에 불만을 갖고 나홀로 농사를 짓고 판매를 시도하다가 손해를 보기 일쑤다. 혈연으로 얽힌 복잡한 연줄망은 수대에 걸쳐 구축된 까닭에 무시하기 힘들다. 차라리 열린 자세로 발품을 팔고 마을 일에 기여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이러한 노력 없이 마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농촌 지역의 현실이다.

진안에서 싹튼 마을기업의 가능성


▎귀농·귀촌인들과 마을주민들이 협력할 때 지속 가능한 농촌을 꾸릴 수 있다. 전북 진안군 군내에 마련된 귀농귀촌인협의회.
원주민들도 외지인들을 마냥 적대해선 안 된다. 부동산 개발업자들의 농간에 받은 상처는 이해한다. 고향을 지키기 위해 방어기제를 작동하는 과정에서 귀농·귀촌인들과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이제 원주민들도 귀농·귀촌 인구의 유입이 없이는 농촌과 농업의 미래가 없다는 절박감을 가져야 할 때다. 국제결혼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농촌과 농업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원주민 스스로도 귀농인의 진정성을 인정해 줘야 할 때인 것이다.

다음으로 귀농·귀촌인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없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농촌에 일자리가 턱 없이 부족하다 보니 생계 위험에 빠지기 쉽다. 40대 이하가 50~60대 귀농·귀촌인에 비해 준비 자금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40대 이하는 준비자금이 부족해 자꾸 농업 외 소득원을 찾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농촌 지역과 무관한 일자리를 찾아서 건설노동, 상점점원, 식당 종업원과 같은 일용직을 찾는다. 결국 좀 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역귀농을 선택한다.

역귀농은 다시 농촌의 공동화·고령화·빈곤화로 이어진다. 귀농·귀촌인의 고통이 개별적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농촌 공동체의 고통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새롭게 농촌으로 진입하는 사람들을 보호할 사회안전망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귀농·귀촌인과 원주민간의 협동을 장려하고 제도화해야 한다. 최근에 마을단위에서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사회적경제가 실마리다. 귀농한 사람에게는 빈집과 땅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활동을 협동조합 틀에서 운영해보자는 것이다. 전라북도 진안군의 예를 살펴보자.

자그만 농촌 지역공동체를 꿈꾸는 좌포교회 한명재 목사는 2009년도에 작목반을 만들었다. 귀농한 사람에게는 빈 집과 농사 부지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초기에 매우 중요하다. 생계 위협을 느끼면 그들은 언제든지 떠나기 때문이다. 한 목사는 우선 배추 작목반을 만들어서 배추를 심었지만 부족한 배추는 고정가격제로 구입해 김장김치를 담기 위한 절인 배추를 만들어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배추의 시중가격 200원으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700원의 고정가격으로 구입하는 시스템에 대해 배추 농가들은 놀라면서도 협동의 가치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원가를 계산해서 절인 배추는 2100원에 팔았고 포기당 800원의 수익금을 얻었다. 한 목사는 총 수익금을 작업에 참여한 사람 n분의 1로 나누어 이익을 분배했다. 7년 정도 운영한 배추 작목반 사업에는 원주민인 교인은 물론 귀농인도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이 협동과정에서 갈등이 종종 발생했다. 예를 들어 젊은 작업자는 장년의 작업자보다 손이 빠르고 더 열심히 일하는데 왜 똑같은 보상을 받는가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다. 생산량에 맞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만은 협동적 인간으로 가는 과정에서 첫 번째로 나타나는 갈등상황이다. 한 목사는 비록 처음에는 손해가 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서로 협동하며 능률이 더 오르게 되고 다른 부분에서 도움을 받게 된다고 젊은 작업자를 설득했다.

분명 숙련도나 노동 강도의 차이로 처음에는 손해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돈만을 보고 이 공동 작업에 참여하면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참여자는 상생을 배우며 상호 신뢰를 쌓아가게 된다. 그 협동의 가치를 소중히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중간중간 떨어져나갔다. 결국 10명 중에서 5명이 정회원이 돼 소위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협동은 또 다른 협력을 부른다


▎벼농사는 모내기와 수확철에 상당한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농촌에서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인 이유다. 전북 진안군 좌포리의 귀농인 벼농사 현장.
이처럼 간단한 작목반 참여를 통해 지역 원주민과 귀농인이 함께 협동의 경험을 쌓고 적어도 1인당 160만원의 수익을 올리게 됐다. 만약 부부가 참여하면 320만원가량의 가외소득을 올리게 되는 셈이다. 돈만 바라본 사람은 이 작업에 참여하지 못해 결국은 농한기 때 아무 소득도 올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귀농인과 어울려 협동하는 소중한 경험도 놓치게 된 것이다.

이후 귀농인들은 협동 작업을 토대로 다양한 경제적 활동에 참여하는 ‘파생효과(spin-off)’를 경험한다. 1200만원을 들여 만든 배추 작목반 작업공간이 겨울에는 약초 가공반 공간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약초를 만들어온 지역 주민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군으로부터 기계를 지원받아서 비록 소규모이지만 마을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결국 자그만 협동의 체험이 하나 둘 싸이면서 마을기업으로 커지게 됐다. 이 과정을 가능케 한 힘은 바로 마을 주민과 귀농인사이의 협동의 과정이 어떻게 자리 잡아 가는가로 결정된다. 귀농인의 유입이 없으면 이러한 마을기업에 참여할 사람이 부족하고 이러한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동기도 떨어지게 된다.

진안의 경험처럼 전국에 걸쳐 마을 단위에서 다양한 플랫폼을 기반으로 일자리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마을기업, 마을시장, 마을R&D 센터, 마을체험 캠프, 마을학교, 마을학원, 마을문화관 등이 대표적인 플랫폼이다. 그런데 이것을 마을 특성을 고려하지 않거나 마을을 지켜온 주민들과 새롭게 마을로 이주한 귀농인들 사이의 협동의 경험이 없이는 일회성 프로젝트로 끝날 위험이 높다.

마을 주민들이 동일한 지리적 환경 아래 비슷한 생활유형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귀농인, 귀촌인, 귀향인과 협력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쇠락한 농촌에 새롭게 수혈을 하는 차원에서 그들은 분명 한국 농촌과 농업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꿈나무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당장 농촌과 농업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 다양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것을 견지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 결실을 보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례로 마을에 늘어나고 있는 태양광, 바이오매스와 같은 대안 에너지를 관리할 수 있는 엔지니어가 농촌에서 안정적으로 거주하고 협동적 인간으로 지역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을까? 마을컨설턴트, 마을캠프 및 자연캠프 교사, 마을학교 교사, 마을문화원 강사가 도시와 다른 농촌 환경에서 친환경 농부와 협력하며 협동의 방식으로 농산물을 구입하고, 서열사회가 아닌 상생과 나눔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신을 물론 후속세대를 길러낼 수 있을 만한 충분한 경험과 노하우를 갖추고 있는가? 아직은 미래의 일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길도 바로 귀농·귀촌인과 지역 주민 사이의 협동 위에 놓여 있다.

생활귀농, 복지귀농, 문화귀농, 지역귀농, 연대귀농, 자치귀농 등 추상적인 논의는 잠시 미뤄두자. 우선 귀농인들이 생존을 넘어 지속가능한 농업인, 농촌 지역주민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현실을 냉철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뜨는 사업에 정책적으로 쏠리는 것을 경계하고, 외양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원주민과의 소통과 교류가 없는 패키지 귀촌단지 건설과 같은 관치 귀농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귀농·귀촌인 위한 연령별 맞춤 정책


▎2015년 8월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2015 팜쇼 창농·귀농 박람회’가 방문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지난 20여 년 동안 20대 후반 청년으로 들어가 이제는 40대 중·후반에 들어선 일군의 귀농집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1990년대 후반 괴산으로 들어간 한 무리의 젊은 청년들은 과수원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학 때 학생운동을 통해 만나 친구들이지만 지역 농민회 활동을 목표로 ‘하방(下方)’ 운동을 한 것이다. 20여 년 좌충우돌하면서 깨달은 것은 지나치게 장밋빛으로 그려진 귀농의 비전을 경계하면서 연령별 맞춤형 지원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첫째, 20~30대 귀농·귀촌을 결심한 청년들은 자본과 경험이 부족하다. 그러나 열정과 패기 그리고 창의성이 뛰어나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최소한 10년 정도는 지역 어르신의 경륜과 농사기술을 전수받는 데 초점을 맞추고 마을 머슴처럼 헌신적으로 지역공동체 구축에 힘쓰기를 주문한다. 최근에는 정부 및 지자체에서 20~30대 귀농인을 위한 다양한 지원사업이 존재한다. 실패를 각오하고 다양한 사업을 시도하라.

그러나 아는 척하지 말고 지역 어르신들과 함께 사업을 공동으로 궁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패한다고 결코 좌절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노력과 진정성에 마을 원주민은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열게 되고 젊은 귀농인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된다. 실례로 괴산의 경우는 원주민은 지역 고유의 농산물을 농가공 식품으로 만들 수 있는 전통지식을 나누며 이를 마을기업으로 전환할 기회를 제공했다.

둘째, 40~50대 귀농·귀촌을 결심한 중년들은 가족에 대한 생계는 물론 자녀 교육 등의 부담으로 농촌에서 농업으로 생존하기 가장 어려운 연령대다.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농을 강행하면 부부갈등은 물론 아이들한테도 상처를 주게 된다. 가급적 아이들을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농촌으로 들어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 들어오는 것을 권한다. 주변에 대안학교가 없는 상황에서 홈스쿨링을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농사일의 노동 강도는 물론 새로운 농사기술 습득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기에 아이 교육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셋째, 60대 이상이 귀농·귀촌을 고려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사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체력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농사를 통해 일정 정도의 소득을 꿈꾸는 것은 과욕일 수 있다. 대신에 사회적 가치를 우선시하며 농촌 지역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과 사업을 고민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농촌의 고된 삶으로 인해 농촌에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놓치게 된다.

결국 연령별 맞춤형 귀농·귀촌 정책을 앞으로 정교하게 개발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농촌 지역의 인구를 늘인다는 가시적 목표를 넘어 미래 한국의 지속가능한 농업과 농촌을 이루는 맥락 속에서 추진돼야 할 것이다.

임현진(林玄鎭, Hyun-Chin Lim) hclim@snu.ac.kr

서울대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사회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실련 공동대표, 사회과학협의회장, 서울대 사회과학대장, 아시아연구소 창립소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글로벌 NGOs> <세계화와 반세계화> <지구시민사회의 구조와 역학> <뒤틀린 세계화> <글로벌 패러독스> <아시아의 부상> 등 50여 권이 있다.

공석기(孔錫己, Suk-Ki Kong) skong@snu.ac.kr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경희대 공동대학원 겸임교수. 환경경운동연합 국제협력위원회와 서울시 공정무역위원회 위원.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미국 하버드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글로벌 NGOs> <인권으로 읽는 동아시아> <인권 사회학> <뒤틀린 세계화> 등이 있다.

201710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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