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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21)] ‘정치가’로 변신한 이성계(3) 

역사의 대변혁 이루고도 불행한 말년을 보내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신진유신 정도전과의 만남은 이성계가 무장에서 벗어나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된 계기였다. 무력과 이념을 성공적으로 결합해 훗날 새 왕조를 열게 된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건국 후 후계자 선택의 오류에 빠져 슬픔과 분노 속에 불행한 말년을 보낸다.

▎이성계는 세상을 떠날 때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 묻히길 원했으나 이를 따르지 못한 아들 태종은 함흥 땅의 억새인 ‘청완’으로 선왕의 봉분을 조성했다. 이를 계기로 매년 한식날 건원릉 봉분을 덮은 억새를 벌초하고 행사를 한다.
위화도회군 전에 이성계는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 보기를 좋아하여 혹은 밤중에 이르도록 자지 않았으며, 개연히 세상의 도의(道義)를 만회할 뜻을 가졌었다”(<태조실록> ‘총서’)고 한다. 도의란 세상의 마땅한 도리다. 이성계는 당대를 이 도의가 무너진 세상으로 인식하고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 대안을 제시한 책이 <대학연의>라는 것이다. 이는 이성계가 단순히 제2차 무신란을 꿈꾼 것이 아니란 뜻이다. 정중부는 단지 문신에 대한 분노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성계에게는 철학적 비전이 있었다. 바로 <대학연의>가 꿈꾸는 세상이다. <대학연의>는 성리학의 제왕학 교과서다. 즉 이성계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신 왕조 개창의 뜻을 품고 있었다는 게 이 기사의 본뜻이다.

<대학연의> 이전 동양의 제왕학 교과서는 <정관정요(貞觀政要)>다. 정관(貞觀)은 당 태종 이세민(599~649)의 연호로 <정관정요>는 그 정치의 요체를 기술한 것이다. 당은 한과 더불어 중국의 국가 모델과 문명의 원형을 완성한 왕조다. 중국인은 또한 당 태종을 가장 걸출한 황제이자 성군으로 추앙한다.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정관의 치(治)’ 이상의 정치를 상상할 수 없었다. 고려도 그랬다. 고려 전기의 제왕학을 대표하는 최승로의 <시무 28조>도 실은 <정관정요>의 고려판 카피였다. 갓 즉위한 성종이 정치적 조언을 요청하자, 최승로는 “당현종 때의 사신(史臣) 오긍(吳兢)이 <정관정요>를 찬진하여, 현종이 태종의 정사를 힘써 닦도록 권하고자 하였으니, 대개 일의 형편이란 비슷하므로 당과 고려가 다르다 해도 그 정사의 아름답고 밝음은 모범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崔承老傳>)

고려사에서 <정관정요>가 처음 등장한 것은 950년(광종 1년)이다. 정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뽑자, 광종은 덕을 닦아 재앙을 물리치라는 충고에 따라 <정관정요>를 읽었다. 예종 또한 <정관정요>를 읽고 “짐이 그 고명(高明)한 덕행을 본받아 행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충선왕의 외조부는 원 세조 쿠빌라이다. 쿠빌라이는 손자를 총애해 1292년 그가 17세 때 침전에 불러 “역대 제왕 중 누가 제일 현명하냐?”고 물었다. 충선왕은 “한 고조와 당 태종입니다”고 답했다. 고려 전기의 저명한 유학자 최충의 아들 최유선(崔惟善)은 현종에게 “당태종의 신성영무(神聖英武)함은 천백 년 이래로 짝할 이가 없다”고 평가했다.(<崔·崔惟善傳>)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성계 역을 맡은 배우 유동근 씨.
주희(朱熹, 1130~1200)가 <대학(大學)>의 사상을 확립할 때까지 <정관정요>는 부동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왕도와 패도의 병용(竝用)을 주장한 진량(陳良)과의 논쟁에서 주자는 “당 태종의 마음은 한마음이라도 야욕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바로 인의를 빌려 그 개인적인 야망을 실행했다”고 당 태종을 맹렬히 비난했다. 인의를 가장한 정치, 즉 패도(覇道)로 본 것이다. 주자의 정신적 스승인 정호(程顥)도 의견이 같았다.

“당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비록 태평스럽게 잘 다스렸다고들 하지만, 또한 오랑캐들의 풍습을 지니고 있었다. 삼강이 바르지 않아서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부부의 구별이 없었다. 그 근원은 당 태종에서 시작되었다.”(<近思錄> 卷 8~19)

당 태종을 오히려 악의 근원으로 본 것이다. 문제는 대다수 사람이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유학자들은 ‘삼대(三代)의 정치’를 고창했지만, 그것이 어떤 정치인지는 매우 모호했다. 주자는 이런 남점을 절감했다. 그래서 주자는 사서삼경을 재독해해 새로운 주석을 붙이고, 새로운 커리큘럼을 제시했다. 특히 그는 <예기>의 한 장인 <대학>을 독립시키고 서문으로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를 붙였다. 이는 주자 철학에 대한 주자 본인의 압축적 해설이자 동시에 주자 정치학의 매니페스토에 해당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과 대립되는 사상적·정치적 입장들을 간결한 어구로, 그러나 근본적인 입장에서 공격하고 있다.

제왕학 교과서 <대학연의>를 읽다


▎진덕수가 편찬한 성리학의 제왕학 교과서인 <대학연의>. 총 6편으로 이뤄져 있다. 성리학의 기본 원리에 따라 선현의 교훈과 역사적 사례를 종합했다. / 사진제공ㆍ김영수
그것은 크게 네 종류로 속유의 기송사장지습(俗儒記誦詞章之習), 이단의 허무적멸지교(異端虛無寂滅之敎), 권모술수에 의한 모든 공명지설(權謀術數一切以就功名之說), 그리고 백가의 중기지류(百家衆技之流)이다. 첫째는 암기와 문장 위주의 유학, 둘째는 도교와 불교, 셋째는 병가나 법가 같은 사공론(事功論), 그리고 넷째는 음양오행론이나 풍수지리론 등 온갖 학설이다. <정관정요>는 셋째 부류의 패도론에 속한다. 주자는 이런 혹세무민의 설들로 인해 위정자는 대도의 요체를 모르고 백성은 선정의 혜택을 입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주자가 제시한 대안은 ‘격물치지성의정심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정치다. 위정자 스스로 갈고 닦아 천하를 평화롭게 하고 만인이 교육과 수양에 의해 자신을 완성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진덕수(1178~1235)는 주희의 제자 첨체인(詹體仁, 1143~1206)을 통해 주자학을 전수받은 재전제자(再傳弟子)이다. 이성계가 읽었다는 <대학연의>는 그가 지은 책으로, <대학>의 요지에 따라 역대 선현의 교훈과 제왕의 치적을 부연해 만든 제왕학 교과서다. 성리학은 유학 사상의 일대 혁명이자 새로운 정치관과 국가상을 제시한 국가개조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고려는 기본적으로 불교의 나라였고, 사상적으로 풍수지리설과 비기도참설 등 다양한 사유가 혼재했다. 좋은 의미에서 다원주의적이고, 나쁜 의미에서 지적 엄밀성과 깊이가 떨어졌다. 고려 유교의 사상 투쟁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부터 본격화되어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그 맥을 잇고 있는데, 그것이 정교한 자기 세계관을 획득하며 역사적 운동으로 자란 것은 이제현이 본격화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에서 <대학>의 정치적 의미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사람은 이제현이었다. 충목왕 원년의 개혁상소에서 그는 <대학>의 관점에서 왕의 교육 모델을 제시했다. <대학연의>가 왕의 경연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공민왕 6년(1357) 윤택의 강의다.

조선 건국 직후 사간원은 <대학연의>가 “맨 처음 제왕의 정치하는 차례로 시작하고 다음에 제왕의 학문하는 근본으로 편차하여 자기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군주의 마땅히 알아야만 될 이치와 마땅히 해야만 될 일이 상세히 이에 나타나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태조실록> 1년 11월 14일)

또 이방원이 왕자였을 때 조준은 그를 집에 초청해 <대학연의>를 주며 “이것을 읽으면 가히 나라를 만들 것”이라고 권고했다 한다.(<태종실록> 5년 6월 27일) 이를 보면 <대학연의>는 조선 건국의 사상적·정치적 가이드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성계가 이 책과 <자치통감강목>을 읽었다는 기록은 1390년(공양왕 2년) 공신으로 책봉될 때 내린 교서에도 나온다.(<태조실록> ‘총서’)

그런데 사실 이성계는 독실한 불교도였다. 함경남도 안변(安邊)의 석왕사(釋王寺)에 얽힌 설화를 보면 이성계는 대체로 1377년(우왕 3년) 무렵부터 왕위에 대한 꿈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유명한 설화에 따르면 이성계는 신비한 꿈을 꾸고 당시 설봉산 토굴에서 수도하고 있던 무학대사를 찾아갔다.(西山大師, <雪峯山釋王寺記>) 이성계는 꿈속에서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고, 또 어느 집 헛간에 들어갔다가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오다가 거울 깨지는 소리에 잠을 깼다. 이에 대해 무학대사는 “서까래 세 개는 왕자(王字)를 뜻하고 꽃이 떨어지니 열매가 맺힐 것이요, 거울이 깨졌으니 소리가 나지 않겠는가(花落能成寶 鏡破豈無聲)”라고 해석해 왕조 창업을 예언했다. 이성계는 그곳에 석왕사를 창건했다. ‘석왕(釋王)’은 왕이 될 꿈을 풀이했다는 뜻이다. 1377년 43세의 동북면 도원수 이성계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청주(靑州) 광적사(廣積寺)의 대장경, 불상 등을 배로 옮겨 석왕사에 안치하고 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

이성계의 명으로 권근이 쓴 발원문을 보자.

“안변에 석왕사가 있는데 옛날 전쟁을 막기(鎭兵) 위한 비보(裨補) 사찰로, 내가 잠저에 있을 때 원찰(願刹)로 만들기 위하여 다시 새롭게 건조하였더니 다행히도 천지의 도움과 조종의 덕에 힘입어 나라를 건국(化家爲國)했습니다. 이로써 오늘에 이르러 위로는 선세(先世)를 복되게 하고 아래로는 군생(群生)을 이롭게 하고자 삼천불과 석가삼존·비로자나 삼존·지장보살·시부명왕(十府冥王: 사후 세계의 10대왕)을 그림으로 그리고 오백나한을 석조(石造)하였습니다. (…) 오직 원컨대 선대의 조종께서는 먼저 신덕(神德)의 선가(仙駕: 신선의 수레)를 짝하여 내려와서 법계(法界)의 모든 생명들을 정토(淨土)에 오르게 하시고, 종친 재상과 조야의 신민이 다 함께 복된 경사를 누리며, 전쟁이 영원히 종식되고 국운이 길이 편안하며, 대대손손을 영원히 보우하사 마침내 자비의 빛을 바라보아 묘과(妙果)가 실제로 이룩되게 하옵소서.(<陽村集> ‘釋王寺堂主毗盧遮那左右補處文殊普賢腹藏發願文’)

발원문에 따르면 이성계는 석왕사를 중창함으로써 천지와 조종의 도움을 받아 왕업을 이뤘다. 그는 또한 만생명과 만백성의 안녕 그리고 전쟁의 종식과 국운의 편안함을 기원하고 있다. 이로 보아 대체로 1377년께부터 이성계는 남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해는 바로 이성계의 사돈 지윤이 이인임과 최영에게 제거된 때였다.

신진유신 집단과의 만남


▎회암사에 있는 무학대사의 부도인 홍융탑과 쌍사자 석등. 무학대사는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었다. 회암사가 조선 전기 최대의 국찰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380년(우왕 6년) 황산대첩을 통해 이성계는 구국의 영웅이자 백성의 구원자로 떠올랐다. 그는 귀경길에 선조의 구거지인 전주에 들렀다. 1230년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떠난 지 150년 만이었다. 그는 오목대(梧木臺)에 올라 일가친척을 모아놓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한고조가 고향에서 읊었다는 대풍가(大風歌)를 불렀다.

“큰 바람이 일어나니 구름이 날리네/ 천하에 위세를 떨치며 고향으로 돌아왔도다/ 어찌하면 용사를 얻어 천하를 지킬 것인가.”(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흉중에 품은 왕업의 대망을 토로한 것이다. 조선 초 <동국여지승람>에 오목대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이는 구전일 것이다. 아무리 구국의 영웅이라도 이런 노래를 부르고도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성계가 정도전을 만난 것은 황산대첩 3년 후였다. 1367년(공민왕 16년) 26세의 청년 정도전은 이색이 성균관을 무대로 시작한 성리학 운동에 참여하여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신진유신 집단의 일원이 됐다. 1374년 공민왕이 암살된 뒤 대외정책의 변동을 둘러싼 이인임과의 권력 투쟁에서 정도전은 신진유신 집단의 선봉에 섰다. 그 결과 전라도 회진현에 유배돼 10년간 실의와 유랑의 세월을 보냈다. 절망에 빠진 그는 1383년(우왕 9년) 가을 49세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 함주(咸州) 군영까지 갔다. 그리하여 고려 말 새롭게 성장하고 있던 신흥무장 세력과 신진유신 집단이 조우했다.

가문과 신분에서 중요한 제약을 받고 있던 이성계와 정도전은 군사와 학문, 정치에 모두 뛰어난 기량을 갖추고 있었고 서로 다른 길을 통해 역사의 대안으로 등장했다. 그들은 모두 전쟁과 유배를 통해 이 시대의 고통을 이해하고 내면화했으며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일종의 시대정신을 대표하고 있었다. 최영이나 이제현, 이색, 정몽주 등 이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 역시 풍부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서로 결합되지 못한 채 가능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역사의 대안이 현실화될 계기를 발견한 것은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다른 한편 이로 인해 고려가 모색할 수 있었고 또한 고려에 주어졌던 다른 많은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다.


▎젊은 시절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이성계가 중창한 석왕사. 퇴위 후 이성계는 이곳으로 와 손수 배나무와 소나무를 심고, 서쪽에 자신의 거처를 짓게 했다. 함경남도 안변군 석왕사면 사기리에 있다.
정도전이 목격한 이성계의 군대는 훌륭했다. 무질서한 당시의 군대와 달리 명령이 엄숙하고 대오가 질서정연했다. 이성계의 군대는 또한 군사 작전 중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노력했다. 황산전투가 끝난 뒤 군사들이 장막의 기둥을 모두 가벼운 대나무로 바꾸려 하자, 이성계는 “대나무가 가벼우므로 먼 데서 운반하기 편리하겠지만 대나무는 민가에서 심은 것이고 우리가 꾸려온 그 전 물건이 아니니 그 전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돌아가면 족할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의 고려군은 왜적에 필적할 만큼 백성을 약탈했다. 이 때문에 이성계의 군사적 업적은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손자나 클라우제비츠, 모택동같이 모든 뛰어난 군사전략가는 전쟁이 정치의 연속이란 점을 늘 강조해왔다.

이로 인해 이성계는 당대의 신진유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가 황산전투에서 귀경했을 때 이색, 김구용, 권근은 축시를 써 이성계를 치하했다. 우왕 8년 호발도의 침입을 막고자 이성계가 북변으로 떠날 때, 이색은 다시 송별시를 지어 군공을 치하하고 “양조(兩朝, 공민왕~우왕대)에 같이 벼슬하니 정이 얕지 않다”고 친밀감을 표시했다.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의 신도비는 이색의 작품이고, 이방원은 이색의 문생이었다. 일반 무장과 달리 이성계는 신진유신들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최영은 그 점에서 실패했다.

이성계와 정치적으로 결합될 가능성이 가장 컸던 사람은 정몽주였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 만났으며 이성계는 정몽주에게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가졌다. 그러나 이성계의 정치적 가능성을 가장 깊이 이해한 것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이 시대가 배출한 가장 탁월한 인물 중 하나로, 문무에 정통했던 그의 기량은 한 국가와 문명을 구상할 정도로 원대한 것이었다. 이성계의 군대에 크게 감명을 받은 정도전은 이성계의 함흥 군영 앞에 서 있는 늙은 소나무에 빗대어 자신의 기대를 드러냈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 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 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 남겼구나(蒼茫歲月一株松 生長靑山幾萬重 好在他年相見否 人間俯仰便陳縱).”(<三峰集> ‘題咸興館’) 이성계의 호는 송헌(松軒)이었다. 정도전은 변방 출신의 이성계가 매우 훌륭하게 성장한 사실에 감탄하고 뒷날을 기약한 것이다.

권문세족의 폐단을 비판한 ‘안변책’


▎이성계가 대풍가를 부른 것으로 알려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는 오목대.
1382년(우왕 8년) 7월,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북면에 파견된 이성계는 이듬해에도 이곳에 머물렀다. ‘안변책(安邊策)’, 즉 ‘변경을 편안히 하기 위한 대책’은 1382년 8월 호발도의 침입을 격퇴한 뒤 올려진 것이다. 이 시기는 정도전과 만났던 때다. ‘안변책’은 이성계의 정치적 비전을 보여주는 유일한 문서다. 당시 최영을 포함해 저명한 장군 중 정치 현안에 대해 포괄적인 견해를 제시한 글은 전무하다. 그만큼 무장 이성계에게는 이례적인 것이다. 안변책은 동북면의 방어체계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한편, 열악한 지방정치의 상황을 개탄하고 수령을 엄선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상소는 매우 절제돼 있었다. 지나치게 정치적이거나 중앙정치에 개입하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자제한 흔적이 있다. 그러나 변방의 군정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삽입시켰다. 또한 그 폐단의 근원이 권문세족에 있음을 명백히 진술하고 있다.

“근년에 수재와 한재로 인하여 공사(公私)가 모두 고갈되었고 게다가 놀고먹는 중과 무뢰배들이 불사(佛事)를 핑계하고서 함부로 권세 있는 사람의 서장을 받아서 주군(州郡)에 청탁하여, 백성들에게 한 말의 쌀과 한 자의 베를 빌리게 하고는 섬이나 심장(尋丈, 8~10자)으로 거둬들이면서 이를 반동(反同)이라 칭하며 밀린 빚처럼 징수하여 백성이 배고프고 추위에 떨게 되었습니다. 또 여러 아문과 여러 원수들이 보낸 사람이 떼를 지어 다니며 기식(寄食)하여 백성의 살갗을 벗기고 골수를 부수니, 백성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처소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십중팔구로 군량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원컨대 이를 모두 금단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소서. (···) 백성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에게 달려 있고 군사의 용감함과 겁내는 것은 장수에게 달려 있는데, 지금의 군현을 다스리는 사람은 권세 있는 가문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세력만 믿고 직무는 근신하지 아니하여 군대는 물자가 모자라고 백성은 직업을 잃게 되어 호구가 소모되고 창고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청렴하고 근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공정하게 선출해 백성을 다스리게 하여 홀아비와 홀어미를 사랑하고 어루만져 주게 하며 또 능히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뽑아 그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려서 나라를 지키게 하소서.”(<태조실록> ‘총서’)

이 글은 백성들을 착취해 기생하는 다양한 무리의 인간군을 상세히 서술하고 지방행정과 국방 문제의 난점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문서가 의미하고 있는 이성계의 정치적 자각이 더욱 주목된다. 이 글은 이성계가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정도전과의 만남을 계기로 단순한 무장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정치적 각성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치가로서의 새로운 탄생이었다. 사실 이성계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힘이 얼마나 세고 활 솜씨가 대단한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자신도 이에 매우 큰 자부심이 있었다. 우인열이 이성계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성계는 쥐를 쏘되 다치지 않게 하는 그의 활 솜씨를 자랑했다.

그것은 무장으로서 훌륭한 재능이지만 건국자에게 어울리는 행위는 아니다. 다소 유치한 것이다. 이는 이성계가 본래 원대한 포부와 높은 품격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성향이 착하고 공평(淑均)하며, 국량이 너그러웠다(寬弘)”고 한다.(<고려사>, 창왕 원년 9월) 또 “활달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도량과 인후(仁厚)하여 생명을 아끼는 덕은 천성에서 나왔”다고 한다.(<태조실록> ‘총서’) 그는 좋은 의미에서 신체를 사용하는 사람 특유의 단순함과 온량함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인재에 대한 애호는 가장 큰 정치적 장점이었다.


▎보물 제1799호 지장시왕도 (地藏十王圖). 지장삼존과 시왕, 판관, 지옥사자, 선악동녀, 옥졸 등 31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이성계는 시왕도를 석왕사에 봉헌했다. / 사진제공ㆍ김영수
그런 이성계가 <대학연의>를 읽고 있었다. 북방 변지에서 태어나 소시부터 말 위에서 크고 말 위에서 입신한 그가 학문에 관심을 가진 것도 기이하지만 <대학연의>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이 시대에 이 책의 중요성을 인식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정치적 의미까지 이해한 사람은 더욱 희귀했다. 누군가의 진지한 조언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성계는 심지어 <자치통감강목>까지 읽었다고 한다. 이 두 권의 책이 조선의 정치와 문명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도전은 1384년(우왕 10년) 여름 다시 함주막을 찾아가 이성계를 만났으며, 그해 7월 종4품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복직됐다.

1388년(우왕 14년)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해였다. 새해의 시작과 함께 우왕대 최대의 정국변동인 무진정변이 발생했다. 우왕은 최영, 이성계와 연합해 14년간 권력을 분점한 이인임을 유배하고 임견미, 염흥방을 처형했다. 또한 요동정벌이 추진됐으며 정벌군이 회군해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처형했다. 회군파는 조민수파와 이성계파로 분열됐다. 조민수가 제거되자 고려에는 일찍이 경험한 바 없는 엄청난 개혁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1388년부터 1392년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 거대한 정국변동이 발생했다. 세 명의 왕이 폐위되고 그중 두 명이 죽었으며, 마침내 조선이 건국됐다.

이성계의 미래를 예언한 이인임


▎1416년 지어진 함흥감영의 정무청인 선화당. 함흥관은 선화당 앞쪽 남문 근처에 있었다. 1384년 정도전의 시 ‘제함흥관’은 이 부근의 소나무를 보고 쓴 것이다. 선화당은 1416년 축조했고 1764년에 재건했다.
역사적으로 무진정변의 의미는 14년에 걸친 권문세족의 정치가 붕괴했다는 것이다. 몽골제국이 붕괴하면서 공민왕과 이인임이 두 개의 정치적 대안을 실험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대안으로 사실상 무신정권이 등장한 것이다. 무진정변의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제2차 무신정권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1270년 원나라가 무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한 후 초유의 사태였다. 물론 1차 무신정권과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결국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고, 마침내 왕조 교체로까지 이어졌다. 이 무신들은 공민왕대 이래 거듭되는 전쟁 속에서 성장한 일종의 군사적 영웅이자 군벌이었다. 그 1세대인 안우·김득배·이방실은 공민왕에게 처형됐다. 최영과 이성계 등은 2세대였다. 우왕대의 권신 지윤과 임견미 등은 군사적 업적에서 최영 및 이성계와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들 역시 군공을 통해 미천한 신분으로부터 최고 권력에 이르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 밖에도 공민왕, 우왕대의 중요한 정치가 중 다수가 군공을 통해 입신했다. 그러므로 이들이 결국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장군들은 왕조의 수호자이자 파괴자다. 왕권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군사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든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해결은 왕조의 존속에 가장 긴요한 일이며 언제나 선택하기 어려운 딜레마를 안겨준다. 제 2차 홍건적의 난 이후 김득배가 피살되자 정몽주는 역사의 부조리에 절규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왕조의 안전을 위해 이 비정하고 부당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공민왕은 심지어 최영조차 제거하고자 했다. 그것은 지나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공민왕의 조치가 옳았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돌아왔을 때 몇 명의 장군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의 무력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 후의 과정은 대단히 복잡했지만 사실 모든 역사가 갔던 행로를 따랐을 뿐이었다. 모택동의 말처럼 정권은 총 끝에서 탄생되는 것이다.

이 사건의 마지막 정치적 의미는 바로 이성계의 급부상이다. 이성계가 비로소 역사와 정치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전무했었다. 공민왕대의 성공적인 요동공벌을 통해 중앙정치의 반열에 참여하긴 했으나 그는 전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이는 똑같이 군공을 통해 입신한 지윤이나 양백연, 조민수와도 뚜렷이 대조된다. 공민왕의 평가처럼 그는 단지 탁월한 무장에 머물러 있었다.


▎이성계의 칼 전어도(傳御刀). 길이 147㎝, 칼날인 도신은 92.0㎝, 자루 길이는 55㎝다. 칼집 길이도 103㎝에 이르는 장검으로 실전용보다 지휘도로 추정된다.
최영이 왜 이성계를 정치적 파트너로 삼았을까? 최영은 이성계를 높이 평가했다. 그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백성에 대한 배려 등이 최영의 마음을 끌었을 것이다. 또한 명망과 정치적 영향력에서 최영과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최영에게 정치적 부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편안한 존재였다. 더구나 성장하는 이성계의 군사적 영향력을 자신의 울타리 안에 포섭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이성계는 조만간 제거될 대상이었다. 실제 이성계의 군사적 성장에 대한 우려는 상당히 심각했다. 이인임은 구체적으로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이라고까지 예언했다. 그러나 최영은 이성계를 옹호하면서 “만약 일조에 위급하면 마땅히 누구를 시키겠는가”라고 반박했다. 결국 이인임이 옳았다.

1388년 요동공벌 과정에서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단행해 최영을 처형하고 우왕을 폐위시켰다. 그는 비로소 정상에 올랐다.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온 지 32년 만이었고, 나이는 54세였다. 위화도회군의 국가적 의미는 첫째로 몽골제국 이후의 대외정책이 대명 사대주의로 확정됐음을 뜻한다. 이는 1895년 청일전쟁 때까지 500여 년 지속됐다. 둘째 의미는 고려의 멸망과 조선 건국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회군 뒤 이성계는 고려 말의 대표적인 국가 과제인 전제개혁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이와 함께 군제를 정비해 40여 년간 지속된 왜구 문제를 거의 종식시켰다. 셋째 의미는 불교국가인 고려왕조가 끝나고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천명한 조선왕조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다. 이로써 1351년 공민왕 이후 시작된 고려 말의 국제적·정치적·사상적 변동에 따른 대혼란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삼봉 정도전의 초상. 이성계는 신진유신이던 정도전을 만난 후 현실 정치가로서 본격적인 변신을 하게 됐다.
최영이 아니라 이성계가 역사적 변혁을 성취한 것은 무력이 이념과 결합됐기 때문이다. 안정기에 이념은 정치체제의 가장 깊은 곳에 잠겨 있다. 하지만 변혁기에 이념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해 시대가 나아갈 푯대이자 초석이 된다. 새로운 체제는 그 이념 위에 건설되며 그 둥지 안에서 안식한다. 그것 없이는 어떤 체제도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현실적인 것이자 이념적인 것이다.

슬픔과 분노로 보낸 말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살해당한 의안대군 이방석의 묘. 뒤쪽이 의안대군 묘, 앞쪽은 세자빈 심씨의 묘다. 묘가 작아 ‘애기능’으로 불린다.
건국은 인간의 가장 큰 난제이며 건국자는 위대하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개인의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큰 희생이 따르고 상처가 남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죽였지만 오랜 동지인 정몽주를 죽여야 했을 땐 도저히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정몽주의 피살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분노했지만 건국의 길은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선택이었다.

건국 후 이성계가 겪은 불행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신적 의지처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먼저 세상을 하직했고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아들 방번, 방석과 사위 이제, 고굉(股肱)의 신하 정도전, 남은이 피살됐다. 조온·조영무·이무·조준 등 이성계의 은혜를 입은 오랜 신하들도 모두 이방원 편으로 돌아섰다. 열흘 후 그는 왕위에서 물러났다. 개인적으로 아들과 신하, 왕위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1399년 이성계는 과부가 된 경순공주를 비구니가 되게 했다. 머리를 깎을 때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자신도 불교에 깊이 귀의했다. 하지만 슬픔과 분노를 삭일 수 없었다. 한 번은 노승 신강(信剛)에게 “방번과 방석이 다 죽었다. 내가 비록 잊고자 하나 잊을 수가 없구나!”라며 비탄했다. 언젠가 정종과 이방원이 베푼 잔치에서 “밝은 달은 발에 가득한데 나 홀로 서 있네. 산하는 의구한데 인걸은 어디 있는가?”(明月滿簾吾獨立 山河依舊人何在)라는 시를 지은 뒤 “나의 이 글귀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말했다.


▎정도전이 쓴 <삼봉집> 목판. 이 목판은 정조 때 왕명으로 재간한 것이다. / 사진·권태균
1402년 신덕왕후의 복수를 천명하며 일어난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의 난은 사실상 이성계의 난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세운 나라를 스스로 뒤엎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난이 진압되자 이성계의 실낱 같은 희망도 사라졌다. 그는 심야에 일어나 큰소리로 울곤 했다. 그 곡성을 들은 태종은 자책했다. “어느 날 밤 밖에 침상을 놓고 소비 두 사람을 시켜 앞뒤에서 모기를 쫓게 하고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들으니 어디서 곡성이 심히 슬프게 났었다. 내가 이것을 매우 괴이하게 여겨 임금의 자리를 사양하고 스스로 반성하고자 하였었다.”(<태종실록> 태종 7년 9월 18일) 이성계는 1408년(태종 8년) 5월 74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정치가는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가장 위태롭다. 휴브리스(hubris: 오만)가 그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인간성은 매우 취약해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자가 많지 않다. 그리스인은 휴브리스를 멸망의 전 단계로 생각했다. 건국 후 이성계가 특별히 오만했던 것은 아니지만 후계자 결정에서 오류를 범했다.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애정에 치우쳐 정치적으로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한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오만이다. 그 하나의 결정이 연쇄적으로 모든 불행을 낳았다. 이 때문에 노승 신강은 “성상께서는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의 불행과 성상의 상심(傷心)은 모두 스스로 초래한 것(自取)입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이성계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조사의의 난까지 일으켰다. 그것은 건국자로서의 대의조차 파괴한 것이다. 이성계의 말년은 인간으로서 초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고려 말의 대혼란을 수습하고 정도전과 함께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것은 한국사의 대위업으로 평가돼야 한다고 본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710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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