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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섬 문명사(11)(마지막 회)] 서양이 발명한 ‘신들의 섬’ 발리(Bali) 

이슬람주의 막는 ‘힌두문화’ 전초기지로 개발… 토착왕조의 자결조차 유적으로 박제된 곳 

글·사진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asiabada@daum.net
발리를 향한 서구인들의 시선은 조야하기 짝이 없었다. 가슴을 드러낸 여인을 관음하며 ‘원시적인 생명력’이라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지난 100여 년간 ‘오직 힌두’만을 외치는 문화정책이 이어지는 가운데, 발리의 섬 문명은 질식돼 갔다.

▎발리에는 2만여 개의 힌두사원이 산재해 있어 ‘신들의 섬’이라고도 불린다. 그중에서도 아궁화산 근처에 위치한 브사끼(Besakih) 사원은 가장 규모가 크다. 브사끼 사원 정문 사이로 흰 연기를 내뿜는 아궁 화산이 보인다. / 사진·연합뉴스
많은 한국인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인도네시아의 발리를 찾는다. 적당한 거리와 만족할 만한 환경, ‘발리 마사지’ 같은 스파(Spa) 산업이 신혼여행객들을 유혹한다. 발리를 갈 때 굳이 ‘인도네시아에 딸린 섬’이라고 인식하지도 않는다. 그만큼 발리는 인도네시아 공화국 소속으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관광의 섬으로 다가온다.

인도네시아는 1만7509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발리 섬은 인도네시아 수도 수마트라가 위치한 자바 섬 바로 옆에 있다. 발리에서부터는 동글한 섬들이 이어지는 소순다 열도가 시작된다. 말레이 반도에서 시작해 수마트라와 자바 섬으로 이어지는 ‘섬들의 체인’은 발리를 거쳐 저 멀리 뉴기니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자바 섬 동쪽 끝 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4㎞만 가면 발리 섬을 갈 수 있다. 물론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해 발리 섬 남단에 있는 응우라라이(Ngurah Rai) 공항으로 곧바로 갈 수도 있다.


남태평양의 외딴섬 타히티(Tahiti)는 태평양 특유의 열대 기후로 고갱(Paul Gauguin)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선교사들로 인해 섬이 오랜 기간 서양화된 데다 물가가 비싸, 많은 관광객들이 실망한 채 돌아간다. 인도는 힌두교와 불교의 성지로 ‘신성스럽게’ 포장됐지만, 되레 그 신비함이 관광객들에게는 ‘난해함’으로 다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너무 넓다. 발리 섬은 아시아와 태평양을 적절히 혼합해 냈다. 이슬람이 주류인 인도네시아인데도 힌두 문화가 번성했고, 남태평양 특유의 경쾌하면서도 나른한 풍광도 매력적이다.

새롭게 만들어진 ‘근대(近代)의 섬’


▎발리의 힌두유적은 네덜란드가 식민통치하던 20세기에 제작된 경우가 많다. 발리 중심가에 있는 이 석상도 나이가 갓 100세에 불과하다. / 사진·주강현
그런데 이 모든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라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발리는 ‘새롭게 탄생한 섬’이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마르크시즘 저술가로 손꼽히는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일찍이 <만들어진 전통(The Invention of Tradition)>(1983)이란 역작을 펴낸 바 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당수의 ‘전통’이 사실은 근자에, 혹은 비교적 짧은 역사적 단계를 거치면서 ‘어차피 만들어진 것’임을 밝힌 바 있다.


▎고갱을 필두로 발리를 찾은 예술가들은 ‘가슴을 드러낸 여인’이 순수한 발리문화의 정수라고 여겼다. 우붓(Ubud)의 한 예술가 화랑에 전시돼 있는 작품들. / 사진·주강현
홉스봄은 스코틀랜드인의 전통을 예로 든다. 오늘날에도 스코틀랜드인은 각자의 씨족을 표시하는 색깔과 무늬로 된 전통의상인 ‘킬트(Kilt)’를 입는다. 일종의 주름스커트다. 스코틀랜드인은 킬트가 까마득한 고대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킬트는 전통 의복이기는커녕 스코틀랜드가 1707년 잉글랜드에 의해 통합된 이후 한 잉글랜드인이 발명한 것이다. 부족별 격자무늬 천마저도 훨씬 후대의 발명품이다. 사실 영국 버킹검궁전의 화려한 의장대나 ‘신사의 나라’ 이미지 따위도 모두 빅토리아 시대에 만들어진 전통이다.

섬의 문명사는 육지에 비해 급격히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섬은 강한 파도로 둘러싸여있지만 섬 자체는 연약하다. 섬은 강한 바위로 둘러싸여있지만 생태계는 지극히 취약하다. 특히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동식물의 습격에서 섬은 손쉽게 정복당한다. 더군다나 외부로부터 낯선 인간이 들어오면서 섬의 인간생태계는 급격히 변모한다. 섬은 ‘규모의 경제학’에서 육지에 비할 바가 못 되는 탓이다. 작은 면적 탓에 자원, 환경 등이 모두 제한적이다.

하와이왕국이 멸망하면서 하와이 원주민의 모든 문화가 급격한 변모를 겪은 것이 좋은 예다. 서양인이 옮겨온 천연두 같은 전염병이 남아메리카를 휩쓸어 잉카와 마야족을 멸망 시켰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태평양의 섬들이 결딴난 것은 훨씬 덜 알려져 있다. 발리의 급격한 변모와 새로운 문명의 탄생은 외부충격이 섬을 뒤흔든 전형적인 사례다.

네덜란드 침략 맞선 ‘명예로운 죽음 행진’


▎발리 힌두문명은 ‘공식적으로’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발리 최대명절인 ‘갈룽안(Galungan)’을 맞은 발리인 가족이 힌두사원을 방문한 모습. / 사진·연합뉴스
잠시 세계지도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해양세계의 대부분은 ‘만들어진 작품’이다. 유럽인이 카리브 해를 ‘서인도제도’로 작명한 이래 아메리카 원주민은 졸지에 ‘인디언’이 됐다. 유럽은 전혀 상관없는 인종과 언어로 이뤄진 흩어진 섬들을 임의로 구조조정해 신생국가로 독립시켰다.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의 연장선에서 ‘인도양의 섬들’이란 뜻을 가진 ‘인도네시아’가 탄생했다.

인도네시아의 동쪽 끝은 서파푸아다. 뉴기니 섬을 정확히 절반으로 잘라냈다. 뉴기니 섬 서쪽은 네덜란드, 동쪽은 영국이 지배했던 역사에서 비롯됐다. 얼굴이 검은 뉴기니인은 인도네시아 계와 상관도 없는 종족이지만 ‘인도네시아인’이 됐다. 해양세계의 다양성과 역사성이 무시된 채 어느 날 갑자기 단일 국민국가가 탄생하자 불화가 터져 나왔다. 동파푸아 독립 이후에 자유파푸아운동(OPM)이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무력충돌은 보르네오 섬 남부 칼리만탄(Kalimantan)과 바탐(Batam) 섬, 말루쿠(Maluku) 섬에서도 간간히 벌어진다. 인도네시아령이었던 티모르 섬에서 벌어진 내전도 식민지배의 결과다. 1999년 한국의 ‘상록수 부대’가 유엔 평화유지군 일원으로 파병되기도 했다.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 그림은 1950년대 유행을 타고 이곳저곳에 그려졌다. / 사진·주강현
이슬람을 믿는 인도네시아인은 전체의 87%에 이른다. 그러나 인도양을 건너 들어온 불교와 힌두교, 기독교가 용광로 속에서 녹아 들지 못하고 강퍅하게 다수의 섬에 산재돼 있다. 발리는 힌두를 선택했고, 힌두는 두말할 것 없이 인도문명의 영향이다. 인도양 상인들은 아프리카 동부로부터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 말루쿠 섬 등으로 교역을 했다. 포르투갈 탐험가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아프리카 희망봉에 다다랐을 때, 이미 그곳에는 인도양 상인들이 있었다.

4세기부터 힌두 자바인이 발리에 거주하며 힌두문명을 뿌리내렸다. 16세기경 이슬람세력이 자바에 근거지를 둔 마자파힛(Majapahit) 왕조를 멸망시키자 많은 신하, 승려, 공예사들이 발리로 피난을 오게 됐다. 이때부터 발리에는 문화의 꽃이 피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19세기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일대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이때 발리 원주민들은 네덜란드에서 거칠게 저항했고, ‘푸푸탄(Puputan) 전쟁(1849)’으로 이어진다. ‘푸푸탄’이란 ‘명예로운 죽음 행진’을 뜻한다. 패색이 짙어지자 발리 왕족과 귀족들은 단검을 뽑아 들고 자결했다. 죽음의 행진에는 여성과 아이들도 참가해 4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발리를 다녀온 관광객들은 기념관에서 발리인들의 치열한 저항의 모습들을 옛 사진과 디오라마, 전쟁기념비 등을 통해서 구경했으리라.

서양인들은 발리를 위험하게 여겼으며, 맹렬한 살상(殺傷) 욕을 수반하는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의식을 지내는 발리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처럼 그렇게 유순하고 개방적이고 외국인에게 친근한 섬이 아니었다는 좋은 증거다. 푸푸탄 전쟁에서 보듯 발리는 저항적이었다. 그 저항의 ‘독’을 빼내고 문화를 주입하자 발리는 어느새 ‘문화의 섬’ ‘전통의 섬’으로 둔갑하게 된다. 1908년, ‘야생’의 발리는 기나긴 투쟁 끝에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귀착된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발리는 ‘파라다이스’로 변모했다. 유럽 사람들은 발리를 문화적, 자연적으로 풍요로운 곳으로 생각했다. 전 세계의 여행가와 이국적 삶의 흥분을 경험하고 자 했던 상류층이나 20세기 초 유럽 문화의 대안을 찾기 위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사람들은 중간 정도의 부로도 하인을 거느리고, 자동차, 예술품과 원주민 마을의 그림 같은 발리 스타일의 집을 살 수 있는 환경에 매력을 느꼈다.

발리를 찾은 이들은 가슴을 드러낸 아가씨와 어린 소녀 무용수가 발리를 상징하는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서양인의 이미지 창출에 힘입어 발리의 여성은 소녀로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벗은 몸으로 예술작품에 등장했다. 여성적 이미지로서의 인도가 영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면, 발리는 독일인에 의해 여성적 이미지를 가지게 된 셈이다.

서구인들의 관음이 빚어낸 ‘벌거벗은 발리’


▎자유로움을 갈구하는 예술가들에게 ‘원시적 생명력’을 간직한 듯한 발리 섬은 낙원과도 같았다. 예술가 거리가 조성돼 있는 우붓 전경.
독일과 다른 유럽 관광객들은 ‘야만적인 발리’를 ‘여성의 발리’, 즉 가슴을 드러낸 여인들이 웃음을 짓는 섬으로 채색했다. 벌거벗긴 다음에는 ‘세련된 발리’, 즉 섬의 모든 사람이 예술가인 곳으로 바꿨다. 독일의 학구적 전통은 발리에 문화적, 예술적 풍요의 이미지를 제공했고, 나중에 여러 인류학자는 이를 이론적으로 보강했다.

적도 부근의 화사한 꽃들은 예술을 옹호하고 힌두신앙을 극대화시키는 데 좋은 소재였다. 오늘날 발리는 방문하는 사람들은 곳곳에 꽃이 뿌려지는 풍경에 매료된다. 머리에 꽃이 올라앉은 소녀들은 꽃쟁반을 머리에 이고 의례를 연출한다. 욕조에는 꽃이 그득하다. 이러한 풍경은 사진으로 연출돼 온갖 미디어로 소개된다. 그래서 발리의 욕조를 떠올리면, 언제나 욕조 그득 차있는 열대의 꽃잎을 연상한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만들어진 전통’이다.

기존의 전통은 박제돼 ‘원시적 낙원’ 이미지를 강조하는데 동원되기도 했다. 1910년대 발리에 연쇄적으로 닥친 재난과 관련해 식민당국이 보여준 조치가 그랬다. 1917년 지진이 일어나 1000여 명이 죽거나 다쳤고, 다음해에는 세계적으로 25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스페인 독감’이 발리에도 창궐했다. 1919년에는 발리 남부에 생쥐가 대량으로 발생해 곡물 수확량이 격감하기도 했다. 당시 발리 사람들은 연이은 재난을 ‘신들의 진노’로 받아들였다. 신들에 대한 의례를 정성껏 하지 못했던 게 재난의 이유라는 것이다. 발리인들은 신들을 진정시킬 목적으로 주술적인 의식을 적극 수행했다. ‘상향 드다리’(Sanghyang Dedari, 빙의 무용)가 대표적이다.

네덜란드 식민당국은 당시 성행하던 신앙행위에 주목했다. 이를 중국이나 유럽 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발리 전통문화’로 해석하고, 재건과정에서도 ‘순수성’을 복원하는데 혈안을 기울였다. 발리를 ‘고대 자바문화의 박물관’으로 만드는 게 이들의 목표였다. 폭력의 역사를 탈색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1920년대부터 발흥했던 이슬람 민족주의에 대응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네덜란드는 발리를 자바 섬에서 밀려드는 이슬람주의를 차단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삼고, 발리 고유의 ‘힌두 문명’을 강조하는 데 앞장섰다.

발리를 관광지로 개발하는 초기 단계에서 1930년대 초까지 발리는 관광지도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했고, 당시 유명했던 자바의 부속 섬 정도로 인식됐다. 이 시기에 발리의 이미지들은 대충 결합됐고, 섬의 명물은 벌거벗은 여인들이었다. 1920~1930년대의 발리는 정신적으로 더 깊고 부유한 세계인 유럽과 미국에서부터의 도피처였다. 부자와 유명인사들이 파리, 베를린과 뉴욕의 살롱의 연장선에서 발리를 찾았다. 젊은 동성애자에게 온화한 자연의 섬인 발리는 엄격한 규칙의 유럽과는 대비되는 곳이었다.

발리는 점차 관광 여행지 중 가장 로맨틱한 곳으로 발전됐고, 섬에 관한 책과 출판물들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발리의 새로운 풍경, 소리와 냄새에 열광한 장기 거주자 또는 여행자들은 세상사람들에게 발리에 대해 이야기해주기 위해 서둘러 글을 출판했다. 그들은 미국과 유럽에 세계 이국적 장소를 소개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과 같은 잡지에 글을 실었다. 책과 기사의 제목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발리의 경향을 잘 나타냈다. ‘열대 동화의 나라’ ‘자연의 파라다이스’ 그리고 ‘신들의 섬’이 그 예다.

서양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1930년대 발리는 ‘발리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했다. 현재의 관광 중심이 된 음악(가믈란 등), 무용(레공, 께짝 등), 회화의 양식이 이때 탄생했다. 독일인 화가이자, 음악가인 발터 스피스(Walter Spies)가 그 중심에 있었다. 우붓(Ubud)의 영주였던 ‘초코르다 스카와티’ 일족에 초대받은 그는 각계 명사를 집으로 초대했다. 멕시코의 화가 미겔 코바루비어스(Miguel Covarrubias)나 캐나다의 음악 연구가 콜린 맥피(Colin McPhee),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등이 이름을 남겼다.

냉전시기 히피들의 마지막 해방구


▎다양한 인종의 관광객이 해변을 거닐고 있다. / 사진·주강현
1950년대에 들어서서 작가들은 ‘파라다이스 발리’에 보다 복잡한 문화적 의미를 가미했다. 할리우드는 1930년대 발리의 요소를 빌려서 이미지를 재배열했다. 1970년대 한국에도 소개돼 큰 인기를 끌었던 조슈아 로건(Joshua Logan)의 영화 <남태평양(South Pacific)>(1958)이 대표적이다. 영화에서 발리는 태평양전쟁 가운데 망중한(忙中閑)을 즐길 수 있는 미국 군인의 파라다이스, ‘Bali-Hali’로 재탄생했다.

전쟁의 트라우마가 지나간 후에 발리는 또 다른 이미지로 채색된다. 인도의 첫 수상이자 새롭게 부상하는 비동맹국의 영웅이었던 네루는, 발리를 ‘세계의 아침’이라고 상찬했다. 발리를 수식하는 말들 가운데 세계인의 뇌리에 가장 확실히 각인된 말이었다. 발리는 유럽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의 영역이 됐다.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매력적인 발리의 이미지를 지지했다. 수백 개의 문화와 수천 개의 섬을 통일한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는 발리에 각별한 애정을 품었다. 그의 어머니가 발리 출신이었다. 덕분에 1920~1930년대 수카르노가 통치하던 시절 인도네시아인들도 발리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대통령은 발리에 궁전을 지어 정기적으로 재판을 했으며, 벽에는 발리의 그림을 걸고 발리 무용수로 접대를 하기도 했다.

1960년대 인도네시아 신정부는 발리 관광에 전기를 마련했다. 1966년 일본에서 받은 전쟁배상금으로 발리 최초의 리조트인 ‘사누르 발리 비치 호텔’을 건설하고, 이듬해에는 응우라라이 공항을 개항했다. 결정적으로 1962년 호주에서 상영된 서핑 영화 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기폭제가 됐다. 히피들은 서핑과 함께 본국에선 금지된 마리화나와 동성애 등을 공공연히 즐겼다. 이 모든 것이 파라다이스로서의 발리의 이미지를 고무시켰다.

여행사는 발리 매력에 관한 새로운 문학을 만들어냈다. 발리에 대한 책을 출판하거나, 기존에 집필한 책을 재출간하기도 했다. 기존에 있던 이미지가 새로운 의도와 부합했기 때문에 관광 산업은 옛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편리했다. 여행사 입장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발리였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지속된 홍보와 섬을 압도하는 여행 관련 글과 학술논문은 발리의 이미지를 반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대통령, 수상, 인류학자, 영화감독과 시인들이 총동원됐다. 풍부한 고대 문화가 있는 ‘이브처럼 옷을 입은 태양에 그을린 여성’과, ‘모든 것이 평화로운 중세사회’, ‘만나는 모든 사람이 무용수이자 예술가’인 데다가 ‘매일의 시작과 끝이 찬란한 자연과 함께하는 곳’이 바로 당대의 발리였다.

우리가 흔히 쓰는 ‘스파’라는 말도 발리가 1980년대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탄생한 말이다. 지압과 아로마 오일을 이용한 마사지. 발리의 전통 약초를 이용한 각질 제거 마사지, 발리의 목욕 문화, 그리고 전통 의료술에 기초한 약초 치료가 버무려져 발리의 스파가 만들어졌다.

활화산처럼 생동하는 세계의 섬 문명


▎발리는 남태평양 특유의 풍광과 독특한 힌두문화가 버무려져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이름 높다. 뒤편에 보이는 아궁 화산은 최근 흰 연기를 뿜어내며 분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오래된 도시 우붓을 찾아간 이들은 전통연극을 볼 수 있다. 이를 본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는 1980년 <네가라(Negara)>를 저술했다. 한국에서는 <네가라: 19세기 발리의 극장국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다.

‘네가라’는 인도네시아어로 ‘국가’를 뜻한다. 기어츠는 1957년부터 1년간 발리에 머무르며 원시국가의 매커니즘을 관찰했다.

“이 국가가 항상 추구하는 것은 연출이고 의식이며, 발리 문화가 집착하는 사회적 불평등과 지위에 대한 자랑을 공적으로 연극화하는 것이었다. 발리의 국가는 군주가 주연, 승려가 감독, 농민이 조연과 무대장치 기술자아 관객을 맡는 극장 국가였다. 수백·수천의 사람과 대량의 부를 동원해 행해지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화장 의례와 삭치(이 뽑기) 의례, 봉헌식이나 순례나 피의 공의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의례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었고, 그 때문에 국가가 있었다.”

이 짧은 지면에 기어츠의 극장국가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의 시각에도 오리엔탈리즘의 잔영(殘影)이 드리운다. 이런 식으로 발리는 이론화되고 창작되고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 차원에서 소비되고 있다.

해발 3142m의 아궁(Agung) 산은 발리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인도네시아에서 다섯째로 높은 활화산이다. 발리인들은 아궁 산을 ‘천국으로 가는 문’이라 부르며 신성시한다. 1963년에 마지막으로 화산 폭발이 있었다. 20세기 인류가 경험했던 화산 폭발 중 가장 규모가 컸다. 현재 아궁 화산은 다시 연기를 내뿜으며 분출물을 토해내고 있다. 발리는 지금도 새롭게 생성되고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발리의 인문환경도 새롭게 생성되는 중이다. 해양문명사라는 관점에서, 발리의 기묘한 문화는 아궁 화산만큼이나 젊고 새롭고 근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섬 문명사 연재를 마치면서 굳이 발리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모두에서 밝혔듯이, 많은 섬의 문명이 만들어졌다. 역사적 필연이기도 했고, 자연적 재해의 결과이기도 하고, 전쟁의 여파이기도 하고, 종교 전파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다. 발리에는 20세기에 문화 르네상스가 밀려들어 왔다. 그것이 발리 원주민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외부인은 정확히 볼 수가 없다. 발리인 스스로가 문화적으로 변모했을지도 모른다. 위기가 닥치면 유전인자 자체가 새로운 선택을 한다고 한다. 발리인들 역시 그러한 선택을 했을 법하다.

서양인, 특히 호주 백인들은 발리를 앞섬 정도로 생각하고 부단히 들어온다. 서양인 매춘관광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아름답게 만들어진 벗은 여성의 이미지 뒤에서, 매춘산업과 관광산업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한국인들도 게걸스럽게도 발리와 발리문화를 탐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인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이 제주도를 소비한다. 제주도는 쇼핑과 자연유산의 보고로 중국인에게 각인돼 있다. 한때는 기생관광의 메카이기도 했다. 4·3사건 등의 비극을 돌이켜보면, 그리고 ‘관광의 섬 제주’ 이미지 역시 개발경제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임을 상기해보면, 지금의 제주도 역시 상당부분 ‘만들어진 전통’이다. 세계의 섬에서, 이렇게 전통은 지금도 만들어지는 중이다.

※ 주강현 - 제주대 석좌교수, 아시아퍼시픽 해양문화연구원장. 해양사·문화사·생활사·생태학·민속학·고고학 등 전방위로 연구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는 해양문명사가. 아시아 바다는 물론 대양의 섬으로 시야를 넓혀가며 비교해양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적도의 침묵> <독도강치 멸종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712호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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