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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분석] 베트남전의 반면교사… 한반도 위기 해결의 교훈은? 

힘의 우위 없는 평화협정은 ‘속 빈 강정’ 

배정호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
통일 위해서라면 적대세력도 포용한 호찌민…통일전선전술 통한 ‘정치전쟁’ 승리, 내부로부터의 붕괴 꾀해

▎베트남전쟁 중 격추된 미군 항공기의 잔해. 베트남 하노이시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 사진:배정호
오늘날의 베트남은 동남아의 경제강국이고 성장 잠재력이 매우 큰 인도차이나반도의 국가이지만, 1960년 대는 물론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쟁 국가였다. 북베트남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은 국력의 절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베트남공화국을 상대로 게릴라전에서 정규전으로,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확대되는 전쟁을 치르며 통일을 이뤘다. 국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어떻게 승리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단 상태인 한반도에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필자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베트남사회과학원을 방문해 쩐꽝민 동북아연구소장, 팜홍타이 동북아연구소 부소장, 딘꽝하이 역사연구소 소장 등 전문가들과 공동 연구를 추진했고, 호안찌바오 전 베트남사회과학원 원장, 레반쿠앙 전 전략연구원 원장 등과 토론회를 가졌다. 이 글은 그와 같은 연구 과정의 결과물이다. 먼저 베트남전쟁의 발발부터 들여다보자.

베트남도 한국과 유사하게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해방을 맞이하게 됐으나, 연합군에 의해 북위 16도를 기준으로 분할됐다. 따라서 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은 베트남의 북부 지역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식민지 지배권을 주장하던 프랑스를 상대로 민족해방전쟁을 전개했다. 그 결과, 베트남공화국이 승리하고 1954년 7월에 제네바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제네바 휴전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의 이남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했고,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또다시 분단됐지만 1956년 7월 국제기구의 감시 아래 남북 베트남의 통일선거를 치르고 통일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국제 냉전의 심화, 남북 베트남의 무력 대치, 통일 선거에서 남베트남의 열세 등으로 남베트남의 베트남공화국 정부가 현실적으로 남북 베트남의 통일선거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베트남공화국의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베트남공화국이 제네바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님’을 명분으로 내세워 통일선거를 거부했고, 이에 따라 국제기구 감시하의 통일선거는 실현되지 못했다. 게다가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반정부 세력을 억압하면서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핍박과 탄압, 체포를 한층 강화했다.

응오딘지엠 대통령의 거부로 남북 베트남의 통일선거가 무산되고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체포 등이 강화되자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 주석은 ‘선거를 통한 베트남공화국의 공산혁명’ 전략을 수정·전환해, 통일전선전술을 통해 베트남공화국을 타도하고 공산화 통일을 이루는 혁명전략을 수립했다. 호찌민은 혁명투쟁에서 ‘남베트남인의 손에 의해 남베트남을 타도할 것’을 강조했다.

호찌민과 베트남노동당은 남베트남 공산혁명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응오딘지엠 정권에 비판적인 모든 계층, 각종정파, 종교단체, 사회단체 등을 총망라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을 1960년 12월 결성했고, 이 조직을 현장에서 지휘할 수 있는 남베트남중앙국을 1961년 1월 설치했다. NLF와 남베트남중앙국의 설립 이후 남베트남 인민해방군의 게릴라 활동은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됐다. 남베트남 인민해방군은 베트콩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베트콩은 베트남공화국이나 미군 측이 남베트남 인민해방군을 비하해 통칭한 것이다.

NLF는 응오딘지엠 정권을 ‘미 제국주의 주구 정권’, ‘족벌 독재정권’ 등으로 비난하면서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한 반정부 투쟁을 선동했고, 베트남 인민해방군은 기습 공격, 매복 공격 등 게릴라전으로 남베트남의 군대·행정기관 등을 공격했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지시에 따라 남베트남 지역 내 베트콩들이 반정부 투쟁, 게릴라전 등을 조직적이고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베트남전쟁은 내전으로 발발했다.

게릴라전에서 정규전으로,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확전


▎베트남 노동당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는 호찌민. 공산주의를 통한 세 확산에 한계를 느낀 그는 민족주의 이념에 호소하며 다양한 세력을 규합하는 통일전선전술을 펼쳤다. 사진은 호찌민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촬영했다. / 사진:배정호
베트콩들의 게릴라전으로 시작된 베트남전쟁은 남베트남의 정치적 혼란기에 북베트남의 정규군이 남파되면서 정규전으로 확전됐다.

남베트남의 정치적 혼란 상황을 살펴보면 응오딘지엠 대통령의 족벌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 토지 개혁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 종교 차별과 승려들의 분신자살, 지식인들의 반정부 시위 등 정치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1963년 11월 쿠데타에 의해 응오딘지엠 정권이 붕괴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후 베트남공화국에서는 쿠데타의 악순환이 지속됐는데, 응우옌반티에우 장군이 1965년 6월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10차례의 정권교체가 있었다. 남베트남은 정권교체의 후유증으로 국가기강의 해이는 물론이고 군대의 지휘 체계, 행정 체계, 주요 기관의 행정 능력 등이 모두 심각하게 약화됐다. 특히 정보기관·대공정보기관의 능력은 우려스러울 정도로 취약해졌다.

호찌민과 베트남민주공화국은 이와 같은 베트남공화국의 정치적 혼란과 취약성을 놓치지 않고 정규군을 남파해 베트콩들의 공세를 강화시켰다. 남베트남 내 정치적 혼란이 가장 심했던 1964년, 1만2000여 명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남베트남 지역으로 침투했다. 이로써 베트남전쟁은 게릴라전 수준을 넘어 정규전 규모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64년 8월 2일 통킹만에서의 미국 구축함에 대한 어뢰공격 사건, 1965년 2월 7일 베트남민주공화국 정규군에 의한 중부 고원지대의 미군 고문단 숙소 및 비행장 기습공격 등을 계기로 베트남전쟁은 미군이 본격 개입하게 되는 ‘전쟁의 미국화’로 전환됐다. 그리고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확전되고 말았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 직후인 1964년 8월 5일 항공모함의 함재기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해군기지, 유류 저장고 등을 폭격했고, 나아가 1965년 2월부터 북위 17도 군사분계선의 이남에 국한했던 제한전을 벗어나 북위 17도 이북의 군사시설, 항구시설에 대한 공습까지 대대적으로 개시했다. 아울러 1965년 3월 미국의 해병 2개 대대가 다낭에 상륙했으며, 같은 해 5월에는 미국 지상군이 파병됐다. 또 ‘베트남전쟁의 미국화’로 전환되면서 미국은 한국·호주·뉴질랜드·태국·필리핀·스페인 등 자유우방 25개국에 베트남공화국의 지원을 위한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은 1965년 10월에 청룡부대(해병여단)를 파병하고, 이어서 맹호부대(육군)를 파병했다. 미국의 요청에 따라 자유우방 국가들의 전투부대·비전투부대 등이 파병되면서 베트남전쟁은 북위 17도 이남의 제한전에서 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됐을 뿐 아니라,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확전됐다.

반전 여론과 파리평화협정 체결 그리고 북베트남의 승리


▎베트남전쟁 중 고엽제를 투하하는 미군 전투기들. 베트남전쟁은 미국과 베트남 등 참전국 모두에 큰 상처를 남겼다.
베트남전쟁이 내전을 넘어 국제전 수준으로 확대되자, 베트남민주공화국도 군사적 총공세를 가하기 위해 1965년 대규모 정규군을 남베트남에 본격적으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정규군의 규모가 1965년 말 약 20만 명이었고, 1966년 들어서는 30만 명을 넘었다.

그러나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정규군과 베트콩은 각종 전투에서 미군과 연합군의 소모작전에 휘말리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미군과 한국군 등 연합군이 산악 정글에 구축돼 있던 베트콩과 베트남민주공화국 전투부대의 근거지를 공격해 적지 않은 타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콩과 베트남민주공화국은 이 같은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구정 연휴를 틈타 대공세를 감행했다. 구정 대공세는 그다지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군과 베트남공화국의 정부군에는 상당한 타격을 가했지만,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정규군과 베트콩도 그 이상의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구정 대공세는 미국·유럽·일본 등 자유우방 세계가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비판하는 반전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한 결과를 가져왔다. 베트콩의 사이공 공격 장면이나 미국 대사관의 점거 장면 등이 TV 등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되면서 미국 시민을 비롯해 전 세계 사람이 세계 최강국 미국의 고전에 주목하게 됐고, ‘베트남전쟁의 승리를 낙관하기 어렵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비판하는 ‘반전 여론’이 조성됐다.

미국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반전 여론이 급속히 확산되자 미국 정부도 베트남전쟁에 더 이상 지원군을 파병하는 것이 어렵게 됐고 베트남전쟁의 정책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미국은 전쟁이 아닌 협상으로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했다.

미국과 베트남민주공화국 사이에 비밀평화협상이 추진됐다. 비밀평화협상이 우여곡절로 겪으며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진행될 때, 다른 한쪽에선 베트남공화국이 무력통일을 위해 1972년 3월 ‘춘계 대공세’를 감행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베트남공화국의 무력통일 의지를 좌절시키고 평화협상을 성사하기 위해 1973년 4월부터 북위 17도 이북의 북베트남 지역은 물론, 그때까지 성역으로 간주돼 왔던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까지 맹폭격을 가했다.

이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지도자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미군의 막강한 공중 지원이 있는 한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게 됐다. 즉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지도자들이 평화협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파리평화회담이 헨리 키신저 당시 미 대통령 안보 보좌관과 레둑토 베트남민주공화국 정치국원의 협상에 의해 성사되고, 1973년 1월 28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파리평화협정은 미국·베트남민주공화국·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공화국임시혁명정부(PRG) 등 4개국이 조인하고, 여기에 ‘평화협정의 국제관리감시위원회’의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국, 아울러 영국·프랑스·소련·중국 등 강대국이 보증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그러나 파리평화협정은 곧 한계를 보였다. 파리평화협정에 따라 미군을 비롯한 한국군 등 연합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자 베트남민주공화국 지도자들은 전력의 공백을 테스트한 뒤, 총공세를 취했다.

베트남노동당의 통일전선전술과 정치전쟁의 승리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지도부는 한편에서는 남베트남공화국 임시정부(PRG),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 등을 통해 끊임없는 국지전 도발과 함께 좌우 연립정부의 구성 등 위장전술을 펼치고, 다른 한편에선 17개 사단과 수만 대의 차량을 동원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함락하기 위한 총공세를 가했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총공세에 착수한 지 불과 1개월여 만에 베트남공화국은 항복했다. 1975년 4월 30일 무조건 항복 선언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월남’으로 알려진 베트남공화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경제력 등 전체적인 국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상당히 열세였던 베트남민주공화국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이 베트남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은 통일전선 전술에 의한 ‘정치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통일전선전술은 1921년 6월 제3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레닌이 제시한 전술이었다. 각국의 공산 진영은 자신의 세력이 취약할 때 정체를 숨기고 세력 규합과 확장을 위해 연대전술을 전개했는데, 이 위장된 연대전술이 바로 통일전선전술이다. 통일전선전술의 핵심은 각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해관계를 같이하기만 한다면 때론 이념적 적대세력까지도 수용하는 광범위한 연대전술이다.

호찌민과 베트남노동당도 남베트남 지역에서 공산주의 이념으로 세력을 확산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상황을 고려해 통일전선전술에 따라 공산주의 이념을 내세우지 않고 민족주의 이념에 호소하며 남베트남의 친미·반공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모든 계층·정파·종파·사회단체 등과 연대했다. 즉 1960년 12월 통일전선 조직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을 결성했다.

이후 호찌민과 베트남노동당은 남베트남 지역의 현지 혁명지도부인 남베트남중앙국(COSVN)의 지휘 아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을 거점으로 게릴라전, 정치투쟁 등을 전개했다.

베트남노동당의 정치전쟁 목적은 남베트남의 국론 분열과 민심 이반 등을 이용해 반정부 투쟁을 격화시키고, 반전 평화운동의 활성화를 통해 미군 철수를 전략적으로 유도하며, 궁극적으로는 친미반공정권의 타도와 공산화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당시 남베트남 사회는 농민, 노동자, 불교 등 종교계, 학생, 지식인 등이 응오딘지엠 정권의 독재정치에 저항하는 반정부운동을 격렬하게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노동당이 통일전선전술에 의한 정치전쟁을 전개하기에 좋은 여건이었다.

따라서 베트남노동당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은 응오딘지엠 정권을 ‘미국 제국주의 주구정권’으로 비난하는 선전전을 전개하며 동조 세력을 확장했고, 반정부운동이 정권 타도투쟁으로 전개되도록 막후에서 공작을 했다. 미군 철수를 전략적으로 유도하기 위해선 반전 평화운동을 선동했다. 반전 평화운동은 1967년 9월,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쭝 딘쥬가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반전(反戰)·반미(反美)를 외치며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의 즉각 중지’ ‘북베트남과의 대화를 통한 평화적 문제 해결’ 등을 역설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베트남공화국의 붕괴 후 쭝 딘쥬는 북베트남의 스파이임이 밝혀졌다.

1968년 1월의 ‘구정 대공세’ 이후에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의 막후 영향 아래 ‘민족민주평화세력연맹’이 결성돼 남베트남의 반전·반미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불교 승려, 가톨릭교회 신부 등 종교인이 적극 참가했다. 베트남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반전 평화운동은 남베트남뿐 아니라 미국 등 국제사회에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이 같은 반전 평화운동에는 베트남민주공화국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 등이 개입해 있었다. 베트남민주공화국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은 민족주의 입장에서 정규군의 참전을 반미투쟁으로 정당화하는 선전전을 전개하면서 미군 철수를 겨냥한 반전 평화운동을 막후에서 선동했다.

그 결과, 베트남민주공화국 정규군의 참전은 남베트남 사회에서 민족주의에 입각한 반미투쟁으로 인식됐다. 미국 사회에서 확산된 반전운동은 미국 정부가 더 이상 베트남으로 파병하기 어렵게 했고, 나아가 베트남에 대한 정책을 전쟁이 아닌 평화협상 쪽으로 전환하도록 했다.

남베트남 내부의 적과 베트남공화국의 정치전쟁 승리


▎전쟁 현장에서 호찌민(앞줄 오른쪽)은 일반 병사와도 가깝게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호찌민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 사진:배정호
파리평화협정 체결 이후 미군이 베트남에서 즉시 철수하자 베트남민주공화국은 전쟁에서 승리해 공산화 통일을 이룩했다.

이처럼 남베트남에서 ‘비공산·민주주의·민족주의’ 세력과의 연대에 의한 반정부 세력의 확장, 국론 분열, 민심 이반과 정부의 고립화 등은 전쟁 수행능력의 약화로 이어졌고, 베트남공화국의 ‘내부로부터 붕괴’를 재촉했다. 또 반전 평화운동은 평화협정의 체결과 이행, 미군 철수 등에 영향을 미치면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승리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이와 같은 베트남공화국의 내부로부터 붕괴, 반전 평화운동과 미군 철수 등은 통일전선전술에 의한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전쟁’ 결과이기도 하다. 베트남전쟁은 전시는 물론 분단 대치 상황에서도 ‘정치전쟁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교훈을 깨닫게 해준다.

베트남민주공화국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은 응오딘지엠 정권의 붕괴 후 정치적 혼란기를 맞아 정보기관이 약화된 틈을 타 남베트남 사회의 각계각층에 스파이들을 침투시켜 인맥을 형성하고 첩보망을 구축하게 했다.

그리고 첩보망 구축에 우호적인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통일전선전술에 따라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하며 반정부 세력의 확산과 더불어 응우옌반티에우 정권의 정치적 고립을 꾀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에 이어 등장한 친미반공정권, 응우옌반티에우 정권의 고립은 전쟁의 패배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경찰·군대 등 주요 행정 부서 내 고위 인사들이 공산주의자에게 동조하는 정치적 환경으로 작용됐다.

남베트남에서 공산스파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은 베트남전쟁에 관한 기밀정보의 수집 및 분석이었다. 스파이들은 수집된 주요 정보를 보고서로 작성해 베트남노동당을 비롯한 대남베트남 공작본부, 군사첩보기관 등에 전달했다. 그들의 능력은 매우 대단했고, 그들이 수집한 정보는 하루 정도 경과한 후 남베트남공화국임시정부(PRG) 등을 통해 북베트남에 보고됐다.

또 북베트남 스파이들은 베트남공화국 군대에 침투해 군사기밀 수집은 물론 장교, 병사 등을 대상으로 민족통일, 반전·반미평화 등의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군 내부의 분열과 사기 저하를 꾀했다. 부패한 남베트남 군인들을 포섭해 미군이 지원한 무기·물자 등을 빼내기도 했다. 미국이 지원한 무기·물자들은 베트콩에 적지 않게 유출됐다.

이처럼 북베트남의 스파이들은 기밀정보 수집 및 분석, 무기 및 물자 유출 등의 공작을 전개하면서 각 사회단체에 침투해 정치적 분열과 국론 분열의 조장, 민심 이반을 위한 반정부 투쟁 유도, 남베트남 정권의 고립화 및 붕괴 등에 역점을 둔 선전선동활동도 막후에서 전개했다.

최대 반정부 세력인 ‘제3세력’을 비롯해 남베트남 반정부 사회단체들의 경우 단체 대표들은 비공산주의자였지만, 실질적으로 이들 단체를 운영하는 실무진은 신분을 감추고 침투한 공산 프락치였다. 이들은 제3세력 등 남베트남 반정부 사회단체의 활동을 격렬한 반정부투쟁으로 유도하며 정권의 고립화 및 붕괴를 추구했다. 이들 내부의 적은 베트남공화국 패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즉 통일전선전술에 의한 ‘정치전쟁’은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 정권을 내부로부터 붕괴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평화협정의 한계와 북베트남의 군사적 승리

잠재적 적국이 존재하는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또 군사력을 중심으로 상호 대치하는 상황에서 평화는 ‘힘의 우위’를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하다. 즉 힘이 열세이거나 비대칭인 경우, 대화나 협상을 통한 평화 추구에는 한계가 있다. 베트남전쟁은 군사력, 국민 결집 등이 받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평화협정의 한계를 단적으로 나타내준다.

1973년 1월의 파리평화협정은 미국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상응하면서 체결됐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리평화협정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 지역 내에서 베트남공화국의 정부군과 베트콩 간의 국지전은 여전히 계속됐다. 게다가 베트남공화국은 미군을 비롯한 외국군의 철수에 따른 전력 약화뿐 아니라 미국의 원조 격감으로 경제적 어려움도 겪어야 했다. 격렬한 반정부 시위로 정치사회적 불안에도 시달려야 했다. 요컨대 미국 지상군 및 공군의 지원이 없는 베트남공화국의 안보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취약했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지도부는 이와 같은 상황을 놓치지 않고 승리를 확신하며 베트남공화국에 총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1973년 1월 28일 평화협정이 체결된 이후 약 2년2개월이 지나서 베트남공화국은 1975년 4월 30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베트남전쟁은 ‘힘의 우위’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평화협정에만 의지해 평화를 추구할 경우, 결코 공산주의자로부터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 배정호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

201801호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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