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새 연재 | 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 정도전이 꿈꾸고 세종이 만든 나라, 조선(1) 위화도회군 

개성까지 400㎞, 10일 만에 주파하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1387~1388년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 근본 변화가 발생한 시기…명과 영유권 분쟁에서 비롯돼 조선왕조 건국되는 사건으로 반전

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단재 신채호는 암흑 속에 빠진 나라라고 생각했다. 자주정신을 잃고 노예 같은 사대주의 의식에 젖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온갖 악의 창고이자 송두리째 불태워버려야 할 악유산이라고 생각했다. 헛된 이념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당쟁을 벌이고, 강한 나라에 굴종했기 때문이다. 망국의 한과 부끄러움이 가슴을 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면암 최익현은 인류의 윤리가 살아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조선을 세우면서 정도전은 백성의 나라(爲民)를 꿈꿨다. 세종은 누구도 억울한 사람이 없고, 살아가는 즐거움(生生之樂)을 가진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조선이 어떤 이상을 갖고 세워졌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까? 고려 말 조선이 세워지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조선의 원형(原型)이 완성되는 세종대까지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조선 건국의 ‘드라마’는 위화도회군부터 시작된다


▎이성계와 최영 양웅(兩雄)은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KBS 사극 [정도전]에서 이성계 역을 맡은 유동근(왼쪽)과 최영(서인석)이 서로 칼을 겨누고 있다. / 사진:KBS
1388년 5월 22일(乙未), 요동공벌(攻伐)에 나섰던 5만의 고려군이 말머리를 돌렸다. 저 유명한 위화도회군이다. 위화도는 고려와 요동의 경계에 위치한 압록강 위의 작은 섬이다. 고려군은 그 경계선까지 갔다가 최후의 순간에 회군을 결정한 것이다. 이 사건은 처음 고려와 명의 영유권 분쟁에서 시작됐다. 국제정치가 급변하는 시대에는 이런 문제가 빈번하게 생긴다. 하지만 이를 기화로 5년 뒤에는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건국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발전했다.

위화도회군은 군사반란이었다. 왕명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당시 병사와 백성들이 노소 없이 모두 목자득국(木子得國)이란 동요를 불렀다고 한다. 이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성계는 오히려 회군 명분을 극도로 낮추고 제한시켰다. 반역의 의혹을 불식시키고자 한 것이다. 원정군이 일제히 말머리를 돌리자 군대를 따라 북상하던 우왕도 개성을 향해 급히 도주했다. 원정군과 우왕의 거리는 처음에 겨우 30~40㎞에 불과했다. 만약 왕을 잡을 수 있다면 회군파의 목적은 쉽게 달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회군파 장군들은 급속한 추격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성계가 반대했다. 왕과 충돌하면 많은 사람이 죽을 거란 이유였다. 그는 오히려 군사들에게 왕과 백성을 범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너희들이 만일 임금의 가마를 범하면 내가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요, 백성의 오이 하나라도 빼앗으면 또한 마땅히 죄를 당할 것이다.”([고려사] 우왕 14년 5월)

또한 회군의 목표를 극도로 좁혔다. 그는 “왕을 보고 친히 화복(禍福)을 진술해 임금 옆의 악을 제거해 생령(生靈)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을 천명했다. 그 악이란 최영이었다. 요동 정벌을 강행한 정치적 책임을 오직 한 사람에게 한정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성계가 행군을 지연시켰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원정군은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약 20일을 소요했다. 그 거리는 약 200㎞로, 하루 평균 10㎞ 행군한 셈이다. 전근대 군대의 행군 속도는 평균 12㎞였으니, 다소 느리게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위화도에서 개성까지는 4배나 빠른 속도로 행군했다. 10일간 약 400㎞를 달려, 하루 평균 40㎞를 주파했다. 도로가 양호하고 장비가 우수한 오늘날의 군대도 하루 40㎞씩, 열흘간 연속 행군하는 것은 무리다.(이상훈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개경 전투]) 회군파 군대는 필사적인 속도로 남하한 것이다.

우왕 생포에 실패, 피할 수 없었던 전투


우왕은 5월 29일(壬寅)에, 원정군은 6월 1일(癸卯) 개성에 도착했다. 겨우 하루 차이였다. 왕 또한 필사적으로 달린 것이다. 회군파는 우왕을 사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사실은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고 회군을 성공시킬 최고의 방법이었다. 이를 포기하는 것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리석은 결정일 것이다.

하지만 회군 성공 이후의 상황을 보건대 회군파는 회군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명료한 구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왕과 직접 충돌하는 것은 회군을 반역으로 인식하게 할 위험이 컸다. 따라서 무력 충돌 없이 왕을 보위하는 형식으로 우왕을 사로잡는 것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회군파는 왕의 뒤를 간발의 차이로 추격하면서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회군파는 기회를 잡지 못 했고, 결국 개성에서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급박한 추격은 군사적으로도 필요한 조치였다. 우왕과 최영에게 방어군을 수습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원정군 중 중군은 총사령관 최영의 직속 부대였다. 하지만 우왕의 만류로 최영은 전선에 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중군은 회군파 장군들에게 장악됐을 것이다.

최영 휘하의 정승가가 지휘하는 소수 병력이 원정군에 배속되지 않고 개경에 남아 있었다. 경기도 병력도 왜구로부터 개경을 방어하기 위해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은 왜구의 개경 침입로인 동강(貞州)과 서강(예성강)에 배치됐다.

당시 개성에는 5명의 원수(도흥·김주·조준·곽선·김종연)가 머물렀다. 원정군 편제를 보면 원수 1인은 1682명의 병력을 거느렸다. 원수 5인이면 8410명의 병력이다. 적지 않은 숫자이다. 따라서 시간만 있으면 우왕과 최영은 1만 명 이상의 방어군을 조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영처럼 뛰어난 장군이 1만의 전력으로 삼중의 성벽(나성·황성·궁성)을 갖춘 개경을 지킨다면, 원정군의 승리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회군파가 왜 그처럼 신속하게 행군했는지 알 수 있다. 시간을 뺏기 위한 것이다. 회군 일자도 상당히 정밀하게 계산된 것으로 보인다. 원정군은 14일간 위화도에 머물렀다. 그 사이 회군을 요청하는 두 차례의 장계를 올렸다. 그리고 5월 22일 둘째 장계에 대한 회신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하를 시작했다. 이것은 전략상의 고려였다.

“최영을 내놓으소서” vs “강상(綱常)을 범하지 말라”


▎요동공벌에 나섰던 5만의 고려군이 말머리를 돌린 위화도.
이에 앞서 5월 13일, 양광도안렴사 전리(田里)가 “왜적이 40여 군에 침입했으며 수비병이 약해 무인지경을 드나들 듯 한다”고 보고한 바 있었다. 원정군은 바로 그날 회군을 요청하는 첫 장계를 올렸다. 하지만 우왕은 이것이 심각한 상황의 전조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원수 5인(도흥·김주·조준·곽선·김종연)을 왜구 토벌에 파견했다. 원정군이 5월 22일 행동을 개시한 것은 5원수의 병력이 개경으로 다시 복귀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개경에 남은 군대는 소수였다.

6월 1일(癸卯朔) 회군파는 개성 근교에 도착했다. 그 사이 이성계를 지원하기 위해 여진인을 포함한 동북면 군사 1000명이 개성에 도착했다. 이를 보면, 회군은 매우 계획적이었다. 위화도에서 함주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280㎞, 개성까지는 약 300㎞, 함주에서 개성은 약 230㎞이다.

그런데 동북면 군사는 원정군보다 하루 늦은 6월 2일(갑진) 개성에 도착했다. 동북면에서 개성으로 오는 길은 백두대간을 넘는 험로였다. 즉, 그들은 원정군과 거의 같은 시기에 출발한 것이다. 위화도에서 동북면에 소식을 전하고 출발했다면 도착이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회군 계획과 시작 일자는 사전에 대략 확정된 것이었다.

6월 3일(乙巳) 마침내 교전이 개시됐다. 그 사이 최영과 우왕은 수천 명의 군사를 모병했다. 또한 전국에 징병령을 내리자 “거마(車馬)가 항구에 찼다”고 한다. 개성은 주위의 산을 이용해 쌓은 둘레 23㎞의 견고한 나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성의 높이는 27척(8.1m), 두께는 12척(3.6m)이며, 나성 밖은 해자로 둘러쌌다. 원정군이 아무리 강력해도 공격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회군파는 구류(拘留)돼 있던 환관 김완을 우왕에게 보내 타협책을 제시했다. 요동공벌을 둘러싼 정치적 책임을 최영 일인에게 한정하자는 것이다. “공민왕께서 지성으로 명나라를 섬기는 동안 천자가 일찍이 우리에게 군대를 동원할 뜻이 없었습니다. 이제 최영이 총재가 돼 조종 이래의 사대하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대병을 동원해 장차 상국을 범하려 해 한여름에 출병하니 온 나라의 농사가 결딴 나고 왜구는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내륙 깊이까지 침입해 약탈을 저지르며 우리 백성을 살육하고 창고를 불살랐습니다. 게다가 한양 천도 문제 때문에 온 나라가 소란한 지금, 이제 최영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종사가 전복될 것입니다.”([고려사] 우왕 14년 6월)

요점은 한 가지이다. 최영에게 모든 책임이 있고, 그것으로 끝내자는 것이다. 왕은 물론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우왕은 이를 거부했다. 첫째, 회군이 반역임을 천명했다. 회군의 정치적 의미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둘째, 책임이 있다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최영의 책임을 거부했다. 왕의 책임을 명백히 한 것은 용기 있는 결정이다. 셋째, 요동공벌이 다수의 의견에 따른 것이며, 국가 안보상으로도 정당한 정책임을 주장했다.

넷째, 장군들이 만약 과오를 인정한다면 영원히 부귀를 함께 누리겠다고 회유했다: “명령을 받고 강역(疆域)을 나갔는데 이미 명령을 어겼고, 군대를 동원해 대궐로 향하는 것은 강상(綱常)을 범하는 것이다. 사단을 일으킨 것은 진실로 나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의 대의는 진실로 고금의 통규(通規)다. 하물며 강역은 조종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어찌 쉽게 남에게 주겠는가? 군사를 일으켜 이것을 항거하는 것만 같지 못한 까닭에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모의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옳다 했는데 이제 어찌 감히 위배하는 것인가? 비록 최영을 가리켜 말을 하나 최영이 내 몸을 막아 호위한 것은 경(卿) 등이 아는 바이며, 우리 국가에 근로한 것도 또한 경 등이 아는 바이다. 교서가 도착하는 날에 미혹됨에 사로잡히지 말 것이며, 과오를 고치는 것에 인색하지 말고, 함께 부귀를 보전해 이로써 시종을 도모하기를 나는 진실로 바라나니 경 등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 수 없구나.”([고려사] 우왕 14년 6월 갑진)

우왕은 회군파가 제시한 최소한의 제안도 거부했다.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우왕은 회군파 장군들에게 현상금을 걸고, 관작을 삭탈하고, 반란군으로 공표했다. 그렇게 해서 전투가 개시됐다. 조민수의 좌군은 서문인 선의문을, 이성계의 우군은 동문인 숭인문을 공격했다. 이성계의 집도 숭인문 부근이었다. 처음 이성계는 출전하지 않고 휘하의 장군 유만수를 보냈다. 그는 최영에게 격퇴당했다. 조민수의 군대도 최영에게 패배했다. 최영의 군대는 10여 일의 짧은 시간에 강력한 방어군을 편성했던 것이다.

“장군, 부디 잘 가시오”


전투가 개시됐지만 이성계는 말의 안장을 풀고 장막에 누워 있었다. 유만수의 패배를 보고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누워 있었다. 초조해진 막료들이 거듭 보고를 올리자, 그는 천천히 일어나 식사를 마쳤다. 말 안장을 채운 뒤 군사를 정돈한 이성계는 100보나 떨어진 작은 소나무 줄기를 향해 활을 당겼다. 단숨에 줄기가 부러졌다.

이성계가 “또 어느 것을 쏘랴?”라고 외쳤다. 군사들은 환호했다. 진무(鎭撫) 이언은 무릎을 꿇고서 “우리 영공(令公)과 함께라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하고 감격했다. 이성계는 군사들의 심리에 정통했다. 회군파 군사들은 상당한 불안감을 가졌던 듯하다. 그들은 어쨌든 반역자였으며, 전투에서 진다면 자신은 물론 가족도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군신(軍神) 최영이었다. 왕과 군신에게 도전해야 했던 평범한 병사들의 심리는 어떠했을까? 이성계는 그들의 심리를 꿰뚫은 것이다. 유만수의 패배는 그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군심을 적절히 수습하지 않는다면 군대는 모래처럼 무너질 것이다. 이를 감안할 때 이성계의 모든 행위는 침착함과 자신감의 퍼포먼스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탁월한 궁술을 과시함으로써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고조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성계로서도 왕과 최영과 싸워야 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좌우군은 다시 공격에 나섰다. 좌군이 선의문을 공격하자 숭인문의 방어가 느슨해진 듯하다. 좌우 양군을 대적하기에는 방어군의 병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이틈을 노려 이성계의 우군은 나성 안에 진입했다. “성을 지키는 군사 중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조민수의 좌군은 영의서(永義署) 다리까지 진군했지만, 최영의 군대에게 거듭 패배했다. 그 사이 우군은 선죽교를 거쳐 남산에 올랐다.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북소리는 땅을 뒤흔들었다.” 남산은 높이 103m의 낮은 산이다. 하지만 개성 분지의 중심에 위치해 “전체를 공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이상훈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개경 전투] 266쪽)

최영의 부하 안소가 정예군을 거느리고 먼저 남산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황룡대기를 보자 그냥 무너져 버렸다. 최영은 전투가 끝났음을 알았다. 그는 전장을 떠나 우왕과 그의 딸 영비(寧妃)가 있는 팔각전 화원(花園)으로 갔다.

이 팔각전은 공민왕이 1373년 여름 니현(泥峴)에 지은 2층 전각이다. 그 주위에 꽃과 나무를 심어 화원을 만들었다. 노국공주를 잃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공민왕이 놀이와 잔치를 즐기고자 만든 것이다. 이성계는 암방사 북령에 올라 대라(大螺, 큰 소라고동) 한 통을 불게 했다. 이에 여러 군대가 화원을 수백 겹 포위하고 크게 부르짖어 최영을 내놓기를 청했다.

소라고동은 이성계 군대의 상징이었다. 최영이 나오지 않자, 조라치(吹螺赤) 송안이 담장 위로 올라가 대라를 한 차례 불었다. 모든 군사가 일시에 담장을 무너뜨리고 뜰로 달려 들어갔다. 곽충보 등 3~4인이 곧장 전각 안으로 들어가 최영을 수색했다. 우왕은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을 고했다. 최영이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이성계와 최영도 마주보고 울었다.

이성계는 말했다. “이번 사태는 내 본심에서 일으킨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동정벌이 대의에 거역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나라가 불안해지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어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이 때문에 부득이 이런 일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함께할 수 없었던 양웅(兩雄)


▎이성계 군대의 상징이었던 소라고동. / 사진:김영수
1476년 김종직의 제자인 유호인이 이곳 화원을 찾아 90여 년 전 그날을 회상했다. “화원에 당도하니 벌써 황폐했고, 오직 팔각전만이 우뚝 홀로 남았는데 해가 묵어서 반이나 퇴락했고, 팔각전 뒤에는 돌을 모아서 가산(假山)을 만들었는데 화초가 아직도 있다. 고려 신우(辛禑)가 일찍이 이 화원에서 날마다 술 놀이만 일삼으며, 망령되이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태조께서 회군해 화원을 수백 겹으로 에워싸니 최영이 분함을 이기지 못 해 문지기를 죽이고 들어갔다. 이때를 당해 안팎이 이반됐는데, 최영은 까마귀 떼와 같은 시정의 졸개들로서 하늘이 돕고 사람이 순종하는 왕의 군대(王師)를 거역하려고 했으니 역시 어렵지 않았겠는가.”([유송도록(遊松都錄)])

10년 뒤인 1485년 남효온은 “내가 10년 전 이곳에 이르렀을 때는 팔각이 꺾이고 썩은 채로 철거되진 않았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팔각전 주춧돌 옆에는 사람 키만 한 배나무가 자라고, 북쪽 바위 위에는 단풍나무의 뿌리가 서려 있었다.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팔각전은 완전히 폐허가 됐다.[송경록(松京錄)]

전투가 끝나자 도통사 이성계와 조민수, 그리고 36명의 원가 대궐을 찾아가 왕께 하직 인사를 하고(배사·拜辭) 군대를 성문 밖으로 철수시켰다. 이것 역시 회군이 반역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 민간에서는 “서경성 밖에는 불빛이요, 안주성 밖에는 연기 빛인데, 그 사이를 왕래하는 이원수(李元帥, 이성계)여 원컨대 백성을 구제하소서”라는 동요가 떠돌았다고 한다. 최영은 고봉현(高峯縣, 경기도 고양시)으로 유배됐다. 이성계와 최영은 두 사람의 우정을 넘어 이제 정치의 세계에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대안을 대표했다.

윤소종은 “그 정을 추구하면 최영이 요동을 침은 조종의 봉강(封疆)이 삭제됨을 차마 좌시할 수 없음”때문이었다고 말했다.[이인임전(李仁任傳)] 그러나 둘 중 하나는 역사의 죄인으로 처형돼야 했다. 이 해 12월, 최영의 처형을 주장한 문하부낭사 허응(許應)은 “최영의 공으로써 불행하게 이런 반역의 죄가 있었으니 진실로 일국이 차마 하지 못할 바”[최영전(崔瑩傳)]라고 말했다.

위화도회군의 직접적 원인은 명과 고려의 영토 분쟁이었다. 그런데 이 분쟁을 단순히 양국 관계로만 봐서는 안 된다.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정치 속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명의 가장 핵심적인 국가 전략은 초원의 북원(北元)을 격멸시키는 것이었다.

명의 대고려 정책은 이 전략의 일환이었다. 1387~1388년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 근본적 변화가 발생한 해였다. 명이 마침내 북원을 괴멸시키고, 동아시아 유일의 패자가 됐기 때문이다. 이 헤게모니는 1644년 명이 멸망하기까지 약 260년간 지속됐다. 1388년 위화도회군을 전후한 정치적 문제는 이런 국제 상황 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388년 1월 이인임 세력을 축출한 무진정변이 발생했다. 고려 후기 정치의 틀을 깬 대사건이었다. 2월 15일 명에 사신으로 간 설장수가 귀국했다. 그는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 “철령(鐵嶺) 이북은 본래 원조(元朝)에 속한 땅이니 함께 요동으로 돌리게 한다”는 홍무제 주원장의 명을 전한 것이다.([고려사] 우왕 14년 2월) 이것은 명과의 관계를 파탄시켜 고려와 명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명의 철령 이북 영토 요구에 발끈한 고려


▎신당에 모셔진 공민왕(오른쪽)과 노국공주의 영정.
그런데 이 대결을 지명을 둘러싼 오해의 소치로 보는 견해가 있다. 철령의 소재지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를 처음 고찰한 일본의 연구는 고려 정부가 명나라가 주장하는 철령의 위치를 오해했다고 주장했다. 1913년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중국이 말한 철령이 함경도 남단이 아니라 압록강 북변 요동지역의 황성(黃城, 皇城, 輯安)이라고 주장했다. 명이 황성에 위소를 설치하고, 위소(衛所)의 이름을 철령위(鐵嶺衛)로 붙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송을 곧 철령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고려는 함경남도 철령으로 오인해 명과 일전을 불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연구에 따르면 명이 주장한 철령도 함경남도 철령이었다. 명도 처음 이곳에 철령위를 설치하고자 했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자 압록강 넘어 황성에 철령위를 설치했을 뿐이었다.(박원호 [철령위 설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

철령은 함남 안변군과 강원도 회양군 사이의 해발 685m의 고개이다. 이 고개를 경계로 함경도와 강원도가 나뉜다. 북쪽은 관북, 동쪽은 관동으로 부른다. 고려 사람들도 철령을 이곳으로 인식했다. 1349년 이곡은 개경을 떠나 금강산을 유람하고 동해안을 따라 영해에 도착했다. 그는 “만 길 높이의 풍악(楓嶽, 금강산)과 설산(雪山, 설악산)을 마음껏 관람하고, 다시 철관(鐵關, 鐵嶺)을 넘어 동해로 들어와서 국도(國島)의 기이한 비경을 끝까지 돌아봤다.”[계림부공관서루시서( 林府公館西樓詩序)]

철령은 정도전의 시에도 등장한다. 함주에서 이성계를 만날 무렵 때의 것이다. “철령이라 산은 높아 칼끝과 같고/ 동해를 바라보니 정히 아득해/ 가을바람 두 귀밑에 불어오는데/ 말 몰고 오늘 아침 북방에 왔네”(‘철령’)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명이 철령 이북의 영토를 요구한 것은 도적 같은 일이었다. 이곳은 원의 쌍성총관부 관할 지역이다. 몽고 침입기인 1258년(고종 45년) 조휘와 탁청은 고려의 지방관을 죽이고 이 지역을 들어 몽고에 항복했다. 몽고는 이곳에 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摠管), 탁청을 천호(千戶)로 임명했다. 1356년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취하면서 쌍성총관부를 수복했다. 명이 건국하기 12년 전이었다.

그런데 32년이 지난 후 명은 이곳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고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명도 나름의 영유권 근거가 있었다. 명은 원을 이었기 때문에 원의 옛 영토 또한 자신의 것이라고 본 것이다. 다만 1368년 건국 직후 즉각 그것을 요구하지 못했을 뿐이다. 몽골 사막으로 후퇴한 북원의 위협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요동도 원의 유신 나하추 등이 지배했다. 그들은 북원과 연합해 명과 맞섰다.

이에 반해 고려는 1369년(공민왕 18년) 명과 국교를 맺고 원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렇다고 명이 고려에 대한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니다. 고려가 북원 및 요동 세력과 연합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민왕 사후 고려는 명 사신을 죽이고 친원정책으로 선회했다. 이 때문에 우왕대 14년간 명은 끊임없이 고려를 협박하고 견제했다. 이에 대응해 고려 또한 북원 및 나하추 등 요동세력과 느슨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군사적 협력은 피했지만, 우호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과도한 조공 요구와 함께 전쟁 위협했던 명


1368년 원을 중원에서 축출한 뒤 명의 핵심적 국익은 북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북원은 현저히 쇠퇴했지만, 여전히 신흥국가 명의 운명에 가장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없이 북정군을 보냈다. 1368년 장군 서달이 대도 (大都, 北京)를 공격하자, 원 조정은 내몽골 지역 상도(上都)로 도주했다. 이어 몽골군은 두 차례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명군은 1369년 상도를 공략했다. 북원은 다시 응창(應昌, 내몽고 克什克勝旗)으로 달아났다. 원순제는 그곳에서 사망했고, 황태자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 昭宗)가 뒤를 이었다. 고려 출신 기황후의 소생이었다. 그러나 명 군이 응창도 함락시키자, 사막을 건너 카라코룸(哈喇和林)으로 도주했다. 소종은 1372년 명의 북정군을 격퇴하며 권토중래를 꿈꿨다. 하지만 1378년 사망한 뒤 동생 토구스테무르(脫古思帖木兒)가 그 뒤를 이었다.

이 과정에서 명은 북원과 요동세력의 연합을 차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명은 이미 1371년(공민왕 20년) 요양에 요동위(遼東衛)를 설치해 요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1위의 군사는 5600명이다. 이것이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遼東都司)로 발전했다. 1387년까지 명은 요동에 11개의 위를 설치했다. 1387년 명은 부이르호(捕魚兒海)에 머물던 북원세력에게 최후의 타격을 가하기 위해 북정군을 조직했다. 그에 앞서 6월 풍승(馮勝)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나하추를 선공하자, 나하추는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마침내 명에 투항했다. 이것은 북원에 치명적 타격이었다. 측면의 보호막이 사라진 것이다.

나하추 세력은 또한 고려와 명 사이의 완충지대였다. 이제 그 방파제가 사라지고 고려 또한 명의 직접적 위협에 직면했다. 사실 고려는 1374년 친원정책으로 전환한 뒤 명의 전쟁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1379년(우왕 5년) 주원장이 우왕에게 보낸 서신을 보자.

“너는 간신의 거짓된 계책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와서 나를 속이고 있다. 무죄한 사자를 죽인 원수이니 집정 대신의 내조 및 세공을 전에 약속한 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후일에 사자를 죽인 병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내가 명하는 것을 믿지 않으면 전함 수천과 정병 수십만으로써 돛을 올려 동쪽에 배를 대고 사자가 어디 있는가를 특문할 것이니, (그러면) 비록 그 당을 진멸시키지 못 할지라도 어찌 태반을 포로로 잡지 않겠는가. 감히 경시할 수 있겠느냐고 하라.”([고려사] 우왕 5년 3월)

무서운 전쟁 위협이었다. 세공액도 매년 금 100근, 은 1만 냥, 양마 100필, 세포 1만 필을 요구했다. 엄청난 양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던 고려는 이를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명은 다시 5년간 미납액을 모두 내라고 요구했다. 5000필의 말도 요구했다. 국력을 기울어질 정도의 규모였다. 그러나 고려는 1385년 이를 모두 완납했다. 가까스로 평화가 도래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양국 관계는 곧 악화됐다. 진헌마가 형편없다는 이유였다. 주원장은 고려가 이처럼 무성의하면서도, 다른 한편 대명외교에 매달리는 것은 명의 공격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수년 이래 도리어 우리에게 신속(臣屬)하려고 애쓰며 자꾸만 와서 매달렸다. 이것이 어떤 의도에서인지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외교적 협상 통해 실타래 풀려 했던 고려 정부


▎일본의 역사학자 쓰다 소키치.
10년 이상 명의 협박이 지속된 데다 이제 나하추마저 명에 투항했다. 더욱이 6개월 뒤 명은 요동에 삼만위(斡朶里城), 철령위(皇城)를 추가 설치했다. 얼마 후 철령 이북의 영토와 백성을 요구했다. 명과의 전쟁이 임박한 것이다. 1337년과 1388년의 상황은 이러했다. 고려의 절박한 위기의식은 당연하지 않은가.

철령 이북지역에 대한 명의 영유권 주장은 설장수가 귀국하기 전 고려에 알려졌다.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가 유사한 내용을 보고했기 때문이다. 명의 요동도사가 압록강을 건너 방문을 붙였다. 그 내용은 “철령 이북·이동·이서는 원래 개원(開原)에 속했으므로 관할하에 있는 군민을 한인·여진·몽골·고려인은 전과 같이 요동에 속하게 하라.” 영토만이 아니라 이 지역에 사는 고려인들도 모두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최영은 그 대응책을 재상회의에 회부했다. 재상들은 명과의 타협을 원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일단 전쟁 준비에 나섰다. 전국의 성을 수리하고, 군사지휘관들을 서북지역에 파견했다. 또한 전국의 양반·백성·향리·역리의 호적을 재점검해 동원 가능한 병력을 파악하도록 했다.


▎MBC 사극 [신돈]에서 기황후 역을 맡은 김혜리가 농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 사진:MBC
2월 설장수가 도착하자 최영은 정부 관리들을 전원 소집해 명의 주장대로 철령 이북을 할양할 것인지 물었다. 모두 반대했다. 그렇다고 전쟁에 찬성하지도 않았다. 남은 방법은 외교적 수단밖에 없었다.

고려 정부는 일단 다시 사신을 파견해 명에 호소하기로 했다. 밀직제학 박의중이 파견됐다. 고려는 주원장에게 보내는 표문(表文)에서, 명이 주장하는 원의 개원로 지역은 사실상 고려의 영토이며 실질적인 국경은 두만강 너머 공험진(公鎭)이라고 주장했다. 공험진은 1108년 윤관이 여진을 정복하고 고려의 경계로 확정한 곳이다.(계속)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802호 (2018.0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