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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북한 급변 시나리오] 김정은의 ‘정상국가’ 향한 개혁·개방의 행로는? 

독재자의 손에 쥐어진 네 장의 원웨이 티켓 

남성욱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장
베이징·하노이·아바나·트리폴리 등 사회주의 시장경제 모델 중 최종 종착지는? 시장경제 수용하고, 미국과 수교한 중국·베트남의 비약적인 경제성장 주목할까

▎지난해 11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승리자동차연합기업소를 시찰했다.
2005년 더운 여름날 평양을 방문했었다. 모 대기업의 요청을 받아 개성에서 인삼 재배 합작사업 추진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1년간의 물밑 협의 끝에 최종적으로 북한의 대남 경제협력 담당기관인 민족경제연합회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려는 방북이었다. 계약 체결 전날 만찬에서 북측 관계자는 폭탄선언을 했다. 병유리 공장 건설계약을 동시에 체결해야만 인삼 사업이 가능하다는 긴급 상부지침이 내려왔다는 내용이었다. 대동강의 무궁무진한 규사를 활용해 평양소주·룡성맥주병을 생산하는 유리병 공장 건설이 시급하다고 부언했다.

창문 유리를 생산하는 판유리 공장은 2004년 중국이 후진타오 주석의 결정으로 24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생산은 가능한데 병유리는 기존 공장이 낙후돼 공급이 부족하다는 설명이었다. 인삼 사업은 남측 기업에 혜택을 주는 비즈니스인 만큼 동시에 북측에 도움이 되는 애국 사업을 병행해야만 추진이 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인삼 사업과 병유리 사업은 별개라고 항변했고, 인삼 사업을 성공시키면 향후 추가 투자를 검토하겠다고 설명했으나 북측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날 저녁 보통강호텔 식당에서 폭탄주로 대취하고 1년간 각종 부대비용을 들여 추진을 검토했던 인삼 사업계획서는 대동강 강물에 휴지로 날려 보내고 다음 날 새벽에 숙취만 안고 순안공항을 출발했다. 훗날 평양 사업을 10년 이상 추진했던 이 기업인은 오히려 투자 전에 사업 무산이 잘된 것이라고 필자를 위로했다. 만약 자금이 투입됐으면 그 다음에는 사정 변경의 원칙을 내세워 합의서를 수차례 수정하고 추가 투자를 요구, 사업 추진이 종국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라는 본인의 경험을 회고했다.

부자인 남측이 경협으로 이득을 취하는 구조를 가난한 북한 경제가 도저히 용인할 수 없으며 양측의 윈윈(win-win) 구조는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 기업인의 평가였다. 인삼 사업에서 얻는 교훈 중 하나는 북한과의 협상은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며 단계별로 지뢰밭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외견상 정중동(靜中動)인 것처럼 보이지만 막후 배후 테크노크라트들이 이득의 극대화를 위해 협상 조건을 수시로 변경하는 전략을 기획한다는 것이었다.

30년을 한 조직에서 일하는 2만 노동당 엘리트


▎흉작으로 최소 15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고난의 행군 시절 김정일 위원장은 2000년 6·15 정상회담으로 활로를 열었다.
오래전의 방북 경험을 글머리에 소개하는 것은 북한 당국자들이 결코 당면 현안에 대해 손 놓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특히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관리하는 2만여 명의 북한 엘리트는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30년 정도를 한 조직에서 맡은 바 일에 주력한다. 5년마다 정권이 교체돼 역사가 배타적으로 단절되는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연속성과 지속력을 갖고 있다. 북한 정권이 각종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절묘한 대안을 모색해 성공적인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는 장기간에 걸쳐 현안을 담당한 귀신 같은 테크노크라트들의 공이 적지 않다.

선대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은 고비 때마다 중국과 러시아를 순방하며 국제적인 고립 속에서도 미국을 효율적으로 응대했다. 김일성은 1994년 1차 북핵 위기를 제네바 합의로 돌파하며 실리를 챙겼다. 1994~98년 사이 북한 전역을 휩쓴 흉작으로 최소 15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김정일은 2000년 6·15 정상회담으로 활로를 열었다.

2017년 9월 6차 핵실험으로 고조된 2차 북핵 위기는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김정은 정권을 좌우로 강펀치를 날리며 코너로 몰아넣는 계기가 됐다.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 제재가 북한 경제의 명줄을 확실하게 죄기 시작했다. 세컨더리 보이콧을 우려한 중국의 전례 없는 제재 동참은 치명적이었다. 북한 무역액의 37%가 감소됨에 따라 평양 궁정경제(court economy)의 금고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해외 파견 노동자의 강제 출국, 각종 해외 영업 식당 중단 및 무기류 수출 차단 등은 최고지도자로 하여금 극적인 돌파구 마련을 기획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궁즉통이라고 할까! 최소 30년간의 국제 정세를 직시한 테크노크라트들이 난국 타개 로드맵을 김 위원장에게 보고했다. 김 위원장은 전광석화처럼 보고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남한의 새로운 정부가 강력한 원군 역할을 자임함에 따라 일은 의외로 손쉽게 풀리기 시작했다. 평창 겨울올림픽의 참가는 립스틱 외교(Lipstick diplomacy)를 통해 순식간에 평양올림픽으로 이미지 변신을 도모했다. 1987년 대한항공 폭발 사건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에 불참하고, 1989년 평양에서 5억 달러의 비용으로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해 5년간 허리띠를 졸라맸던 가슴 아픈 추억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었다.

평양의 남북 민족공조 전략은 1단계에서 완벽한 성공을 거뒀고 미국과의 정상회담이 초단기에 결정됐다. 남측 특사단을 접견한 트럼프 대통령은 45분 만에 북·미 정상회담을 선언했다. 휘발성이 적지 않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이 전격 결정됨에 따라 김 위원장은 ‘생명보험’과 ‘여행자보험’이 필요했다. 차이나 패싱(China passing)을 우려하는 베이징 지도부에 선수를 치고 빅딜에 성공했다. 3월 5일 남측 특사단을 접견한 후 3주간 두문불출하던 김정은 위원장은 특급 전용 열차를 타고 홀연히 베이징에 나타났다. 과거처럼 일본 언론의 특종 보도로 베일에 가린 방중이 알려지고 김 위원장의 평양 도착 이후 노동신문과 런민일보에 대문짝만 하게 보도되기까지 서울은 깜깜이 수준이었다.

청와대는 마치 사전에 인지한 뉘앙스를 던졌지만 국정원이 국회 정보위에서 베이징행의 주인공에 대해 오전에는 김여정, 오후에는 김정은이라고 오락가락한 사실로 인해 정부나 언론, 전문가 모두 장님 코끼리 더듬기 식의 예언과 추측 이상의 언급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우리 정보기관이 김정일 위원장의 8차에 걸친 방중을 사전에 인지하거나 최초로 보도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이번 방문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단둥에서 선양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하는 북한의 녹색 특급열차를 감지하는 수많은 안테나를 심어놓은 일본 당국과 언론의 정보 네트워크를 우리가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고,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3박4일간의 꿈같은 베이징 출장은 김 위원장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초국빈 대우는 ‘지구상의 어느 정상이 와도 이보다 좋을 순 없다’는 수준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첫 번째 해외 순방 국가가 중국이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초국빈 예우에 화답했다. 특히 시진핑과 김정은 연설의 압권은 선대의 추억이었다. 시진핑은 1983년 6월 무더운 여름날 아버지 시중린이 직접 베이징역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영접하고 고궁에 동행한 옛날이야기를 장황하게 언급했다. 심지어 김정일 위원장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언급까지 추가했다.

번번이 헛물만 켠 중국의 북한 개혁·개방 기대감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는 5억 달러의 비용이 들었다.
하여튼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으로 비핵화 방정식은 3차에서 4차 고차 방정식으로 진화했다. 중국 변수가 상수(常數)로 등장했다. 4·27 남북 정상회담은 민족공조로 양측이 치장하기 때문에 과속 수준이다. 하지만 북·미 정상회담은 구조와 내용이 다르다. 통념적이지 않은(unconventional) 워싱턴과 평양의 양 지도자가 톱다운 방식으로 정상회담을 결정한 것이다. 김 위원장이 비핵화를 해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할 것인지 아니면 시간 벌기용, 사진 촬영용, 명분 축적용일지 현재는 미지수다. 다만 김 위원장의 비핵화 복심은 중국에서 한·미가 사전에 분위기를 조성해 단계적 동시적 핵 포기 과정을 거치면 비핵화가 가능하다는 언급이 현재로선 전부다.

요컨대 김 위원장의 베이징 방문에서 북한의 미래 행보로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전망할 확실한 근거를 발견할 수는 없다. 3박4일 일정이었지만 장거리 열차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실제로 동선이 노출된 것은 하루 반 정도였다. 김 위원장의 행보와 발언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세기의 북·미 정상회담은 김정은이 복심과 상관없이 그가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Riding the tiger)’는 비유가 가능하다. 미국 석세스대 교수였던 고든 화이트(Gordon White)는 중국의 1978년 개혁·개방을 분석한 책의 제목을 ‘호랑이 등에 올라타기(1993, stanford university 출판사)’로 결정했다. 부제로 ‘호랑이 등에 올라타면 내리기 어렵다(騎虎難下, if you’re riding a tiger, it’s hard to get off)’라는 문장을 통해 중국의 개혁·개방이 경제적 측면에서 후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지난 1, 2차 남북 정상회담과 김일성과 김정일의 중국 방문 이후 북한이 호랑이 등에 올라탈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호랑이 모습에 놀라 그냥 돌아왔다.

김일성은 1984년 초 선전특구를 방문해 ‘천지개벽’ 발언을 했다. 중국 공산당 관계자는 당시 “김일성 주석이 천지개벽 운운해 놓고 실제로는 선전특구식 개방 정책을 펴지 않았기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이 상하이에서 천지개벽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의미를 별로 두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김일성은 1984년 9월 외자 유치를 위한 합영법을 제정, 발표했다. 북한이 선전특구 등을 둘러보고 중국처럼 대담한 특구식 개방을 하긴 어렵지만 외자 도입에 의한 생산력 증대를 위해선 합영법 정도의 법률 제정이 필요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일성의 중국 방문 이후 개혁·개방 시도는 형식적인 법 제정 정도로 그쳤다.

중국 정부는 김정일 위원장의 2001년 1월 상하이 방문 직후 북한의 관영매체들이 그의 천지개벽 발언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이번에는 뭔가 중국식 개방 모델을 수용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 뒤 북한이 중국식 개방 정책을 배우기 위한 대표단조차 파견하지 않자 실망했다.

북한이 중국식 개방 모델을 따를 생각이 없다는 것은 김 위원장의 방중 기간에 어느 정도 감지됐다. 2000년 5월 주룽지 중국 총리가 김 위원장의 푸둥지구 시찰을 수행한 뒤 김 위원장과 단독 면담을 하고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개방을 권유했으나 김 위원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총 8차에 걸친 중국 방문 이후 ‘단번도약론’을 내세우고 컴퓨터 기술을 중심으로 정보기술(IT) 분야에 대한 집중 투자를 강조했다. 하지만 IT 발전이 단순히 과학기술과 연계해 생산력 증가에만 관심이 집중돼 1978년 중국식 개혁·개방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평양에 맥도널드 매장 오픈된다면


▎2011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중국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의 한 대형마트를 시찰했다.
10년 만에 상하이를 다시 찾은 김정일 위원장은 변하지 않은 것은 황푸강뿐이라고 언급했지만 결국 김 위원장의 중국 발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북한식 개혁·개방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열흘씩이나 특급열차를 타고 만주 벌판을 지나 상하이까지 방문하며 천지개벽을 언급해도 평양에 돌아오면 깜깜무소식이었다. 호랑이가 시베리아의 맹수 호랑이가 아니라 에버랜드의 동물원 호랑이였기 때문에 김 위원장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감지하자마자 즉각 내려올 수 있었다. 북한의 사회주의 정치체제와 경제구조를 바꾸는 급진적인 변화가 간단하지 않은 과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평양이든 판문점 혹은 몽골에서든 직접 만남으로써 회담의 결과와 상관없이 새로운 여정에 들어설 것이다. 호랑이가 시베리아 호랑이일 가능성이 높아 선대 지도자들처럼 하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는 명분과 실리를 확보하기 위해 당일 일정으로 평양 순안공항에 전격적으로 에어포스원 전용기를 착륙시킬 수 있다. 평양 시내 중심가를 미국 성조기를 단 방탄 세단 수십 대가 회담장으로 질주할 것이다. 한반도 상공에는 전략자산이 집중 배치될 것이다.

모든 평양 시민을 건물 안으로 몰아넣고 외부에 나오지 못 하게 하겠지만 CNN의 생중계로 특이한 시내 풍경이 전 세계로 중개될 것이다.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종료되면 트럼프는 전용기에 오르자마자 본인은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김정은의 핵보유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는 메시지를 계속 트위터로 날릴 것이다. 김정은은 결국 과거로 회귀하면서 강력한 제재에 부딪혀 선제타격 시나리오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북한은 미국의 압박에 대응해 중국과 러시아에 구원 요청을 할 것이다.

반면, 트럼프와 김정은이 원샷으로 일괄 비핵화에 합의하면 ‘행동 대 행동의 원칙’으로 최소 1년, 최대 2년 안에 비핵화와 제재 완화가 이뤄지는 장밋빛 시나리오가 전개될 것이다.

김정은이 진심으로 비핵화를 결정하고 국제사회의 대규모 투자와 지원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가보지 않은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로 가는 탑승권은 목적지가 중국 베이징, 베트남 하노이, 쿠바 아바나, 리비아 트리폴리 등이 될 것이다. 중국식 개혁·개방은 북한이 일차적으로 벤치마킹할 수 있는 모델이다.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결정으로 중국 정치는 사회주의 공산당, 경제는 정부 주도의 ‘계획과 시장이 병존하는 경제(Plan and Market economy)’의 이중발전 모델을 통해 주요 2개국(G2) 수준으로 급성장했다.

중국은 8개의 서류상 정당으로 복수정당제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공산당 1당 독재다. 북한은 노동당 1당 독재를 유지하면서 제한적인 개혁·개방을 단계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북한이 베이징 모델을 벤치마킹하기 위해서는 외국자본에 개방을 해야 한다. 평양에 맥도널드 매장을 오픈해야 한다. 신의주·남포·원산·청진 및 해주 등 5개 항구를 개방해야 한다. 외국자본 투자가 이뤄지도록 관행을 변경하고 각종 법과 규정을 개정해 국제적인 투자보장 협정이 지켜져야 한다.

백두혈통 김 위원장의 3대 권력은 단기적으로 문제 없이 유지될 것이다. 중국이 1978년 11개의 항구를 개방하고 단계적으로 이를 연결해 대륙으로 확대하는 점(点)→선(線)→면(面)→개혁·개방을 점진적으로 단행했다. 덩샤오핑이라는 개방 전도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누구든지 부자가 돼라.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라”는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은 반신반의하던 중국 인민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덩샤오핑식의 김정은 ‘남순강화’ 가능할까


▎나선경제무역구 내 수산물 가공공장에서 일하는 북한 주민들. / 사진:연합뉴스
보수파들의 극렬한 반대로 홍(紅)와 전(專), 즉 이념과 실용이 격렬히 충돌하던 시기에 덩샤오핑이 베이징에서 선전까지 기차를 타고 가며 위험을 무릅쓰고 주장한 남순강화(南巡講話)는 개혁·개방의 살아 있는 메시지였다. 과연 김정은 위원장은 신의주에서 개성까지, 함경도 두만강에서 금강산까지 특별열차를 타고 가며 남순강화를 할 수 있을까?

하노이행 항공권도 매우 바람직한 대안이 될 것이다. 베트남전쟁으로 미국과 베트남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과 북한 간의 사상자보다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미군의 공식 사망자는 5만8315명이었다. 부상자는 30여 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베트남은 1986년 응우옌반린이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모든 부문에 걸친 개혁 정책안인 ‘도이머이(刷新)’ 정책을 실시해 국민경제 회복에 주력했다. 베트남은 시장경제를 수용하고 1995년 미국과 수교하면서 북한과 다른 길을 걸었다.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동남아국가연합(ASEAN, 아세안) 등 국제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3월 5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단장으로 한 대북특사단이 평양에 도착,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4시간 동안 접견했다.
2015년 수교 20주년을 맞아 당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찾은 응우옌푸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은 “우리는 적에서 친구로 탈바꿈했다”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 후 43년 만인 2018년 3월 5일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 전단이 베트남 다낭에 기항했다. 미국은 베트남과의 군사협력 강화를 위해 핵잠수함의 기항 가능성도 시사했다. 베트남이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군사 교류를 강화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베트남은 북한의 이상적인 미래 모델이 될 수 있다.

김 위원장 입장에서 하노이보다는 못하지만 쿠바 아바나행 비행기도 탑승할 만하다. 북한 검찰 대표단은 2018년 3월 12일 쿠바를 방문했다.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개혁·개방에 나선 쿠바 모델은 북한의 미래상이 될 수 있다. 2008년 피델 카스트로(2016년 사망)의 뒤를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이 된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소련식 중앙통제 경제의 개혁을 선언했다. 국유 농지의 일부를 농민에게 분배해 자영농을 육성했다. 또 농산물 거래 시장을 허용하고 음식점·커피숍·이발소 등 자영업도 일부 허용했다.


▎청와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등 한국 특사단이 3월 8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백악관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개혁 속도는 더뎠고 경제난도 개선되지 않았다. 쿠바의 개혁·개방 모델이 3대 세습체제에 접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구심을 표하는 목소리가 높다. 쿠바를 방문한 응우옌푸쫑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2018년 3월 29일 시장 친화적 경제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응우옌 서기장은 아바나대 강연에서 “시장경제는 그 자체로 사회주의를 파괴할 수 없다”며 “성공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선 적절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고 강조했다.

응우옌 서기장은 베트남은 지난 20여 년 동안 국민 약 3000만 명을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쿠바는 라울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은 2011년 이후 본격적으로 경제 개혁을 시작했다. 쿠바 공산당은 시장 개혁의 속도 부진은 절차의 복잡성, 관료들의 참여 저조, 관리감독에서의 실수 탓이라고 인정했다.

김정은, 트리폴리 비행기는 안 탈 것


▎북한 상류층이 거주하는 평양 고층아파트 밀집 지역.
김 위원장은 리비아 트리폴리 비행기는 결코 타지 않을 것이다. 리비아 핵 포기와 경제지원 방식은 북한엔 최악의 카드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이 ‘리비아식’ 북한 비핵화를 주장하면서 향후 협상의 최대 쟁점이 되고 있다. 리비아식 비핵화의 핵심은 핵과 생화학무기의 완전 포기선언이다. 국제사회의 관계 개선과 경제지원 등 비핵화의 대가는 그 이후 과정에 포함된다.

리비아는 1969년 무아마르 카다피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 독재를 시작했다. 독재만 놓고 보면 북한 정권과 유사하다. 강경 반미 노선인 카다피 정권과 미국의 반목이 점차 심해지면서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고 1981년에는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1992년 리비아는 미국 여객기 폭파 테러 혐의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경제제재를 받았다. 장기간 국제적 고립과 경제제재로 정권 유지에 위기를 느낀 리비아는 영국의 중재로 2003년 미국과의 비밀 협상 후 그해 말에 핵과 생화학무기의 완전 포기를 선언했다. 비밀협상 과정에서 핵 물질과 장비, 프로그램을 공개했으며 포기 선언 이후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도 수용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의 관계 회복은 즉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2006년이 돼서야 미 정부는 리비아에 대사관을 세우고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편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지웠다.

‘평양식’ 비핵화 모델의 실체는?


▎3월 26일 베이징역에 도착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부부가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영접을 받고 있다. / 사진:조선중앙통신
리비아식 비핵화를 하면 북한은 사실상 2년 내에 핵 폐기를 완료해야 한다. ‘조건 없는 비핵화’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장기간 독재 집권한 카다피 정권은 비핵화 선언 이후 8년 후인 2011년 민주화운동인 재스민 혁명으로 시작된 ‘중동의 봄’ 영향으로 무너진 것도 북한이 리바아식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이유다.

이외에도 ‘이란식’ ‘우크라이나식’ ‘남아공식’ 등 각국의 비핵화 과정은 다양하다. 1992년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핵 폐기를 촉진시키기 위해 ‘넌-루가(Lunn-Rugar program)’ 법안으로 총 16억 달러를 지원했다. 이란의 비핵화 과정은 제재 해제와 핵 폐기 과정이 병행됐다. 이란과 주요 6개국(유엔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은 10여 년의 협상 끝에 2015년 7월 이란이 핵무기에 사용되는 고농축우라늄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에 이란 제재를 해제하는 핵 협정을 타결했다.

북한이 선호하는 최상의 비핵화 모델은 ▷최소의 단계적 비핵화 ▷최대의 신속한 경제지원과 체제 안전보장이다. 반면 미국이 요구하는 모델은 반대로 ▷최대의 신속한 비핵화 ▷가능한 한 늦은 단계적 경제지원과 체제 안전보장이다. 양국이 협상장에서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혹은 이란 방식으로 최대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핵 폐기가 가능한 살라미 방식으로 10년에 걸쳐 나눠 진행하는 ‘평양식’을 염두에 둘 것이다.

과거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북한 인사들에게 “옆집(중국)에 좋은 선생님이 있는데 왜 벤치마킹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북한은 종심(縱深)이 작아서 중국처럼 할 수 없다고 한다. 남포와 원산을 개방하면 평양도 개방할 수밖에 없어서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면 무슨 대안이 있느냐고 반문하면 ‘우리 식대로 간다. 장군님이다 알아서 한다’는 답변이 돌아와 토론이 지속되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와 김정은의 정상회담은 평양이 핵·경제 병진노선하에서 자력갱생의 우리 식대로 나아가는 데 한계에 직면하게 할 것이다.

명과 청나라를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이 세계관의 전부였던 조선시대의 쇄국 시각으로 무장한 평양은 19세기 말 조선처럼 서구의 개항 압박을 받고 있다. 특히 인류에게 치명적인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강요받고 있다. 김 위원장은 비핵화로 호랑이 등에 올라타서 새로운 개방화 시대에 동참할지, 호랑이를 보자마자 다시 핵을 안고 동북아 국제정치의 밀림으로 숨을지 세기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다. 전 세계 시청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 남성욱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장,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201805호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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