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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연구] 100년 전 구한말과 2018년 한반도의 선택 

막연한 희망은 오판 불러 냉정 지키며 살길 찾아야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영국 대신 청나라를 외교의 중심에 둔 고종 황제와 위정척사파의 선택을 반면교사 삼아야…북핵 위기와 미·중 패권 경쟁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의 외교적 선택에 한반도와 대한민국의 존망이 달렸다

반만년 한국사는 무수한 전쟁으로 점철됐다. 대부분은 소소한 국경분쟁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 존망을 가를 정도의 큰 전쟁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사에서 큰 전쟁은 예외 없이 동북아 패권 경쟁과 직결됐다. 전쟁의 원인·경과·결과가 패권 경쟁 그 자체였던 것이다. 패권 경쟁에 잘못 대응했을 때, 우리 민족은 국가 존망의 전쟁에 휩쓸려 들었고 실제 망하기도 했다. 반면 현명하게 대응함으로써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때로는 전쟁 위기를 국가 번영의 기회로 살려내기도 했다.


▎2018년 한반도 상황은 열강들이 패권을 다퉜던 100년 구한말과 닮은 점이 있다. 대한민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며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북핵 문제가 2018년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여기에 더해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도 격화되고 있다. 북핵 문제는 잘 해결될까? 아니면 전쟁으로 치달을까? 대한민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북한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결말을 맞을까?

이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래서 불안하고 두렵다. 이럴 때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장 앞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유사한 상황에서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봄으로써 귀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귀감을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모든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엇보다도 상대는 흉악하고 우리 조상은 선량하다는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 우리 조상에 대한 친근한 감정도 내려놓아야 한다. 철저한 객관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냉정한 현실이 보이고, 그 냉정한 현실에 대응한 우리 조상들의 잘잘못이 명확해진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큰 장점을 가진다.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조상일수록 낯이 설고, 그럴수록 그 조상에 대해 객관적인 자세를 취하기가 쉽다.

패권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동북아 역사는 19세기를 경계로 나눌 수 있다. 패권 경쟁의 주체와 방식이 19세기를 경계로 확연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19세기 이전에는 주로 유목 세력과 농경 세력 간에 패권경쟁이 벌어졌다. 두 세력의 패권 경쟁은 흉노 제국과 한(漢) 제국 때부터 시작해 청나라와 명나라 때까지 2000년 가까이 지속됐다. 두 세력은 육지에서 패권 경쟁을 벌였고 승자는 육지를 차지했다.

반면 19세기부터는 농경 세력과 러시아 세력 그리고 해양 세력 간에 패권경쟁이 벌어졌다. 기왕의 양자대결이 삼파전으로 확대됐던 것이다. 2000년 가까이 농경 세력과 패권을 다투던 유목 세력은 러시아 세력에 그 자리를 넘겨주고 역사의 주무대에서 사라졌다. 삼파전은 육지에서도 벌어졌지만 주로 바다에서 벌어졌다. 그래서 승자는 육지는 물론 바다도 차지했다.

흉노 편에 섰던 고조선의 운명


▎구한말 프랑스 일간지에 실렸던 만평. 조선의 지도를 밟고 있는 아시아의 맹주 일본이 유럽의 강자 러시아와 링에서 격돌하고 있다.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청나라가 천막 밖에서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 차이만이 아니었다. 해양 세력은 동북아에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저 멀리 유럽과 아메리카에도 존재했다. 나아가 해양 세력과 러시아 세력은 농경 세력이 이전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근대문명으로 무장했다. 그 모든 것이 농경 세력에는 낯설었다. 그래서 과거 유목 세력과의 패권 경쟁에서 얻었던 경험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낯선 해양 세력 그리고 러시아 세력과 동북아 패권을 놓고 경쟁해야만 했던 것이 100년 전 구한말의 시대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구한말의 패권 경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2000년 가까이 지속된 농경 세력과 유목 세력 간의 패권 경쟁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북아에서 유목 세력과 농경 세력 간의 패권 경쟁은 흉노 제국과 한(漢) 제국 때 처음 벌어졌다. 그때의 패권 경쟁은 이후 2000년간 양 세력 간에 지속된 패권 경쟁의 전범이나 같았다. 흉노 제국은 몽골 고원과 중앙아시아를 아우르는 초원지역을 장악하면서 동북아 패권을 추구했다.

반면 한 제국은 중국 대륙을 석권하면서 동북아 패권을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양 제국 간에 패권 경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동북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초반의 패권은 흉노 제국이 차지했다. 하지만 한무제가 등장하면서 패권은 한 제국으로 넘어갔다. 그 뒤 2000년에 걸쳐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즉 초원 지역을 장악하는 유목 세력 아니면 중국대륙을 석권하는 농경 세력은 예외 없이 패권을 추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패권 경쟁이 발발했고 동북아 전체가 전쟁에 휘말려 들곤 했다.

그렇다면 흉노 제국과 한 제국 간의 패권 경쟁이 일진일퇴를 겪을 때 우리 조상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 당시 만주와 북한 지역에는 한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있었다. 고조선은 흉노 제국과 한 제국이 패권 경쟁을 벌일 때 흉노 제국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고조선은 한 제국과 국경을 접했고 그래서 고조선 최대의 안보 위협은 바로 한 제국이었다. 그런 면에서 고조선이 흉노 제국 편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한 제국이 흉노 제국을 제압하고 동북아 패권을 석권한 이후였다. 예상 그대로 한무제는 자신의 패권 질서에 순응할 것을 요구했다. 이미 고립된 고조선에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자존심을 내세우며 적대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인정하고 순응할 것인가? 그 둘 중 하나였다. 현실을 인정하고 순응하는 것은 현실추구형 대응이라 부를 수 있다.

반면 자존심을 내세우며 적대하는 것은 이상추구형 대응이라 할 수 있다. 둘 다 일장일단이 있었다. 현실추구형은 생존 대신 자존심을 포기해야 했다. 이상추구형은 자존심 대신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한무제의 요구를 놓고 논쟁을 벌인 결과, 고조선 왕은 거절하기로 결정했다. 그런 면에서 당시 고조선 왕은 이상추구형이라 할 수 있다. 결과는 전쟁이었고 1년간의 저항 끝에 고조선은 멸망했다.

그 이후 동북아 패권 경쟁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 민족의 대응방식은 현실추구형 아니면 이상추구형이었다. 여기에 더해 한 가지 대응방식이 또 있었다. 패권추구형이 그것이었다. 스스로 패권국가를 추구하는 방식이 곧 패권추구형이었다. 고구려가 그랬다.

고구려의 패권 추구는 일면 성공했고 일면 실패했다. 유목 세력과 농경 세력의 패권 경쟁이 승패 없이 장기간 지속될 때, 즉 남북조 때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수나라 그리고 당나라가 패권을 차지했을 때, 고구려는 그들과의 패권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결과는 전쟁이었고 고구려는 멸망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을 반복한 한민족


▎구한말 러시아 공사관의 원래 모습.
고구려와 비교할 때 신라는 현실추구형이었다. 비록 신라는 당나라의 영토 야욕에는 결연히 맞서 싸웠지만 그것이 없을 때는 당나라의 패권 질서에 순응했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생존과 번영을 누렸다.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도 처음에는 현실추구형이었다.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으로 침략하자 고려 성종은 재빠르게 거란의 패권질서를 수용했다. 그때 서희의 뛰어난 협상으로 강동 6주를 얻어내기까지 했다. 즉 자존심을 버리는 대신 영토 실리를 취했던 것이다. 그 같은 현실추구형 대응은 여진의 금나라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무신정권 때, 몽고 침략에 저항하면서 고려의 대응 방식은 이상추구형으로 돌변했다. 최우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몽고의 패권질서를 거부했다. 그 결과 고려와 몽고 사이에 30년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에는 항복으로 끝이 났다. 사실상 그때 고려는 멸망했다.

조선 후기의 사림파 역시 고려 무신정권과 마찬가지로 이상추구형이었다. 만주와 몽고 고원을 석권한 여진의 청나라가 자신의 패권질서에 순응할 것을 요구하자 사림파는 크게 반발했다. 명나라에 대한 명분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청나라의 패권질서를 수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 사림파의 주장이었다. 광해군이 현실의 엄중함을 들어 순응할 기미를 보이자 아예 인조반정을 일으켜 왕을 축출했다. 그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했고 결국에는 항복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조선은 멸망하지 않았으며 인조 역시 축출되지 않았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인조와 사림 세력은 여전히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대외관계를 주도했다. 한국의 대외관계사에서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은 중요한 전기가 됐다. 고구려 때부터 인조반정 이전까지 대외관계를 주도한 세력은 현실과 실리를 중시했다.

그래서 현실과 실리에 따라 유목 세력과 협력하기도 하고 농경 세력과 협력하기도 했다. 어느 일방을 오랑캐로 무시하거나 중화(中華)로 사모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농경 세력 일방으로 기우는 것이 큰 추세였다. 그 이유는 만주 때문이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우리 민족에게 최대의 실리는 만주를 되찾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목 세력에 적대하게 되고 농경 세력에 친근하게 됐다. 그래야만 유목 세력이 장악한 만주를 되찾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조선 초기의 대명 사대외교 또한 현실과 실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대명 사대외교를 통해 세종은 4군 6진을 개척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세종의 대명 사대외교는 고려 태조 왕건의 북진정책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대명 사대외교라는 형식을 통해 영토 회복이란 실리를 취했던 것이다.

반면 조선 후기 사림의 명분론과 의리론은 현실과 실리라는 측면에서 공허하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협력 대상이어야 할 명나라는 멸망한 상태였다. 이미 동북아 패권을 장악한 청나라와 적대하려면 힘을 키우고 친구를 찾아야 했다.

정신적 자존심만 높았던 조선 후기 사림


▎고바야시 기요치카의 [일본만세 백찬백소(日本萬歲 百撰百笑)]에 실린 ‘전기 충격을 당한 만주인’. 고바야시는 청나라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사림은 그런 노력은 전혀 기울이지도 않으면서 단지 이론으로만 청나라에 적대했다. 만주로 진출하지도 못하고, 실제 청나라에 적대하지도 못하면서 이론으로만 적대하다 보니 정신적인 자존심만 한없이 높아갔다.

조선 후기 사림은 청나라의 여진족을 비롯한 모든 유목 세력을 오랑캐라 멸시하며 아예 상종하지도 말아야 할 대상으로 매도했다. 패권국가에 대한 이상추구형 대응이 급기야는 현실을 현실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반대로 왜곡해 인식하게끔 조장했던 것이다. 유목 세력에 대한 멸시는 만주를 비롯한 북방지역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민족 에너지는 내부 논쟁과 내부 약탈로 쏠릴 뿐 밖으로 뻗어가지 못했다.

고종이 즉위했을 때 조선은 사림의 후예인 위정척사파가 주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제 현실은 급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청나라의 패권질서가 흔들리고 있었다. 청나라의 동북아 패권질서를 뒤흔든 세력은 영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열강이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온 세력 즉 해양 세력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방면으로는 또 러시아 세력이 진출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동북아 패권질서는 남쪽의 해양 세력과 북쪽의 러시아 세력 양쪽으로부터 도전받았던 것이다. 그 틈을 타고 일본이 청나라의 패권질서에 도전했다.

10년간 지속된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끝내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해는 1874년이었다. 그때만 해도 고종은 위정척사파와 마찬가지로 서양 세력을 오랑캐라 생각했다. 본래 오랑캐란 만주의 여진족을 지칭하던 말로 야만인 또는 미개인이란 뜻이었다. 즉 오랑캐라는 말은 비록 무력은 발달했을지언정 문명은 저급한 사람들이란 의미였다.

따라서 서양 세력을 오랑캐로 보는 생각에는 혹시 서양 세력의 무력은 인정한다 해도 그들의 문명은 절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뜻이 함축돼 있었다.

만약 고종이 당시 서구 열강과 국제질서에 관련된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분석했다면 국제질서의 골격을 파악하고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세계 패권을 차지한 영국에 러시아가 도전하는 것이 당시 국제질서의 골격임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동북아 국제질서의 변화를 영국과 러시아 간의 세계 패권 경쟁과 연관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영국이 세계 패권국가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해양 세력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모색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세계 국제질서에 대해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북아 국제질서의 변화를 과거의 패권 경쟁과 비슷한 것으로 오판했다. 그런 오판에 입각해 청나라를 여전히 동북아 패권국가라고 믿었고, 청나라의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는 일본이라고 판단했다. 영국과 러시아 그 외 미국·프랑스·독일 등은 그냥 서양 오랑캐일 뿐 고려 대상에 들지도 않았다.

과거의 경험상 중국 세력과 일본 세력이 충돌했을 때는 언제나 중국세력이 승리했다. 저 멀리 삼국시대의 백강구 전투를 비롯해 가까이 임진왜란까지 모두 중국 세력이 승리했다. 그런 역사적 경험에 더해 임진왜란의 원한까지 생각하면 청나라와 일본의 패권 경쟁에서 청나라가 승리할 것이 확실했고 또 승리해야만 했다. 고종을 비롯해 당시의 위정척사파는 그렇게 판단했고 그렇게 믿었다. 그런 판단으로 일본의 도전을 과소평가했고, 서양 세력의 도전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저 일본과 서양을 똑같은 오랑캐라 부르며 무시할 뿐이었다.

그 같은 고종의 생각은 1875년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이홍장이 보낸 밀서 때문이었다. 이홍장은 수시로 밀서를 보내 일본과 러시아의 위협을 경고하면서 그들의 위협에 맞서려면 일본은 물론 서구 열강과도 수호·통상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 권고에 따라 고종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홍장의 권고에 따라 조약을 맺었을 뿐, 일본과 서구 열강에 대한 정보수집이나 분석은 전혀 없었다. 물론 근대화 운동도 없었다. 여전히 청나라를 동북아 패권국가로 확신하고 일본과 서구 열강을 오랑캐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국제질서에 대한 오판의 연속


▎1896년 2월 11일 친러파에 의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지는 ‘아관파천’이 단행된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포를 끌고 가서 고종의 알현을 강요하는 일본군들.
고종이 일본과 러시아의 위협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879년 7월이었다. 그때 이홍장의 밀서를 받았는데, 그 밀서에는 일본의 위협에 더해 러시아의 위협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 경고에 따라 고종은 일본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제2차 김홍집을 파견했다. 1880년 8월에 귀국한 김홍집은 사행(使行) 결과를 보고하면서 [조선책략]을 바쳤다. 그것은 동경 주재 청국공사 하여장이 참찬관 황준헌을 시켜 작성한 책으로 조선이 취해야 할 외교정책을 정리한 것이었다.

“지구상에 막대한 국가가 있으니 러시아다. 러시아의 영토는 유럽·중앙아시아·동아시아에 걸쳐 있으며, 육군의 정예병이 100여 만, 해군의 거함이 200여 척”으로 시작하는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무력과 위협을 크게 강조했다. 그런 러시아를 막기 위한 조선의 대책으로 [조선책략]은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을 제시했는데, 조선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선의 국토는 진실로 아시아의 요충지에 위치해 반드시 다퉈야 할 요해처(要害處)가 되므로 조선이 위험해지면 중국과 일본의 형세도 날로 위급해집니다. 러시아가 영토를 공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아! 러시아는 승냥이와 같던 춘추전국시대의 진(秦)나라와 같은 나라입니다. 러시아는 마치 옛날의 진나라처럼 힘써 정복하고 경영해온 지 300여 년인데, 그 처음은 유럽이었고, 이어서 중앙아시아였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시 동아시아로 옮겨 조선이 그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조선의 급선무를 계책할 때 러시아를 방어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러시아를 방어하는 계책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바로 친중국·결일본·연미국입니다.”

이 책은 고종에게 러시아의 위협을 경각시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세계 국제질서를 오판하게 하는 부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이 책에 의하면 당시 세계 최강 국가는 단연 러시아였다. 러시아가 워낙 강력해서 청나라 혼자 감당하지 못하고 조선과 일본의 힘을 필요로 한다고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종은 러시아를 세계 최강 국가 또는 세계 패권국가로 오판할 수 있었다. 그런 오판에 입각한다면 세계 최강국가 러시아가 동북아 패권국가 청나라를 위협하는 것이 동시 동북아 국제질서 변동의 핵심으로 읽힐 수 있었다. 즉 세계 최강 국가는 러시아이고 둘째 최강 국가는 청나라라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판단에서 고종은 청나라와 협력해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본다면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러시아는 흉노·선비·거란·몽고·여진 같은 북방 유목 세력의 변종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가 동북아 패권 경쟁에서 승리해 청나라의 패권을 대신하는 것은 과거 송나라의 패권을 몽고가 대신했던 상황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조선의 국가안보는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태를 막으려면 당연히 청나라와 더욱 긴밀히 협력해 러시아를 막아야 했다. 그런 판단에서 고종은 ‘친중국·결일본·연미국’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 같은 고종의 대응방식을 한국사에 비춰보면 그것은 이상추구형이라 할 수 있다. 약한 국가들과 연대해 최강 국가의 패권 질서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조선책략]은 당시 세계 국제 질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영국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 당시 세계 패권 국가는 영국이었는데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물론 청나라의 국익을 위해서였다. 우선 영국을 세계 패권국가로 언급한다면 고종은 러시아의 위협을 과소평가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고종이 세계 패권국가가 영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협력 대상으로 청나라보다는 영국을 고려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청나라의 국익에 심각한 위협을 줄 수 있었다.

국가 존망 달렸음에도 중국만 쳐다봐


▎다이쇼 천황이 된 일본 황태자가 1907년 조선을 방문한 기념사진. 앞줄에 조선 통감부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오른쪽 끝), 일본에 끌려가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 영친왕 (오른쪽에서 셋째), 일본 황태자 (오른쪽 넷째)의 모습이 보인다. 둘째 줄에는 조중응, 한 사람 건너뛰어 가쓰라 다로, 도고 헤이하치로, 이완용, 송병준 등이 서 있다.
당시 이홍장은 청나라의 동북아 패권을 지키기 위해 분투 중이었고, [조선책략]도 그 일환 중에 하나였다. 사실 [조선책략]의 외교대책은 고종으로 하여금 청나라의 힘을 과대평가하게 하고 조선을 청나라의 영향력 안에 계속 묶어 두려는 목적에서 제시됐다.

이렇게 보면 고종이 러시아를 세계 최강 국가 또는 세계 패권국가로 오판한 원인은 [조선책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 스스로 국제 정보를 확보하고 분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가의 존망을 결판 지을 외교대책을 입안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국제 정보를 확보할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오직 중국에만 의지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책략]에 숨겨진 이홍장의 심중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 결과는 국제질서에 대한 오판 그리고 오판에 근거한 외교대책이었다. 국제질서에 대한 오판은 고종뿐이 아니었었다. 당시의 위정척사파 역시 국제질서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다. 단지 [조선책략]에 제시된 친중국·결일본·연미국을 보고 그것에 대해 표면적으로만 비판했다. 그래서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친중국·결일본·연미국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기만 했다.

만약 고종과 위정척사파가 당시의 세계질서를 냉정하게 확인하고 현실적인 외교대책을 입안했다면 [조선책략]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됐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세계 패권국가 영국 그리고 국가 이익을 중심으로 외교대책을 논의했다면 친중국·결일본·연미국이 아니라 친영국·결미국·연일본이 도출됐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당시 세계 패권국가는 영국이고 그 패권국가와 연결된 국가가 미국·일본 등이라면 당연히 영국·미국·일본을 중심으로 외교대책을 입안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러시아는 협력대상이 아니라 타도 대상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냉정히 봤을 때 당시의 세계 패권 경쟁에서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양 세력의 승리 가능성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해주를 수복하기 위해서도 연해주를 영유한 러시아와 적대하는 것이 국익 확보에 훨씬 유리했다. 만약 세계 패권 경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고, 그때 조선이 영국과 협력관계라면 러시아로부터 연해주를 수복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나라에 대해서는 점진적인 이탈대책을 세웠을 듯하다. 비록 청나라가 약화됐다고는 해도 여전히 동북아의 대국이고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고종은 [조선책략]을 신뢰해 영국을 배제한 외교 대책을 채택했다. 그것은 영국 대신 청나라를 중심에 두는 외교대책이나 같았다. 당시 상황에서 세계 패권 국가를 배제한 외교대책이란 오판에 입각한 비현실적 외교대책이나 같았다. 그렇게 채택된 외교대책은 수많은 외교문제를 야기했다.

무지·오판에 입각한 이상추구형 대응은 분란만 조장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미 대통령.
우선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에서부터 외교문제가 발생했다. 고종은 미국과의 수호통상을 이홍장에게 일임하다시피 했다. 청나라 패권에 대한 신뢰 그리고 이홍장 개인에 대한 신뢰에서 그렇게 했다. 그때 이홍장은 조미수호조약에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구절을 삽입함으로써 조선을 명실상부한 청나라 속국으로 만들려 했다. 그럼에도 고종은 불만스러워하지 않았다. 청나라가 패권국가라면 그 패권에 순응하는 것이 조선의 국가안보에 유리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이 명실상부한 독립국인지를 의심했다. 명실상부한 독립국이라면 외교조약에 그런 구절을 삽입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라면 조선이 아니라 청나라와 조약을 맺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에 따라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이홍장과 미국 사이에 무수한 논쟁이 발생했고, 결국에는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구절을 부속문서에 넣는 것으로 봉합했다. 그렇게 봉합하기는 했지만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라이는 구절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으로 하여금 조선의 독립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당시 청나라가 명실상부한 세계 패권국가였다면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구절은 조선의 국가안보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어떤 국가이든 청나라 패권에 도전할 생각이 아니라면 감히 조선을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청나라는 세계 패권국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구절이 논란됨으로써 조선은 국가안보에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면서 청나라 속국이 아닌가 하는 의심만 받았던 것이다. 그럴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세계질서에 대한 무지와 더불어 청나라 패권에 대한 오판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지와 오판에 입각한 고종의 이상추구형 대응은 별 실익도 없이 분란만 조장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오판은 아관파천이었다. 고종은 청일전쟁에서 당연히 청나라가 이길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일본이 승리하자 크게 놀랐다. 청나라는 동북아 패권국가는커녕 일본보다도 약한 국가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설상가상 승리한 일본은 오만무례하게 행동했다. 그때 러시아가 등장해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고종은 그것을 보면서 세계 패권국가는 바로 러시아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패권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살길이었다. 그런 판단에서 고종은 1895년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기왕에 청나라·일본·미국과 연대해 러시아의 패권질서에 저항하려던 이상추구형 대응에서 현실추구형 대응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추구형 대응 역시 조선 국익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관파천이라는 현실추구형 대응이 성공하려면 러시아가 명실상부 세계 패권국가라야 가능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세계 패권국가가 아니었다. 세계 패권국가는 영국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것은 의도와는 달리 영국의 패권질서에 도전한 꼴이 됐다. 그 결과는 러일전쟁이었고, 러시아는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에 패했다. 러시아의 패배와 더불어 조선의 독립도 끝장났다. 오판에 입각한 현실추구형 대응이 불러온 참혹한 결과였다.

2018년의 현명한 선택을 위한 세 가지 고려

돌이켜보면 고종의 실패는 근본적으로 국제질서에 대한 무지와 오판 때문이었다. 청나라를 동북아 패권국가로 오판하고 친중국·결일본·연미국이라는 이상추구형 대응을 선택했다가 실패했다. 또한 러시아를 세계 패권국가로 오판하고 아관파천이라는 현실추구형 대응을 선택했다가 실패했다. 그 두 차례의 실패는 국가 멸망으로 이어졌다.

2018년 현재 북핵 문제와 미·중 패권 경쟁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대한민국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와 전쟁은 물론 국가 존망이 결정될 것이다. 과거 2000년의 한국사에 더해 100년 전 구한말의 역사에 비춰볼 때, 대한민국이 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세계 패권질서에 대한 냉정한 전망이다. 현재 한반도의 국제질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미국의 패권질서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 한반도의 국제질서가 요동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중국의 패권 도전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미국의 승리, 아니면 중국의 승리, 아니면 장기간의 세력균형 이 셋 중의 하나로 귀결될 것이다. 냉정히 말해 미국의 승리가 확실하다면 미국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반대로 중국의 승리가 확실하다면 중국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또 장기간의 세력 균형이 확실하다면 중립외교의 강화도 가능하다.

그런데 미국과의 연대 강화 또는 중국과의 연대 강화 또는 중립외교의 강화가 성공할지 아니면 실패할지는 궁극적으로 세계 패권질서가 어떻게 귀결되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그 무엇보다도 세계 패권질서에 대한 냉정한 전망이 필수적이다. 물론 냉정한 전망을 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중국 관련 정보를 대한민국 입장에서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분석·평가해야 한다.

둘째는 대한민국 국익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대한민국의 첫째 국익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안전과 번영이다. 여기에 더해 남북통일과 영토 회복이 가능하다면 더할 수 없는 국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관계와 국제관계에서도 그것이 대한민국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하고 나아가 남북통일과 영토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가의 여부를 기준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북핵 문제와 미·중 패권 경쟁에 대한 대응방식의 확립이다. 한국사의 경험에 비춰볼 때, 북핵 문제와 미·중 패권경쟁에 대한 대한민국의 대응방식은 이상추구형, 현실추구형 그리고 패권추구형 셋 중의 하나다. 대한민국이 패권을 장악하고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 여건상 그것은 실현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현실적인 선택은 이상추구형 아니면 현실추구형밖에 없다. 먼저 북핵 문제에서는 이상추구형 대응방식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북핵 문제에서 자칫 현실추구형 대응방식을 선택한다면 잠깐의 평화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미·중 패권경쟁에 대해서는 현실추구형 대응방식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세계 패권질서에 순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 패권질서에 대한 냉정한 전망, 대한민국 국익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리고 북핵 문제와 미·중 패권경쟁에 대한 대응방식의 확립은 국제질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것 없이 감정이나 희망을 앞세우다가는 오판할 수밖에 없다. 오판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국제질서를 오판하지 않고 정확히 인식하는가 아닌가의 여부는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평범한 원리를 얼마나 충실하게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805호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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