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7)] 일본 문단의 시원(始原) 기쿠치 간 

“인생은 한판의 장기… 물릴 수가 없다” 

최치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소설가·극작가·언론인이자 문예춘추사 창설한 실업가…일본 노벨문학상 두 차례 수상의 ‘원동력’으로 평가돼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에 이어 일본 문단 사상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왼쪽)가 1994년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있다.
매년 가을이 되면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노벨문학상 수상 예정자의 소식을 접하며 혹시 이번에는 우리나라 차례가 아닐까 기대를 해본다.

2017년에는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시구로(一雄石)가 수상했다. 노벨문학상이 문학을 제대로 평가하는 최고의 상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 권위는 실로 대단하다. 수상 작가는 일거에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한다. 세계에는 유명한 문학상이 다수 존재한다. 그중 노벨문학상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영국의 맨부커상이 있고 프랑스에는 콩쿠르상이 있다. 맨부커상은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수상하면서 우리에게도 친숙해졌다.

한국도 작가의 이름을 딴 이상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이 있다. 노벨문학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일본의 문학의 저력은 문학상에서도 나타난다.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이 일본에서는 대표적인 문학상이다. 이 문학상을 제정해 일본 문단의 형성의 후견인 역할을 한 사람이 기쿠치 간(菊池, 1888~1948)이다.

일본은 예술의 나라다.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예술적이다. 그 중심에는 문학이 자리한다. 나라시대(710~794)부터 헤이안시대(794~1185)를 거치며 일본만의 문학적 미의식을 구축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만의 문자로 삶의 궤적과 밑바닥을 치열하게 탐색했다. 상상력의 극단을 추구하며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인간 존재의 이유를 외쳤다.

2018년 1월 일본 문학상을 대표하는 두 가지 상을 발표했다.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이다. 이 두 가지 상은 같은 듯 다른 모양으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실의에 잠긴 도호쿠(東北) 지방은 이 상의 발표에 환호했다. 도호쿠에 관련된 소설이 권위 있는 문학상을 두 군데서 수상했기 때문이다. 둘 다 이와테현(岩手縣) 출신 시인이자 동화작가인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1896~1933)와의 인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동화작가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만화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로 알려져 있다.

순수문학 지향하는 아쿠타가와상, 대중성 주목하는 나오키상

우선 아쿠다가와상 공동 수상작인 와카타케 지사코(若竹佐子)의 [나 혼자 갑니다]는 이와테현 오코노시(遠野市) 출신의 가정주부로 미야자와 겐지의 시에서 소설 제목을 인용했고, 도호쿠 지방의 사투리를 듬뿍 담아 74세의 노인이 신천지에 다다르는 내용을 소설로 전개해 갔다.

나오키상을 수상한 가도이 요시노부(門井慶喜)의 [은하철도의 아버지]는 이와테현 하나마키(花卷)의 미야자와 겐지의 아버지를 시점( 點)으로 잡아 동화 [은하철도의 밤]으로 알려진 일본의 동화작가인 미야자와 겐지를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괴짜 아들 겐지로 묘사한 작품이다.

올해로 158회째를 맞이한 이 양상(兩賞)은 같은 단체에서 주최하고 같은 장소에서 전형(銓衡)을 하고 같은 상품과 상금을 수여한다. 이 두 상은 동시에 제정됐으나 성격도 다르고 지향점이 다른 문학상이다. 아쿠타가와상이 단편의 순수문학을 지향하고 신인작가에게 우선권을 주는 상이라면 나오키상은 중·장편의 소설에 대중성을 주목하고 기성의 작가에게도 문호를 개방한다.

이 두 상은 일본 문학의 산실이다. 일본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데는 이 상의 역할이 적지 않다. 1968년 일본인 최초의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는 초기부터 이 상의 전형위원으로 활약했고 1994년 일본에 두 번째 노벨 문학상을 안긴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 1935~)는 1958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였다.

매년 1월과 7월에는 일본문학진흥회가 주최하는 전형회가 도쿄의 쓰키지(築地)에 있는 신키라쿠(新喜樂)라는 요정에서 열린다는 점도 흥미롭다. 1층에서는 아쿠타가와상, 2층에서는 나오키상 전형회가 각각 열린다.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상이 이렇게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전형회를 갖는 데는 이 상을 제정한 문단의 황제라 불리던 작가 기쿠치 간 때문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는 당대 최고의 단편 소설가였다. 나오키 산주고(直木三十五, 1891~1934)는 뛰어난 작가였는데 둘의 공통점은 기쿠치 간이라는 친구를 둔 것이었다. 이들은 안타깝게 그리고 작가답게 요절했다. 그들 사후 기쿠치 간은 벗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들의 문학적 성취를 오래 기억하기 위하여 이 상을 동시에 제정한다.

신기라쿠는 도쿄의 쓰키지에 있는 노포(老鋪)의 요정이다. 가네다나카(金田中)와 나란히 일본 2대 요리점의 하나고 또한 깃초(吉兆)를 포함해 일본 3대 요리점으로 불린다. 매장 건물 자체는 구리 지붕 목조 2층의 다다미 72장의 오히로마(大廣間)라고 불리는 큰 사랑이 있다. 정원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보낸 한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다.

아쿠다가와상과 나오키상의 전형이 이뤄지는 장소로 아쿠타가와상은 1층 나오키상은 2층의 오히로마를 이용한다. 정·재계와 문화인의 이용자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초대 여주인인 이토킨(伊藤きん)과 성씨가 같은 이토 히로부미가 자주 이용했고 전 수상이며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토에이사쿠(佐藤作)가 1975년 뇌일혈로 쓰러진 것도 이 가게였다. 재계 인사들이 자주 이용한 이유는 이곳에서 극비리에 행해진 대화가 외부에 전혀 유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영방침에도 독자적인 철학이 있다. 지점은 내지 않는다. 선전은 하지 않는다. 매일 개점한다. 초심을 잃지 않고 영업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무언의 서비스’를 행한다. 고객이 질문하지 않는 한 이쪽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주간 요미우리]의 기사에 따르면 “신바시(新橋)가 다른 요정 지역과 크게 다른 것은 입의 무거움이다. 아카사카(赤阪)의 이야기는 어떤 극비의 이야기도 언젠가 세상에 유출된다. 그러나 신바시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높은 병풍 안의 일은 일절 밖으로 새지 않는다는 믿음이었다.”

이곳에서 두 상의 발표가 이뤄지는 이유는 기무라 사쿠(木村さく)라고 하는 뛰어난 여주인의 존재가 컸다. 다른 비슷한 유형의 라이벌 요정을 누르고 문예춘추 간부의 마음을 잡은 훌륭한 경영자 기무라 사쿠는 1917년 32세에 신키라쿠를 선대 여주인에게 양도받아 2대 여주인이 되고, 1950년경에 이 두 상의 전형회장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1961년부터는 두 상의 전형회가 모두 이곳에서 거행되기 시작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1924년(다이쇼 13년)에 기쿠치 간이 [문예춘추]를 창간한 이래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매호의 권두에 작품을 게재했다. 나오키 산주고는 문단 가십을 모아서 문예춘추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작가의 이름을 붙인 상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학계]의 편집자였던 가와사키 다케이치(川崎竹一)의 회상에 따르면 1934년에 문예춘추사가 발행하던 [문예통신]에서 가와사키가 공쿠르상이나 노벨상 등 해외문학상을 소개한 김에 일본에서 권위 있는 문학상을 설립해야 한다고 쓴 글을 기쿠치가 읽은 것도 동기라고 한다. 이때 기쿠치는 가와사키에게 문예춘추사 안에서 바로 준비위원회 및 전형위원회를 만들도록 요청하고 가와사키와 나가이 다쓰오(永井龍男)등이 준비 작업을 한다. 그해 중 [문예춘추] 1935년 1월호에서 ‘아쿠타가와 나오키상 선언’을 발표하고 정식으로 두 상을 제정한다. 두 작가를 기억하고 문운(文運)의 양성에 이바지하는 것이 설립 취지다. 당시부터 상패로 정상(正賞)에 해당하는 회중시계가 수여됐고, 부상은 500엔이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芥川龍之介賞) 통칭 아쿠다가와상(芥川賞)은 순수문학의 신인에게 주는 문학상이다. 문예춘추 사내의 일본 문학 진흥회(日本文振興)에서 심사하고 상을 수여한다.

다이쇼 시대(大正時代, 1912~1926)를 대표하는 소설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업적을 기념해 친구인 기쿠치 간이 1935년 나오키 산주고상(直木三十五賞)과 함께 창설 이후 해마다 1월과 7월 두 차례 발표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5년부터 일시 중단했지만 1949년에 부활했다. 신인작가로 발표된 단편·중편 작품이 대상으로 전형위원의 합의에 의해서 수상작을 결정한다.

현재 수상자는 정상으로 회중시계, 부상으로 100만 엔이 수여되며 수상작들은 [문예춘추]에 게재된다. 전형회는 요정 신키라쿠의 1층에서 열린다. 수상자 기자회견과 그 다음 달의 시상식은 오랫동안 토쿄회관에서 이뤄졌지만, 이 건물이 재건축을 하는 바람에 현재는 제국호텔에서 열린다.

징병 기피… 와세다大에 적(籍) 두고 이하라 사이카쿠 탐독


▎1. 도쿄의 쓰키지(築地)에 있는 신키라쿠(新喜樂)라는 요정에서 전형회가 열린다는 점도 흥미롭다. 1층에서는 아쿠타가와상, 2층에서는 나오키상 전형회가 각각 열린다. / 2. 일본의 노벨문학상 두 차례 수상 ‘원동력’으로 평가되는 기쿠치 간. / 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작품으로 [라쇼몬(羅生門)] [지옥변(地獄變)] [어떤 바보의 일생] 등이 있다.
나오키산주고상은 무명·신인 및 중견작가에 의한 대중소설 작품에 주는 문학상이다. 통칭은 나오키상(直木賞)이다. 나오키산주고는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각본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주로 대중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을 남겼다. 대중소설이란 예술성보다도 오락성에 중요성을 두고 있는 소설의 총칭이다. 이런 점에서 나오키상은 대중소설 작품이 전형 대상이다.

과거는 아쿠타가와상처럼 무명·신인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이었지만 점차 중견 작가 중심으로 이행됐다. 현재는 거의 커리어는 관계없이 백전노장이 수상하는 경우도 많다. 전형과 시상 과정은 위의 아쿠타가와상과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수상작들은 모든 읽을거리라는 뜻의 [올 요미모노](オル讀物)라는 잡지에 게재한다. 또한 복수의 수상자가 있는 경우에도 각각 상품과 100만 엔의 상금을 증정한다.

아쿠타가와상·나오키상은 지금은 언론에서 크게 다뤄진 상이 됐지만 설립 초기는 기쿠치가 생각한 만큼 이목을 끌지 않았고 1935년 [이야기의 휴지통]이란 글에서 키쿠치는 “신문 등은 더 크게 다뤄줘도 좋겠어”라고 불평했다. 1954년에 수상한 요시유키 준노스케(吉行淳之介)는 수상 당시 아쿠타가와상에 대해서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고 수상자가 갑자기 바빠지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1955년에 수상한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도 당시는 “쇼 아니라 정말 상이었다”고 화제성이 낮았음을 보여준다.

엔도에 따르면 시상식도 신문 관계된 문예춘추 사내의 사람이 10명 정도 모인 극히 소규모였다. 전기가 된 것은 1956년이다. 지금은 일본 보수의 리더가 된 전 도쿄도 지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가 [태양의 계절]로 수상한다. 작품의 선정적 내용과 학생 작가란 점에서 큰 화제가 됐고 수상작이 베스트셀러가 됐을 뿐만 아니라 ‘태양족’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이시하라의 머리 모습을 본뜬 ‘신타로 컷’이 유행하는 등 ‘신타로 붐’으로 불리는 사회 현상을 일으켰다.

이후 아쿠타가와상·나오키상은 저널리즘에 크게 다뤄진 상이 된다. 1957년 하반기에 가이코 타케시(開高健), 1958년 상반기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가 수상할 무렵은 신문사뿐만 아니라 텔레비전·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취재가 밀려들었다. 신작의 게재권을 놓고 잡지사들이 다투게 됐다. 오늘날에도 특별히 수상자가 학생 작가인 경우에는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수상작들은 종종 베스트셀러로 탄생한다.

기쿠치 간은 소설가·극작가·언론인. 문예춘추사(2018년 현재는 주식회사 문예춘추)를 창설한 실업가이기도 하다. 본명은 기쿠치 히로시(菊池)이다. 같은 한자를 훈독하면 히로시이고 음독하면 간이 된다. 남들이 주로 간으로 읽어서 점차 필명으로 굳어졌다.

가가와 현(香川縣) 가가와 군 다카마쓰(高松) 태생이다. 기쿠치가는 에도시대 다카마쓰 번 유학자 가문이었다. 다카마쓰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성적 우수로 학비 면제받고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수업 태만으로 제적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 지역의 재산가로부터 우수한 두뇌를 인정받아 메이지 대학 법과에 입학한다. 법률을 배우고 한때는 법률가를 목표로 한 적도 있었지만, 제일고등학교 입학에 뜻을 두고 중퇴한다. 징병 기피를 목적으로 와세다 대학에 적만 두고 수험 공부하는 한편 대학 도서관에서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에도시대 작가)를 탐독했다.

문단의 비즈니스맨이자 만능 아이디어맨

1910년(메이지 43년), 제일고등학교 1부 을류에 입학한다. 동기생 중에 유명인이 다수 있다. 그가 창설한 문학상으로 이름을 남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가와 야스(井川恭, 나중에 법학자 쓰네 토쿄(恒藤恭) 등이 있다. 그러나 졸업 직전 절도 사건에 휘말려 친구인 사노(佐野)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퇴학당한다.

그 후 친구인 나루세 쇼이치(成正一)의 집에서 원조를 받아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지만, 구제고등학교 졸업 자격이 없어 당초는 본과에 배우지 못 하고 선과(選科)에 배울 수밖에 없게 됐다. 기쿠치 간 자신은 구제고등학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를 치르고 도쿄제국대학에 가서 친구들과 합류하려고 했지만 우에다 만넨(上田萬年)의 거부와 교토를 떠나기 어려운 사정 때문에 머물게 된다. 쿄토대학 문과대학 교수로 있던 우에다 토시(上田敏)에게 사사했다. 당시의 실의의 나날에 대해서는 픽션을 섞어 [무명작가의 일기]에 상세하게 묘사한다.

1916년(다이쇼 5년)에 쿄토대학 졸업 후 시사신보 사회부 기자를 거쳐서 소설가가 된다. 1923년(다이쇼 12년)에 사비로 잡지 [문예춘추]를 창간하는 대성공을 거둬서 큰 부를 거머쥐었다. 일본문예가협회를 설립한다. 아쿠타가와상· 나오키상의 설립자다.

영화사인 다이에이(大映) 초대 사장과 호치(報知) 신문 객원으로 일한다. 이들의 성공에서 얻은 자산 등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요코미츠 리이치( 光利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등 신진 문학자에게 금전적인 원조를 행했다.

다이에이 사장 취임사에서 키쿠치는 “나는 사장으로서의 가치는 아무것도 없지만, 제작하는 전 작품의 시나리오를 읽어 주면 좋겠다 해 그렇다면 내게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장을 맡았다”고 말하고 이나가키 히로시 등은 그 담담한 말투나 꾸밈없는 모습에 큰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좋아하는 장기를 두거나, 시나리오를 훑어보는 것이 전세가 거세지는 안에서 기쿠치의 낙이었다.

작가로서의 창작 면에서는 1920년의 [진주부인(眞珠夫人)]으로 시작되는 통속소설을 주로 집필했다. 대표작으로는 [진주부인] [원한을 넘어서] [도주로의 사랑] [옥상의 광인] [아버지 돌아오다] 등이 있다. 인생 경험과 인생관을 창작에 활용함을 중시하고 있다.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청년에 준다’는 글 가운데 “25세 미만의 사람은 소설을 쓰지 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가로서보다는 문단의 비즈니스맨이자 만능 아이디어맨에 여러 가지 취미를 가진 팔방미인이었다. 또 성격 좋은 초창기 일본 문단의 형성에 기여한 문단의 후원자였다.

천하 한량의 자유 연애주의자로 보인다. 양성애자의 경향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구제 중학 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 4학년 아래의 소년 사이에 동성애 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 소년에게 여자 말투로 담은 사랑의 편지가 다수 현존한다. 또 본처 이외에 다수의 애인을 갖는다. 그중 한 명으로 고모리카즈코(小森和子)가 있었다. 고모리는 너무 쉽게 기쿠치에게 몸을 허락하자 기쿠치가 “여성적인 조심성이 없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전 문예춘추사 편집자, 출판사 줄리앙의 대표이사인 기쿠치 나츠키(菊池夏樹)는 기쿠치 간의 손자다. 2009년 [키쿠치 간 급서의 밤]을 간행한다.

“마주에게는 ‘무사한 명마’가 더 바람직해”


▎1. 가와바타 야스나리(왼쪽). 온갖 전위문학적 실험을 거듭한 끝에 전통적인 일본의 아름다움 속에서 독자적인 문학의 세계를 창조해 근대 일본 문학사상 부동의 지위를 구축했다. / 2. 2018년 3월호 [문예춘추].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전문이 게재됐다. / 3. 나오키상 수상작이 실린 [オル讀物].
그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 일류 문화인으로 활약한 조선 작가도 있다. 우리에게 아동 문학가로 알려진 마해송(馬海松, 1905~1966)이다. 창작 동화의 집필에 생애를 바치고 방정환 선생과 함께 조선의 아동문학운동의 선구를 맡았다.

그의 문재는 기쿠치 간이 인정하고 문예춘추의 편집부에 들어가 나중에는 계열사 [모던 니혼](모던일본)의 사장이 되기도 한다. 지인지감(知人之鑑)에 사람을 키워내는 능력이 출중했다. 작가의 양성에는 국적을 가리지 않았고 인재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이 도쿄에서 이렇게까지 성공을 이룬 것으로 일본의 문화계에 일약 유명인이 된다. 당시의 인기 여배우 미즈구보 스미코(水久保澄子), 기쿠치 간의 비서 사토 미도리(佐藤碧子)로부터 교제 요구가 있었으나 그것을 거절하고 1937년 무용가인 박외선과 재혼한다.

각종 취미활동을 한다. 마작·경마와 장기에 특기가 있었고 전문가적인 식견도 갖고 있었다. 마작은 다이쇼 시대 중기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중에 일본마작연맹 초대 총재를 지냈다. 키쿠치는 애호가 단체에 ‘마작찬(麻雀讚)’이란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도박을 통해 삶의 의미를 내비치고 있다. 역시 기교보다는 인격이다.

“어쨌든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며 많이 이기는 사람은 결국 잘하는 사람,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판 한 판 승부가 되면 강한 자 반드시 이기리라고는 말 할 수 없다. 정패(定牌)를 기억한 초보자에 질 수 있다. 그 점이 마작의 재미이다. (…) 최선의 기술에는 노력에 따라서는 누구도 이른다. 그 이상의 승패는 그 사람의 성격·마음씨·각오·배짱에 의한 것이 많다. 모든 게임 스포츠가 그런 것처럼 마작도 기술로부터 나와 궁극적으로는 인격 전체 경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마작도(麻雀道)의 세계가 열린다고 생각한다.”(기쿠치 간, [기쿠치 간의 일])

경마에 대해서는 입문서 [일본경마독본]을 출판했고, 전전(前前)에는 마주로서 많은 유력한 경주마를 소유했다. 장기에 대해서는 “인생은 한판 장기여서 물릴 수가 없다”는 문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무사한 명마(無事之名馬)’란 경주마를 가리키고 “능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부상 없이 계속 무사히 달리는 말이 명마”라는 생각을 나타낸 격언이다. 마주였던 작가 기쿠치 간에 의한 조어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시사신보(時事新報)]의 오카다 고이치로(岡田光一)에 의한 것이다.

오카다는 또한 기쿠치의 [일본경마독본] 대필도 했다. 기쿠치가 경마 관계자로부터 책을 구했을 때 [임제록(臨)]에 있는 ‘無事是貴人(무사시귀인)’에서 착상해 색지에 휘호한 것이 말의 시작이라고 한다. “무사함이 귀인”이란 본래 “자연체 안에 깨달음을 계몽하는 사람이 귀인”이라는 뜻의 선어로 다도(茶道)에서 1년의 무병 안녕을 축복하는 말로 전용됐다.

마주로서 말의 부상에 따른 걱정과 우울에 시달리던 기쿠치는 “마주에게는 조금 정도의 소질이 뛰어난 것보다 항상 무사한 것이 바람직하다. ‘무사한 명마’의 이유”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생각은 마주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마 관계자의 공감을 부르며 이후 ‘무사한 명마’는 건강하게 달리는 말을 칭찬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불우한 작가들에게 지갑 활짝 열어

장기에 대해서는 “인생은 한 판 장기여서 물릴 수가 없다”는 문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다이에이 사내에서 장기를 좋아하는 사장 기쿠치의 영향으로 장기가 유행하면서 중역들도 갑자기 장기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이나가키 히로시는 ‘평균 이하’를 자인하고 있었지만, 중역들과 좋은 승부를 할 정도는 됐다. 기쿠치는 그런 서투른 장기라도 열심히 들여다보고 관전하면서 “아마추어 장기는 앞뒤도 생각하지 않으니까 보고 있어도 정말 재미있네”하고 담뱃재를 주르르 무릎에 떨어뜨리고 유쾌한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고 한다.

기쿠치의 어른스러움은 동료 작가 등을 보살피는 방법에서도 엿보인다. 원래 잡지 [문예춘추]를 창간한 것도 자립할 수 없는 작가들에게 일할 자리를 주는 게 목적 중 하나였고[금색야차(金色夜叉)]로 알려진 오자키 고요(尾崎紅葉)의 사후, 그 미망인이 돈에 쪼들리고 있는 줄 알자 문예가협회 사무실로 찾아 가서 출판사에 제대로 인세를 내주도록 말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문예춘추사를 찾아온 불우한 작가들에게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놓는 일도 자주 있었다. 콘히데미(今日出海)에 따르면 기쿠치가 주머니에서 꺼낸 지폐는 구겨지고, 너무나도 무관심해 보이지만 금액을 세어 보면 많거나 적지도 않고 마치 미리 계산한 것 같기도 했다고 한다. 가난한 문사에 돈을 무심하게 아무렇게나 꺼내면 1엔인 사람도 있고 5엔인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기쿠치가 후원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 ― 그 서론]이란 제목으로 1968년 노벨상 수상연설을 한다. 중세 선승의 와카(和歌)를 인용·해석하면서 눈·꽃·달(雪月花)로 상징되는 일본의 아기자기한 미의 전통과 [겐지 이야기] [마쿠라노소시](枕草子) 등 일본 고전의 최고 명작이 나와 후대의 문학을 800년간 지배했다고 말하면서 일본의 전통미와 사계의 자연을 마음껏 자랑했다.

한편 그로부터 26년 후 또 한 명의 기쿠치 키즈로 볼 수 있는 오에 겐자부로는 같은 장소에서 영어로 된 수상 소감에서 ‘애매한 일본의 나’라는 제목으로 연설한다. 가와바타의 애매한 신비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바른 정신을 옹호하며 과거 역사에서 일본의 책임을 촉구한다.

다양한 목소리를 세계에 외치는 일본 문학의 힘을 본다. 기쿠치 간이 꿨던 꿈이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까?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저 번역이나 국력의 힘으로 받은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문학적 전통의 축적과 뒤를 받쳐 주는 일본 문단의 저력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이 있으며 그 시원은 기쿠치 간이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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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호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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