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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財테크 | 고란의 ‘알(면)쓸(모있는)신(기한)재(테크)’(4)] 주식시장 ‘고래’ 국민연금 새 밥상에 어떤 메뉴 올릴까 

주주권 적극 행사로 사회책임투자 확대·경영 건전화 유도… 주주 권익 높이는 고배당·지배구조 모범 기업 눈여겨봐야 

고란 중앙일보 기자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했다. 사회책임투자 규모는 5년 내 지금보다 약 3배로 확대한다. 국민연금은 주식시장의 절대 ‘갑’이다. 국민연금이 사면 주가가 오르고, 팔면 주가가 떨어진다. 이기지는 못해도 최소한 지지 않는 투자를 하고 싶은가? 비법은 ‘국민연금 따라잡기’다.

"사회주의를 노동자에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로 엄격히 정의한다면 미국이 지구상 최초의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의 말이다. 그는 1970년대 초부터 시행된 미국 기업과 공공기관의 퇴직연금제도에 주목했다. 1976년 [보이지 않는 혁명: 연금사회주의는 어떻게 미국에서 일어났는가(The Unseen Revolution: How Pension Fund Socialism Came to America)]라는 책을 펴냈다. ‘연금사회주의(pension fund socialism)’라는 용어가 여기서 나왔다(※직역하자면 ‘연금기금 사회주의’이지만 통상 연금사회주의로 줄여 쓴다).

드러커는 1980년대 중반쯤엔 연금 등 기관투자자가 미국 상장주식의 70%를 보유하게 될 것으로 봤다(실제론 1990년대 초 기준으로 44%에 그쳤다). 그러면 연금은 최대주주로서 기업을 지배할 수 있다. 연금의 주인은 노동자다. 곧, 노동자가 기업을 지배하는 셈이다. 자본주의인데 자본가가 없다. 그래서 연금사회주의라고 명명했다.

드러커가 예언한 연금사회주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연금의 주인인 노동자들은 일치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연금을 활용해 노동조건 개선을 도모하지 않았다. 수익률 제고를 최우선 가치로 여겼다.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의 밥줄을 끊는 구조조정이 노동자가 주인인 연금의 지지 아래 이뤄졌다.

30여 년 전 불가능하다고 입증된 연금사회주의 논란이 최근 한국에서 재현되고 있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Stewardship code: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지침)를 도입하고 사회책임투자(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 SRI)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다. 4월 말 기준 국민연금 덩치는 635조원에 이른다. 국내 주식만 135조원어치 들고 있다. 코스피와 코스닥 시장을 합친 규모(약 1900조 원)의 7% 수준이다. 국민연금의 날갯짓 한 번으로 증시에는 돌풍이 분다. 펀드 매니저가 아닌 개인투자자들이 국민연금의 투자 전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연금사회주의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유력 후보였던 곽태선 전 베어링자산운용 대표(왼쪽)는 7월 2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청와대가 인선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오른쪽)에게 지원 권유 전화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국민연금은 6월 27일 기금운용본부장을 재공모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2월 공모를 시작해 4월에 최종후보를 3명까지 압축했지만 유력 후보가 청와대 검증에서 낙마했다고 한다. 이로써 2000만 가입자의 노후를 책임지는 자리는 1년 넘게 공석이 됐다. 앞서 지난 정권 사람으로 분류되는 강면욱 전 본부장은 지난해 7월 사직했다.

재공모 발표가 나온 뒤, 유력 후보로 거론됐던 곽태선 전 베어링자산운용대표가 중앙일보에 청와대 개입 사실을 폭로했다. 곽 전 대표는 “공모 전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에게서 지원 권유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김성주 국민연금 이사장과도 만났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돌연 선임이 취소됐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유는 곽 전 대표 본인과 아들의 병역 문제다. 국민정서상 기금운용본부장 자리를 맡겼다가는 역풍이 우려되기 때문이란다.

논란의 핵심은 곽 전 대표가 왜 선임되지 못했느냐가 아니다. 기금운용본부장 선임에 왜 청와대가 개입했느냐는 점이다. 청와대는 “장 실장이 덕담 차원에서 전화했을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개입할 의도도 없었고, 결과적으로 선임되지 않았으니 개입한 게 아니지 않느냐는 설명이다. 그래도 개운치 않다. 사익 추구에 국민연금이 동원됐던 전 정권의 아찔한 기억이 떠올라서다.

2015년 7월, 국민연금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지만, 국민연금은 청와대의 지시를 따랐다. 참여연대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이 합병으로 약 6000억원을 손해 봤다. 반면, 이 부회장과 삼성 일가는 3조원가량의 직·간접적 이득을 얻었다. 시민들은 노후자금을 볼모로 사익을 추구했다는 사실에 분노해 촛불을 들었다. 대통령이 탄핵됐다. 삼성그룹 총수가 처음으로 구속됐다. 합병을 실행에 옮긴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기금운용본부장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정권이 국민연금에 손을 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지금의 청와대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데도 국민연금 개입을 시도했다. 비난 받아 마땅하다.

주주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국민연금의 파워는 막강하다. 어느 정권이건 이를 활용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다. 최근 논란이 되는 연금사회주의가 국내에 처음 등장한 것은 노무현 정부 때다. 2004년 말 당정은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를 허용하기로 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좌파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경영에 간섭하려 한다”며 연금사회주의라고 비판했다. 2007년 1월에는 유시민 전 복지부장관이 불을 댕겼다. 그는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예외적인 경우 경영권에 직접 개입하겠다”고 말했다. 마침 국민연금이 SK텔레콤을 제치고 포스코의 최대주주(2.86%)가 됐다. 야당은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연금사회주의 하자는 거냐”며 유 전 장관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연금사회주의라는 꼬리표는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실세인 곽승준 당시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은 2011년 4월 “대기업들의 거대 관료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를 적극 북돋우겠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전자, 포스코, KT 등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연기금을 활용한 기업 감시를 선포했다. 이념을 공유하는 우파 시장주의자들이 일제히 등을 돌렸다. 당시 김정호 자유기업원장은 “국민연금에 의결권을 부여하겠다는 청와대 측 방침은 기업들을 장악하려는 의도이며 결국 사회주의적 국영화처럼 갈 것”이라면서 “이명박 정부 정책이 참여정부보다 더 좌파적”이라고 비난했다.

월스트리트룰은 가고 스튜어드십코드 온다


▎국민연금은 정치권력의 입김에 휘둘려 사익 추구의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2015년 국민연금은 청와대 지시에 따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합병에 도움을 준 문형표 당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왼쪽)과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오른쪽)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스튜어드십코드는 고객이 맡긴 자산을 충실하고 선량하게 관리해야 할 기관투자자의 책무를 정해 놓은 가이드라인이다. 2010년 영국에서 시작돼, 미국·호주 등 20여 개국이 도입했다. 세계 최대 연기금인 일본공적연금펀드(GPIF)는 4년 전에 채택했다. GPIF의 참여를 기폭제로 일본에서는 200개 이상의 기관투자자가 스튜어드십코드를 준수하고 있다. 유럽에서 둘째로 큰 연기금인 네덜란드 공무원연금(APG)도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했다. 이들 연기금은 대체로 주주권 행사에 적극적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공무원연금(CalPERS)은 1987년부터 지배구조 개선과 주식가치 제고 등을 위해 중점관리 기업 리스트를 작성한다. 스웨덴 국민연금(AP)은 이사 후보 추천위원회에 직접 참여하고, 주주총회 전 기업과 미리 대화한다.

순환출자 구조를 통해 쥐꼬리 지분으로도 절대 권력을 행사해 온 재벌 입장에서는 기관투자자의 관여를 가능하게 하는 스튜어드십코드가 반가울 리 없다. 애초 2015년 3월 금융 당국이 주도했지만, 이듬해 12월이 돼서야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 민간 중심으로 ‘한국판 스튜어드십코드’가 제정된 것도 재계 반발에 부딪혀서다. 재계는 “국민연금의 독립성 보장이 먼저”라고 버텼다.

그럼에도, 결국 스튜어드십코드를 제정하고 국민연금이 이를 도입하게 된 것은 각종 사건·사고 덕분(?)이다. 국민연금이 정권에 휘둘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찬성했다가 6000억원을 날렸다. 또다시 이런 일을 겪지 않으려면 기금운용의 독립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올해 들어선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이 문제가 됐다.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이런 부도덕한 경영자를 두고만 볼 거냐는 여론이 고조됐다. 이를 의식한 국민연금은 지난 6월 대한항공에 공개서한을 보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여건이 조성됐다. 기금운용본부장이 아직 공석이지만, 복지부와 국민연금은 예정대로 7월 말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했다. 그간 배당확대에 국한된 주주활동 기준을 경영진 사익 추구, 부당 지원, 횡령·배임 등 기업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로 확대했다. 중점관리 사안을 정한 후 개선 대책을 요구하고 비공개 서한을 발송한다. 그래도 변화가 없으면 주주총회에서 기업 가치를 훼손한 이사와 감사의 선임을 반대하고, 해당 임원에 대한 주주대표소송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는 이유에는 도덕적 당위성 외에 운용 성과도 있다. 국민연금은 그간 ‘월스트리트룰(Wall Street Rule)’을 따랐다. 투자기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의결권 행사 대신 해당 주식을 파는 방법으로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 월스트리트룰이다. 그런데 6월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지분을 5% 이상 확보한 상장사가 299개다. 10% 이상 지분을 확보한 기업도 96개에 달한다. 워낙 지분이 많아 팔기 시작하는 순간 주가가 급락한다. 국민연금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팔고 떠나는 월스트리트룰을 따를 수 없다. 경영진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영국의 관련 보고서(Active Ownership)에 따르면,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한 경우 기관투자자와 투자대상 기업 간에 우호적 관계가 형성됐고 이를 통해 기업가치가 개선됐다. 특히, 투자대상 이사회와의 대화 등 비공식 주주활동은 기관투자자의 초과 수익으로 이어졌다.

스튜어드십코드 도입과 함께 사회책임투자(SRI) 확대도 국민연금이 추진하는 주요 투자정책이다. SRI는 단순히 기업의 수익창출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닌 투자행위가 주주와 환경, 지배구조 투명성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다각도로 고려하는 투자다.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의 영어 앞글자를 따 ESG투자라고 한다. 국민연금법에는 이미 ESG 투자가 명시돼 있다.

배당주·우선주·지주사 주목


2015년 개정안에 따라 국민연금은 투자할 때 ESG 등의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 여러 공적 기금의 기금자산 운용 원칙을 명시한 국가재정법 63조도 기금 운용 시 ‘공공성’을 고려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법상의 ESG 원칙은 권고사항에 가깝다. 국가재정법상의 ‘공공성’은 지나치게 모호해 역시 강제성이 없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ESG 가운데 ‘지배구조(G)’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합병 찬성이 결정된 2015년 7월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회의에서는 지배구조 등 ESG 원칙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국민연금에 대해서는 사회책임투자 원칙을 저버렸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연기금의 ESG 투자확대는 대세다. 장기 수익성과 안정성을 추구하는 공적 기관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ESG 투자 개념을 도입했다. 일본의 GPIF도 지난해 7월 1조엔(약 10조원)을 자국 기업 대상 ESG 투자에 배정했다. 2016년 기준으로 전 세계 SRI 규모는 약 22조9000억 달러다. 전체 투자 자산의 26%다. 국내는 갈 길이 한참 멀다. 국내 SRI 펀드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다 합쳐야 6조9000억원에 불과하다. 위탁자산의 11%, 전체 운용자산의 1% 수준에 그친다.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고 사회책임투자를 확대하게 되면 국민연금은 어떤 주식을 살까. 가장 대표적인 주주권 행사는 배당 확대 요구다. 그간 국내 기업들은 해외와 비교해 배당에 인색했다. 국민연금이 배당정책을 중심으로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면 배당 규모가 커질 전망이다. 지난해 배당액을 기준으로 코스피 상장사 가운데 배당수익률이 6% 이상인 고배당주로는 에쓰오일·쌍용양회·ING생명·한국자산신탁·메리츠종금증권 등이 있다.

배당이 늘어나면 우선주도 재평가받을 수 있다. 우선주 가격은 의결권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보통주 대비 60% 수준에서 거래된다. 소액주주로서 의결권은 투자 수익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배당을 더 챙겨주는 우선주에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국민연금은 최근 향후 5년 내 2023년까지 SRI 투자 규모를 위탁자산의 30%까지 확대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5년간 약 12조원, 매년 2조원 넘는 돈이 ESG 관련 종목으로 유입되는 셈이다. 스튜어드십코드 도입과 맞물려 지배구조가 우수한 기업들이 시장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종목 선정이 어렵다면 SRI 펀드에 가입할 수도 있다. 다만, 국내 출시된 SRI 펀드의 경우 보유 종목이 일반 주식형 펀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경우도 많다. 아직까지 국내 시장에는 ESG 투자 개념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만 보고 펀드를 고르기보다는 보유 종목을 꼼꼼히 살펴야 투자를 결정해야 한다.

※ 고란 - 2003년 중앙일보에 입사, 중앙선데이 경제부문 소속이다. 대학 졸업 후 6개월 은행에 몸담은 걸 빌미삼아 ‘반 금융인’이라고 주장한다.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이 열어갈 ‘토큰 이코노미’에 관심이 많다. ‘암호화폐의 정석’에 해당하는 [넥스트 머니]를 지난 6월 출간했다. 중앙일보 홈페이지에 재테크 및 암호화폐 시장과 관련한 ‘고란의 어쩌다 투자’ 코너를 연재 중이다.

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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