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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취재] ‘7년째 계류 중’ 기부연금제의 행로(行路) 

기부하고 싶은데 안 된다고? 누가 ‘김장훈법’ 가로막나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고령화 시대 노후 대안이자 선행의 성취감 느낄 기회 박탈하는 ‘부처 이기주의’ ... 복잡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밀린 법안, 20대 국회에서는 통과될지 관심

▎가수 김장훈은 100억원 이상을 기부했는데 정작 전세를 살았다. 기부자의 노후를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배려해 줘야 한다는 관점이 기부연금제의 출발이다.
# 사례1. 70대 A할아버지는 서울 도심에 500억원대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아들과 딸이 한 명씩 있지만 사이가 안 좋다. 왕래가 끊긴 지 오래다. 자식에게 유산을 주고 싶지 않다. 평생 돈 모을 줄만 알았지 쓸 줄 모르는 할아버지는 이 건물을 공익재단에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고민이 하나 생겼다. 건물을 기부하면 할아버지의 생계가 문제였다. 아직 해외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건강하다. 할아버지는 기부를 약속하는 조건으로 공익재단에 제안을 했다.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의 일부(월 500만원)는 죽을 때까지 내가 받게 해달라’.

공익재단은 고민에 빠졌다. 순수한 기부가 명백하고 임대료 일부를 줘도 큰 부담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500억 건물과 임대수입 모두 공익재단에 귀속된다. 그러나 할아버지 제안을 들어주면 현행법상 ‘온전한 기부’가 성립되지 못한다. ‘그 어떤 대가라도 들어간 순간, 기부라고 할 수 없다’는 법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공익재단의 선의를 악용한 탈세를 막기 위한 방어 조치다.

그렇다고 공익재단이 ‘월 500만원을 할아버지에게 준다’고 신고하는 순간, 기부가 아니라 증여가 된다. 할아버지는 소득세를, 재단은 증여세를 내야 한다. 세금 내는 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이렇게 되면 기부의 성립 여부가 논란이 된다. 좋은 일을 하려는 과정에서 무척 일이 복잡해진다.

결국 할아버지와 공익재단은 국가에 알리지 않고 몰래 진행하기로 합의한다. 선량한 일을 하면서 ‘탈세 모의’를 병행한 셈이다. ‘음성적 기부’란 이상한 모양새가 됐다.

중산층 기부의 딜레마


▎주택연금 가입자 수는 해마다 증가한다. 이는 곧 기부연금제의 수요가 적지 않을 수 있다는 근거다.
그나마 A할아버지 같은 거액 자산가의 기부는 이렇게라도 이뤄질 수 있다. 그러나 5억원 미만의 소위 ‘중산층 기부’는 굳이 이렇게 합법과 불법의 경계 위를 걸으면서까지 강행할 필연성이 희박하다. ‘유류분(상속 자격을 갖춘 사람을 위해 반드시 남겨둬야 할 몫)’ 발생 탓이다.

풀어 쓰자면, 부모가 공증된 유언으로 ‘자식에게 상속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더라도 자식의 몫은 0이 아니라 일정액이 보장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게 10억원이 있다고 가정하자. 아들 둘이 있지만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남기고 사망했다. 그러나 아들들은 제 몫을 달라고 자선단체에 소송을 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 세법은 유류분 제도로 사건을 조정한다. ‘10억원*0.5(자식이 둘이니까 절반씩)*0.5(아버지 의도와 무관하니까 100%가 아닌 법정상속분의 50%만)=2억5000만원’이 자식 1명씩에게 돌아가게 되는 유류분이다. 즉 유류분 제도로 인해 아버지의 기부 뜻은 5억원(나머지 2억5000만원씩은 두 아들이 가져감)만 현실화된다.

유류분엔 아버지가 생전에, 자식에게 준 돈(증빙이 가능해야 한다)도 포함된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예전에 아들 한 명이 집을 살 때 보태라고 돈을 은행계좌로 1억원을 부쳐줬다면 유류분에 반영된다. 즉 이 아들은 2억5000만원이 아니라 1억5000만원만 상속받을 수 있다.

어쨌든 이런 현실이라면 공익재단은 중산층 기부를 받을 때 더욱 딜레마에 빠진다. 아주 크지도 않은 돈을 기부받으려고 줄기차게 소송을 불사하게 되면 이미지에 부담이 가기 때문이다.

# 사례2. B할머니는 치매 초기 증상을 앓고 있다. 가진 재산은 서울 아파트 한 채가 전부다. 온전하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보고 할머니는 전 재산을 처분해 병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이 과정에서 사기를 당해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다행히 남은 돈과 주위 도움으로 입원했지만 지속적으로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게다가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 자식들이 득달같이 달려올 수 있다. 할머니는 ‘돈이 남으면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자식들이 ‘어머니의 기부 유언은 치매 상태에서 한 것이라 효력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변호사와 의사 입회하에 유언장을 작성했어도 내심 불안하다.

# 사례3. C할아버지는 고독사(孤獨死)했다. 자식들이 많았지만 그 누구도 돌보는 이가 없어 쓸쓸히 생을 마쳤다. 집에 있는 유품들을 정리할 사람조차 없었다. 전화를 했지만 자식들은 ‘어떤 유품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녹음까지 해뒀다. 할 수 없이 요양사가 할아버지 집에 갔다. 그런데 집을 정리하던 중 거액의 현금 다발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모아놓은 돈을 은행이 아니라 집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식들은 그 집에서 나온 물건의 소유권을 포기한 상태였다. 성실한 요양사는 그 돈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고를 했다. 전액 국고에 환수됐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기부 의사를 남긴 것은 아니었다. 국고 환수는 기부와 달리 이름이 남지 않는다.

살아서도 내 맘대로, 죽어서도 내 뜻대로


▎김관영 바른미래당 의원은 기부연금제를 재발의했다. 입법 과정의 ‘관례’를 뚫고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사진:연합뉴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사례는 독특한 일이 아닐 수 있다. 효의 가치, 가족공동체는 희박해지고 있다. 고령화는 심화되고 있다. 중산층 이상 노·장년층의 노후와 사후 재산 관리는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여기서 떠오르는 대안이 기부연금제다. 소위 ‘김장훈법’으로 알려졌다. 가수 김장훈은 공식 기부금만 110억원(2014년 기준)을 냈다. 그러나 정작 자신 명의의의 집 한 채 없이 전세를 살고 있었다. 만약 김장훈의 인기가 떨어져 수입이 급감하면 노후가 불안할 수 있다. 가뜩이나 연예인은 미래가 불안정한 직업이다.

김장훈의 사례에 착안해 나온 발상이 기부연금제다. 기부에 대한 대가 제공을 금하는 현행법의 맹점을 보완하는 아이디어다. 현금·부동산 등을 공익법인에 기부하면 본인이나 유족이 약정된 금액을 연금처럼 정기적으로 지급받는 구조다.

위의 세 가지 사례도 기부연금제가 있었다면 걱정이 덜어질 수 있었다. A할아버지는 소득세를, 공익재단은 증여세를 걱정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B할머니는 처음부터 국가나 공익단체에 기부 의사를 밝히고 병원에 갔으면 사기 당하는 일 없이 훨씬 안정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C할아버지도 고독사를 당하지 않았을 터다. 기부자로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기부연금제의 기본 발상은 ‘내가 평생 열심히 번 돈, 노후까지 풍족하게 쓰고 죽어서도 의미 있게 남기겠다’는 가치관에서 출발한다.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부유층과 중산층은 노후 혹은 사후 재산 관리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국가의 제도적 장치는 미비한 편이다. 주택담보모기지론이나 국민연금, 개인연금 수준이다. 그나마 국민연금은 고갈 위기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거부(巨富)들이야 증여·상속을 도와줄 전문 인력을 갖췄겠지만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늙음과 죽음은 현실적인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자식을 낳지 않거나 자식에게 기대지 않으려는 마인드의 부부라면 더욱 그렇다.

이 지점에서 기부연금제의 존재 이유가 발생한다. 중산층은 기부연금제를 통해 노후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다. 또 기부의 뿌듯함도 남는다. ‘살아서도 내 맘대로, 죽어서도 내 뜻대로’는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 연대의식의 실천이기도 하다.

김관영 바른미래당 의원은 2016년부터 기부연금제 입법화에 적극적이다. 김 의원은 19대 국회에서 기획재정위원회(이하 기재위) 소속이었다. 이때 세법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그 과정에서 기부 활성화가 테마로 떠올랐다. “기존 기부에 어드밴티지를 강화하는 차원에 그치지 말고 급진적이어도 좋으니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김 의원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복지비용의 급증, 세대별 부의 편중을 고려할 때 현재 고령 연령자들의 자산이 사회화되는 창구로서 기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책 구상에 참여한 송미경 비서관은 “주택연금법을 샘플링해 나온 정책이다. 어르신 재산이 집 한 채만 있으면 당장 살아야 하는데 기부를 할 수가 없다. 기부 약정을 하면 국가가 향후 생활을 보장하고 남은 금액을 기부액으로 가져가기로 약속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부연금제가 정착된 미국과 캐나다는 중산층의 기부가 활발하다. 두 나라 모두 기부를 받는 공익단체가 직접 기부자에게 기부연금을 지급한다. 자선단체는 관련 내용을 국세청에 신고한다. 김 의원은 한국적 상황을 고려해 기부연금의 운영 주체로서 국민연금이나 생명보험사에 위탁하는 안(案)을 제시했다.

사안이 복잡해 도입 못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설립한 청계재단. 순수한 공익사업을 위한 재단인지를 놓고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 사진:연합뉴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부연금제는 아직 시행이 안 되고 있다. 국회에서 부결된 것은 아니다. 계류가 됐다. 우선순위에서 밀려 제대로 된 심사를 받지 못했다. 기부연금제의 표류는 국회 의결 시스템의 관행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당시 상황을 지켜본 김 의원 측 관계자의 증언이다. “기재위 산하 조세소위(세법개정안을 심의) 심사가 녹록지 않다. 연말에 몰아서 하다 보니 기존 조항, 반드시 다뤄야 할 세법 예산과 부수법안 논의 과정에 새 법안은 밀린다. 새롭거나 복잡한 것은 뒤로 밀린다.”

모든 법안은 소위로 넘어오면 심사 대상이 된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모두 볼 수는 없다. 암묵적으로 패스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조세소위 소속 의원이 낸 법안은 최소한 패스는 하지 않는다. 실질적 심의는 이뤄진다. 이런 관례 탓에 “소위의 소속 의원들 이름으로 법안이 나가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기부에 혜택을 주는 정책 논의에서 기부연금제는 후순위로 밀렸다. 김 의원이 당시 조세소위 소속이라 언급은 됐으나 세부 논의까진 못 갔다. 그 이유는 ‘고도화된 모델이다. 단순히 세법으로 다뤄서 될 일이 아니다’로 알려졌다.

복잡한 이유는 기부연금제 도입 시 관련 부처가 기재부로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김 위원 측은 “기부를 받아 어떻게 쓸 것인지에 관한 기관 지정은 보건복지부의 일이다. 또 어떻게 연금액을 산정하고, 지급 주체는 어디인지를 놓고, 국민연금이 포함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전문성을 갖춘 정부 기관의 평가를 받아서 다시 가져오라’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어떻게 보면 기재부가 강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정부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진 않다. 현실적으로 사안이 복잡하다. 연금 산정을 어느 기관이, 어떻게 할 것이며, 지불능력을 어떻게 유지할지, 개입 기관을 어디까지로 할지 등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무엇보다 이런 난해한 일을 해 봤자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 “안 하다가 복잡한 일을 해야 되면 누가 하려고 하겠는가”란 현실론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 의원을 포함해 여야 의원 12명이 법안을 발의하는 과정에서 ‘전술적 실수’도 있었다. 취지가 좋다고,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고 공청회 등 절차를 거치지 않고, 먼저 법안부터 발의한 것이 빌미를 제공했다. 이에 관해 김 의원 측은 “복잡성은 인정해도 정부가 할 수 있는 역량은 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고 말했다.

19대 국회에서 20대 국회로 넘어오며 모든 법안이 폐기된다. 기부연금제는 제대로 된 평가조차 받지 못하고 폐기될 운명을 맞았다. 재발의를 해야 되는데 김 의원은 기재위를 떠나 산자위로 자리를 옮긴 상태다. 기재위 특성상 조세소위 의원 법안 발의가 우선권을 갖는다. 이런 마당에 자칫 그대로 올리면 재탕이란 빌미를 줄 수 있다. 김 의원이 자기 이름 넣는 것을 포기하고 기재위 의원 명의로 발의해야 신속히 진행될 가능성이 조금 더 올라간다. 그러나 김 의원은 지난 7월 20대 국회 개원 직후에 본인 명의로 재발의하는 방편을 택했다. 그만큼 이 법안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김 의원은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로서 우리 당 주요 법안으로 제안해 국회 논의에 속도를 내보겠다”고 말했다.

김 의원 측은 19대 때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국회 공청회나 이에 준하는 토론회로 여론부터 환기해야 할 것 같다. 정부를 향한 (기부연금제의 타당성·현실성을 받쳐줄) 준비도 병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경제에 걸맞지 않은 세계기부지수 74위의 현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미국 기부 문화의 아이콘처럼 여겨지고 있다.
기부연금제는 발의 때 ‘심사를 해 봤더니 문제가 있을 것 같아서 조심스럽다’는 식의 구체적 지적은 받지 않았다. 법안 자체에 치명적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란 소리다. 결국 의지 문제인 것이다. 실제 ‘나눔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법률’ 형태로 2011년부터 도입이 추진됐다. 2012년 정부제정안은 입법 예고까지 됐다. 국회 차원에서도 기부연금제의 법적 근거라고 할 나눔기본법이 발의된 적이 있었다. 2014년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 주재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기부연금제가 언급됐지만 아직 빛을 못 보고 있다. 김 의원은 “당시 법안이 최소한의 규정만 두고 있었다면, 이번에 재발의되는 기부연금 법안은 운영을 위한 세부사항을 법률에 규정했다. 기부자, 기부금 모집자, 기부연금 수급자, 기부연금 지급기간 및 수탁기관의 권리·의무에 관한 사항 등을 법제화하는 것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기부연금제가 도입되더라도 현실적 우려는 ‘기부가 활발해져도 공익재단이 투명하게 활용할지’ 여부다. 기부의 비과세를 악용한 사례가 종종 눈에 띄기 때문이다. 기부연금제가 발의될 무렵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청계재단 의혹이 터져 나왔다. 대통령선거에서 재산의 사회 환원 공약을 수행하는 차원으로 공익재단이 설립됐다. 그것이 청계재단이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 소유인 영포빌딩의 부채까지 재단에 기부되자 말이 무성해졌다. 재단은 장학금보다 대출이자를 더 많이 내기도 했다. 재단은 이 전 대통령의 처남 소유 회사로 외부에 알려진 다스의 주식까지 기부받았다.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이 다스를 아들 시형씨에게 상속세를 안 내고 물려주기 위한 장치가 청계재단’이라고 봤다. 이 전 대통령이 감옥에 들어가는 하나의 사유가 됐다. 대기업 산하 공익재단에서도 잡음이 곧잘 나온다.

이런 극단적 사례가 있다고 공익재단 기부를 백안시하는 일은 모기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공익재단의 투명성을 감시하고 탈세가 적발됐을 시 세제상 불이익을 가할 방법은 얼마든지 모색할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한국의 2015년 기부지표는 25위로 발표됐다. 영국 자선구호재단(CAF)이 발표한 세계기부지수 평가에서도 145국 중 74위였다. 당시 나눔기본법을 발의하는 과정에서 정갑윤 자유한국당 의원은 이런 수치를 제시하며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은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라고 말했다. 기부를 촉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개탄이겠지만 한국민이 딱히 동정심이 부족하다고 자성해야 될까.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의 마지막 챕터 제목은 ‘게으른 일본인과 도둑질 잘하는 독일인, 경제 발전에 유리한 민족성이 있는가?’다. 일본인하면 근면성실, 독일인하면 우직함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옛 사람들 눈엔 정반대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것일까.

장 교수는 문화(민족성)의 차이가 경제 발전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경제 발전이 문화 차이를 불러온다고 봤다. 한국의 근대화는 1960년대 정부의 이데올로기적 설득과 더불어 산업, 교육 정책이 작동한 결과다. 결국 바람직한 행동양식(문화)을 이끌어내는 것은 장기간에 걸친 정책과 제도의 변화가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

기부도 마찬가지다. 한국민의 연대의식이 부족하거나 선진국 시민들이 특별히 이타적이어서 차이가 발생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기부연금제는 현실화시켜 놓고 비교할 사안이라고 볼 수 있다.

기부는 빌 게이츠 같은 부자나 하는 것이 아니란 문화가 정립되려면 이를 촉진하는 제도가 전제돼야 할 것이다. 실제 미국의 기부연금기금 규모는 2009년 150억 달러를 돌파했고, 1만 명 이상이 평균 4만3000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초(超)고령화 시대에 평범한 사람들도 부담 없이 기부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정부 의지에 따라 지속 가능할 수 있다.

-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201810호 (201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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