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글로벌 포커스] 포퓰리즘과 반미(反美)의 선봉장 베네수엘라의 몰락 

사회주의 정책이 망가뜨린 ‘21세기 사회주의 모델’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경제난으로 최대 400만 명 해외로 탈출, 여성들은 현지에서 성매매 뛰어들어…석유산업 국유화로 인한 고급 인력 상실, 영구집권 집착으로 위기 자초

▎베네수엘라 국민은 자국의 화폐가치 폭락 탓에 돈을 인출하려면 한참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 사진:CNN홈페이지
"경제적으로 노예가 되고 박해와 멸시를 당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 말한다. 해외에서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을 그만두고 조국으로 돌아오라.”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지난 8월 28일 국영 TV 연설을 통해 경제위기를 피해 나라를 떠난 국민들을 향해 귀국할 것을 종용하는 내용이다. ‘화장실 청소’는 마두로 대통령이 지난 4월 조국을 떠나는 국민들을 조롱하면서 쓴 표현이다. 당시 마두로 대통령은 “베네수엘라를 떠난 사람들은 결국엔 미국 마이애미에서 화장실 청소나 하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일부 국민이 유혹의 목소리를 듣고 페루로 갔지만 그들이 리마(페루의 수도)에서 직면한 것은 인종차별과 경멸뿐이었다”며 “페루로 이주했던 국민 89명이 잔인한 대우를 견디다 못해 베네수엘라로 돌아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마두로 대통령의 연설 이후 각국에 있는 자국 대사관에 귀국을 원하는 국민 수천 명이 도움을 요청했다면서 이들을 귀국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베네수엘라 정부는 자국 국민이 대거 외국으로 피난 간 이유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일부 국민이 귀국한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2014년부터 지금까지 베네수엘라 전체 인구 3200만 명의 7%인 230만 명이 브라질·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가이아나 등 이웃 국가로 떠났다. 비공식적으론 400만 명 이상이 베네수엘라를 탈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콜롬비아와 페루 정부는 현재 자국에 체류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국민이 각각 100만 명과 40만 명이라고 밝혔다. 유엔 산하 국제이주기구(IOM)는 살인적인 물가상승과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수많은 베네수엘라 국민이 조국을 등지는 이른바 ‘베네수엘라 엑소더스(대탈출)’가 지중해 난민 사태와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국경을 넘어 이웃 국가로 건너간 베네수엘라 국민은 졸지에 ‘경제 난민’ 신세로 전락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성범죄와 인신매매 등 각종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 젊은 여성의 경우 상당수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성매매를 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의 공공기관 ‘여성-양성평등 전망대’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보고타의 성매매 여성 중 35.7%가 외국인으로, 베네수엘라 여성이 99.8%를 차지했다. 사실상 모두가 베네수엘라 출신이라는 얘기다. 이들 중 84.5%가 “성매매로 번 돈을 베네수엘라에 남은 가족에게 보내고 있다”고 밝혔다.

“돈 버는 유일한 방법은 내 몸을 파는 것”


▎지난 6월 콜롬비아 경찰이 성매매 혐의를 받는 베네수엘라 출신 이주 여성들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있다.
보고타에 기반을 둔 싱크탱크 FIP(The Ideas for Peace Foundation)의 후안 카를로스 가르존 소장은 “베네수엘라 난민 여성들이 콜롬비아 북부 국경지역에서 활동하는 폭력조직과 게릴라 단체 등으로부터 성 착취를 당하고 있다”며 “베네수엘라 난민 대다수가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어 폭력단체들은 이 같은 취약점을 노려 성 착취와 인신매매 등의 범죄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영국 스카이뉴스는 베네수엘라 접경 도시 쿠쿠타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 60명 중에서 2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베네수엘라 출신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베네수엘라에서 발레리나였다는 한 여성은 이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선택권이 있다면 성매매를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아이들을 보살피고 먹이려면 돈을 벌어야만 하는데, 유일한 방법은 콜롬비아에서 내 몸을 파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페루 내 상황도 비슷하다. 페루 경찰은 지난 5월과 7월 베네수엘라 난민 여성들을 성매매에 이용한 인신매매 조직을 검거했다. 당시 한 페루 인권단체 대표는 “2014년까지 검찰 통계에 없던 베네수엘라 여성에 대한 성 착취 현상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며 “최근 들어 매주 5건에서 10건 정도의 베네수엘라 여성의 성 착취 보고서가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베네수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브라질 북부 호라이마주의 주도(州都)인 보아비스타시에서도 베네수엘라 여성들이 성매매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하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을 수도 없어 거리로 나섰다”고 밝혔다.

보아비스타시에는 베네수엘라 난민 4만여 명이 체류하고 있는데, 이는 시 전체 인구 33만 명의 10%를 넘는 규모다. 호라이마주에선 올 들어 베네수엘라 난민의 유입으로 살인사건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 1~6월 발생한 살인사건은 인구 10만 명당 27.7명이었다. 이는 지난해의 평균 25.1명에 비해 급격히 늘어난 수치다. 호라이마주는 지난해만 해도 살인사건 발생 건수가 10위 안에 들지 않았고 2016년에는 전국 최하 3위였다. 최근 들어선 이 지역에 홍역도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베네수엘라에서 창궐한 홍역이 난민과 함께 전파됐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해 온 베네수엘라가 난파선으로 전락하고 있다.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웃 국가들이 국경을 폐쇄할 움직임을 보이자 더욱 많은 베네수엘라 국민이 탈출하고 있다. 애초에는 서민들이 대거 베네수엘라를 빠져나갔지만 이제는 교사·교수·의사·과학자·엔지니어 등 전문직도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이웃 국가로 떠나고 있다.

초·중등 교사의 12% 해외로 떠나


▎브라질 국경 검문소에서 입국이 거절된 베네수엘라 국민이 버스 정류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 베네수엘라를 떠난 교사는 4만8000여 명에 이른다. 이는 전체 초·중등 교사의 12%에 달하는 수다. 교사들이 떠나면서 초등학교에선 담임교사가 1년에도 서너차례씩 바뀐다. 후임자를 구하기 어려워 교사가 새로 부임할 때까지 2~3주씩 휴업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교수도 마찬가지다. 한때 ‘베네수엘라의 MIT’라 불렸던 시몬볼리바르 대학의 경우 지난해에만 129명의 교수가 사표를 냈다. 전체 교수진의 16%에 달한다. 수도 카라카스의 한 아동병원에선 지난 2년간 68명의 의사가 사직했다. 전체 인력의 16%다. 간호사는 300명 이상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7개의 수술실 중 2개만 운영 중이다. 간단한 수술이라도 8개월을 기다려야 받을 수 있다. 다른 병원도 마찬가지다. 말라리아·결핵·홍역이 창궐하고, 당뇨와 고혈압으로 목숨을 잃는다.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는 고장 난 채 방치된 지 오래다. 지난해 전체 지하철 인력의 20%가 넘는 2226명이 사표를 냈다. 시내버스는 30% 정도만 운행된다. 전문직들의 탈출이 늘어나면서 베네수엘라 국가 기관의 기능도 마비되고 있다.

부자들도 베네수엘라를 탈출하고 있다. 이들의 행선지는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300여 년간 베네수엘라를 식민 지배했었다. 스페인에 거주하는 베네수엘라인은 28만 명에 달하는데 이 중 절반이 최근 2년 사이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때문에 지난해 수도 마드리드의 집값 상승률이 17%에 달했다고 한다. 스페인에 베네수엘라 부자가 몰려드는 이유는 2013년 신설된 ‘황금비자제도’ 때문이다. 황금비자제도란 50만 유로(약 6억5000만원) 이상 부동산을 매입한 외국인에게 스페인 정부가 즉시 영주권을 발급해 주는 것을 말한다. 게다가 베네수엘라와 스페인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문화와 관습도 비슷하다. 베네수엘라 부자의 스페인 행렬은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베네수엘라에선 지난 5년간 극심한 경제난이 계속되면서 전력 부족으로 대규모 정전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는 등 혼란이 일상화되고 있다. 수도 카라카스와 인근 미란다주·바르가스주 등에선 최근 들어 정전이 자주 발생해 지하철이 멈춰 서고 은행·쇼핑몰·식당들이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올 들어 전국적으로 7000여 회의 정전이 발생했다. 지방의 경우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곳도 많다. 정전이 되는 이유는 화력발전소를 돌릴 충분한 석유가 없기 때문이다. 원유는 많이 생산되지만 이를 정제해 석유와 휘발유 등으로 제조할 시설이 없다. 치안 부재 상황도 심각하다. 베네수엘라에서 비교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차를 방탄차로 개조해 강도가 들끓는 고속도로를 지나가야 한다. 베네수엘라 내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하루 평균 53명이 살해됐다.

베네수엘라 국민이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 때문에 식료품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상점은 대부분 텅텅 비어 있어 식료품과 생필품을 구하기조차 어렵다. 갓난아이에게 먹일 우유도 부족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썩은 음식을 찾고 있는 실정이다. 동물원 동물들과 길거리의 개까지 잡아먹는 비참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시몬볼리바르대와 베네수엘라 중앙대, 안드레 벨로 가톨릭대가 공동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베네수엘라 국민의 몸무게는 평균 11㎏ 줄어들었다.

게다가 하이퍼(hyper, 超)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서 베네수엘라를 해방시킨 국부(國父) 시몬 볼리바르(1783~1830)의 얼굴이 들어간 통화인 볼리바르화는 이미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베네수엘라의 올해 인플레율이 100만%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역대 최악의 인플레를 겪은 국가는 헝가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7월 한 달에만 물가가 4190조%까지 치솟았다. 둘째는 2008년 인플레율이 2억3100만%였던 짐바브웨였다. 셋째는 1921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2억%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출범한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은 전쟁배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통화를 발행해야만 했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물가가 15시간마다 배 이상 뛰고 있다. 이 때문에 베네수엘라 정부는 공식적인 물가상승률 집계를 포기한 상태다.

물가상승률 8만%, 최저임금 60배 인상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그림이 그려진 벽. 베네수엘라엔 아직도 차베스 시절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다. / 사진:연합뉴스
물가상승률이 8만%가 넘는 초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서 경제난이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자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8월 20일 볼리바르화를 10만 대 1로 액면 절하하는 화폐개혁인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을 단행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실질가치는 그대로 둔 채 액면가를 낮게 바꾸는 조치를 말한다. 하이퍼 인플레로 화폐단위가 지나치게 커지면서 거래가 불편하거나 부정부패나 지하경제 규모가 엄청날 경우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에 따라 기존 통화에서 ‘0’을 5개 떼어낸 ‘볼리바르 소베하노’(Bolivar Soberano)라는 이름의 새 화폐가 도입됐다. 새 통화는 베네수엘라가 자국산 석유에 토대를 두고 만든 암호화폐 ‘페트로’와도 연동된다. 현재 1페트로의 시세가 미화 60달러 수준임을 고려하면 1달러는 60볼리바르 소베하노가 된다.

페트로는 지난해 12월 베네수엘라 정부가 발표한 세계 최초의 정부 주도 가상화폐로, 화폐 가치를 베네수엘라산 원유 1배럴 가격에 고정시켰다. 마두로 대통령은 페트로를 발표했을 당시 “베네수엘라의 자산을 팔아먹는 짓이며, 페트로는 부패를 위한 맞춤형 자산”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또 9월 1일부터 최저임금을 액면가 기준으로 60배, 암시장 달러 환율로는 34배를 인상했다.

화폐개혁에도 불구하고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구권과 신권 가치를 알려주는 스마트폰 화폐 계산 앱도 나왔지만 물가상승률이 너무 가팔라 상품 가격이 수시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업체인 다타날리시스의 루이스 비센테 레온 대표는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은 기업을 재앙적인 상황에 처하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계 단체인 페데카마라스도 화폐개혁과 함께 시행되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기업이 정상적인 운영을 할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마두로 대통령의 화폐개혁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짐바브웨 정부도 과거 통화인 짐바브웨 달러에 대해 리디노미네이션을 여러 차례 실시했지만 인플레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짐바브웨 정부는 2006년 1월 1000대 1, 2008년 8월 100억 대 1, 2009년 2월 1조 대 1 비율의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2015년 10월 1일자로 짐바브웨 달러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베네수엘라도 짐바브웨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IMF는 “현재 베네수엘라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인 1923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이나 2000년대 말 짐바브웨와 비슷하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마두로 대통령은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창해 온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포퓰리즘 정책을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있다. 중남미 급진좌파의 대표적 지도자였던 차베스 전 대통령은 철저한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들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된 차베스는 1982년 ‘볼리바르 혁명 운동’이라는 군부 지하 정치조직을 만들어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차베스는 공수부대 중령이던 1992년 2월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해 2년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와신상담하던 차베스는 1994년 제5공화국운동당을 창당하고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과 연대해 1998년 12월 대선에서 44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4선을 기록하면서 2013년 3월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14년간 장기집권을 했다. 차베스는 막대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저가주택 공급, 휘발유와 생필품을 무료로 나눠주는 등 포퓰리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차베스의 야심은 이른바 ‘볼리바르 혁명’을 통해 베네수엘라를 ‘21세기 사회주의’의 모델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볼리바르 혁명이란 국부인 볼리바르가 주창한 빈곤으로부터의 해방과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남미 통합을 뜻한다.

세계 최대 원유 매장국의 ‘자원의 저주’


▎2009년 카다피 당시 리비아 대통령과 만난 우고 차베스 당시 대통령(오른쪽).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포퓰리즘의 원조에 해당한다.
차베스는 실제로 석유와 천연가스를 비롯해 천연자원을 국유화하고 대규모 예산을 빈민 구제 프로그램에 투입하는가 하면, 분배를 강화하는 내용의 각종 법률을 제정하는 등 베네수엘라를 남미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의사가 모자라자 석유를 주고 쿠바 의사들을 수입했다. 토지개혁도 단행했다. 유휴 토지를 빈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었다. 남의 땅을 불법 점유했더라도 점유기간이 10년 이상이면 점유자에게 소유권을 인정해 줬다. 심지어 자신의 정책을 비판해 온 신문사와 방송사를 폐쇄하는 등 언론 탄압도 서슴지 않았다. 차베스는 또 이란 핵 문제를 비롯해 각종 국제 현안에서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했으며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쿠바·니카라과 등 중남미 좌파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다. 이런 정책들 때문에 재정적자와 국가부채가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차베스의 잘못된 정책들은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했다. 베네수엘라에선 제조업 기반이 사라지고 만성적인 생필품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치약·비누·기저귀·식용유 등 생필품들은 상점에서 살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차베스가 ‘21세기 사회주의’라는 공상(空想)에 빠진 이유는 풍부한 석유와 고유가 때문이었다. 미국에너지정보국(EIA)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에는 2980억 배럴의 원유가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5위 원유 수출국인 베네수엘라는 국가 재정의 95%를 원유 수출에 의존해 왔다. 베네수엘라가 석유로 한창 돈을 벌어들일 때 일일 원유 생산량은 300만 배럴 전후였다. 2014년 중반만 해도 배럴당 100달러대에 거래되던 국제 유가는 이후 하향세를 보였고 2015년에는 배럴당 20~30달러대로 폭락했다. 이 때문에 국고(國庫)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처럼 경제가 망가진 것은 풍부한 자원이 외부 요인에 극히 취약한 경제구조를 만드는 일종의 ‘자원의 저주’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중남미 전문가 테리 린 칼 교수는 “오일 붐은 베네수엘라에서 번영의 환상을 만드는 동시에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역량을 약화시켰다”고 지적했다.

베네수엘라 경제가 파탄이 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석유산업의 국유화 때문이었다. 차베스는 2003년 국영 석유기업 PDVSA에서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자 이를 명분으로 자신에게 반대하던 경영진과 엔지니어, 고급 기술 인력을 모두 해고했다. 차베스는 2007년 외국계 석유회사 자산도 강제로 수용해 PDVSA에 합병시켜 석유산업을 국유화했다. 이후 PDVSA는 차베스의 포퓰리즘 정책의 재원이 됐지만 방만한 경영으로 서서히 망가져 갔다. 원유 수출로 벌어들인 돈을 정부가 빼가는 바람에 PDVSA는 생산 장비와 시설에 대한 투자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고장 난 장비와 시설이 방치되자 정유 시설이 폭발하는 사고가 빈발했다. 또 전문 인력들도 대부분 회사를 떠났다. 베네수엘라의 일일 원유 생산량은 30년래 최저 수준인 120만~140만 배럴이다. 이마저도 30만 배럴은 차관을 제공한 중국으로, 90만 배럴은 국내 소비용으로 무상 공급된다.

베네수엘라 출신 이코노미스트 다니엘 디 마르티노는 “베네수엘라 경제와 석유산업이 저유가 때문에 망가졌다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며 “국유화와 이로 인한 고급 인력 상실, 사회주의 정책 그 자체가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국유화의 폐해는 지금도 발목을 잡는다. 국유화 조치로 손해를 본 외국 석유 기업들이 베네수엘라 정부를 상대로 한 국제소송에서 잇따라 승소하면서 PDVSA가 생산한 원유를 압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차베스의 후계자 마두로는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자신을 차베스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차비스타(Chavista)’라고 부른다. 마두로는 버스 운전기사 출신으로 대통령직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1962년 카라카스에서 태어난 그는 1980년대 버스 운전기사로 근무하며 운수노조 지도자로 활동했다. 1992년 쿠데타 기도로 감옥에 갇혀 있던 차베스를 도와 준 것을 인연으로 그는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했다. 대통령 보좌관, 국회의원, 국회의장, 외교장관, 부통령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대통령이 민주주의 파괴에 앞장서


▎9월 3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각료회의에서 발언하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 사진:연합뉴스
2013년 4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차베스의 후광으로 당선된 마두로는 집권 이후 실정을 거듭해 왔다.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무상복지 예산을 줄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2015년 12월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통합사회주의당은 야당연합인 국민연합회의에 참패했다. 전체 167석 중 112석을 차지한 국민연합회의는 마두로 대통령을 탄핵하고 조기 대선을 실시하는 방안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국민연합회의는 이를 위해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를 추진하는 등 마두로 대통령 퇴진운동을 벌여 왔다. 그러자 마두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꼼수를 부렸다. 마두로는 지난해 5월 헌법에도 없는 제헌의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야권은 물론 많은 시민단체는 마두로가 권력을 유지하려는 책략이라고 반발하면서 반대 시위를 벌였지만 군과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에 굴복해야만 했다. 제헌의회는 지난해 8월 4일 선거를 통해 선출된 545명의 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출범했다. 의원들은 대부분 마두로를 적극 지지하는 인사들이다. 심지어 마두로의 아들 니콜라스 에르네스토 마두로 게라(27)와 부인 실리아 플로레스(60)도 의원으로 당선됐다. 제헌의회는 지금까지 야당이 지배하는 의회를 사실상 무력화하는 등 민주주의 파괴 행위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마두로는 지난 5월 20일 실시된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해 내년 1월부터 6년간 통치를 계속하게 됐다. 당시 대선은 주요 야당 후보가 불참하는 등 국제사회로부터 부정선거라는 비판을 들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베네수엘라 대선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베네수엘라 정부와 PDVSA 등이 발행한 모든 채권 거래를 금지하는 내용의 제재 조치를 내렸다. 미국은 지난해 8월 베네수엘라와의 금융거래를 금지하는 단독 제재 조치를 취한 데 이어 마두로를 비롯한 베네수엘라 고위급 인사들의 재산을 동결하고 거래를 금지한 상태다. 유럽연합(EU)도 민주주의 훼손 등을 이유로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 등을 포함한 11명의 베네수엘라 고위 관리에 대해 역내 여행금지와 자산동결 조치를 내렸다. 로드리게스 부통령은 제헌의회 초대 의장을 지냈다.

중남미 국가와 캐나다 등 14개국으로 구성된 리마그룹도 베네수엘라 대선을 인정하지 않고 자국 대사들을 베네수엘라에서 철수시켰다. 마두로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구 집권을 꿈꾸고 있다. 경제난이 갈수록 악화되고 마두로는 철권통치를 더욱 강화했다. 마두로는 돈이 부족하면 국채를 남발하고 화폐를 더 찍었다. 물가가 오르면 시장가격을 통제했다. 마두로가 집권한 이후 베네수엘라의 누적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42%를 기록했다. IMF는 올해 베네수엘라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18%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50년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서 넷째로 높았다. 베네수엘라보다 잘사는 나라는 미국·스위스·뉴질랜드뿐이었다. 1970년부터 1980년대 말 베네수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였다. 당시 베네수엘라는 콜롬비아·페루 등 정정 불안을 겪던 국가의 국민들이 기회의 땅으로 생각하던 남미 최대 부국이었다. 그랬던 베네수엘라가 이제는 남미에서 천덕꾸러기가 됐다. 그런데도 마두로는 경제난이 악화하고 있는 이유가 미국의 경제제재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정과 철권통치로 나라를 말아먹고 있다는 비판을 국제사회로부터 듣고 있는 마두로는 자신이 난파선의 선장이란 사실조차 모르는 듯하다.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201810호 (2018.09.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