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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11)] 여말의 퇴로 없는 對중국 외교전 

明 황제의 전문, 이성계를 살리다 

주원장, 역성혁명론에 근거해 위화도회군 ‘쿠데타’를 승인… 대마도 정벌로 개혁파 ‘시대정신’ 입증, 타협 없는 투쟁으로

▎중국의 사상가 맹자는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전복시킬 수 있다’는 역성혁명론을 펼쳤다. 이 사상에 입각해 이성계의 조선 건국은 중국으로부터 정당성을 확보했다. 작은 사진은 [맹자] 원문을 한글로 풀어 쓴 [맹자언해].
1389년 2월, 경상도원수 박위가 100척의 병선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공격해 왜선 300척을 불태웠다. 원수 김종연, 최칠석, 박자안 등도 잇달아 도착해 포로로 잡혀간 백성 100여 명을 찾아 귀환했다. 제1차 대마도 정벌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짧은 기록만 남아있다. 그러나 1350년부터 40년간 고려 전역을 피로 적신 왜구와의 전쟁사 흐름을 바꾼 획기적 전투로 평가해야 한다. 이를 계기로 대(對)왜구전은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었다. 창왕의 교서는 그런 의미를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우리 조정이 태평한 시절이 오래돼 무비가 점점 해이됨으로써, 왜구가 방자하게 노략질을 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40여 년에 이르렀다. 삼면의 변방이 소란스러웠으나, 국가는 방어만 힘쓰고 장수는 정벌을 주저했다. 그런데 경은 발분하여 의로움에 따를 것을 생각하고, 헤아릴 수 없이 큰 파도를 넘어 오랜 적의 소굴을 뒤엎어 버리고, 적의 집과 배를 모두 불태웠으며, 포로가 되었던 백성들을 고향으로 귀환시켰으니, 족히 국가의 치욕을 씻고 신민의 원수를 갚게 되었다.”([고려사] ‘박위전’)

왜구의 침입은 고려 말 정국에서 최대 정치 현안 중 하나였다. 1350년 이래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은 일상적인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1388년 8월, 제2차 시무상소에서 조준은 “이제 왜구가 횡행하여 주군을 쳐서 함락시켜, 화곡을 밟아 버리고 노약자를 살육하며 젊은이를 노비로 삼고 있는데, 장수는 성안에 엎드려 싸울 뜻이 없다”고 기술했다.([고려사절요]) 고려 정부는 40년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고려 정부의 무능력을 입증하는 근거이자 이 왕조가 지속되는 한 희망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성계파는 집권 6개월여 만에 확고한 성과를 올렸다. 이제 백성들은 누구를 지지해야 하는가? 제1차 대마도정벌은 고려 백성의 고통을 최종적으로 제거할 희망을 제시한 것이다.

사전의 폐단 혁파가 왜구문제 해결로 연결


▎조선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정벌 상상도. / 사진:세종대왕기념사업회
고려 정부는 왜 왜구 문제 해결에 실패했는가? 공민왕은 군대의 기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1372년(공민왕 21) 공민왕은 친히 각지를 순력하며 왜구 방어태세를 점검한 적이 있었다. 그때 풀어진 군율을 탄식했다. “경자년(1360), 신축년(1361)의 홍건적을 막지 못할 것이 아니며, 경인년(1350) 이래의 왜적도 대적하지 못할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백성이 노략질당하고 나라가 수도를 옮기게 될 정도에 이르게 된 것은 용병에 규율이 없고 호령이 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친히 와도 명령을 좇지 않는 자가 있는데, 하물며 여러 장군이 대행함에 있어서랴.”([고려사] 공민왕 21년 10월 갑오)

고려는 홍건적의 대규모 침입을 두 차례나 격퇴했다. 국가의 능력을 과시한 것이다. 왜구는 규모면에서 홍건적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도 왜 해결하지 못했는가? 공민왕은 군대가 잘못 통솔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그런 점이 있다. 탁월한 지휘관들은 어쨌든 계속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공통된 특징은 군사적 탁월성보다 청렴성과 공정성에 있었다. 1373년 합포에서 대승을 거둔 경상도순문사 홍사우가 대표적 사례다. 그는 명재상 홍언박의 아들로 본래 문관이다. 그는 “청렴하고 삼가하여 몸가짐을 바르게 했으므로, 아전과 백성이 두려워하고 존경했다”고 한다.([고려사] ‘홍사우전’) 하지만 이런 지휘관은 예외적이다. 기본적 문제는 사실 고려군의 시스템에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국가의 정규군이 아니라 장군들의 사병이 국방을 대신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군대로 왜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무리다. 또한 농민을 일시 동원해 병력으로 편제할 순 있지만 상시동원체제는 불비했다. 이 점은 이성계의 [안변책]에 잘 나와있다.

시스템 상의 결점은 결국 전제(田制)의 문제였다. 전제가 무너져 군인에게 군전을 지급할 수 없게 된 결과 정규군을 운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군량도 확보할 수 없었다. 국가재정의 건전성 없이 대규모 군대를 운용할 수 없다. 1388년 7월, 제1차 시무상소에서 조준은 “지금은 군사와 밭이 함께 망하여, 늘 급한 때를 당하면 농민을 징집해서 군대에 보충하기 때문에 군사가 약해져 적의 먹이가 되고, 농민의 양식을 쪼개 군사를 기르기 때문에 호구가 줄어들어 고을이 망한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이성계파의 전제개혁은 군대 재건을 위한 근본 방안이었다.

대마도정벌을 감행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이성계파의 긴급재정 계획이 주효했다는 사실이다. 조준은 제1차 시무상소에서 이 플랜을 제안했다. “지금 밭을 측량하는 때를 당해서, 수를 정하여 밭을 주기 전에 3년을 한하고 임시로 국가에서 거둬들이면, 군국의 수용을 충당할 수 있으며 관원의 녹봉을 줄 수 있을 것이다.”([고려사절요])

개인이 수조권을 가진 사전(私田)도 국가가 직접 조세를 거둬 정부와 군대의 비용, 관리의 녹봉에 필요한 긴급재정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8월말 창왕은 “사전의 벼를 모두 나라에서 거둔다면 조신들이 반드시 먹기 곤란할 것이니, 그 벼를 반만 거둬 나라의 용도에 충당하라”고 지시했다.([고려사절요]) 이를 통해 고려정부는 상당한 재정능력을 갖췄던 것이다. 박위가 병선을 100척이나 동원해 대마도를 공격하려면 상당한 전비가 필요했을 것이다. 조선 건국 후 1392년 12월 16일, 조준이 올린 전문은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초기에 전하께서 신을 천거하여 대사헌으로 삼았을 때 전하께서는 의욕적으로 만세를 위하여 태평 시대를 열어 줄 것을 하늘의 신명에게 고하였습니다. 간사한 무리들의 비방을 배격하고 거실(巨室)의 노여움을 범하면서 사전(私田)으로 인한 해묵은 폐단을 혁파하니, 백성을 도탄 속에서 구제할 수 있었고 병사와 군량을 어려운 상황에서도 풍족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누선(樓船)도 만들고 성보(城堡)도 쌓아 무위(武威)를 떨치고 조운의 길을 통하게 하니, 삼한에 40년 동안 끊이지 않았던 왜구에 대한 근심이 하루아침에 해소되었습니다.”([국조보감] 태조조 1년)

주원장의 면죄부 ‘역적이지만 인정한다’


▎부산 기장 남산의 봉수대. 날씨가 좋으면 대마도가 보인다. 고려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졌고, 한국에서 확인된 봉수대 유적 중 가장 오래됐고, 큰 규모로 알려졌다. 그만큼 왜구의 침입은 국가의 중대사였다.
1389년 3월, 강회백과 이방우가 중국에서 귀환했다. 그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갖고 왔다. 명이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의 행위를 ‘불신의 역모’로 규정했던 것이다. 이성계파의 치명적인 외교적 패배였다. 이성계파는 생존의 갈림길에 섰다. 4월에 돌아온 이색도 명의 감국을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명은 고려의 정치적 상황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고려 내정에 간섭할 의도도 없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창왕의 친조를 요청하기 위해 6월에 다시 사신을 파견했다. 그 사이 4월 중에 전제개혁의 추진을 둘러싸고 이성계파와 반이성계파가 격돌했다. 이색을 필두로 우현보, 이림, 변안렬 등 반이성계파가 사전 개혁에 반대했다. 중국의 입장에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변안렬이 이색을 지지한 것은 위험했다. 많은 전공을 세운 뛰어난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이성계에 맞설 무력을 확보하기 위해 반이성계파는 그와 제휴했을 것이다. 이성계파는 대명관계를 돌파할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7월 이성계는 심덕부, 배극렴, 정지를 대동하고 여주에 가서, 우왕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타협책을 모색하는 자리였을 것이다. 반 이성계파에게는 희소식이었다. 8월 대사헌 조준이 전제개혁을 촉구하는 제4차 시무상소를 올렸다.

1389년 8월까지 14개월간 이성계파는 최영, 조민수를 비롯한 이인임파를 제거하고 정치권력과 군사력을 확고히 장악했다. 그리고 내정에서 전제, 중앙정부, 지방정치, 국방 분야의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왜구와의 전쟁에서 점차 승기를 잡았고, 최종적 해결을 위한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대중외교에 실패함으로써 위기에 처했다. 반이성계파도 이색을 중심으로 점차 결집해, 사전개혁을 둘러싸고 분명한 전선이 형성됐다. 이성계는 이 위기를 타협을 통해 돌파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1389년 9월이 됐다. 9월은 아주 특별한 달이었다. 이 한 달 동안 커다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첫째로 창왕이 명에 입조하려던 계획을 갑자기 중단했다. 이는 이성계파와 이색파 모두에게 나쁜 일이었다. 창왕이 친조하면 이성계파는 ‘불신의 역모’라는 명의 의심을 풀 수 있었다. 이색파는 고려왕조의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색은 조바심을 냈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출발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창왕의 모후 근비가 반대했다고 한다. 창왕이 어리다는 이유였다. 아마 친조의 득실을 저울질했을 것이다. 중국이 이성계파를 ‘불신의 역모’로 규정한 이상, 왕조의 안전은 이미 확고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둘째, 이성계파 중 급진파가 이숭인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는 이색에 대한 공격의 전조로써 본격적 권력투쟁의 서막이었다. 이숭인은 단순한 정치가가 아니라 이색파의 심볼로서, 고매한 인품과 발군의 문장력, 깊은 학문으로 폭넓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에 대한 탄핵은 다가올 권력투쟁의 성격을 예시해 준다. 국제적 여건이 수렁에 빠진 가운데, 급진파는 이성계가 이색파와 타협하려는 동향에 불안을 느낀 것이다.

셋째, 정몽주에 의해 이성계(집정), 이색(사부), 이림(외척) 등 삼두마차가 이끄는 제2차 연립정권이 탄생했다. 회군 뒤 ‘조민수-이성계’의 공동집권이 제1차 연립정권이다. 정몽주의 구상이 성공했다면, 고려는 내부로부터의 온건한 개혁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고려왕조는 1000년간 지속됐을지 모른다. 이성계파의 개혁은 근본적이고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시스템이든 해체 위기에 처하기 마련이고, 내부 원인을 제거하면 낡은 시스템은 다시 안정을 찾고 회춘한다.

넷째, 그런데 9월이 가기 전 완전히 상황을 뒤집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발생했다. 9월말, 창왕의 ‘친조’를 청하러 간 윤승순, 권근이 귀국했다. 그가 가져온 이른바 황제의 성지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바로 우왕, 창왕은 왕씨가 아니고 제거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고려 국중에 일이 많은데, 배신(陪臣)된 자 중에 충신과 역신이 뒤섞여 하는 바가 다 좋은 계책이 아니다. 왕위는 왕씨(공민왕)가 시해된 뒤 후사가 끊어지니, 왕씨를 가장하여 다른 성씨를 임금으로 세웠을지라도, 삼한을 길이 지키는 양법이 아니다. 옛날에 임금을 죽이는 역적이 있었으나, 임금의 악이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무릇 난신적자라도 또한 어진 정치를 베풀어 하늘의 뜻을 돌리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자도 있었다.(雖在亂臣賊子 亦有發政施仁 以回天意 以安有衆) 이제 고려는 배신들이 음모를 꾸미고 온갖 거짓을 저질러 이제까지 편안하지 않다. 설사 역모로 권력을 얻었어도 역모로 이를 지키는 게 옳겠는가? … 예부에서는 그 어린 왕에게 공문을 보내 우리 수도에 꼭 올 필요는 없다고 전하라. 정말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신이 있어 위로 군신의 명분을 정하고 나라에 백성을 편안히 할 계책을 마련한다면, 비록 수십 년 입조하지 않아도 무엇이 걱정이며, 또한 해마다 입조한들 왜 싫어하겠는가? 또한 처녀를 보내지 말라고 지시하라.”([고려사] 창왕 원년 9월)

고려에 온 明의 사신들


▎조선왕조 외교 의전의 핵심으로 기능한 경복궁 경회루 전경. 경회루는 경복궁 근정전, 종묘 정전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목조건물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단일평수로는 가장 큰 규모다. 외국사신을 위한 연회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잔치를 베풀었다.
이야말로 이성계파가 그토록 원하던 내용이었다. 물론 이성계파에 모두 유리한 내용은 아니다. 이성계를 분명히 난신적자로 규정하고, 당시 고려의 내정도 편안치 않다(未寧)고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핵심은 이것이 아니다. 핵심은 첫째, 우왕·창왕이 왕씨가 아니며, 가짜를 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이성계가 선정을 베푼다면 중국은 찬성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이 제시한 명분은 역성혁명론이다. 신하가 왕을 죽이는 것은 인정할 수 없으나, 그것은 왕 자신의 잘못 때문일 수 있다. 나아가 난신적자라도 훌륭한 정치를 실시한다면 하늘의 뜻을 돌릴 수도 있다. 왕조체제에서는 감히 공언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주원장이야말로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중국의 입장이 이처럼 급선회한 배경은 알 수 없다. 정사 윤승순이 중국 정부를 설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적극적인 이성계파가 아니었다. 또한 부사 권근은 적극적 이색파였다. 문서의 내용을 보면, 주원장은 고려의 내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시 고려정치의 핵심 논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물론 공민왕은 시해됐고 우왕이 왕씨가 아니란 주장은 1374년 이래 중국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성계에 대해선 1389년 3월 강회백이 가져온 중국의 외교문서와 정반대였다. “이제 그 나라의 신하가 왕을 쫓아내고 그 아들을 옹립하고는 새 왕의 입조를 요청해 왔으니, 이는 인륜이 크게 무너지고(彝倫大壞) 임금의 도리가 아예 없어졌으며(君道專無), 불신의 역모(不臣之逆)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왕의 옹립과 폐출이 다 저에게 달려 있으니 우리 중국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고려사] 창왕 원년 3월)

이성계를 역적으로 본 것은 두 문서가 동일하다. 하지만 반역의 원인, 그리고 반역의 목적에 대한 설명이 다르다. 이를 통해 명은 논리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이성계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이성계와 대화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셈이다. 결국 중국은 고려의 정치상황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가장 유리한 정치적 대안을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이와 관련해 1388년 12월, 고려에 온 명 사신 희산(喜山)과 대경(大卿) 김여보화(金麗普化) 등이 주목된다. 이들은 고려인 출신으로, 원나라 때 원사(院使)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사행 목적은 말과 환관을 구하고, 명에 귀화한 몽골의 친왕 등 80가호를 제주에 이주시킬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위화도회군 뒤, 고려는 대명외교에 총력을 기울였다. 사신이 빈번히 파견됐을 뿐 아니라, 이색과 이방원처럼 중요 인물들까지 나섰다. 하지만 중국이 고려에 보낸 사신은 이들이 처음이었다. 당연히 양국 간에 논의하고 해결해야 할 중대한 정치적 사안이 산적해 있었다. 그런데 중국 사신의 사행 목적은 뜻밖이었다. 다소 한가하고 엉뚱해 보인다. 이들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고려 정부의 정황을 탐문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위화도회군 뒤 대고려정책을 결정하려면 정확한 상황을 알 필요가 있었다.

中황실의 실세된 고려 출신 환관들


▎충북 음성에 위치한 권근의 조묘. 반이성계파의 선봉에 섰던 권근은 이숭인을 옹호하고, 친이성계파 조준을 저격하는 상소문을 썼다.
사신들의 행동도 그런 추측을 구체화한다. 희산 등은 사신으로서의 “의례가 끝나자 뜰에 내려가 네 차례 큰 절을 올리니 창왕이 선 채로 절을 받았다.” 이들은 대개 고려의 천민 출신으로서, 원 조정에 환관으로 들어갔다. 이들 중 일부가 명 조정에도 남아,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사신으로 왔다. 중국 사신 중 조정의 문관은 거의 없었다. 고려인으로서 중국 사신으로 온 자들은 대개 난폭하고 무례하고 탐욕스러웠다. 몽골인이나 중국인보다 심한 경우가 많았다. 황제를 빙자해 왕조차 위압하려고 했다. 중국 사신 해수(海壽)는 고려 출신 환관으로, 1408년 이후 일곱 차례나 조선에 왔다. 1421년(세종 3년) 상왕 태종이 “해수에게 술을 주고 좌석으로 돌아와 앉으니, 임금(세종)이 그 좌석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술을 받아서 부복하고 마시는데 해수는 일어나지 아니하였으니, 황제의 사신이 존엄으로 누르는 것”이었다. 해수는 조선의 관리들을 채찍질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태종은 “천자는 조관(朝官)을 보내지 않고 환시를 명하여, 오기만 하면 혹은 탐하고 혹은 포학하여 무례한 짓을 자행하니,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라고 분개했다.([태종실록] 9년 11월 15일)

희산 등의 겸손한 태도는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조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극히 몸을 낮춘 것이다. 그들을 하찮은 환관으로만 보면 안 된다. 그들의 관명인 ‘원사’는 원나라 때 궁중의 다사(茶事)를 담당했다. 표면상 중요한 직책은 아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황제를 자주, 직접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고려인 환관 고용보(高龍普)다. 그는 기황후를 황후에 올린 인물이다. 그녀는 1333년 공녀로 끌려갔는데, 15대 칸 토곤티무르(順帝, 재위 1333~68)의 다사를 담당했다. 그러다 칸의 총애를 받아, 이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원 황후에 올랐다. 그녀에게 다사를 맡긴 인물이 바로 투만티르(禿滿迭兒)로 불린 고용보다. 그는 전주 출신으로 원래 석탄을 캐는 천민이었다. 기황후를 보좌하는 자정원(資政院)이 세워지자 고용보는 책임자인 원사로 발탁됐다. 기황후의 권력이 황제 다음으로 막강해지자, 고용보도 거물이 됐다. 친왕과 승상조차 “고용보의 모습이 멀리 나타나기만 하면 달려가 절을 올렸다. 뇌물을 긁어모아 금과 비단이 산처럼 쌓여있으며, 권세는 천하를 좌우할 지경이었다.”([고려사] ‘고용보전’) 그는 고려 조정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충혜왕을 체포해 원에 압송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그였다. 그리고 후계가 결정될 때까지 고려의 국정에 개입했다. 충목왕이 왕이 된 데에도 고용보의 공이 컸다. 그는 갓 8세 된 충혜왕의 아들을 직접 안고 황제를 알현해 왕위를 잇게 했다.

이들은 환관이고 고려 출신이었지만, 원과 명 조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환관 해수도 조선에서 악행을 일삼았지만, 영락제의 신임을 받았다. 영락제는 1424년 제5차 몽골원정 귀로 중 현재 내몽고 지역에 있는 유목천(榆木川, 몽고명 khailas-ausu)에서 병사했다. 그때 해수는 영락제의 유조를 받들어, 천리 밖의 황태자 주고치(朱高熾)에게 황위를 잇게 했다. 대권의 전위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일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도 그 일을 그르쳐 나라가 망했다. 승상 이사(李斯)도 진시황의 유조를 잘못 전해 나라를 망치고, 자신과 일족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이런 일을 해수에게 맡겼으니, 영락제의 신임이 그토록 무거웠던 것이다. 1388년 고려에 온 희산과 김여보화는 고용보나 해수만큼 유명하진 않다. 그러나 그들도 정치적으로 단순한 인물들이었을 리가 없다. 그들은 고려의 정치적 상황을 주원장에게 상세히 보고했을 것이다. 당연히 이성계파에서도 이들의 환심을 얻고자 전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 결과가 1389년 9월, 명의 대고려정책에 나타난 것으로 봐야 한다.

황제의 전문은 일차적으로 연립정권의 존재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몽주의 연립정권은 짧은 생명을 다하고 막을 내렸다. 이성계는 중국의 입장에 대한 부담에서 완전히 해방됐다. 급진파가 가장 원했던 상황이었다. 이색의 우려가 현실화됐다. 이제 이성계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를 막을 힘은 없었다. 정몽주의 대안은 사라졌다. 이제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1390년 7월까지 그는 계속 이성계를 지지했다. 그러나 윤이·이초 사건을 둘러싼 정쟁에서 반이성계파로 돌아섰다. 1392년 조선건국 때까지 이성계와의 권력투쟁에서 의미를 지닌 유일한 저항은 정몽주의 반대뿐이었다. 정몽주가 죽자 고려도 종말을 고했다.

깨진 연립정권…사생결단의 충돌


▎고려 출신인 기황후는 이국인으론 처음으로 원 제국의 황후 자리에 올랐다. 기황후의 스토리는 하지원 주연(가운데)의 드라마로도 제작됐고, 역사해석 논란을 빚기도 했다. / 사진:MBC
1389년 10월, 좌사의대부 오사충 등에 의해 재개된 이숭인에 대한 공격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본격적인 권력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반이성계파에선 권근이 반격에 나섰다. 그런데 윤소종과 오사충에 따르면, 윤승순의 사행시 부사로 동행했던 권근이 황제의 전문을 사사로이 먼저 열어보고, 창왕의 장인 이림(李琳), 다음에 이색에게 보였다고 한다.([고려사] ‘조민수전’ ‘오사충전’) 황제의 전문을 사적으로 열람하는 것은 대죄였다. 사헌부는 “이 공문은 우리나라의 존망과 관련된 중요한 것이므로 바로 도당으로 보낸 다음 재상이 모인 자리에서 함께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권근은 여러 날 동안 사사로이 간직했다가 사사로이 열어 보고 은밀히 계책을 꾸몄으며 천기를 누설하였습니다”라고 권근을 탄핵했다. 반이성계파의 처지가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문서를 본 그들은 모두 임박한 위험을 예상했을 것이다. 이숭인을 옹호하기 위한 권근의 상소문은 매우 길고 도발적이었다. 일전을 불사하기로 결심한 것으로써 아마 반이성계파의 공동의사였을 것이다. 권근이 일신의 희생을 각오한 것이다.

먼저 이숭인의 ‘불효’ 문제를 둘러싼 권근의 주장을 살펴보자. 첫째, 권근은 이숭인이 모친상 중 시관이 된 것은 오히려 진정한 효도라고 주장했다. 병으로 임종을 앞둔 부친의 바람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아버지 원구(元具)는 이미 늙고 병들어 금방 죽을 목숨으로 매우 급박하였는데, 그가 살아 있을 때에 아들이 감시(監試)를 맡는 영화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국가에서 숭인의 재주를 중히 여기고 원구의 뜻을 가련하게 여겨 그로 하여금 감시를 맡게 하였습니다. 만약 숭인이 구차스럽게 사양하였다면 이는 죽은 어머니만 알고 살아 있는 아버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 되며, 그가 후일의 비방을 면하고자 한다면 그 아버지의 뜻을 돌보지 않게 되기 때문에, 비록 마음속으로는 편안하지 못하였으나 힘써 직무에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허물이 있지만 공자의 이른바, '허물을 보고서 그 사람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효자의 불행이니, 불효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참다운 예인가는 단순한 예제를 넘어 현실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논쟁적인 주제다. 구체적으로는 부모의 바람이 예에 어긋날 때, 무엇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예인가? 또는 어머니에 대한 효와 아버지에 대한 효가 충돌할 때, 무엇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효인가?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본질론과 현상론의 대립이다. 또한 가치들의 서열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권근은 조선초 [예경천견록(禮經淺見錄)]을 저술할 정도로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요컨대 간관들이 주장처럼 단순히 불효로 치부할 수 없는 문제임은 틀림없다.

둘째, 현실적으로도 3년상을 실천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 국가도 유사시에는 복상을 중시시켜 직무에 종사토록 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나라 사람이 3년상을 행하는 사람은 만 명에 혹시 한 명이 있을 정도이며, 국가에서 기복의 법을 만들어 거상하려는 뜻을 빼앗는데, 만약 숭인에게 죄를 주고 반드시 3년상을 행한 사람을 구하여 이를 쓰려고 한다면, 이는 만 명을 버리고 한 명을 얻는 것이므로 신은 주상께서 사람을 얻어 쓸 수 없을까 염려합니다.” 3년상은 [주자가례]에 규정돼 있지만 고려 말까지 하나의 당위론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를 기준으로 특정 개인의 윤리를 판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국가에서도 상례를 엄격히 준수하기보다 현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국가도 엄수하지 않는 예식을 개인에게 강요하는 것 또한 무리라는 주장이다.

셋째, 이숭인을 탄핵한 자들은 3년상을 실천하고 있는가? “지금 관직에 있는 자 중에도 혹은 부모가 모두 죽고 난 후 3년 안에 왕의 구전(口傳)을 받았다 사칭해 시험을 보고 과거에 오른 자가, 중요한 관직에 올라 헌부(憲府)에 앉아서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 가 있으니, 그 사람들은 부모가 모두 죽었으니 누구를 위한 영화이겠습니까. 오직 자기 몸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어머니에게는 미안한 일을 한 것이 불효가 된다면, 제 몸을 위하여 부모를 잊은 것이 참 효도가 되겠습니까.” 탄핵자들은 위선자이자 사실은 더 질 나쁜 불효자라는 주장이다. 이는 조준을 겨냥한 것이었다. “대사헌 조준은 그때 기복출사(起復出仕)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가 다 죽었는데 3년이 되기 전에 높은 아문(衙門)에 앉아서 영화로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란 말이 자기를 두고 한 말이라 하여 앙심을 품고 있었다.” 조준은 위화도회군 당시 모친상 중에 있었다. 그런데 이성계는 그를 대사헌에 발탁해 국가개혁의 총지휘를 전적으로 맡겼다. 이숭인에 대한 탄핵도 실은 그의 지휘 하에 이뤄진 것이었다. “헌부에 앉아서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 “오직 자기 몸을 위한 것”, “제 몸을 위하여 부모를 잊은 것” 같은 권근의 표현은 적나라하고 거칠다. 조준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이 담겼다.

이성계파와 반이성계파의 투쟁은 선을 넘었다. 그들 중에는 한때 절친한 벗도 많았다. 하지만 이젠 서로를 증오하는 적일 뿐이었다. 정치는 우정보다 증오의 세계다. 우정은 유리처럼 쉽게 부서진다. 마키아벨리의 이 말처럼, 인간의 본성이 본래 그런 것인지 모른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812호 (20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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