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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특별기고] 고사성어(故事成語)로 본 己亥年 

경당문노(耕當問奴) ‘물어라, 답이 보일지니’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밭 가는 일조차 노비에게 물어볼진대 하물며 국사(國事)야… 만사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 전문가에 묻고 들어야

▎서울 광진구 아차산 해맞이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새해 소망을 실은 풍선을 날리며 환호하고 있다. / 사진:우상조
문득 2018년 1월을 떠올려본다. 나는 무엇을 아쉬워했고 무엇을 다짐했던가. 기억은 가물거리지만 나의 발전과 가족의 행복을 원하지 않았을까. 얼마나 그 다짐과 희망에 가까워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참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새해가 시작되면 늘 다사다난했던 지난해를 과거의 기억 속에 묻고 새로운 희망으로 가슴을 가득 채운다. 돌아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던가. 그 기억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내 삶을 만들었으니, 웃음도 눈물도 모두 소중한 삶의 자산이다.

그렇게 한 발 두 발 내디뎌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돌아보면 아쉽고 마음 아픈 일이 왜 없었겠는가만은 내일은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다.

여전히 우리의 삶은 팍팍하겠지만, 그리고 그 속에서 잠깐의 휴식처럼 즐거운 일이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소망을 빌어보는 것은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개인과 가정의 삶이 아름다워야 사회와 나라가 아름다워지는 법이고, 사회와 나라가 안정돼야 개인과 가정이 안정되는 법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망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렇지만 주변을 배려하면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좀 더 평화롭고 따뜻하기를 원할 뿐이다.

1. 경당문노(耕當問奴) | 모르면 물어봐야 건강한 사회


▎전남 화순군 북면 들녘의 길게 늘어선 밭고랑 사이에서 겨울 밭일을 하던 아낙네들이 얘기꽃을 피우고 있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다. 시골에서 자라고 지방 소도시에서 학교를 나온 나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 가난한 집안 살림에 비싼 학비를 감당해야 했으니 내 일상이 넉넉할 리 없었다.

절약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최소한의 비용만을 써야만 했다. 값싼 음식일망정 밥은 먹어야 했고, 학교와 집을 오가는 교통비 역시 필수적으로 지출해야만 했다. 그런데, 대중교통이 별로 필요 없는 지방 소도시 출신에게 서울의 교통체계는 너무도 복잡했다.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나는 가야 할 방향과 반대로 가는 버스를 타는 바람에 낭패를 당한 바 있다. 게다가 집에서 학교까지 두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야 했으므로 신중하게 버스를 타지 않으면 그런 꼴을 당하기 일쑤였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묻고 공부하는 존재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우연히 버스노선도를 구입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서울시내 버스노선도를 사서 나는 그것을 숙독했다. 그리고는 내가 주로 다니는 곳을 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열심히 익혔다. 덕분에 낭패를 당하는 일이 훨씬 줄어들었다.

내 동기 중에 서울에서 나고 자란 학생이 있었다. 하루는 그와 함께 국립도서관에 가게 됐다. 그는 대중교통에 아주 익숙했고, 나는 아무 걱정 없이 따라다니기만 하면 됐다.

하루를 그와 함께 다니다가 문득 나는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무슨 버스를 타든, 그는 늘 버릇처럼 운전기사에게 우리가 가야 하는 목적지를 말한 뒤 그곳으로 가는 버스가 맞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수십 년을 서울에서 자란 그가 저렇게 묻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심지어 나도 당연히 아는 버스노선인데도 그는 해맑은 얼굴로 물어보고 타는 것이었다.

그렇게 국립도서관을 다녀온 며칠 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서울 사람인데 왜 그렇게 버스노선을 물어보느냐고. 그러자 그는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렇게 물어보고 타면 혹시라도 실수할 일을 줄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모든 버스 노선을 능숙하게 아는 것도 아닌데 한 번 물어보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내 마음에 큰 울림을 줬다. 묻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묻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다. 버스에 익숙하지 않은데 버스기사에게 행선지를 물어보기를 부끄러워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나를 반성했다.

어쩌면 서울 생활에 낯선 것을 누군가가 비웃을까 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묻고 공부하는 존재다. 그래서 대부분 제사상의 위패에 ‘학생(學生)’이라고 표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르면 물어야 한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묻고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인데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묻지 않고 일을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경당문노(耕當問奴)라는 말이 있다. 밭을 가는 일은 남자 종에게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 송문제(宋文帝)가 북방을 정벌해 국토를 넓히고 싶어 했다. 이때 심경지(沈慶之)가 이전에 감행했던 북벌(北伐)의 교훈을 거론하면서 반대했다.

송문제는 문관(文官) 몇 사람을 다시 불러서 군사 문제를 논의했는데 심경지가 나서서 황제에게 간언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집안을 다스리는 것과 같습니다. 밭 가는 일은 남자종에게 물어야 하고(耕當問奴), 베 짜는 일은 여자종에게 물어야 합니다(織當問婢). 아무것도 모르는 백면서생(白面書生)과 이런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송사(宋史)] ‘심경지전(沈慶之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가 좁기는 하지만 곳곳에 고수들이 포진해 있다. 어떤 분야든 전문가가 있기 마련이다. 국가를 경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개인이나 가문의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것도 모르는 일이 있으면 물어보고 구성원들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물어보면서 해나간다. 하물며 국가를 경영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 하랴.

문제는 조금의 권력만 쥐면 자신이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일을 한다. 그러니 전문가들에게 묻지도 않고 그들의 조언을 듣지도 않는다. 이런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제발 물어보자. 정부든 국회든, 혹은 동장이든 집안의 가장이든, 구성원에게 묻고 전문가에게 물어보자. 묻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물음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훨씬 건강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2. 등고자비(登高自卑) |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소망하라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 때 함께 걸어가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 사진:사진공동취재단
30대 후반 나이까지 즐겼던 등산을 그만 둔 지가 꽤 된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늘 다니던 인근의 산도 가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허리에 살이 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건강이 염려된다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지난 주 일요일에는 도시 인근의 낮은 산에 올랐다. 별로 가파른 곳도 아닌데 역시 힘들다. 운동을 하지 않은 벌이다. 평소에는 왕복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이날은 훨씬 더 걸렸다.

만나지 않고선 불신의 벽 허물 수 없어

한 시간쯤 올랐을까. 몸이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산을 오르는 일이 즐거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상당히 차가운 날씨였지만 몸에는 더운 기운이 흐르고 땀이 조금씩 났다. 오르는 걸음걸음이 즐거웠다.

연초에 결심했던 것 하나가 갑자기 생각났다. 일을 좀 줄이고 운동을 더 하는 것이 내 결심 중의 하나였다. 결의에 찬 눈빛으로 결심했건만 정작 나는 올해 내내 운동을 제대로 하기는커녕 이따금 오르던 뒷산도 제대로 오르지 않았다. 부끄러운 생각과 함께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 오르다 보니 어느새 꼭대기다.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매 순간마다 내디뎠던 걸음 덕분이다. 아무리 멀고 험한 산이라 하더라도 그 시작은 당연히 첫걸음에서 시작한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우리의 속담이 참 새롭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엄청난 사건을 많이 겪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중에서 특히 기억나는 것을 꼽으라면 나는 남북 정상회담을 앞줄에 놓을 것이다. 분단 이후 남북은 같은 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적대시하면서 살아왔다.

약소민족의 서러움을 20세기 내내 겪었고 지금도 그 결과 이렇게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살아가고 있다. 제국의 위력 앞에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았고, 냉전 체제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분단국가의 국민으로 살았다.

부모형제가 생이별을 한 지 벌써 60년을 지나 70년을 바라본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길었던 탓인지 남북한이 쌓아온 불신의 벽은 너무도 높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건네도 일단은 의심부터 하고 본다. 그러니 우리의 20세기가 얼마나 불행한 역사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남북의 정상이 만났다는 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기억될 만한 큰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에도 서로 만나려는 의지를 보였고 또 실제로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전격적으로 만나서 남북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혹은 극적으로 확인한 적은 없지 않았나 싶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 열강들의 미묘한 국제관계 속에서 지지와 함께 여러 가지 우려도 자아냈지만 그래도 이전의 만남에 비해서 이번 만남이 남북관계에 있어서 상당한 진전을 가져온 것 역시 사실이다.

남한이 북한을 방문했던 것처럼 새해에는 답방(答訪) 역시 이뤄질 것으로 기대해 본다. 북한의 답방에 대해서는 워낙 견해 차이가 크기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 다양한 논의와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겠지만, 어쨌든 만나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만나지 않고서는 불신의 벽을 허물 수가 없고, 만나지 않고서는 통일로 가는 길을 함께 걸어갈 수가 없다. 많은 전문가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분석과 국민들의 격렬한 토론이 전제돼야 하겠지만, 새해를 맞아 우리가 희망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남북이 더 평화로운 관계를 형성하면서 남북관계에 대한 긍정적인 결과가 꾸준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등고자비(登高自卑)라는 말은 [중용(中庸)]에 나온다. “군자의 도는 마치 먼 곳으로 가는 것은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것과 같고, 마치 높은 곳을 오르는 것은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과 같다”(君子之道,辟如行遠必自邇,辟如登高必自卑[군자지도 비여행원필자이 비여등고필자비])는 구절에 들어 있다. 참 평범한 말인데도 우리는 늘 잊고 살아간다.

그야말로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남북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점, 어떤 방식이든 통일로 가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우선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꾸준히 걷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함께 평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으리라.

3. 양빈양거(讓畔讓居) | 믿음과 배려가 넘치는 삶

남북문제에 큰 진전이 있었지만, 경제는 참 어려웠다. 우리 같은 책상물림들은 아무리 경제지표와 여러 자료를 보여줘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실 국가적으로 경제지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잘 모른다.

그렇지만 경제는 늘 서민들의 피부로 먼저 느끼는 법이다. 국가적으로 경제가 좋아졌다 해도 내 삶이 팍팍해졌다면 경제가 나빠졌다고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경제가 좋았다고 한 적이 언제는 있었느냐는 반문에 딱히 답할 말은 없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은 늘 어려웠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늘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경구를 떠올리곤 한다.

나의 십대 시절보다 요즘의 십대들의 삶이 풍족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만큼 국가 경제가 성장했다는 방증(傍證)이기도 하다. 복지도 좋아졌고 사회 환경 역시 풍족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지금의 십대들도 우리 세대와 마찬가지로 살아가기 쉽지 않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고민과 어려움을 안고 살아 간다. 경제적인 사정은 이전에 비해 좋아졌다고들 하지만 삶의 질도 그에 비례해서 높아졌을까.

배려 없으면 타인 도울 생각 못해

어려움에 닥치면 공동체는 오히려 강한 결속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힘든 상황을 넘어서기에는 혼자보다 여럿의 힘이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단위든 국가 단위든,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수준으로 경제적 수익을 올리거나 혜택을 누릴 수는 없다.

누군가 넉넉하면 누군가는 부족하게 살아간다. 그들 중에서 너무 어려운 사람이 생기면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도움과 배려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살아갈 만한 곳이라고 느낀다. 정말 어려울 때 내미는 작은 손길 하나가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만든다. 나는 우리 사회가 그러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늘 품고 살아간다.

중국 고대의 성군으로 칭송 받는 순임금은 가정환경이 매우 불우했다. 신분이 낮은 집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자랐으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뒤 그의 아버지는 후처를 얻었다. 후처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그를 총애한 나머지 전처소생의 아들인 순을 여러 차례 죽이려고까지 했다.

물론 그는 아버지와 새어머니에 대한 효성스러운 마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인품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짓자 역산에 사는 백성들은 서로 밭의 경계를 양보했고 뇌택(雷澤)에서 고기잡이를 하자 그곳 백성들은 서로 고기 잡는 자리를 양보했으며 하빈(河濱)에서 도자기를 굽자 하빈에서 생산되는 그릇은 하나도 조악(粗惡)한 것이 없게 됐다.

순이 사는 곳은 1년이 지나자 마을을 이뤘고, 2년이 되자 읍(邑)이 됐으며 3년이 지나자 도시가 됐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양빈양거(讓畔讓居)’다. 밭의 경계를 양보하고 물고기 잡는 곳을 양보한다는 뜻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나오는 고사다.

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의 사정을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내 사정만 절박하고 남의 사정은 돌아보지 않는다. 배려도 없으니 남을 도울 생각도 못한다. 조금만 주변을 돌아보면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터인데,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형편이 되는데도 배려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새해를 맞아 그런 소망을 가져본다. 내 것을 조금 헐어서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삶을 만들어 가기를, 누구나 자신이 가진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비록 작지만 이러한 생각과 태도들이 더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하나의 발걸음이 되기를, 나아가 한반도의 엄혹한 추위가 평화의 훈풍으로 변화하기를 빌어본다.

- 글 김풍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pung10@kangwon.ac.kr

201901호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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