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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한반도 워치’] 위대한 한 해, 2018년을 반성적으로 결산한다 

그래도 비핵화 협상의 불가역적 돌파구 필요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
트럼프, 평양 가서 북한 위신 세워주고 핵·미사일 가져온다면?
김정은 서울 답방 원한다면 진보단체들 최대한 절제해야


▎2018년 9월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 랩핑된 한반도 평화 기원 문구. / 사진:연합뉴스
한반도 역사의 물줄기가 크게 바뀐 2018년이 저물어 간다. 올해의 랜드마크 이벤트로 기록되는 4·27 판문점 선언, 6·12 싱가포르 선언과 9·19 평양선언 이후 한반도의 안보 환경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의 전망은 시야에 들어왔는가. 이 대변화의 동력은 새해에는 더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이 모든 물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과 그것이 매개할 북·미 2차 정상회담이었다. 그러나 김정은의 연내 서울 방문은 불발로 끝나는 것이 확실해졌다.

가수 주현미의 히트곡 ‘신사동 그 사람’의 노랫말에 이런 소절이 있다. ‘시간은 자정 넘어 새벽으로 가는데/ 그 사람은 오지 않고 나를 울리네’. 김정은을 기다리는 문재인 대통령의 심정이 이럴 것 같다. 문 대통령의 자정은 2018년 말, 새벽은 2019년이다. 지금은 자정이다. 곧 새벽이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에 너무 큰 무게를 뒀다. 그가 와야 내년 초 김정은-트럼프의 2차 만남이 성사될 것으로 인식한 것이 잘못이다.

실천적 행동(deeds)들이 숭고한 말들을 따라가지 못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 위원장의 입장에서 보자. 그는 문 대통령을 세 번이나 만나 트럼프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북한 비핵화가 가져올 한반도 영구 평화가 북한에 경제적 대박을 안길 것이라는 설명과 설득을 들을 만큼 들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제 문 대통령의 족집게 과외를 받지 않아도 트럼프를 상대할 자신을 가졌을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빼고 2018년 남·북·미 대화와 협상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봐야겠다. 김정은의 서울 방문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평창겨울올림픽 이후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까지의 역사적인 성과를 가려 버렸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개선과 비핵화 협상에서 2018년은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성과를 거둔 것은 평가할 만하다. 판문점·싱가포르·평양의 3대 공동성명의 내용을 중심으로 2018년의 기성고(期成高)를 점검해 보고 2019년이 우리에게 어떤 해가 될 것인지를 전망해 보기로 하자.

판문점 공동선언(4·27)

1. 남과 북은 남북관계의 전면적이며 획기적인 개선과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 나갈 것이다.

2.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 첨예한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 위험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해 나갈 것이다.

3. 남과 북은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적극 협력해 나갈 것이다.

싱가포르 공동선언(6·12)

전문: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한반도에 지속적이고 튼튼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문제에 포괄적이고 깊이 있고 진지한 의견을 교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안전보장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고,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그의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약속을 재확인(reaffirm) 했다.

1. 북한과 미국은 평화와 번영을 염원하는 두 나라 국민들의 희망에 부응하여 새로운 북·미 관계의 수립을 약속(commit)한다.

2. 북한과 미국은 한반도에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평화체제(peace regime)를 수립하는 데 공동으로 노력한다.

3. 북한은 4·27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평양 공동선언(9·19)

1~4조: 비무장지대의 군사적 적대관계를 시작으로 한반도 전 지역서 전쟁 위험 제거. 판문점 군사분야합의서를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로 채택. 남북공동군사위원회 조속히 가동. 조건이 마련 되는 대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서해경제공동특구 및 동해관광공동특구 조성 합의. 이산가족문제의 근본적 해결 위한 인도적 협력 강화. 금강산에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개소. 이산가족 화상 상봉과 영상편지 교환문제 우선 해결. 2020년 하계올림픽 공동 참여와 2032년 하계올림픽 공동개최 유치.

5. 남과 북은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진전을 조속히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5의1. 북측은 동창리 엔진 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하에 영구적으로 폐기하였다.

5의2. 북측은 미국이 6·12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 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5의3. 남과 북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함께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5의6.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가까운 시일 내로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17년까지의 한반도 긴장 상태, 특히 2017년 말까지의 전쟁 위기를 생각하면 판문점·싱가포르·평양의 세 공동선언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가 경험한 가장 크고 의미 있는 역사적인 전환점으로 기록될 만한 말(words)이다. 문제는 실천적 행동(deeds)들이 이들 숭고한 말들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빈손 답방보다는 오지 않는 편이 생산적이라는 역설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 사진:연합뉴스
부분적으로 실천의 첫발을 뗀 것은 평양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남북관계의 개선뿐이다. 남북, 북·미 대화 전체의 핵심적 화두인 비핵화는 의미 있는 진전과는 거리가 먼 깊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원인은 미국이 북한에서 요구하는 종전 선언과 제재 완화에 응하지 않는 것, 북한이 미국에서 요구하는 핵 리스트와 비핵화 타임 테이블의 대강조차 건네지 않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북·미 간의 이 간극을 좁혀 보려고 혼신의 노력을 쏟아부었지만 교착상태를 타개하지는 못했다. 북·미 대화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이에 남북 경제협력과 휴전선 일대의 긴장완화 부분에서 장족의 진전을 이루어냈다. 이것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의혹을 키웠다. 미국은 한국과 미국이 보조를 맞춰 나가기를 바라지만 한국은 한 발 앞서가는 남북관계가 북·미 대화를 견인할 것이라고 믿는다.

판문점 선언 1항의 세부사항으로 합의된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개설되고, 이산가족 상봉이 실현되고, 비무장지대를 실질적인 평화지대로 전환하는 구체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서해를 평화수역으로 만드는 일, 임진강 하구의 공동 개발을 위한 조사도 시작했다. 가장 가시적인 성과는 경의선과 경원선의 철도와 도로 복원을 위한 공동조사가 실시된 것이다. 비핵화를 위한 북·미 협상은 탱크의 속도로 움직이는데 남북 협력 관계는 스포츠카의 속도로 질주하는 인상이다. 지지부진한 북·미 협상과 쾌속으로 달리는 남북관계 개선 사이에 생기는 먼 거리,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대북 한·미 공조의 뿌리를 흔들 잠재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초조한 마음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마지막 순간까지 준비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 때 서울 방문을 확인했다. 정상적이라면 11월 중에 서울 방문 날짜를 청와대에 통보했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이 하는 일은 정상적인 외교 관례를 따르는 법이 거의 없다. 김정은 위원장의 행보, 특히 해외 방문은 사후 발표가 관례로 정착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평양에서 통보가 오지 않았다,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말만 고장난 녹음기처럼 틀었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에 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말한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의 최종적인 목적이 한반도 비핵화인 이상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 자체로 여론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비핵화에 대한 김 위원장의 확실하고 구체적인 약속, 더 바람직하기로는 대강이라도 시간표의 제시가 없는 답방은 먹을 것 없이 소문만 요란한 잔치와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김 위원장의 빈손 답방보다는 오지 않는 편이 오히려 생산적이라는 역설적 평가가 나온다. 김정은 위원장의 연내 답방 불발을 환영한다.

김정은이 서울 답방에서 보일 반응


▎9월 18일 평양에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무개차를 타고 평양 시내를 둘러보고 있다.
지금의 비핵화 프로세스는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의 청사진을 문 대통령에게 넘기고 문 대통령은 그것을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해 북·미 2차 정상회담이 열려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는 번거로운 구조다. 폼페이오와 김영철 간의 고위급 회담에 의한 사전조율이 잘 안 되는 것도 정상들이 큰 틀의 합의를 먼저 하고 아래로 내려가 실천의 로드맵이 만들어지는 하향식(top down) 방식으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자체가 운용되기 때문이다.

사실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그로서도 선뜻 내키는 일이 아니다. 그가 9월 남북 정상회담 때 옥류관에서 냉면 먹으면서 남측 특별 수행원들에게 실토한 것처럼 그의 방문에 반대하는 참모들이 많았다. 그들은 서울에서 그들의 ‘최고 존엄’이 남측 반김(反金, 반김정은), 반북 시위대에 봉변을 당할 것을 걱정한다. 합리적인 걱정이다. 지금 남한 사회는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을 ‘위인’으로 환영하는 단체들이 속속 등장해 서울 곳곳에서 김정은 환영 집회를 열고 있다. ‘위인 맞이 환영단’ ‘김정은 국무위원장 환영 청년학생위원회’ ‘백두칭송위원회’ ‘꽃물결 실천단’ ‘백두 수호대’ 등 그 이름도 다양하다. 그러나 그들의 뿌리는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지금은 해산된 통합진보당이다. 12월 8일 지하철 종각역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환영 청년학생위원회’가 김정은 환영문화제를 열었다. 행사를 주도한 단체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과 청년민중당이다. 그들은 김정은 위원장도 사용을 중단한 주체사상을 숭상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에 오면 이 단체들은 김정은이 지나가는 거리에서 열렬한 환영을 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그들의 환영이 거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김정은에 반대하는 보수단체들의 격렬한 반대집회와 충돌할 가능성이 컸다. 일부 진보단체의 김정은 환영·칭송 행사는 결과적으로 김정은의 경호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그들의 ‘최고 존엄’이 서울에서 털끝만큼도 훼손돼서는 안 된다. 김정은의 참모들이 신경을 쓰는 것은 남한의 소수 청년 진보세력의 김정은 환영보다 그 환영이 부를 보수 진영 쪽의 반작용에 잠재된 경호상의 리스크와 ‘최고 존엄’의 이미지 손상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으로 비핵화·평화 프로세스에 가속이 붙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김정은이 정말 ‘위인’이어서 그 이미지를 남한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고 싶다면 그를 환영하는 진보단체들은 최대한의 절제(prudence)를 발휘해야 한다. 그들의 행동은 남북관계, 한반도, 동북아시아의 궁극적인 평화라는 콘텍스트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박근혜 탄핵에 절망하고 좌절한 보수 세력에게 울고 싶은 차에 뺨 맞는 빌미를 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두 세력 간의 가두 몸싸움이 큰 충돌로 발전할 때 김정은 위원장이 보일 반응은 뜻밖인 것일 수도 있다.

이제 관심은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내년 1~2월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북·미 2차 정상회담 전이냐 후이냐다. 그 선·후 관계는 결정적인 변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김정은과 트럼프가 무엇을 주고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다. 김정은 위원장은 9·19 평양 공동선언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검증 아래 영변 핵시설의 폐쇄를 미국에 대한 중대한 양보로 생각할 것이다. 상응조치로 가장 먼저 대북 제재 완화, 그 다음으로 종전선언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제재 완화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은 영변에 더해 모든 핵·미사일 시설의 폐기와 폐쇄다. 이 넓은 간격을 좁히는 것은 김정은과 트럼프의 진을 빼는 협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북·미 정상회담은 개최 시기조차 안갯속이다.

트럼프는 새해 1월 1일 이후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3월도, 6월도, 12월도 1월 1일 이후에 해당돼 너무 애매하다. 처음엔 서두르던 트럼프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겠다면서 여유를 부린다. 당초 트럼프가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담을 서두른 것은 북한이 2017년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 발사 성공에 화들짝 놀랐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한국·일본을 위협하는 것으로 만 알았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전쟁이 나도 거기서 나고 사람이 죽어도 그들”이라는 망언이 나온 것이다. 거기는 한국과 일본이고 그들은 한국인과 일본인이다. 그러나 화성-15의 등장은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화성-15의 사정거리가 1만3000㎞로 뉴욕과 워싱턴까지 타격권에 들기 때문이다.

“영변이 북핵의 전부가 아니다, 바보야”


▎세계 각국 언론인이 일산 킨텍스에 마련된 메인프레스센터에서 남북 정상회담 모습을 취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김정은 위원장은 2018년 4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7기 3차 전원회의에서 핵과 경제의 병진정책에서 핵을 버리고 사회주의경제 건설에 인민군까지 나서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그는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동결했다. 트럼프는 시간을 벌었다. 이제 걱정하던 중간선거도 상원은 지키고 하원은 민주당에 내어주는 선에서 끝났다. 트럼프는 서두를 이유가 없어졌다. 무역전쟁으로 중국의 시진핑을 압박해 김정은을 압박하게 하고 대북 제재는 현상대로 유지하는 꽃놀이패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리하여 쾌속 질주하던 문 대통령의 한반도 비핵화·평화 프로세스에 제동이 걸렸다. 김정은의 서울 방문 불발로 비핵화·평화 협상의 동력이 떨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지금의 북·미 협상의 교착상태가 어떻게 타개될 수 있을 것인가. 미 국무부 비확산·군축 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아인혼 브루킹스연구소 수석연구원의 말대로 비핵화의 진전과 제재 완화를 연동시키는 방안도 있는데 트럼프 행정부의 그 누구도 진지하게 고려하는 흔적이 없다. 김정은 위원장이 9·19 평양 공동선언에서 말한 영변 핵시설 폐쇄도 교착상태 타개의 한 방안이 될 수 있지만 이 방안이 거론될 때마다 미국의 대북 강경론자들, 트럼프 무조건 반대론자들이 들고 나오는 문제가 있다. “영변이 북핵의 전부가 아니다, 바보야!” 물론 그렇다. 산악지대가 많은 북한은 핵탄두, 핵물질, 미사일을 각지에 분산 배치 또는 은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의 동시 폐기·폐쇄를 보장하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때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38노스]가 8월 공개한 위성 영상. 북한 영변 핵단지 재처리시설 화력발전소에서 옅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영변시설 폐쇄로 상호 신뢰를 쌓아 북한이 말하는 동시적, 단계적 방법 말고 더 좋은 대안이 있을까. 한 가지 걸어볼 만한 모험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의 평양 방문을 갈망한다. 그러나 트럼프는 지금 단계에서 김정은에게 그런 영광을 줄 생각이 없다. 트럼프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담대하게 발상을 전환해 대형 수송기를 가지고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은 위원장의 국제적 위신을 세워주고 그 대가로 핵탄두 물질과 몇 기의 미사일을 가지고 돌아온다면 트럼프의 자존심(ego)은 하늘을 찌르고 비핵화 협상에는 불가역적 돌파구가 생길 것이다. 트럼프와 그의 외교 참모들은 독일 통일의 기본 틀인 동방정책의 입안자 에곤 바의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라(Think the unthinkable)’는, 획기적 발상의 대전환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북·미 교착상태가 장기화하면 문제가 복잡하게 꼬인다. 미국 강경론자들의 반격이 강화되고 미국 여론은 북핵 피로감에 빠지고 트럼프는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 물린 아이처럼 이란·시리아 같은 다른 장난감으로 눈을 돌릴 충동을 느낄 것이다. 누구보다도 김정은 위원장이 이런 사정을 직시해야 한다. 핵은 갖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을 뿐 사용할 수는 없는 괴물 아닌가. 미국이든 북한이든 핵의 선제 사용은 자살행위니까. 화성-15로 북·미 간에도 공포의 균형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전쟁이 나면 북한은 지도상에서 사라지지만 영토가 방대한 미국은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는 입어도 미국이라는 나라는 존속한다는 정도다.

한국은 어떤가. 지금의 교착상태가 오래가면 한국은 대북 제재에 걸려 실질적인 남북협력은 진전을 보지 못하고 한·미관계의 긴장, 남남갈등의 악화라는 구정물만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른다. 2018년은 한국의 위대한 한 해였다. 남북, 북·미 대화와 협상의 동력을 살려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말연시의 휴가 중에 2018년과 거리를 두고 이 위대한 한 해를 반성적으로 성찰(reflect)할 것을 건의한다. 한 해를 눈코 뜰 새 없이 보낸 문 대통령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거리의 변증법(dialectic of distance)’이다.

※ 김영희 - 1958년 22세 나이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필자는 82세가 된 지금까지 현장을 누비는 영원한 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 임원 등을 거치고 최근까지도 중앙일보 대기자 및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다. 외교·안보·국제 뉴스의 한 우물을 판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201901호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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