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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3·1정신’ 홍보 나선 日 감독 겸 배우 고바야시 게이코 

“20년 전 위안부 연기가 내 삶 바꿔”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전후(前後) 중국 잔류 일본인의 삶 그린 작품 [순애]로 찬사…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위해 일본 안에서도 기금 모금 앞장서

▎영화감독 겸 배우인 고바야시 게이코는 8년 간 제작한 영화 [순애]로 해외 여러 영화제에서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고바야시는 “영화야말로 현실을 뛰어넘어 이상을 그려낼 수 있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다.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하면서다. 대법원은 강제징용 등 불법행위에 대한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봤다. 일본 정부는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한국 외교부는 “일본이 책임 있는 자세로 역사문제에 임해야 한다”고 받아쳤다.

이런 가운데서도 민간에서는 훈기가 감돈다. 3·1운동 100주년 홍보에 발벗고 나선 일본의 영화감독 겸 배우 고바야시 게이코(小林桂子)가 군불을 지폈다. 고바야시는 12월 6일 서울 마포구 유니세프 빌딩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원케이(One K)글로벌캠페인’의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또 앞으로 일본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기금 조성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원케이글로벌캠페인’은 문화를 활용한 통일운동 캠페인으로 국내외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통일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보여주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2015년엔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특별공연을 주최했다. 2017년엔 필리핀 마닐라에서 공연을 열었다.

“3·1운동은 반일운동 아닌 평화운동”


▎영화 [순애]의 주인공 ‘아이’(오른쪽 첫째)는 전후(戰後) 중국에 머물며 일제강점이 중국인에게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맡는다. / 사진:·영화 [순애]
고바야시는 1999년부터 자신이 제작과 주연을 맡았던 중·일 공동제작 영화 [순애(純愛)]를 크랭크인 8년만인 2007년 일본에서 개봉한 뒤 지난 12년간 전 세계에서 상영회와 교류 투어를 진행해 왔다. 개봉 첫 해 모나코 국제영화제 최고 프로듀서상을 시작으로, 2017년에는 영국 롬포드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과 대만 아시아국제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는 데 발벗고 나선 이유가 뭘까. 홍보대사 위촉식이 열린 다음날 월간중앙과 만난 고바야시는 지난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을 방문했던 이야기로 운을 뗐다. 탑골공원은 3·1운동의 물결이 처음 시작된 곳이다. 고바야시는 “민족대표 33인이 공원에 모인 군중과 함께하지 못하고 식당에서 독립선언서를 읊조려야 했다고 한다. 비애(悲哀)를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다.

“숙소에 돌아와 일본어로 번역된 기미독립선언서를 찾아 읽어봤다. 반일 감정을 담은 글이 아니었다. 대신 조선인이 떨쳐 일어나 평화를 쟁취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3·1운동을 계기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홍익인간’을 기본정신으로 삼았다고 들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세계를 이롭게 하겠다’는 결의에 감동을 받았다.”

제국주의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欧)를 강조했다. 일본 개화기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나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나쁜 인상을 준다”며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시아는 미숙하고 비합리적’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연장이었다. 전후 일본에서도 탈구입아(脫欧入亞) 구호가 나오기까지 적잖은 세월이 걸렸다. 그가 말한 ‘감동’이란 ‘조선인도 평화를 말할 줄 알았구나’라고 비칠 법도 하다.

그러나 고바야시가 느낀 감동은 가벼운 수사가 아니다. 그 역시 일본군 위안부를 연기라는 방법을 통해 접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1997년 ‘전후 50년 일중우호방문단’ 일원으로 중국을 처음 방문한 그는 이듬해 중국의 지인으로부터 시나리오 하나를 건네받았다. [검은 숲(黑森林)]이라는 드라마의 대본이었다. 여자근로정신대에 자원했지만 실상 일본군 성노예를 강요당했던 일본인 여성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

“제가 맡았던 주인공은 여자근로정신대의 진실을 깨닫고 군영에서 도망친다. 그리고 신분을 감추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남자인 척하면서 벙어리 행세를 한다. 중국인과 일본인이라는 입장을 넘어, 국가라는 이름 하에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희생이란 이름의 고통’이 얼마나 막대했는지 깨달았다.”

이때 경험을 계기로 고바야시는 ‘일본인으로 태어난 내가 진심으로 세계평화를 원한다면, 동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게 먼저’라고 결심했다. 그가 생각한 ‘세계 평화’란 거창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저녁에 따뜻한 밥을 부모님과 함께 먹는 일”이었지만, 현실은 그마저도 요원했다. 용서의 메시지를 전할 방법으로는 영화를 선택했다. “영화야말로 현실을 넘어 꿈을 내 눈 앞에서 (가상으로나마) 실현해주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용서와 화해는 국경을 뛰어 넘는다”


▎‘원케이글로벌캠페인’의 홍보대사로 위촉된 고바야시(오른쪽)는 “100년 동안 이어진 한일 간의 아픔과 갈등을 청산하고 새로운 100년을 여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 사진:원케이글로벌캠페인
1999년부터 영화 [순애] 제작에 들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에 남은 일본인을 소재로 삼았다. 일본 정부는 국내 식량부족과 만주 개척을 이유로 1936년부터 일본인을 만주로 이주시킨 터였다. 개척한 땅의 소유권을 주겠다는 미끼를 내세웠다. 이른바 ‘만몽(滿蒙)개척단’으로 만주에서 거주하던 일본인은 27만여 명에 달했다.

전황이 최악으로 치닫던 1945년 8월 9일 소련이 태평양전쟁 참전을 선언하자, 일본 관동군은 개척단의 장정 4만여 명을 징집해 갔다. 그러고서 관동군은 군인 가족만을 안전지대로 피난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개척단에 남은 노인과 부인, 어린이들은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관동군은 8월 12일 만주국의 수도인 신경(新京)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관동군 체제는 반석 위에 든든하다. 개척단 제씨(諸氏)는 근심 말고 생산에 매진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개척단은 만주 한복판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억눌려 살았던 중국 농민들의 표적이 됐음을 물론, 부녀자는 소련군의 성노리개로 전락했다. 계속되는 폭행과 약탈에 집단 자결을 선택한 주민들도 있었다.

[순애]의 첫 장면도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를 탈 수 있다는 봉천(奉天·현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으로 향하는 일본인 행렬로 시작한다. 행렬 곳곳에서 ‘군인은 우리를 버렸어요’ ‘우리는 속아서 온 거야’라는 절규가 이어진다.

피란 도중 소련의 폭격으로 일행이 실종되고, 주인공 ‘아이(愛)’의 남편은 봉천으로 향하는 기차를 홀로 타고 떠난다. 홀로 남게 된 주인공은 중국인 마을로 향한다. 아이를 발견한 중국인들은 ‘열일곱 살 된 딸이 일본군에게 겁탈 당했다’ ‘내 남편은 일본군에게 살해당했다’라고 분노하며 아이를 죽이려 한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아이 역시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임을 이해하고,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영화의 큰 줄기를 이룬다.

영화 촬영지는 고구려의 첫 수도였던 ‘졸본(卒本·현 중국 랴오닝성 환런현)’이다. 고바야시는 “개척단이 거주하던 지역이기도 했지만, 한국과 함께하는 2부작을 염두에 둔 점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곳에서 그는 마을 세 곳을 섭외해서 마을주민과 함께 촬영을 진행했다. “극중 ‘아이’을 거둬준 할머니는 실제로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분이었다. 촬영이 끝나고 나면 ‘너무 감정이입을 한 것 같은데 괜찮느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상처를 입은 분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극중 ‘아이’도 일본인이지만 일본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었다. 결국 화해는 일본과 중국의 화해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화해에서 그치는 게 아닐까. 고바야시는 “화해는 개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마을주민들이 아이를 죽이겠다고 나섰을 때, 아이는 선선히 복수를 하라고 말한다. 일본이 해온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용서를 구한 것이다. 나아가 사람과 사람 간의 화해는 국경을 넘는다. 지금 한일관계가 그렇다. 아무리 정부끼리 신경전을 벌여도 이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끊지는 못한다. 한국 사람은 여전히 일본 애니메이션을, 일본 사람은 여전히 한국 아이돌의 콘서트를 본다. 한일관계의 진정한 토대는 어떤 조약이나 협정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관계인 것이다.”

[순애]를 제작하는 데 8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일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과 달랐던 탓이다. 제작사도 배급사도 없었다. 고바야시는 “당시만 해도 중국지방 관청에, 그것도 일본인이 촬영을 요청해 온 적이 없었다. 관청에서도 처음이라 놀란 김에 허가를 내줬던 것 같다”며 웃었다. 혈혈단신 중국으로 건너가 한 명 한 명 동료를 만나고 자금을 모으면서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이런 뜻을 주변에 전하자 무보수로 출연해 준 사람들이 생겨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고바야시는 “사실 출연진 전원이 무보수”라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영화 제작이 한창이던 2004년에는 중국 산둥성 태산 기슭에 스러져 가는 학교 건물을 현지 사람들과 힘을 합쳐 재건축하기도 했다. 학교 이름을 ‘고바야시 게이코 기금희망 초등학교’로 지었다. 영화가 개봉한 뒤인 2008년에는 영화 수익금을 다시 학교에 투자해 ‘순애유치원’도 건립했다.

“한·중·일 합작, 그 자체로 평화의 메시지”


▎고바야시는 “한반도 분단 역사에서 일본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가 한·중·일이 함께 만드는 영화 [순애] 후속편으로 다시 한 번 치유를 꿈꾸는 이유다.
[순애]를 알려온 시간은 제작에 걸린 것보다 긴 12년이었다. 2007년 도쿄 긴자의 영화관을 시작으로 일본 각지의 영화관에서 상영했다. 현실에서 ‘순애의 인연’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풀뿌리 상영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순애의 인연’은 중국부터 모나코까지, 인도네시아부터 미국까지 퍼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까지 닿았다. 한국에서 [순애]를 상영했을 때 원케이글로벌캠페인 관계자와 만나 오늘날의 인연까지 만들어 왔다.

“특히 중국에서의 반응이 뜨거웠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함께 중국에서 개봉했을 때 중국 전역 250개 영화관에서 상영했고, 2010년 중국 국영 방송사 CCTV에서 [아이]를 송출하면서 입소문으로 퍼져 웹사이트를 통한 시청 횟수도 600만 회를 넘어섰다.”

오랜 제작·홍보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은 20년 만인 2018년 고바야시가 후속편 제작에 도전하는 자신감이 돼줬다. ‘한반도는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데 이 과정에 일본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며 동료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전작 [순애]가 중일 공동제작이었다면, 후속작은 한·중·일 세 나라가 함께 제작에 참여한다.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단계지만 주인공 이름은 일찌감치 ‘아이카(愛花)’로 정했다. 아이(愛)가 품고 있던 사랑의 씨앗이 손녀인 아이카에게서 꽃으로 피어난다는 뜻을 담았다.

작품에는 한국에 온 아이카가 한류스타와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을 계획이다. 고바야시는 “첫 번째 작품에서 슬프고 잔잔하고 아픈 내용을 담았다면, 2편은 기쁘고 행복해서 우는 느낌”이라며 “한국 드라마의 극적인 요소를 담아내기 위해 한국 작가진에 다시 각색을 맡겼다”고 말했다.

한류스타와의 사랑 이야기에 중국이 낄 자리가 있을까. 고바야시는 “복잡하지만 설명을 잘 들어 달라”고 당부하며 말을 이었다. “[순애]의 주인공 ‘아이’는 일본 남편과 결혼했다. 그러나 남편이 떠나면서 아이와 그녀의 딸만 중국에 남는다. 그리고 아이의 딸은 중국인과 결혼한다. 그러니 아이의 손녀인 ‘아이카’는 일본인과 중국인의 피가 섞인 셈이다.” 그는 “자칫 막장 드라마의 설정처럼 들릴까 봐 걱정스럽다”며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나 장난스럽게만 들리진 않는다. 그만큼 한·중·일 세 나라의 근·현대사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방증으로 읽혔다. 일본에 남은 재일조선인, 연해주에 남은 고려인, 중국에 남은 조선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순애] 후속편의 설정은 고바야시의 걱정과 달리 설득력이 있었다.

‘차기작을 통해 기대하는 바가 있느냐’는 질문에 고바야시는 “한반도 통일이 가져올 미래가 얼마나 밝은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다”며 포부를 드러냈다. 현재 한국을 포함해 일본·중국·유럽 등에서 촬영이 진행되고 있다. 2020년 도쿄올림픽 시기에 맞춰 개봉할 계획이다. 고바야시는 “이번엔 한국에서도 상영회를 열 예정”이라며 “부산국제영화제 출품도 고려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마지막으로 20년만의 도전인데 걱정은 없는지 물었다. 고바야시는 “세 나라가 합작하는 작품이니만큼 정말 많이 부딪치리라 생각한다”면서도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친구가 되려면 그냥 이뤄지는 건 없다. 같은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여정에서 교류를 하고 신뢰를 쌓는다. 그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함께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리라 믿는다. 또 한·중·일 사람이 모여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전 세계에 전하는 평화의 메시지가 되리라 생각한다.”

- 글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 사진 이원근 객원기자 abcd2877@naver.com

201901호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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