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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고려청자 복원 꿈꾸는 조상권 도자문화재단 이사장 

“예술에는 좌(左)도 우(右)도 없다”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 1967년 ‘동백림 사건’ 연루된 佛 유학 건축학도, 北에서 고려청자에 눈떠
■ “고려청자의 독창성·분청사기의 자율성에 민족적 자신감 깃들어”
■ “북한의 허물만 들추면 서로 다쳐”, 도자기와 고고학 분야 남북협력 절실


▎조상권 도자문화재단 이사장이 경기도 이천 작업실에서 도예작품을 만져보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고려자기의 복원은 민족을 위한 필생의 사명이다.
북한 공작원 출신의 조상권(83) 도자문화재단 이사장은 2018년 11월 ‘출국’을 했다. 10박 11일 일정으로 스페인을 여행했다. 1997년 한국으로 귀순한 뒤, 21년 만이었다. 그의 개인사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에 고스란히 포개진다.

남미 작가 이사벨 아옌데는 소설 [영혼의 집]을 통해 칠레 역사의 비극을 관통했다. [영혼의 집]의 주제는 용서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고 죽는 역사 속에서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 그 잘못된 선택의 피해를 본 자가 복수로 응징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초월일 수 있다. 트루에바 집안 이야기는 곧 칠레 현대사였다.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을 활용했어도 이 소설은 리얼리즘적이다.

조상권의 생애 역시 사실감을 초월한 사실이다. 인생의 중요한 길목에서 이승만, 조용수, 김종필, 윤이상, 김일성 등을 만났다. 시대의 모진 풍파 속에서 일본·프랑스·스페인·독일·러시아·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에콰도르·과테말라·캐나다 등을 거쳐야 했다. 그의 일생을 뒤흔든 끈은 남북 분단이었다. 거기 옭아매인 조상권은 무력했지만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했다.

이제 그는 경기도 이천 광주요 도자문화재단에서 은인자 중의 여생을 보내고 있다. 외진 곳을 찾아가 두 차례에 걸쳐 조상권을 만났다. 프랑스 국립 보자르건축학교 1등에 빛나는 천재적 소질의 건축가는 남한에서 태어나 북한에 넘어간 뒤 다시 남한에서 고려청자의 재생을 위해 여생을 건 장인(匠人)으로 살고 있었다.

1. 스페인 여행에서의 깨달음 | “우리 눈으로 우리 문화를 들여다보자”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성당을 배경으로 젊은 조상권이 서 있다. 1971년 북한에 적을 두고 있을 때다.
21년 만의 출국이었다. 나가 보니 세상이 바뀌었던가?

“스페인은 (1960년대 초) 유럽 유학 시절 오래 살던 곳이다. 제2의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외국어 중에서 스페인어를 가장 잘한다. (1997년 귀순 전까지) 마지막으로 머물던 곳이다 보니 재미있고, 통하는 것이 많았다.”

무엇이 인상 깊었나?

“문화적 깊이에서 감명받았다. 스페인에 가서 외식을 많이 했다. 고급 식당이 아닌 일반인들이 가는 식당에 갔다. 하나같이 플라스틱 식기를 쓰지 않았다. 도자기를 썼다. 스페인의 도자기에 관한 긍지를 알 수 있었다. 세비야는 도자기 수출로 돈을 번 도시였다. 거기 가면 길가 웬만한 모양들은 다 도자기로 만들어져 있다.”

이제 여행에 (국가정보원의 통제 등) 제약은 없어진 것인가?

“그렇다. 이전에 하도 많이 돌아다녀서 갈 생각 없다고 말했는데 막상 다녀오니 또 가고 싶다. 이제야 돈 벌어야 될 필요성이 생겼다.(웃음) 한 방송사 PD가 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살았던 곳을 설명해주기 위해 내가 프랑스에 직접 갈 수도 있다.”

조상권은 언어에 천부적 감각을 갖고 있다. 모국어인 한국어는 물론 유학 시절 일본어를 배웠고, 유럽에서 프랑스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독일어· 러시아어 등을 익혔다. 1967년 ‘동백림 사건’이 그의 운명을 갈랐다. 동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을 거점으로 한 유럽 교포, 유학생 중심의 대규모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발표에 따르면 관련자가 300명 이상이었다. 기소자는 60여 명에 달했다. 음악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가 주범으로 지목됐다. 이때 조상권은 북한 도피를 선택했다.

조상권이 파리에서 언어와 학업 적응 문제로 실의에 빠져있을 때 물심양면 도와준 선배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몇 명은 이미 북한과 내통하고 있었다. 서울대를 나온 천재 수학자 노봉규도 그중 한 명이었다. 노봉규의 권유로 1963년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을 방문했다. 호기심에 발을 들여놨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기도 했다.

투철한 이념 없이 찾아간 북한의 현실은 참담했다. 예술에 종사할 줄 알았는데 세뇌교육 뒤 공작원과 대남방송 요원을 시켰다. 가족이 볼모로 잡혀 있으니 도리가 없었다. 유럽 교포, 유학생, 광부, 간호사 포섭을 위해 움직였지만 실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자원해서 남미로 방향을 틀었다. 당시 북한 공작원으로 파견된 것이었다. 독학으로 공부한 스페인어 덕에 1972년부터 25년간 남미를 떠돌았다. 거기서 북한 공작원 신분 세탁과 자본주의 적응을 도왔다. 현지 교포들을 도울 일도 생겼다. 하지만 그는 공작원으로서 낙제였다. 다만 스페인어가 남았다. 스페인어 실력 덕분에 조상권은 여행 도중 스페인을 문화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문화적 저력은 자국 문화의 특수성을 발휘하는 데에서 나온다고 확신하게 됐다.

예술은 그 나라 경제·문화의 총합


▎1. 프랑스 국립 보자르 건축학교 본과 진학시험의 모범답안지 책자. 1200명 이상의 응시생 중 최우수 점수를 받은 학생의 답안지만 책자로 만든다. 1964년 시험에서 조상권은 전체 1등을 했다. / 2. 1964년 조상권이 그린 도면. 1등을 하자 연고가 없던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축전을 보내왔다.
한류(韓流)와 한식의 세계화에서 알 수 있듯 우리 문화의 힘도 세지고 있다.

“한류는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다. 5000년 우리나라 역사가 응축돼서 발현된 것이다. 젊은 세대는 열등감이 없어서 멋지다. 그들을 통해 세계가 한국 문화의 특수성을 깨달아가는 것이다. 내가 1990년대 파리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유럽인들은 스시 등 일본 음식에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날생선을 먹느냐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 음식이라고 하면 너도나도 비싼 돈을 주고 사 먹는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일본이 생산한 자동차, 공산품들은 깨끗하고 편리하다. 일본을 방문하면 알 수 있듯 친절하다. 문화에는 이런 배경이 존재한다. 경제, 문화적 저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면 한류는 이뤄지지 않았다.”

문화는 교육과 직결된다.

“그렇다. 우리나라 역사는 외국의 평가에만 매달린다. 랑케는 실증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독일 사람이다. 독일은 내세울 역사가 짧다. 괴테는 독일의 후진성을 한탄하기도 했다. 문화, 역사적 바탕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역사는 정확히 확인된 사실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실증주의가 나왔다.”

역사교육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인가?

“우리는 여태껏 역사책에 외국인이 평한 고려청자 정보를 실었다. 일본 도자기의 기원은 우리나라다. 일본인들은 우리에게 도자기를 배웠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 도자기에 관해서 잘 안다. 반면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 자기 역사의 대(代)가 끊겼다. 이제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문화를 분석, 종합,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지 않고, 일본인들이 써 놓은 책, 소설을 그대로 인용하니 문제다. 소위 거물급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학자들이 미술평의회 같은 자리에서 ‘우리 예술미의 정체성은 편안하고 소박하고 해학적이어서 긴장감이 없다’는 말을 하더라. 예술품엔 예술가의 자아가 가장 극명하게 표출된다.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것은 당연하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관에 비춰 각자 해석을 만들어낸다. 저마다 다른 부분에서 감동을 받는 것이다.”

우리 학계의 미학적 관점이 일본의 영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의 어느 학자는 ‘한 가지의 기술을 수십 년 수련하면 고려자기처럼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같은 일을 반복한 사람의 실력에는 한계가 있다. 가령, 도예가는 자신의 조그마한 공간에서 도자기 만드는 일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세계와 소통할 일이 적다. 예를 들어 로열 코펜하겐, 마이센은 도공예에 의해서 탄생하지 않았다. 화학자·건축가·물리학자 등 타 분야에서 온 사람들이 이 분야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창의적인 고민 속에서 나온 것이야말로 독특하면서 독자적일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 완성도가 자연스럽게 높아진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2. 고려청자 복원은 민족문화의 재생 | “자율성 품은 세종시대 분청사기도 연구 대상”


▎1961년 파리에서 열린 결혼식 때의 조상권(사진 왼쪽). 당시 27세였다. 그리고 83세인 2019년의 조상권(사진 오른쪽).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지만 품격은 그대로다.
조상권은 1936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큰 부자였던 부친 조소수(1988년 작고)는 어린 그를 일본으로 보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다시 일본에 유학을 갔다. 아버지 조소수는 한국전쟁의 혼란에서 큰 아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조상권은 일본이 싫었다. 일본의 겉 다르고 속 다름은 솔직하지 못함으로 여겨졌고, 일사분란함은 자유분방한 기질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가장 따랐던 외할머니의 영향이 컸다. 외할머니는 독립운동가에게 시집을 갔다. 외할아버지는 일본 헌병대와 총격전 도중 사망했다.

조상권은 전 세계를 떠돌았다. 역설적으로 방랑이 그를 더 진한 민족주의자로 만들었다. 그는 좌파, 우파 같은 이념에 무심했다. 그에게는 ‘민족’이 중요한 개념이었다. 고려청자의 복원에 그토록 천착하는 이유도 민족을 대입할 때 이해될 수 있다.

고려청자는 어쩌다 명맥이 끊어졌을까?

“고려는 몽골에 침략을 당한 뒤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려 말기에 좋은 청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 현상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로 옮겨가며 고려에서 만들어오던 것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그 이후 세종시대가 시작됐다. 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찬란해졌다. 세종시대에 분청사기가 나왔다. 그 유래가 있다. 고려청자에 숙련된 사람들은 그에 관한 규율·질서에 사로잡혀서 자기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고려의 쇠퇴 이후 분위기가) 자유로워지니까 자유분방한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온 것이 분청사기다. 분청은 고려자기와 또 다르다. 유럽에서도 예술가의 자아가 분명히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 1400년대 도래된 르네상스 시대였다. 세종시대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분청을 만든 사람들은 예술관을 발전시켜 추상의 세계까지 나아갔다. 서양에서 추상의 세계는 근대에서나 나타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고려청자에서 못다 이룬 꿈을 분청에서 발휘했다. 만약 우리가 국제 교류에 제대로 대응했다면 조선시대의 분청사기가 세계 미술사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다. 실제 영국 도예가 버나드 리치가 분청을 그대로 베낀 것과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분청에서 추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도자기에 새긴 그림이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었다. 추상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은 난해하다. 설명을 들어야 이해가 간다. 보는 것만으로 느낌을 받기 어렵다. 그러나 구상과 추상이 어우러진 그림들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최대로 자극한다. 그래서 감명을 준다. 분청이 지니는 가치다.”

고려청자의 복원을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12세기 초가 고려청자의 전성기다. 그때 고려청자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흙과 유약이 어우러져서 나오는 오묘한 푸른색, 비색이다. 문화·예술을 보존하는 데는 돈·끈기·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선진국과는 다른 상황이다. 예술을 애호하는 독지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공공기관이나 문화재단에서 해줘야 하는데 가시적 성과가 목전에 있다고 여겨질 때만 과감히 투자한다. 복원작업은 불확실성을 띤다. 효과가 언제 나타날지를 가장 중시하는데 이러면 안 된다.”

김일성을 설득하다


▎1967년 터진 동백림사건 관련 재판의 피고인들.
조상권은 마음 둘 곳 없었던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1960년 프랑스 파리로 자비 유학을 갔다.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했는데 프랑스로 와 건축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2년 뒤 당대 최고의 건축학 명문인 국립 보자르건축학교로 옮겼다. 1964년 본과 진학시험 제도 실기과목에서 1200명 중 1등을 했다. 5·16 쿠데타 성공 이후 프랑스를 방문한 김종필과 만나기도 했다. 1967년의 동백림 사건으로 인한 북한행이 아니었다면 “한국의 아름다움을 건축에 담겠다”는 꿈을 이루며 살았을 것이다. 이런 그가 건축에서 도예로 전업한 계기도 북한에서 비롯됐다.

북한 체류 중 김일성을 열 번 이상 만났다. 독대도 했다. 김일성은 유독 프랑스 유학생들에게 살뜰했다. 프랑스 유학파인 덩샤오핑, 저우언라이 등 중국 공산당 주축 세력에 좋은 인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에게 고려청자 복원을 직접 건의했다고 들었다.

“(내가 갔을 때만 해도) 북한에서는 도자기를 잘 몰랐다. 1971년 김일성을 만났을 때 즉흥적으로 고려청자의 재현을 건의했다. 김일성의 호응을 금방 받았다. ‘왜 청자를 재현해야 하는지에 관한 구체적 계획이 담긴 제안서를 작성하라’고 하더라. 밤새워 썼다. 당시 고려청자를 만져보지도 못했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허락이 떨어졌다.”

백지상태에서 어떻게 도자기를 배웠나?

“우치선이라는 분이 평양도자기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은 고려청자를 만들 기술력이 없었다. 당시 그는 화부로 일했는데, 내가 직접 가서 설득했다. 우리나라 문화를 되살리려는 순수한 마음을 전했다. 그쪽에서 받아들여 의기투합이 됐다. 처음 5개월은 같이 생활했다.”

실제 고려청자에 얼마나 접근했나?

“‘청자가 이런 거구나’ 하는 수준까지 갔다. 내가 탈북한 뒤, 그와는 당연히 연락이 끊어졌다.”

지금 이곳 작업실은 고려청자 복원이 가능한 수준인가?

“(판매용 도자기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청자를 집중적으로 복원하고 있지는 않다. 고려청자 복원은 사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청자의 기원인) 중국 송나라 시대 서적 같은 기록을 살피는 역사학자·교육자·과학자·재료공학자들 등 각 분야 사람들이 동원돼야 한다.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이 갖춰져 하나의 박물관·체험장이 돼야 한다. 관광객들이 한국에 왔을 때, 역사적 사실에 대해 교육 시킬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고려청자와 한류 관광을 연계할 수 있다?

“고려청자의 재현을 위해선 당시와 똑같은 조건을 필수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한번 해놓으면, 관광 수입의 확보가 가능하다. 옛날 방식으로 고려청자를 만드는 공간을 갖추면 세계 사람들에게 내놓을 수 있다. 이것을 보면서 중국 청자와 고려청자의 차이점, 고려청자가 왜 아름다운지 등을 실제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다. 서둘러야 한다. 도자기에 평생을 몸담았던 사람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조상권은 고려 문화에 애정을 기울인다. 청자뿐 아니라 금속활자, 접선(부채), 고려 불화(佛畵)에 관심이 걸쳐 있다. 그는 “고려는 타 문화를 받아들이는 자세와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능력, 모두가 뛰어났다. 청자를 보면 고려인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감각이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고려만의 멋이 있다”고 평했다.

근본적인 질문이다. 왜 고려청자를 복원해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가 전통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고려 문화가 핵심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예술은 우연히 태어나는 법이 없다. 혼자서 태어나는 법도 없다. 반드시 사회·경제·역사·문화에 걸친 수준에 정비례해서 나타난다. 고려청자의 아름다움도 사회적 배경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단순하게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다시 세상에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려의 시대상을 재조명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송나라에서 청자가 처음 만들어졌다. 그 이후 고려로 흘러들어 갔다. 고려문화는 모방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려인들은 송나라의 청자를 어떻게 변화, 발전, 승화시킬 수 있는지를 알았다. 우리도 고려의 정신으로 들어가서 재현하는 방법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은 과학이 발전했기 때문에 색 재현은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고려 사람들이 외국 문화를 어떻게 자기 것으로 흡수했는지,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전반적으로 살펴야 한다.”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자신감을 찾는 것


▎조상권의 예술혼은 이념을 초월한다. 도자기가 남과 북의 문화교류로 이어지기를 꿈꾼다.
이 작업이 세계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후대에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 것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에 관한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행위를 국수주의로 매도한다. 하지만 (정치적 민족주의, 국수주의와) 전혀 무관하다.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을 떠나서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가 번영하기 위해선 자기만의 특성이 필요하다. 특성이 없으면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여기서 경쟁력이 생기게 된다. 그 나라만의 개성을 얼마만큼 발휘하느냐에 따라 ‘문화경제’의 시대에서 생존력을 지니게 된다. 이것을 국수주의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창작, 창조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구체적으로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나?

“첫째, 중국 사람들이 만들어내지 못한 비색(고려청자에 비치는 푸른빛)이다. 중국 청자의 유약은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두껍다. 고려청자의 유약은 보일까 말까 한 정도다. 중국 청자 색깔은 유약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구워서 못마땅하면 다시 굽고, 두 번 세 번을 구운 것이 많다. 그렇다고 고려청자가 중국 청자보다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 청자도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닌다. 고려청자는 옅은 유약에서 드러나는 자기만의 색이 뚜렷하다. 고려청자를 감상할 때, 가까이에서 보기보다 5~6m 떨어져서 볼 때 오묘한 기운을 잘 느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둘째,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다. 상감기법은 사실 신라시대 도자기에 도입됐다. 이 기법은 표면을 칼로 긁어서 그 속에 흙을 담는 방식이다. 이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한 뒤 깨끗하게 긁어내고 본래 청자의 청색에 원색과 희색을 넣은 뒤 문양을 만든 것이다. 고려청자에서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청자에서는 이 기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중국 청자는 수십 번 덧칠한 뒤 만들어졌기 때문에 속의 색이 겉으로 나타날 수 없다.

셋째, 선각이다. 선만 이용한 조각 기법이다. 돌출된 부분의 색은 희미해지고, 파인 부분은 진해진 결과로 고려청자의 오묘함이 탄생하게 됐다. 돌출 부분의 유약이 흘러 파인 부분에 고이면서 은은하게 표현되는 것은 고려청자에서만 가능한 아름다움이다.

넷째, 박지기법이다. 그리스 도자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상감을 칠한 뒤 문양을 그대로 두고 바탕을 긁는 것이다. 상감기법과 박지기법을 혼용해서 도자기를 만들 수도 있다. 고려청자가 독특함을 갖게 된 요인 중 하나다.

이 네 가지 기법을 도자기에 모두 도입한 것이다. 그만큼 고려 사람들의 독창성은 어마어마했다. 우리가 고려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본받기 바란다. 앞으로 이런 시대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아름다움을 안다는 것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고려청자를 통해 우리의 민족 자신감을 찾아야 한다. 고려청자를 빨리 구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석굴암이 왜 아름다운지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고려청자의 네 가지 기법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걸 못하니까 애초에 교육부터 잘못된 것이다.”

3. 북한 향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눈길 | “도자기, 고고학은 북한과 협업 가능한 공간”

독일은 우리보다 먼저 통일을 이뤘다. 우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나는 독일에서 어학을 배웠다. 1969년 9개월간 유학을 갔다. 서독 쾰른 지역의 강습소에서 언어를 배웠다. 여강사였는데 교육·의학 등 동독의 장점에 대해 말했다. 그때 나는 ‘독일은 이미 통일이 됐구나’라고 느꼈다. 당시 독일에는 소련군이 주둔해 있었고, 베를린 장벽이 굳건했다. 살벌한 시대였다. 그럼에도 상대의 장점을 인정했다.”

우리도 가능할까?

“북한과 대화해야 한다. 덮어둘 건 덮어두고 서서히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난제는 뒤로 돌리고 나아가야 한다. 제도적으로 북한에 안전 보장을 해줘서 무력으로 북한을 해치는 일은 없겠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면 긴장관계가 조금씩 풀릴 것이다. 인권문제부터 들먹이면 역효과가 난다. 허물만 꺼내면 서로 다치는 수밖에 없다. 배가 조금은 불러야 반항심도 잦아든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 다각도에서 협력을 취하려고 한다. 고려청자 복원에 관한 합작이 촉매제가 될 수 있을 듯한데.

“지금 북한과 교류해서 얻을 것이 별로 없긴 하다. 그럴수록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남북관계를 주도, 발전시켜 나가면 좋을 것이다. (고려청자 복원에 관한 협업을 추진하기에) 지금이 때가 참 좋은 것 같다. 청자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서로 대화,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례로 고고학에서 북한은 미개발 상태다. 공동 발굴 작업을 펼쳐야 한다.”

북한에서 고구려 사신도를 직접 봤나?

“강서고분이라고 황해도에 있다. 1970년대 초에 봤다. 그때 내가 북한 측에 ‘사신도를 외부에 공개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면 벽화가 손상될 위험이 컸다. 이후 북한이 출입통제 구역으로 지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과 북한은 역사관이 다르다. 가령 한국이 신라 위주라면 북한은 고구려가 중심이다.

“상관없다. 평양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새로이 탐구해도 좋다. 지금은 자료를 같이 쌓아가는 게 중요하다. 판단은 후예들한테 맡기면 된다.”

직접 만나본 조상권에게선 이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조국에 대한 애틋함을 지닌 예술가였다. 그러나 순수함으로 돌파하기에는 그의 시대는 엄혹했다. 1963년 북한에 경도된 선배 유학생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에 간 순간, 삶은 굴절됐고 갈수록 비틀렸다. 방북, 조선노동당 가입으로 선을 넘어가자, 돌이킬 수 없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이 터지고 북한에 갔다.

막내동생 조태권 광주요 회장의 도움과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의 전신)의 개입으로 1997년 한국에 돌아왔다. 그의 곁에는 1961년 결혼한 아내 상현숙(2005년 작고)뿐이었다. 1962년생 아들 성호(김책공대 졸업), 65년생 딸 성연(김일성대 졸업) 그리고 며느리와 사위·손자들은 북에 남았다.

“아이들을 북한에서 구출해달라”는 조상권의 귀순 조건을 안기부는 못 들어줬다. 1년 반 동안 안기부 조사를 받은 뒤 조태권 회장이 마련해준 광주요도자문화재단에 은거해 지금에 이르렀다.

자식·손자의 생사는 알 길이 없다. 그 죄책감에 지금도 밤에 악몽을 꾼다. 그 여한을 예술혼에 담고 산다. 조상권은 의도적으로 북한에 관한 말을 아꼈다. 감당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고려청자의 복원과 북한과의 문화 교류는 민족애의 표출이다. 그 끄트머리에는 가족애가 있었다. 삶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함과 동시에 버티는 것 자체일 수 있음을 그의 인생사가 말해주고 있다.

- 글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201902호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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