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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역사의 창고 ‘만철(남만주 철도)’을 찾아서 

‘문재인의 동아시아 철도공동체’ 앞에 만철의 불편한 진실이 버티고 있다 

다롄·선양·창춘·하얼빈(중국)=글·사진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식민지 시대의 철도는 이중적, 수탈 도구와 근대화 접촉 창구 ‘실사구시의 상상력’으로 국제 철도망 경영한 만철의 기억을 해부해야 만철의 상징인 초특급 기관차 ‘아시아’호를 한국 언론 최초로 실물공개한다

▎만철의 상징 ‘아시아’-. 1934년 운행 시작, 최대 속도 130㎞. 지름 2m 거대 바퀴에다 증기기관차에 짙은 색감의 유선형 덮개를 씌웠다. 일본어 명판 [‘アジア(아지아) 757’]이 달려 있다. / 사진:박보균 대기자
만철(滿鐵)은 낯설다. 만주국은 거북하다. 그 말들은 거부감을 일으킨다. 제국 일본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만철은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의 약칭이다. 식민지배의 영악한 장치였다. 하지만 만철은 역사의 창고다. 그 속에 20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내막이 있다. 만철을 생략하면 역사 기술의 생동감을 잃는다.

만철은 만주의 광활한 철길을 달렸다. 만주는 지금 중국의 동북3성이다. 만철은 한반도 철도(조선총독부 철도망)와 중국 대륙으로 이어졌다. 일본 본토는 바다로 연결됐다. 그 철길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다가갔다. 그것으로 유럽행 국제 철도망이 짜였다. 만철은 그 네트워크를 주도했다. 초특급 열차 ‘아시아’호는 그것의 상징이다. 나는 만철을 추적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야망은 ‘동북아 철도 공동체’다. 공동체는 남북한, 중국, 러시아, 몽골, 일본, 미국 7개국이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그 프로젝트는 경제성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선 일본이 들어와야 한다. 일본은 과거 이런 철도를 운영해 왔다”고 했다. 그것은 만철의 경험이다. 만철의 역사는 불편한 진실이다. 하지만 만철의 유산을 우회할 수 없다.

대륙행 철길은 식민지 조선의 삶 속에 편입됐다.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때다.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는 그 열차를 탔다. 여객선의 뱃길이 아니다. 조선총독부 철도→만철→시베리아 횡단철도로 갔다. 1927년 나혜석은 그 철길 위에 있었다. 그는 최초 여성 서양화가다. 그 여행길은 유라시아(유럽+아시아) 철도의 원형이다. 나는 만철을 찾아야 한다.

그 시대 동아시아 철길은 이중적이다. 강대국의 식민 지배 통로다. 식민지 수탈의 수송 도구다. 다른 쪽은 근대로 가는 문이다. 새로운 세계와 접촉하는 이동 수단이다. 조선의 지식인·독립운동가·문인·예술인은 그런 양면성에 고뇌했다.

만철은 러일전쟁 때 일본 승리의 전리품


▎지난 100년의 기관차 40여 대를 전시한 초대형 실내 박물관 ‘심양 철로 진열관’ 입구. / 사진:박보균 대기자
만주는 어떤 곳인가. 만주국은 어떤 나라였나. 1932년 만주국이 세워졌다. 만주는 중국과 분리됐다. 1945년 그 나라는 일본 패망과 함께 사라졌다(13년5개월 존속). “만주는 한국에선 잊힌 전설의 공간이다. 하지만 만주국은 동아시아 현재를 푸는 역사의 블랙박스다.”([만주 모던], 한석정 동아대 총장) 만철은 블랙박스를 여는 열쇠다.

만철의 싱크탱크가 있었다. ‘만철 조사부’다. 거기에 일본 엘리트들이 모였다. 그 기관은 만철 경영과 식민지배의 전략과 정보를 생산했다. 만주국의 국가 운영 실험에 나섰다. 만철의 운영기간은 39년이다.

나는 만철을 해부해야 한다. 출발점은 그것에 익숙해지기다. 만주 철도망은 제정(帝政)러시아의 야심 속에서 짜였다. 계기는 청일전쟁 이후 삼국 간섭이다. 그 대가로 청나라(중국)로부터 동청(東淸) 철도부설권을 얻었다. 노선 디자인은 장대하다. 청나라 동쪽 만주대륙의 북부를 비스듬히 횡단한다. 동청 본선(간선)은 만저우리(滿洲里·만주리)~하얼빈~쑤이펀허(綏芬河·수분하)다. 철길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동쪽)와 치타(Чита·서쪽) 양쪽으로 뻗는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역들이다. 동청 철길은 하얼빈에서 아래쪽으로도 뻗는다. 남쪽 지선(支線)이다. 하얼빈~신경~봉천~대련이다.

동청 철도 완공(1903년 7월) 직후 러일전쟁(1904~05)이 터졌다. 러시아의 패배는 의외였다. 러시아는 뤼순·다롄의 조차권을 일본에 넘겼다. 조차(租借)는 일정 기간 식민지다. 러시아는 철도 일부도 포기했다. 동청의 남쪽 지선 중에서 창춘~봉천~대련이다. 승전국 일본은 철로 경영에 나섰다. 1906년 11월 회사 설립. 영업개시일은 1907년 4월이다. 남만주철도 주식회사(만철)의 탄생이다.

의왕 철도박물관에서 포착한 만철의 흔적


▎의왕 철도박물관. (왼쪽부터) 히카리·노조미·아카쓰키·흥아·대륙 호 속도표. 만철 로고가 새겨진 동판과 휘장.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의 전용 객차(1927년 일제시대 제작). / 사진:박보균 대기자
경기도 의왕 철도박물관(1988년 개관), 그곳은 만철 추적의 예비 코스다. 박물관 중앙 홀은 한국 철도의 개막을 담았다. 경인철도 기공식 사진이 한쪽 벽을 장식한다. 1899년 9월 18일 그 노선(제물포~노량진 33㎞)이 개통됐다. 2층 전시물에 열차 명판이 붙어 있다. ‘파시, 미카, 혀기, 터우, 푸러, 소리’. 기관차 유형이다. 미카는 미카도(みかど·천황)에서 따왔다. 동판은 기관차 앞과 옆에 부착했다. 차량 제작의 장소·시기를 넣은 60여 개 철판·동판도 있다. ‘만철 철도공장 昭和(소화) 10년’, ‘大連(다롄)철도공장 소화 10년’이라고 적혀 있다. 소화는 히로히토 일왕의 연호다. (소화 10년은 1935년) 그 동판 가운데 만철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만철의 이름과 표식이 내게 포착됐다.

그 옆 전시물은 ‘철도 휘장의 변천’이다. 거기서 한국철도 120년의 파란과 곡절이 실감난다. 대한제국 말기~한일강제병합~조선총독부(1910~45. 8. 15)~미군정~대한민국까지다. 통감부, 조선총독부 철도국 마크가 있다. 휘장 중에 ‘만철경성관리국’(1917. 7. 31~1925. 3. 31)이 보인다. 만철 글자가 다시 내 눈에 잡혔다. 그 기간에 만철은 한반도 철도를 위탁 관리·경영했다. 만철은 그렇게 우리 역사에 깊숙이 전개했다.

대형 도표가 눈길을 끈다. ‘열차 속도의 변천’이다. 최초 경인선(모갈형 기관차)부터 2010년 3월 경부선(KTX 산천)까지다. 도표는 나를 복잡한 감상에 빠뜨린다. 1933년 4월 열차 ‘히카리’가 있었다. 노선은 부산~봉천(지금의 선양)이다. 소요 시간은 17시간45분, 시속 60㎞(최대 90㎞). 그 아래 노조미, 대륙·흥아호(부산~중국). ‘히카리, 노조미, 흥아, 대륙’. 그 시대에 한반도는 국제열차의 왕성한 무대였다.

도표는 허탈감을 준다. 지금 북한 철도의 형편없는 사정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경의선(서울~개성~평양~신의주) 특급의 평균시속은 60㎞. 지금 개성~평양 구간은 시속 20㎞(2018년 11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설명)다. 그것은 마라토너 이봉주 수준이다. 역사의 부끄러운 후퇴다.

남북 철도를 연결해야 한다. 남북 협력의 소명의식은 절실하다. 하지만 과거 노하우를 낚아채야 한다. 그 지혜는 미래의 시행착오를 차단한다. 만철의 드라마는 외면할 수 없다.

나는 중국 다롄으로 떠났다. 2018년 늦가을이다. 인천공항에서 비행시간 1시간20분. 그곳에 만철의 심장부가 남아 있다. 나는 그곳부터 추적했다. ‘만철 39년’을 압축한 박물관이다. 이름은 ‘남만주철도 주식회사 구지(舊址) 진열관’. 옛 만철 본사다. 다롄역에서 택시로 15분 거리다.

목적지에서 화보집을 꺼냈다. [滿鐵-滿洲の巨人(만철- 만주의 거인)](니시자와 야스히코, 西澤泰彦 지음)이다. 표지는 80년 전 만철 건물 사진이다. 나는 비교했다. 르네상스식 석조 3층 건물은 그대로다. 만철 깃발만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낯선 놀라움이다.

다롄은 미묘하다. 중국은 제국 일본의 중국 침략을 통분한다. 하지만 그 시대 유산을 남겨둔다. 만철 본부 건물도 살아있다. 박물관 옆도 옛 만철 건물들이다. 다롄 철도국에서 쓰고 있다. 안내원은 나의 예약 신원을 확인했다. 진열관 2층에 만철 총재의 집무실이 있다. 안내원은 “만철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러 군데 복원했다”고 했다. 테이블, 의자, 실 내용 깃발, 역대 만철 총재(사장포함) 사진, 전화, 그림, 노선 지도(일부 복제)가 그 시절 그대로다. 방은 호화롭지 않다(46㎡). 실무적인 분위기다. 두 명의 인물 사진이 걸려 있다. 일본군 참모총장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郎)와 초대 만철 총재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다. 둘은 만철의 창업공신이다. 고다마는 러일전쟁 때 현지 참모장이었다. 전쟁 승리로 만주의 이권이 쏟아졌다. 러시아가 넘긴 것들이다. 만주경영위원회가 생겼다. 고다마는 위원장을 맡았다.

둘의 인연은 고다마의 타이완(臺灣) 총독 때다. 고다마는 내무성 위생국장 고토를 총독부 핵심부서(민정장관)에 발탁했다. 고토는 타이완 식민정책을 총괄했다. 강압과 회유, 협박과 포섭을 섞었다. 그것으로 식민 통치의 기반을 다졌다.

만철 총재 고토 신페이는 식민지 경영의 책사


▎다롄 만철 본부 건물은 110년 전 그대로다. 만철 깃발만 달리지 않았다. 중국은 제국 일본의 유산을 없애지 않는다.
고다마는 고토의 그런 수완을 높이 샀다. 만철 경영의 지휘자로 삼았다. 1906년 11월 고토는 만철 총재로 취임했다. 고토의 만철 경영은 타이완 경험의 확대·재구성이다. 전시물은 고토의 그런 면모를 압축해 설명한다. “고다마는 고토가 작성한 만철 경영책 경개(梗槪, 줄거리)를 수용했다.” 줄거리는 고토의 ‘문장적무비(文裝的武備)’([만철-만주의 거인])다. “문으로 치장해 무에 대비한다.” 그 언어는 절묘한 대칭과 조화다.

전시물에 만철의 본질을 실감나게 폭로한다. “고토 신페이가 제출한 식민정책은 ‘擧王道之旗 行覇道之術(거왕도지기 행패도지술, 왕도의 깃발을 세우고 패도의 술책을 행한다)’이다. 일본 정부를 대신해 만주를 경영한다. 철로 경영을 수단으로 대륙정책을 실행한다. 경제를 발전시키고 식민지 교육·위생 사업으로 인심(人心)을 정복하며 잠재적으로 군비(軍備)를 구성한다.” 고토의 ‘문사와 과학’은 만철조사부 설치로 발전한다.

왕도와 패도, 문무(文武)의 병행. 그 이중적 술수는 만철의 숨겨진 정체성이다. “문사적 요소를 구사해야만 식민지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외경(畏敬)심이 생겨난다.”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 저서 [満鉄-知の集団の誕生と死(만철-지의 집단 탄생과 소멸)]]


▎중국이 복원한 다롄시 만철 본부의 총재실(다롄 만철 진열관 내부), 아래는 만철 초대 총재 고토 신페이(왼쪽)와 일본육군 참모총장 고다마 겐타로.


만철의 수탈 양상은 식민지 한국과 비슷


▎호텔 2층 커피숍에 불은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 사진.1907년 그는 만철을 찾았다. / 사진:박보균 대기자
고토(1857~1929)는 누구인가. 그는 의사다. 그는 지방(아이치현) 병원장을 지냈다. 만철 총재 이후 내각 체신대신(겸직 철도원총재)·외무대신·도쿄시장을 맡았다. 그는 식민지 경영의 책사(策士)로 통한다.

고토는 ‘지정학(地政學)’에 심취했다. 그의 시각은 도발적이다. 일본은 섬나라다. 하지만 그의 욕망은 대륙국가로의 재구성이다. 수단은 만주로 가는 철도망 장악이다.

만철의 모델은 영국의 ‘동인도 회사’다. 주식회사에 의한 식민경영이다. 철도 외에 탄광(푸순)·제철(안산)·해운·도시 교통·항공사업을 했다. 철도 부속지(특별 역세권) 점거는 만철 경영의 묘수다. 거기엔 중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했다. 조차지처럼 만철이 일반 행정권을 가졌다. 관동주와 함께 일본의 거점이었다. 만철은 부속지에 병원·학교(소학교 47개, 의과대학)·도서관을 지었다. 다롄·선양·창춘에 호텔(大和, 야마토)을 운영했다. 영화제작, 스포츠 팀도 있었다. 신문사(다롄일일신문)도 경영했다. 전성기의 평판은 만철왕국이었다. ‘자본금=일본 제국 예산의 절반, 철도 총길이=1만㎞, 사원=40만, 만주에 군림한 거대 기업집단([만철-만주의 거인])’이었다. 만철의 부속지 모델은 조선 철도에 적용됐다. 용산병원·철도호텔(현 조선호텔)·학교·도서관이 세워졌다.

총재실 벽에 17명의 총재(사장) 사진이 걸렸다. 14대 총재인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石)는 외교관 출신. 외무대신 시절 베를린에서 히틀러를 만났다. 삼국(일·독·이탈리아) 방공(防共) 협정을 맺었다. 1941년 4월 모스크바에서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했다. 그 요란스러운 행적은 전쟁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나는 전시실에 들어갔다. 크지 않지만 압축적이다. 제목은 ‘만철역사 도편전(圖片展)’. 1부는 ‘만철 설립과 임무’다. 전쟁과 만철의 관계가 적혀 있다. 벽과 천장·출입문 만철 문양이다. 만철의 유품이 진열돼 있다. 완장, 벽걸이 시계, 소화전, 지도, 전등, 열쇠. 온도계, 필기용품, 선전물, 식기류, 달력 등 200여 점. 만철 로고가 찍혀 있다. 만철의 상징은 ‘아시아호’다. 그 기관차 사진 10여 장이 주제별로 붙어 있다.

‘만철의 착취’ 전시물은 분노를 낳는다. “만철의 철도 돈벌이에 중국인 노동자의 피와 눈물이 있다. 철도 건설에 반발과 저항이 거세졌다.” 양상은 비슷했다. 정재정 교수의 해설이다. “한국 철도는 일본의 침략 도구로 부설했다. 한국인의 토지와 노동력을 빼앗았다. 한국인은 철도를 문명의 이기(利器)가 아니라 수탈의 흉기로 여겼다.”([철도와 근대 서울]) 경부선 부설은 침탈의 원형이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중산(中山)광장으로 갔다. 광장은 러시아의 점령 시절 꾸며졌다. 유럽 분위기가 퍼진다. 광장 지하철 밖으로 일본인 친구 무토 다카시(59)가 나온다. 그는 다롄에서 무역업을 한다. 젊은 시절에 다롄의 근대건축 조사에 참여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만철 출신이다. 이제부터 그와 역사 동행을 한다.

우리는 광장 건너로 갔다. 만철의 옛 야마토 호텔 건물(4층)에 들어갔다. 바로크 양식 외관은 그대로다. 입구 위쪽에 ‘大連賓館(대련빈관)’이라고 씌어 있다. 2018년 겨울 현재 내부 수리 중. 2층 커피숍만 운영한다. 그 방에 인물사진이 시선을 잡는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다.

그는 일본 문학의 최고봉이다. 일본 1000엔 지폐(1984~2004)의 인물이다. 어떤 인연일까. 무토는 그 사연을 이야기했다. 나쓰메는 만철의 2대 총재(나카무라 고레미키)의 동경제대·고교 친구다. 그 인연으로 만주 초청을 받았다. 1909년 9월 만철 출범 2년 뒤다. 42일간 만주와 조선을 다녔다. 귀국 후 [満韓ところどころ(만주·한국 여기저기)] 여행기를 썼다. 무토는 “그 책에 중국인 쿨리(苦力)와 인력거를 끄는 조선인에 대한 시각이 경멸조여서 부담스럽다”고 했다.

안중근 불멸의 거사는 ‘동청철길’에서 이뤄진다


▎만철이 경영한 다롄의 야마토 호텔 현재 모습(오른쪽). 앞쪽 중산광장은 동상(관동도독 오시마 대장)만 철거되고 기본 디자인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다롄 항구로 갔다. 다롄 옆이 뤼순이다.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은 순국했다. 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은 불멸의 거사다. 이토는 제국 일본의 간판. 조선 침략의 교활한 주역이다. 나는 안중근의 철길을 그렸다. 거사 장소는 하얼빈 역전. 이토의 만주 이동은 다롄에서 시작했다.

1909년 일본은 한국 강탈에 나섰다. 그 무렵 만철 총재 고토는 체신대신이었다. 고토는 러시아와의 제휴, 강제 합병을 위한 담판을 건의한다. 이토는 그 방책을 수용했다. 담판 대상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 그해 10월 코코프체프 일정에 하얼빈 방문이 있었다.

이토는 도쿄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쳤다. 그곳은 메이지유신의 본거지 조슈(長州)다. 지금의 야마구치(山口)현. 이토는 조슈 번(藩)의 기둥이다. 그는 막부(幕府) 말기의 풍운아 다카스키 신사쿠(高衫晋作)의 기념비를 썼다. “움직일 때는 번개(雷電), 일어설 때는 비바람(風雨) 같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다카스키 신사쿠를 존경한다. 2014년 7월 아베는 그의 새 동상 제막식에 참석했다. 아베 이름의 ‘신’은 신사쿠의 ‘신’에서 따왔다.

이토는 모지(門司)항에서 배를 탔다. 서해를 지나 10월 18일 다롄에 도착했다. 안중근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다. 이토의 하얼빈 방문 계획이 신문에 보도됐다. ‘하얼빈 열하루’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했다(10월 21일). 22일 밤에 동청 철도 중심역 하얼빈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우스리스크→포그라니치니(이상 러시아)→쑤이펀허→무단장(牧丹江·목단강)→하얼빈(이상 만주)이다. 국경 지방인 포그라니치니에서 유동하가 합세했다. 쑤이펀허는 헤이룽장성 동쪽 끝이다. 2019년 안중근의 철길은 ‘프리모리에 1호 구간’이다. 그것은 러시아·중국의 종합 물류협력 프로젝트다.

이토는 다롄에서 만철을 탔다. 25일 관성자(寬城子, 옛 창춘)에 도착했다. 창춘(長春·장춘)에 러시아의 특별열차가 대기했다. 레일 폭이 달라졌다. 만철은 표준궤(1435㎜). 창춘부터 러시아의 광궤(廣軌·1520㎜)다. 10월 25일 밤 11시. 이토의 특별열차가 떠났다. 아침 9시 열차는 목적지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코코프체프가 객차 안에 들어갔다. 20분 후 이토가 내렸다. 의장대 사열을 받았다. 9시30분 안중근은 결행했다. 그의 권총은 불을 뿜었다. 이토는 쓰러졌다. 안중근의 ‘이등박문 포살(捕殺)작전’은 완벽했다.

다음 날 나는 만철의 상징을 찾아 나섰다. 그것은 초특급 열차 ‘아시아’다. 그 기관차가 보존·전시된 박물관이 있다. ‘선양 철로 진열관’이다. 나는 다롄 역에서 고속철(2시간 소요)을 탔다. 일본인 친구와 동행했다. 중국은 고속철 왕국이다. 우리는 열차 안에서 자료와 사진을 교환·공유했다. 아시아호는 1934년 운행을 시작했다. 만주국 설립 2년 뒤다. 노선은 다롄에서 신경(新京)까지다. 창춘은 수도로 격상됐다. 이름도 신경으로 바꿨다. 관련 책들은 아시아호의 빛바랜 옛 사진으로 장식한다. ‘만철의 영화(榮華), 환상(幻想)의 초특급, 다롄~신경(701.4㎞) 8시간 30분에 주파. 만철 기술의 개가(凱歌)다.’ ([만철과 만주제국의 환영] 역사로망)

만철 시절의 선양(瀋陽·심양)역은 봉천(奉天·펭톈)역이다. ‘선양 철로 진열관’은 도시 외곽 쑤자툰(蘇家屯·소가둔)에 있다. 역에서 택시로 1시간쯤이다. 우리는 다소 긴장했다. 2017년 중반까지 외국인은 관람하지 못했다. 이젠 입장료와 간단한 신분 확인 후 들어간다.

직사각형 실내 박물관은 엄청나다(건축면적 1만9000㎡). 옛 기관차가 진열돼 있다. 42대의 육중한 물체가 도열해 있다(증기 15대+디젤 11대+전기 2대+화물차 12량+객차 2량). 어떤 것은 괴물 같다. 1907년형 미국제 증기기관차(PL 1형)부터 일본·체코·독일·러시아, 중국 첫 고속철 ‘허세(和諧·화해)호’까지다. 중국 디젤 기관차 동방홍(東方紅)은 중간쯤에 있다. 열차는 20세기 중국 역사의 고통과 감격, 영욕(榮辱)을 담고 있다.

80년 전 시속 130㎞로 대륙 누빈 ‘아시아호’는 신칸센 원조


관광객들은 압도당한다. 공간과 실물의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쪽 길이 300m쯤의 실내 전시관을 걸었다. 희귀함은 매력이다. ‘빈티지 자동차’ 전시장과 비슷하면서 다르다. 열차의 완고함, 중량감, 대중성 때문이다. 갑자기 열차가 숨 쉬는 듯하다. 나는 ‘열차 열병식’을 받는 느낌이다. 구석 쪽으로 갔다. 원색의 기관차 두 대가 서 있다. 색감은 강렬하다.

하늘색과 녹색이다. 열차의 명판은 ‘アジア 757’과 ‘胜利(간자체) 751’. ‘아시아’와 ‘승리’다(Asia의 일본 표기는 아지아 アジア). 아시아는 파시나(たパシナ·파시 7)형이다. 파시는 퍼시픽(pacific)의 일본식 영어 줄임, 나(ナ) 는 나나(일곱)다. ‘파시 나’의 중국 형식이 ‘승리 7’.

아시아는 유선형이다. 짙은 색감의 덮개 덕분이다. 검은색의 투박한 물체는 가려졌다. 산뜻했지만 위압적이다. 지름 2m 거대 바퀴 때문이다. ‘아시아 757’의 간단한 안내문은 힘 있다. “1934년 일본 가와사키(川崎) 중공업 제조, 길이 25.675m, 속도 130㎞/h, 중량 119.2t, 1981년 퇴역.” 파시나 형 기관차는 객차 일곱 량을 끈다(전체 길이 174m). 승객 정원은 276명. ‘승리 751’ 은 1934년 만철의 대련 공장에서 만들었다.

무토는 상기된 표정이다. “최고 시속 130㎞는 그 시절 세계 수준을 능가했다.” 아시아호의 돌파력은 뚜렷했다. 만주에서 유라시아로 가는 길을 단축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나의 할아버지는 만철의 신쿄(신경)에서 근무했다. 그곳을 ‘창춘’이라고 부르지 않으셨다. 그것은 아시아호의 자부심 때문인 듯했다. 아시아호는 객차에 에어컨을 달았다. 철도 서비스의 놀라운 혁신이었다. 객차에서 만주대륙의 벌판이 눈에 들어왔다.” 패전 후 만철의 노하우는 일본 철도로 전수된다. 그것은 신칸센(新幹線) 기술의 바탕이다. 1964년 10월 신칸센은 세계 최초의 고속철로 등장했다.

만주 땅은 이미 한국인의 삶에 들어와 있었다. 1911년 11월 한반도 철길은 만철과 연결된다. 압록강 철교가 세워진 덕분이다. 만주의 안봉선(安奉線, 안둥~봉천) 레일이 표준궤로 바뀌었다. 안둥(安東)은 지금의 단둥(丹東). 한반도 철길은 원래 표준궤다. “이로써 한반도와 만주의 철도는 동일 궤도상에서 동일 궤간으로 접속하였다. 철도에 관한 한 국경선은 사실상 허물어졌다. 경부·경의철도는 명실공히 아시아 대륙의 간선철도가 되었다.” ([한국철도 100년사], 철도청 발간)

만주 열풍이 조선에 불었다. 아시아호는 선망의 경험이었다. 정재정 교수는 “철도의 편리함을 이길 장사는 없다. 열차가 한반도의 산하를 누비자 한국인은 왕래와 물자운반에서 열차를 이용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철도와 근대 서울])

소설가 이태준은 아시아호에 탑승했다


▎1. 선양 철로진열관의 내부 모습. 파시나 형(아시아호) 기관차 2대가 위용을 과시. / 2. 만주벌판을 누빈 아시아호의 운행 모습. / 3. 1936년 유라시아 행 열차를 갈아타고 베를린 올림픽에 참석한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장면.
아시아호의 탑승 대열에 작가 이태준도 있었다. 그는 1937년 4월 만주에 갔다. 봉천(선양)역에서 신경(창춘)행 아시아호를 탔다. 그는 식당칸에서 점심을 먹는다. “급사는 노인(露人) 소녀다. 희고 야위고 반듯한 이마가 영화 [죄와 벌]에서 본 쏘냐 같았다.”([만주기행], 이태준) 그의 깔끔한 글 솜씨는 이런 평판을 낳았다. “시는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 그는 해방 후 월북했다. 하얼빈과 신경에는 백계(白系) 러시아인이 많았다. 1917년 볼셰비키 붉은 혁명 때 망명한 러시아 사람들이다. ‘백계’는 공산주의 적군(赤軍)에 대항한 세력이다. 하얼빈은 제정 러시아의 개발도시. 유라시아의 출입구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고뇌했다. 일제의 억압 체제는 장기화했다. 그들은 탈출구를 찾았다. 그 심리에는 저항 지속과 현실 도피, 미지의 열정과 체념이 교차했다.

이효석의 단편 [합이빈(哈爾濱)]은 이국적 색채다. 합이빈은 하얼빈이다. “나는 키타이스카야 거리를 사랑한다… 합이빈의 애수(哀愁)는 겹겹으로 서러워가는 것이다… 노크를 듣고 뽀인(종업원)인 줄 알고 콧소리를 질렀더니 뜻밖에도 유라다.” 이효석의 대표작은 [메밀꽃 필 무렵]이다. 합이빈의 취향은 동방의 모스크바다. 강원도 봉평과 다르다. 철길은 문학적 감수성을 확산한다.

진열관 벽 쪽의 전시물은 수백 가지다. 전시물에 ‘위(僞·괴뢰)만철, 만철의 40년 약탈, 일본침략군 물자 수송, 철로파괴의 항일투쟁’이란 글귀가 담겨 있다. 다른 벽면은 ‘선양 철도와 항미원조(抗美援朝)’ 코너다. 중국은 6·25전쟁을 ‘항미원조(미국에 대항, 조선을 지원)’로 부른다. 전시물 설명문은 자부심을 드러낸다. “미군 전투기는 군수품 운송을 봉쇄하려고 압록강대교를 폭파했다. 철도원들은 ‘타불란 작부단(打不爛 炸不斷, 때려도 부서지지 않고 폭격해도 끊어지지 않는)’ 자세로 운송을 했다.” 압록강대교(축소 모형), 항미원조 기념 배지, 컵 수십 개가 유리관에 가득하다. 중국은 열차와 전쟁의 관계를 회상한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박물관 앞 광장에 독특한 형태의 대형 조각상이 있다. 조각상 위쪽에 달린 대형 시곗바늘은 10시40분, 2008. 8. 1이다. 중국의 첫 고속철 운행 날짜와 시간이다.

중국은 항일정신을 되새긴다. 하지만 치욕의 역사도 간직한다. 사실에 충실하려 한다. 그것을 교훈으로 삼는다. 그것은 고속철 성취의 자부심 덕분이다. 중국 ‘고속철 굴기’(거리 2만5000㎞)는 거침없다. 전 세계 고속철의 66%다.

우리는 역전 광장 건너편 호텔의 커피숍에 들어갔다. 호텔 입구에 동판이 붙어 있다. ‘奉天滿鐵 地方事務所 舊址(봉천만철 지방사무소 구지)’, 선양시 문화재다. 아마추어 역사가 무토는 “만주 최대도시 봉천(선양)의 만철은 한반도와 시베리아의 중추”라고 했다. 그는 책자를 꺼냈다. [半島の近影(반도의 근영)](조선총독부철도국, 1937)이다. 조선 관광안내 화보다.

화보집은 압축적이다. “조선 철도는 국방과 더불어 통치상 중요한 사명을 가지며, 민토(民土)의 발전, 산업의 개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반도를 종주(縱走)하는 부산~안동(安東)간 간선, 경성에서 북선(北鮮, 한반도 북쪽)으로 이어지는 경원·함경선, 어느 쪽이든 만주 철도와 이어지고 있으며 일만(日滿, 일본·만주)간 교통의 최첩경로(最捷徑路·지름길)일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를 경유해 구주(歐洲·유럽)로 통하는 국제교통의 가장 쉽고 빠른 길이다.”

그 기준과 중심은 일본 본토다. 일본의 식민 세력권(대동아공영권)이라는 개념이 깔렸다. 하지만 그 철길은 그대로다. 그것에 21세기 부가가치를 높여 활용해야 한다. 그 설명문은 ‘동북아 철도 공동체’ 의 필수 참고사항이다. 그 시대 국제교통 첩경은 지금도 적용된다.

나는 그 부분을 이렇게 정리했다. ①한반도 제1동맥=부산~경성(서울)~평양~신의주(압록강 철교)안동~봉천~신경~하얼빈~만저우리~시베리아 횡단 열차. ②한반도 제2동맥=경성~원산~남양~(두만강 도문교)~도문~길림~신경~하얼빈~만저우리~시베리아 열차.

경성역은 동북아 철도 네트워크의 허브였다


▎1. 만철 로고가 들어간 맨홀 뚜껑과 역무원 완장·검표기. / 2. 아시아호는 식당차 서비스에 러시아 여성을 투입했다. / 3. 이태준의 ‘만주기행’에 그 장면이 나온다. / 4. 1927년 한반도 열차~만철~시베리아 열차로 유럽에 갔던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부부.
다른 코스도 있다. 일본은 제3의 노선도 개발했다. 동해로 진입하는 북선(北線)루트다. 함경북도 동해안 끝쪽 나진·청진에서 시작한다. 철로(북선선)는 남양을 거쳐 만주 도문으로 들어간다. 1935년 11월 나진~신경 노선의 특급 ‘아사히(朝)’가 운행됐다. 나진·청진의 북선항에 일본 여객선이 들어왔다. 개발 목적은 일본 군대의 신속한 만주 진입이다. 주적인 러시아(당시 소련)에 맞서는 군사전략 측면이 강했다.

그 시절 북선 3항(나진·청진·웅기)에 땅 투기 바람이 불었다. 북선선 종단(縱斷)항구를 놓고 세 곳이 경쟁했다. ‘동해의 다롄’ 선정이다. 조선의 투기꾼이 몰렸다. ‘땅! 돈!’ 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조선 최초의 부동산투기 소동이다. 1932년 국제철도 종단항은 나진으로 정리됐다.

일본의 대륙 연결 여객선도 경쟁을 했다. ㉮시모노세키항→부산(관부연락선)→한반도 종관철도 ㉯모지항→만주 다롄→만철본선 ㉰일본쪽 동해 니가타(新潟)·쓰루가(敦賀)→나진·청진 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 노선이다. 관부 연락선은 한반도 핵심 종단노선과 닿는다. 속도와 안정성, 서비스 경쟁력에서 우위였다. 나가타 노선은 1960년대 제일동포의 북송 바닷길이다.

중국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도 빨라졌다. 1938년 10월 특급 열차 흥아(興亞)호가 부산~베이징(2068km)을 38시간 45분에 주파했다. 다음해 대륙(大陸)이 추가 투입됐다.

그 시절 국제철도망의 중심은 경성(서울)역이다. 사통팔달이었다. 경성은 동북아 철도의 허브였다. 경성역은 독특한 공간이다. 이상의 소설 『날개』(1936년 발표)에 나온다. “경성역 일이등 대합실 한 곁 티이룸에 들렸다. 그것은 내게는 큰 발견이었다. 거기는 우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안 온다… 여기 시계가 어느 시계보다도 정확하리라는 것이 좋았다. … 이따금 들리는 날카로운 혹은 우렁찬 기적소리가 모차르트보다도 더 가깝다.”

경성역의 역사(驛舍)는 동북아 중심에 우뚝 섰다. 그 건축미는 탁월하다. 세계 어디에 내세워도 수려(秀麗)하다(1925년 건립). “비잔틴 풍의 돔을 올린 르네상스식이다. 철도가 주된 교통수단이었던 시절 수도 서울의 관문이었다.”(의왕박물관 설명문) 지금 옛 서울역 건물은 기능 정지다. 예술전시관으로 바꿨다. 접근성은 떨어진다. 그 옆에 KTX역이 있다. 특색은 없고 평범하다. 옛 서울역의 겉 모습은 암스테르담, JR 도쿄, 프랑크푸르트 중앙역과 비슷하다. 이 중 서울역은 퇴출했다. 철도는 과거와 오늘을 접속한다. 옛 서울역 건물은 전면 재가동해야 한다. 그것은 동북아 공동체 철도 문화의 복원이다.

1927년 조선 ‘신여성’ 나혜석은 유라시아철도에 도전했다


▎제국 일본은 식민지와 대륙 경략을 위해 신속한 운송체계를 마련했다. 시모노세키·모지·니가타에서 출발하는 해상 통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는 나혜석이다. 그는 “조선 여성 처음으로 구미(歐美) 여행에 오른 여성”이 됐다. 그때 나혜석(31세)은 세 자녀의 주부였다. 나혜석의 삶은 파격이다. 그는 유교적 여성 억압 질서에 저항했다.

그의 남편(김우영)은 만주 안동현 부영사였다. 그는 변방 공관 근무의 포상(부부 해외여행)을 받았다. 유라시아 열차 여행은 선박보다 유리하다. 소요 시간·비용이 3분의 1 수준. 하지만 비싼 경비 탓에 소수의 선택이었다.

나혜석의 여행기 [구미유기(遊記)]는 잡지 ‘삼천리’(1933년 2월)에 실렸다. 나혜석은 1927년 6월 19일 부산을 출발했다. 한반도 철도 제1동맥 노선이다. 부부는 창춘역 야마토 호텔(만철 직영)에 묵었다. “정원에서 납량(納凉·피서)을 하다 시가 구경으로 때웠다.” 그 호텔은 현재 영업 중이다. 흰색 타일의 아르누보 양식은 변함없다. 이름은 춘의빈관(春誼賓館)으로 바꿨다.


▎부산~경성을 6시간45분(1936년 12월)에 주파한 특급열차 ‘아카쓰키’.
나혜석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부산서부터 신의주까지 정차장마다 백색 정복에 빨간 테두리 정모를 쓴 순사(巡査)가 번쩍이는 칼을 잡고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순한 조선인) 승강(乘降)에 주의하고 있다. 안동에서 장춘까지는 누런 복장에 약간의 붉은색을 씌운 누런 정모를 쓴 만철 지방 순사가 피스톨 가죽 주머니를 혁대에 매어 차고 이곳이 비록 중국이나 기차 연선(沿線)이 만철 관할이라는 자랑과 위엄을 보이고 있다. 장춘서 만주리(滿洲里)까지는 검은 회색 무명을 군대 군대 누며 복장으로 입고 어깨에 3등 군졸 별표를 붙이고, …일본 유신(메이지)시대에 버린 칼을 사다가 질질 길게 차고, 창검(槍劍)을 빼들고 멀건이 휴식하고 있는 중국 보병… 노서아(露西亞·러시아)관할 정차장에는 출찰구(出札口)에 종이 하나씩 매달려 있다. 그리하여 기차가 도착되면 즉시 종을 한 번 때린다. …호의로 취(取)하면 간단 명백하고 악의로 취하면 방정맞고 까부는 것 같다. 늘씬한 아라사(俄羅斯, 러시아)사람과는 도무지 조화가 되지 않는다.” 나혜석의 비교는 세밀하다. 조선 총독부 순사, 만철 순사, 중국인 철도 보병, 러시아 경비원의 특징은 대조적이다. 그들 나라의 성쇠와 행태가 드러난다.

여행기는 이어진다. “만주에서 여권 검사를 받고 기차는 소비에트 연방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창망(滄茫, 넓고 멀어 아득하다)한 광야(曠野)를 질주했다. 치파(치타)역에 도착하니 자정이 되었다. 시베리아의 ‘치타’-. 치타역의 노선과 운영방식은 지금도 같다. 그곳은 교통요지다. 시베리아 횡단 철로가 아래쪽으로도 나뉜다.

그곳에 춘원 이광수의 청년시절(22세) 삶이 있다. 그곳에서 조선 독립을 외치는 신문이 있었다. 대한인정교보(大韓人正敎報)다. 그 신문 주필(1914년 2~6월)이 이광수. 그 철길은 오래됐다(러시아, 1903년 동청철도 완공). 그 짧은 기억은 이광수의 뇌리에 자리했다. 소설 ‘유정’의 집필로 이어졌다. “시베리아 쪽으로 달리는 감상은 비길 데 없이 광막하여서 청년 나의 꿈을 자아냄이 많았다”. 공간의 경험은 인간의 상상력을 재편한다.

2011년 8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러시아 울란우데를 방문했다. 당시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문이다. 열차는 초록색 바탕에 노란색 줄이다. 2019년 1월 젊은 영도자(김정은)의 베이징 방문 열차는 그것과 비슷하다.

김정일의 출발노선은 평양~원산~나진~하산(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치타~울란우데였다. 귀국 코스는 달랐다. 북한 특별열차는 시베리아 노선을 탔다. 치타에 도착한 뒤 남쪽으로 꺾었다. 중국 국경 만저우리로 진입했다. 하얼빈에서 지린(吉林)쪽으로 갔다. 이어서 매하구~퉁화(通化)~지안(集安)을 통과했다. 만철시대의 매집(梅集)선이다. 그 노선은 ③제3의 한반도 동맥이다. 거기서 압록강 만포철교(587m 단선, 1939년 8월 준공)를 건넜다. 북한으로 넘어가 만포선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지안에 간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가 있어서다. 관광객의 다음 코스는 압록강변이다. 유람용 보트를 탄다. 강 폭은 좁다. 북한 땅은 손에 잡힐 듯하다. 북한 쪽은 피곤하고 초라하다.

2011년 러시아 방문한 김정일의 귀국 코스는 만철 시대 철길


▎1. 일본인을 위한 식민지 조선관광 화보집 「반도의 근영」 ‘히카리(ひかり’표식의 전망차와 식당차가 실려 있다. 오른쪽 사진은 ‘아카쓰키’ 1등 전망차 내부. / 2. ‘관부여락선’의 이병주와 ‘합이빈(하얼빈)의 이효석.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터졌다. 선양 외곽의 류탸오후(柳條湖)지역의 만철 철로가 파괴됐다. 그것은 관동군의 음모·조작이다. 그곳의 중국 군벌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의 대응은 무기력했다. 관동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렸다. 이어 1932년 3월 만주국이 출현했다. 만주국 등장은 조선의 독립운동가에게 낙담과 고난이다. “만주는 이제 중국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만주제국이라는 일본의 괴뢰(傀儡)국으로 형식상 독립을 했다. 그렇다면 만주나 조선이나 다를 바가 없다.”(류주현 실록 대하소설 『조선총독부』 1967년)

만주사변은 만철의 제2 전성기를 열었다. 소련은 만주에서의 철도 경영을 포기했다. 동청철도의 북만주 노선을 팔았다(1934년9월). 본토의 일본인들은 환호했다. 만철은 러시아식 광궤를 국제 표준궤로 바꿨다. 부산발 유라시아 열차는 활기를 띠었다. 출발·종착역은 ‘부산 잔교(棧橋)’역이다. 잔교는 부두와 닿았다. 관부(關釜)연락선과 경부철도는 편리하게 연결됐다. 잔교역은 일본 패망 뒤 철거됐다. 지금은 부산여객터미널이다. ‘부관 페리’가 다닌다.

이병주의 소설 『관부연락선』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처음으로 부산을 보는 감상은 어때/ 글쎄/ 혼잡을 이룬 사람들이 빚어내는 소란 위로 ‘봉천행 열차를 타실 손님은’ 하고 라우드 스피커가 울려퍼졌다/ 그렇지, 여기가 바로 대일본제국의 대륙에 이르는 관문 아닌가/ 어디 봉천뿐인가, 여기서 시작해 하얼빈으로도 가고 치타로도 가고 페테르부르크에도 가고 바르샤바에도 가고 베를린으로 해서 파리까지라도 갈 수 있지”

그 코스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여정이다. 손기정과 남승룡(3위)은 현지 적응을 위해 선발대로 출발했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내렸다. 경성역 그릴 환송연에 참석했다. 그해 6월 14일 두 선수는 경성에서 특급 히카리에 올랐다. 봉천~하얼빈~만저우리~치타 노선이다. 이어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탔다. 모스크바에서 유럽 열차다. 바르샤바~베를린으로 갔다. 손기정은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시베리아 철도가 제일 빨랐다. 경성역에서 베를린까지 두 주일 걸렸다”고 했다(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아카쓰키’ 경부 특급 기관차의 실물은 사라졌다


▎1. 기관차가 인천 공작창에서 나오자 환호하는 모습. / 2. 해방 후 우리 독자기술로 조립한 ‘조선해방자호’ (1946년 5월)
‘반도의 근영’은 국제철도의 번창을 소개한다. ‘鮮滿(조선 만주)을 묶는 특급’이다. 특급 열차는 아카쓰키(あかつき), 히카리(ひかり), 노조미(のぞみ)다. 새벽(暁·효), 광(光·빛), 희망(望·망)으로 열차 이름을 붙였다.

“아카쓰키는 부산과 경성을 불과 6시간45분의 쾌속으로 주파한다. 그리고 조선과 만주를 직통으로 연결하는 히카리는 신경까지, 노조미는 봉천까지 직통 왕복한다. 이들 차량은 호화로운 1등 전망차와 침대·식당차가 달려 있다.”

나는 한국 자료를 뒤졌다. 『사진으로 본 한국철도 100년』(2003년 코레일)이다. 만철의 아시아호는 경쟁을 일으켰다. 조선총독부도 특급 개발에 나섰다. “만주철도에서는 특급 ‘아시아’가 운행되고 있었는데 스피드감은 있었으나 대단히 중량감이 있고 구조적으로 너무 강고한 느낌이다. 이에 비해 아카쓰키는 스피드감이 있고 경쾌하고 스마트한 것으로 대조적이었다. 일본철도에서도 이만한 차가 없었다. 만철에서 견학을 오고 일본철도의 요청에 따라 도면 한 장씩을 제공하기도 했다.”

아카쓰키의 기관차 실물이 궁금하다. 중국은 ‘아시아호’를 보관한다. 거기에 담긴 노하우를 차용한다. 하지만 아카쓰키는 사라졌다. 언제, 어떻게 폐차시켰는지 기록도 희미하다. 역사학자 신복룡박사(전 건국대 석좌교수)는 “비분강개(悲憤慷慨) 역사관이 충만한 문화의 서글픈 현상”이라고 했다.

나는 다롄 진열관을 떠올렸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만철조사부는 만주 지역의 역사·풍속·농촌실태·농업·광공업·인구에 대한 조사와 통계를 달았다. 만주 경영 전략기관이었다. 조사 자료 보고서가 6만여 종이었다.”

만철 조사부는 만주국 등장 이후 경제조사회로 재편됐다(1932년). 위원장은 소고 신지(十河信二). 그는 만철 이사 출신이다. 경제조사위는 관동군 사령부의 경제참모부 기능을 했다. 태평양전쟁 이후 소고는 만철의 경험을 재활용했다. 일본 국철총재로 신칸센 건설에 나섰다.

엘리트 싱크탱크 만철조사부


▎1. 경성(서울)역은 동북아 철도의 허부, 지금도 수려한 건축미를 잃지 않았다. / 사진:박보균 대기자 / 2. 경성역 티룸은 소설가 이상의 ‘날개’에 등장.
만주국과 만철 경제조사위의 엘리트들은 의기투합했다. 그들은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 강요(綱要, 골자)”를 마련했다. 그중에 만주국 산업부 차장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도 있다. 기시는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다. 그는 전범재판을 받았다(불기소). 내각총리를 지냈다.

5개년 계획은 거대한 실험이었다. “5개년 계획은 전후 일본 고도성장, ‘일본 주식회사’의 원형이다. 지(知)의 집단 만철 조사부의 유산이다.” (『만철-지의 집단 탄생과 소멸』)

박정희는 문경 보통학교 교사였다. 그는 만주로 떠났다. 1940년 2월 만주 신경군관(예과 2년)학교에 들어갔다. 우수생도는 일본 육사 본과에 진학했다(1944년4월 졸업).

만주국의 5개년과 한국의 5개년 개발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주제는 박정희의 만주 체험 때문이다. 김종필(JP) 전 총리는 초기 ‘박정희 통치’를 다자인했다. JP는 생전에 이렇게 일축했다. “만주 경험이 박 대통령의 리더십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산업화는 만주국의 문제의식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박 대통령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수백 년 서열을 깨는 것이 경제개발의 핵심 추진력이라고 확신했다. 거기에다 우리 국민성의 숨겨진 근면과 자립을 깨우쳐 세상을 새롭게 바꿨다. 5·16을 쿠데타라고 하지만 이런 엄청난 국민적 변혁을 이룬 게 혁명이다. 만주국 운운하는 얘기는 ‘박정희 리더십’을 깎아내리는 의도가 깔렸다.”

나는 JP에게 박정희의 만주 회상을 물었다. “박 대통령한테서 만주에 관한 것을 한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 만주군관학교 졸업이 굳이 자랑할 것도 아니고 해서 한마디도 안 했던 것 같아. 박 대통령이 만주에 간 것은 처했던 어려운 환경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본 식민지 아래서 원하는 것은 안 되고 한국에는 있을 수 없고 해서 만주를 선택한 거다. 별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간 것이 아니다. 현상타파 생각에서 만주로 간 거다.”

만주국은 꺼림칙하다. 배후 조종세력 관동군의 무자비함이 겹쳐 있다. 관동군 731세균부대는 절망이다. 만주에 대한 남북한의 기억 차이는 뚜렷하다. “김일성의 만주 항일 게릴라 투쟁은 북한의 건국신화 수준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잊힌 공간이었다. 해방 후 분단, 만주의 중국 공산화 과정에서 멀어졌다. 일제의 만주 침략은 한국 강탈과 연결돼 만주국 역사는 부정적으로 대부분 묘사됐다.” (『만주 모던』 한석정)

JP “한국의 산업화는 만주 5개년 계획과 차원이 달라”


▎1. 1931년 관동군이 조작한 만주사태의 류타오후 유적 (이상 선양의 ‘9·18 역사 박물관’). / 2. 만주국 황제 푸이와 신하들(밀랍인형). / 사진:박보균 대기자
한석정 교수의 연구 성취는 주목된다. “만주는 항일과 관동군이 대결하는 세계로 인식된다. 하지만 만주는 식민지 착취와 영웅적 저항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양 극단 사이에 넓은 지평이 있다.” 만주는 독립운동가의 특별한 무대다. ‘기회의 땅’으로도 작동했다. 일본·한국에서 대량 이민이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예술인·사업가들이 찾아갔다. 사기꾼과 깡패도 만주땅에 뛰어들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패망했다. 일본 철도 기술자는 돌아갔다. 철도는 한국인의 역량으로 재출발했다. 1946년 5월 ‘조선해방자호’(증기기관차)가 만들어졌다. 나는 옛 신문(자유신문 1946년 5월 4일자)을 살폈다. “우리들 조선 사람의 손으로 훌륭하게 유선형 기차를 만들어 과거 왜놈들에게 지지만은 않는 기술진에 개가를 올리었다.”

속도는 답답했다. 서울~부산까지 9시간40분이 걸렸다. 해방 이전 ‘아카쓰키’보다 3시간 느렸다. 광복의 감격과 독자적 기술의 자부심은 이런 불편을 참게 했을 것이다. 1960년에 2월 특급 무궁화호는 6시간40분에 육박했다. 그 2년 뒤 재건호의 소요시간은 6시간10분. 아카쓰키 기록을 깨는 데 17년이 걸렸다.


▎1. 만철의 싱크탱크 ‘만철 조사부’가 생산한 각종 보고서. / 2. 1971년 박정희(오른쪽)와 김종필.
만철 시대는 그렇게 마감했다. 나는 만철 시대를 정리했다. 중국의 역사 접근 자세는 인상적이었다. 중국인 거의가 만철과 만주국을 거칠게 비난한다. 하지만 남긴 건물은 부수지 않는다. 만철의 지적 유산을 연구한다. 만철의 첨단 기관차, 경영 노하우를 살핀다. 그렇게 명분과 실질을 분리한다. 배울 건 배우겠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다. 그런 자세는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지혜와 용기로 가능하다. 미·중 무역 전쟁의 본질은 기술과 경영 능력 전쟁이다. 요즘 한국의 풍토는 명분 우세다. 실사구시 정신은 움츠린다.

경기도 의왕박물관에 파시형 증기기관차 23호가 있다. 설명문은 이렇다. “일본에서 제작,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조립한 텐더식 증기기관차,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파시형 증기관차. 등록문화제 417호 1942년 제작.” ‘국내유일, 문화재’-. 하지만 대접은 형편없다. 비·눈에 노출돼 있다. 최소한 지붕이라도 씌워야 한다. ‘동북아 철도공동체’의 깃발과 어울리지 않는다. 선양의 철도 박물관은 실내 전시다.

정재정 교수는 “동아시아 철도 공동체는 지금 단계에선 기획 수준이다. 그러나 남북 분단을 극복하는 상징이다. 그것을 이룩하려면 사람들의 세계관이 거대해야 한다.” 그 실천의 출발은 리더십의 역사 상상력이다. ‘우리 민족끼리’ 자세만으론 어렵다. 실사구시와 지피지기는 상상력을 확충한다. 그것이 동북아 철도 공동체의 실천 시기를 당긴다.

[박스기사]

▶만주 지금은 동북 3개 성(省)이다. 랴오닝 (遼寧·요녕), 지린(吉林·길림), 헤이룽장(黑龍江·흑룡강)성이다. 중심도시는 랴오닝성의 다롄(大連·대련), 선양(瀋陽·심양) ,지린성의 창춘(長春·장춘), 헤이룽장성의 하얼빈(哈爾濱·합이빈).

▶삼국간섭 청일전쟁 승자인 일본은 랴오둥반도의 영유권을 얻었다(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 러시아·프랑스·독일 삼국의 외교 간섭으로 좌절했다. 일본은 굴복하여 영유권을 반환.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과 만주국 관동군의 철도 폭파 자작극으로 시작. 주역은 관동군의 작전주임(중좌)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와 고급 참모(대좌)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이시하라는 일본 육군의 천재다. 그것은 만주국 설립(1932년)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위(僞·괴뢰)만주국’이라고 부른다. 국정 이념은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다. 오족은 일본·조선·만주·중국·몽골족.

▶포츠머스조약과 관동주(關東州) 1905년 9월 미국 뉴햄프셔주 항구도시 포츠머스에서 체결된 러일전쟁 강화조약. 일본은 삼국간섭으로 잃은 이권을 탈환했다. 뤼순·다롄의 조차권, 동청철도 구획 중 남만주 쪽 철길의 운영권이다. 일본은 조차지역을 관동주라고 불렀다. 통치기관(관동도 독부→관동청)을 설치했다. 관동은 만리장성의 산해관(山海關) 동쪽.

- 다롄·선양·창춘·하얼빈(중국)=글·사진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201902호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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