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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평양] ‘단 하루’ 쉬는 북한의 설날 풍속도 

조상보다 김일성·김정일 제사가 우선! 

박용한 북한학 박사
새벽부터 동상 참배로 분주… 열악한 교통 여건에 고향 방문 어려워
떡국·만둣국·온반(溫飯) 즐겨하며 金 부자 명절에는 고기 배급


▎북한 주민들이 2월 5일 음력설을 맞아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에 참배하러 가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분단 70년을 넘어서면서 남과 북 사이에 달라진 모습은 생각보다 많다. 전후 두 세대를 건너오면서 문화와 풍습이 달라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서울에선 음력설을 맞아 세배를 올리고 신년 인사도 한 번 더 건네지만, 평양의 음력설은 단출하다. 북한에서 만든 2019년 달력을 보면, 음력설 당일인 2월 5일 단 하루만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나아가 70년을 지나며 북한에선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과 김정일의 생일인 ‘광명성절’이 설보다 중요한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설 명절 분위기가 완전히 퇴색된 건 아니다. 새해 아침 떡국부터 연날리기까지 우리에게 친숙한 풍습도 적잖이 관찰할 수 있었다.

2월 5일 오후 북한 조선중앙TV는 ‘설명절음식-떡국’이라는 제목의 방송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영상은 설 연휴를 맞아 창광음식점거리에 있는 떡국음식점을 찾은 평양 시민 모습을 전달했다. 자세한 떡국 조리법도 소개됐다. 돼지고기 육수에 돼지고기 편육을 넣는 북한식 조리법이다. “집집마다 지방마다 다양하다”며 지역별 떡국 특징도 소개하는데, 수산물이 들어간 경상도 떡국과 미역과 두부를 담아낸 충청도 떡국도 포함했다.

설 아침 청와대 식탁에 오른 ‘평양 온반’


▎북한 주민들이 평양 개선문광장에서 한복을 차려입고서 민속놀이를 즐기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설 명절을 맞아 ‘먹는 맛’은 다양하다. 노동신문은 음력설을 하루 앞둔 4일 “설 명절을 맞으며 수도 평양과 각지의 급양 봉사기지들에서 민족의 향취가 한껏 넘치는 특색 있는 봉사준비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외식업을 소개했다. 평양 옥류관을 먼저 언급하면서 “설 명절을 맞는 인민들에게 우리 민족의 고유한 향기가 넘치는 고기쟁반국수와 평양냉면을 비롯한 민족음식들을 봉사하게 된다”고 소개했다. 청류관에 대해선 “평양냉면·쟁반국수와 전골·신선로·떡국·녹두지짐을 비롯한 여러 가지 민족 음식들을 봉사하기 위한 준비를 갖췄다”며 세세한 메뉴 소개까지 곁들였다.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 북부 지역에선 설에 떡국보다 만둣국을 주로 끓여먹는다. 쌀농사를 많이 짓지 않는 북쪽의 기후와 중국의 만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산지가 많은 함경도에서는 만두 소 안에 꿩고기를 넣어 꿩만둣국을 끓여 먹고, 평안도에서는 돼지고기나 숙주나물, 고춧가루가 들어가 있지 않은 배추김치 등으로 소를 만들어 담백한 만둣국을 먹었다. 한반도 중부 지방에서 즐겨 먹는 떡만둣국은 만둣국을 먹는 북부 지방과 쌀 가래떡을 뽑아 먹는 남부 지방의 풍습을 절충한 결과물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한 가지 빠진 북한 전통 음식이 있다. 바로 ‘온반(溫飯)’이다. 닭고기나 소고기·꿩고기 등으로 만든 따뜻한 육수를 밥 위에 부어 먹는 음식이다. 고명으로는 국물을 낸 고기와 녹두전, 채소 등이 올라간다. 이런 온반을 북한 매체 대신 청와대가 소개해 화제가 됐다. 청와대는 “보통 떡국을 먹는 것이 상례인데 오늘은 김정숙 여사가 온반(溫飯)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이어 김 여사는 “설에는 떡국을 먹는 것이 보통이지만, 북한에서는 온반도 많이 먹는다”며 “따뜻한 음식인데 평양에서 오실 손님도 생각해 온반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특별사절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측은 평양식 온반을 첫날 만찬 메뉴로 선보이기도 했다.

놀이 문화도 전통을 잇고 있다. [노동신문]은 강원 원산시 해안광장에서 연을 날리는 풍경을 전했다. 방송에선 팽이 돌리기, 윷놀이, 제기차기 등 민속놀이를 즐기는 장면도 내보냈다.

북한 주민이 명절을 기다리는 이유는 역시나 먹는 문제에 있다. 평상시보다 다양한 식량을 배급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얻는 음식으로 친지를 찾아가 인사도 하고 음식도 나눈다. 하지만 고향을 찾거나 멀리 성묘를 가는 일은 드물다. 교통수단이 불편하고 ‘여행증명서’ 받기도 어렵다.

‘미신’이라던 음력설, 민족문화로 격상


▎설을 맞아 2월 5일 평양에서 ‘설명절 경축 음악무용종합공연무대’가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 사진:연합뉴스
사실 북한에서 음력설은 한동안 명절에서 빠지기도 했다. 북한에서 1992년 발행한 [조선말대사전]을 보면, 북한 명절은 ‘국가적 명절’과 ‘국제기념일’, 그리고 ‘민속명절’로 나뉜다. 민속명절은 양력설과 음력설, 정월대보름, 한가위 등 우리 민족 전통 명절을 포함한다. 그러나 “봉건 잔재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역설한 김일성은 1967년 음력설을 미신이라고 격하하면서 양력설 하나만 명절로 인정했다.

북한에서 사회주의 제도를 강조하면서 강제로 막았지만 반만년 동안 내려오던 관습을 쉽게 없애기 어려웠다. 1972년 추석에 다시 성묘를 허용하면서 부분적으로 부활됐다. 본격적인 명절 부활은 김정일이 1989년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자”고 강조하면서다. 이때부터 음력설은 한식, 추석과 함께 다시 민속명절로 지정됐다. 당시 북한 방송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전래의 민속적 풍습인 음력설을 잘 쇠도록 크나큰 배려를 했다”며 명절 부활을 밝혔다.

김정일은 민속명절 강조 추세를 이어갔는데 2003년 양력설 대신 음력설을 쇨 것을 지시했다. 정월대보름도 하루 쉬고 단오와 추석을 수리날과 한가위로 부르라고 지시했다. 북한의 대외선전매체 [메아리]는 2월 1일 “설 명절은 우리 인민들이 제일 큰 민속명절로 쇠곤 했다”며 전통성을 강조했다. 또한, “설 명절날 아침 자식들이 집안의 가장들께 먼저 설 인사를 드린 다음 온 가족이 모여앉아 가정 부인들이 성의껏 마련한 설음식을 맛있게 들고 또 마을의 윗사람들과 친척들, 스승들을 찾아가 설 인사를 드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며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2019년에 나온 북한 달력을 보면 2월 19일 정월대보름과 4월 5일 청명, 그리고 9월 13일 추석을 붉은색으로 표기돼 있다. 민속명절은 법규로 제도화된 공휴일이 아니다. 북한 당국이 지정하면 휴무일이 된다. 북한 내각에서 휴무일로 지정했더라도 별도 공표는 없다. 그해 달력에 붉은색으로 표기하는 형식으로 주민들에게 알린다. 북한에선 민속명절에 윷놀이와 농악무, 씨름경기를 개최하고 민족음식품평회를 비롯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면서 명절 분위기를 띄운다. 보통 봄이 시작하는 4월 5일 청명절에는 조상 묘를 찾는다.

북한은 민속명절을 띄우면서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추세다. 조선중앙TV는 2월 5일 단군신화를 다룬 특집방송 ‘민족의 시조를 찾아주시여’를 내보냈다. 하루 뒤인 6일에도 단군 실화를 다룬 프로그램 두 편을 연이어 방송했다.

앞선 1월 31일 조선중앙통신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민족유산보호법’을 수정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민족유산보호법은 6개장에 70개 조문으로 되어있으며 물질유산과 비물질유산, 자연유산의 보호 관리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규제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법규 내용도 소개했다. “민족유산보호법을 수정해 민족유산을 더 잘 보호하고 바르게 계승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법적근거가 마련됐다”는 해설도 담았다.

‘김정일 생일’ 명절 준비에 설 분위기는 궁색


▎지난해 2월 16일 0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김정일의 생일인 광명성절을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북한에서 이처럼 민족문화 계승을 강조하지만 실상은 “나라와 민족의 융성발전에서 매우 의의 깊고 경사스러운 날”로 설명되는 ‘국가적 명절’이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북한은 김일성 전 주석 생일인 4월 15일을 “우리 인민의 민족 최대의 명절”로 규정하면서 ‘태양절’로 부른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생일인 2월 16일 역시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면서 ‘광명성절’로 기념한다.

북한 체제와 제도를 기념하는 명절도 포함된다. 북한 정권 수립일인 9월 9일, 조선노동당 창건일인 10월 10일, 북한 헌법 제정일인 12월 27일도 달력에 붉은색 공휴일로 표기된다. 광복절인 8월 15일을 공휴일로 지정한 점은 한국과 동일하다.

북한 주민은 설날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고향을 찾는 발걸음이 아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에 참배하려면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한다. 집을 나서기 전 새벽에도 김일성·김정일 초상화에 먼저 절한 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 조상 제사보다 김일성·김정일 부자 제사가 우선이다. 김일성이 봉건주의를 비판했지만 새로운 봉건주의는 김일성과 김정일로 채워진다. 당장 음력설을 지내자마자 2월 16일 김정일 생일이 다가온다. 지난해는 음력설과 김정일 생일이 겹치기도 했다.

지난해 김정은 위원장은 2월 16일 새벽 0시에 김정일의 시신을 안치한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아 참배했다. 김 위원장 뒤로는 군복 입은 장성과 고위관료가 줄지어 뒤따른다. 매년 반복되는 모습이다.

우리의 명절 세태처럼 제사만 간단히 하고 끝내지 않는다. 생일을 앞두고 한 달도 훨씬 전부터 각계각층·각급단위에서 기념행사를 벌인다. 중앙추도대회를 비롯한 연구토론회·회고음악회·충성맹세모임 등 행사 종류도 다종다양하다. 김정일이 김일성 생일을 맞아 열던 행사였는데,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그의 생일에도 열리게 됐다. 2017년 김정일 생일을 하루 앞둔 2월 15일 김정은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보고대회’를 열었다. 지난해 행사에는 불참했다.

이런 성격의 정치행사는 해외에서도 함께 열린다. 북한에 우호적인 단체들이 ‘회고위원회’를 결성해 김일성과 김정일 업적을 칭송하는 토론회와 영화감상회를 개최한다. [노동신문]은 지난해 6월 스위스를 비롯한 21개국에서 ‘김일성회고 위원회’가 결성됐다고 과시했다. 5개월 후인 11월엔 러시아를 비롯한 33개국에서 추가로 ‘김정일회고위원회’를 결성했다고 알렸다. [노동신문]은 이후에도 관련 동향을 지속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문화행사도 빠질 수 없다. 지난해엔 2월 초부터 ‘김정일화(花) 명명 30돌 기념’ 학술대회 및 전시회를 열면서 ‘광명성절’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다. 올해도 각종 행사로 우상화 작업에 여념이 없다. 2월 7일 인민문화궁전에서 ‘제16차 2·16과학기술상 수여식’과 ‘인민 사랑의 길을 끝없이 이어가시며’를 주제로 한 중앙사진전시회 개막식이 열렸다. 같은 날 삼지연군 김정일 위원장 동상 앞 교양마당에서는 전국 청소년학생들의 맹세모임이 있었다. 2월 13일부터 27일까지는 평양국제문화회관 2층 미술작품전시장에서 소나무 미술전시회(조선화·유화·수예·공예 등)가 열린다.

金 부자 생일에 사망일까지… 추모의 일상화


▎광명성절 아침 김정일 동상을 참배하는 행사가 끝난 뒤엔 학생들의 경축무도회가 이어진다. / 사진:연합뉴스
김 부자를 향한 찬양 수위는 한층 더 높아질 태세다. 북한 당국이 사망일까지 생일에 준해서 챙기겠다고 나선 까닭이다. 북한은 1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김일성(7월 8일)과 김정일(12월 17일) 사망일을 ‘국가적인 추모의 날’로 지정했다. 그동안 추모사에서 ‘민족 최대의 추모의 날’이라고 불러 오면서 조짐을 보여 왔다. 지금까지도 사망일을 앞둔 한 달 동안 추모 열기를 올려왔는데 이제 ‘국가적인 추모의 날’로 격상된 만큼 참배를 비롯한 추모행사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상임위 정령을 보더라도 3항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과 해당 기관들은 이 정령을 집행하기 위한 실무적 대책”을 세우라고 명기했다.

요란한 김일성·김정일 행사에 비하면 김정은의 생일인 1월 8일은 올해도 조용히 지나갔다. 달력에서도 지난해처럼 평범한 검정색으로 표기돼 있다. 고위 간부 출신 탈북자는 “김정은 나이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며 “아버지뻘 나이 많은 사람들을 아래에 두고 있는데 생일상까지 받기엔 주민들에게 눈치가 보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일성은 62세를 넘긴 1974년, 김정일은 40살인 1982년부터 생일을 휴일로 지정했다. 30대 중반인 김정은에겐 다소 이르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고 김정은의 생일을 쉬쉬하진 않는다. 조선중앙TV는 2014년 미국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방북해 열린 농구경기를 중계하면서 “전능한 원수님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경기”라고 밝힌 바 있다.

북한 주민들은 어떤 휴일을 선호할까. 보통 명절에는 기름·과자·간장·된장이 담긴 선물상자를 받지만, 김일성·김정일 명절에는 고기까지 배급받는다. 이때는 어린이들도 과자 선물을 기대해봄직하다. 김 부자 동상에 꽃바구니를 올린 뒤엔 경축무도회, 체육경기와 같은 문화생활을 즐기거나 휴식을 취하는 모습도 보인다. 설날보다 김 부자 생일이 더 기다려지겠거니 짐작하는 이유다.

- 박용한 중앙일보 군사안보연구소 연구위원, 북한학 박사 park.yonghan@joongang.co.kr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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