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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대한노인회중앙회 공동기획 同行(2) | 존경받는 시니어, 골드보이가 간다] ‘원조 미인’ 김창숙의 핑크색 연기인생 

“어쩌다 찍은 CF 반백 년 배우인생 서막이었죠”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경희대 무용과 1년 때 이모 권유로 TBC 탤런트 데뷔
연기자는 천직이자 운명…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김창숙이 2월 12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쉐라톤 서울 팔래스 강남 호텔에서 월간중앙과 만나 인터뷰를 한 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배우 김창숙(70)의 애칭은 ‘원조 미인’. 그래서 사람들은 김창숙이 조금은 도도하고, 조금은 가탈스러울 거라 생각하곤 한다.

김창숙은 “아이 둘 낳고 (브라운관에) 복귀하면서부터 귀부인·사모님 이미지가 굳어져서 그럴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만나고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라며 “‘나는 여자가 아닌 남자’라고 생각하며 자랐던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월간중앙은 2월 12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쉐라톤 서울 팔래스 강남 호텔에서 ‘원조 미인’ 김창숙을 만났다. 김창숙은 “정말 너무나 우연한 기회에 배우가 됐는데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렀다”며 “특별한 욕심은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유쾌한 할머니 역을 맡아보고 싶다”고 소박한 포부를 밝혔다.

고희(古稀)를 넘기셨는데도 젊음을 유지하시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고희라는 말이 저와는 굉장히 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작년에 주위에서 자꾸 칠순, 칠순 하길래 ‘내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됐다’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칠순이 고희잖아요? ‘옛날에 고희는 나이 많은 사람들을 보고 했던 말인데, 이제 내가 그 나이가 됐구나’라고 오늘 처음 느꼈다니까요(웃음). 그래도 사람들은 저를 칠순으로 보진 않습니다. 젊어 보이는 건 좋은 거죠.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지간하면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 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훌훌 털어 버립니다.”

연기인생은 얼마나 되셨나요?

“한 50년 됐나요? 스물한 살 때쯤부터 연기를 한 것 같아요. 이래저래 반백 년 된 건가요?”

시골에서 나고 자라셨죠?

“네, 완도에서 태어나서 서너 살 때까지 그곳에서 자라다 부산으로 이사를 갔어요.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이사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고요. 배우가 되고 난 뒤 군(郡)에서 초청해서 완도에 간 적이 있는데 정말 멀긴 멀더라고요. 친할아버지는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하셨고, 외할아버지는 일본을 왕래하시며 무역업을 하셨어요. 친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잡혀 들어가셨을 때 외할아버지가 석방을 도우셨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완도에서는 두 분 다 큰 인물로 존경받아요. 특히 친할아버지는 성인(聖人)처럼 추앙받으시고요.”

우연히 예식장 광고 찍었다가…


▎1971년 방영된 드라마 [세 자매]에 출연한 김창숙(가운데).
경희대 무용과를 다니셨잖아요? 어떤 계기로 배우가 되셨나요?

“어렸을 때 몸이 약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여섯 살 때부터 무용을 시키셨어요. 고전무용에 이어 발레도 배우게 하셨죠. 진명여중에 들어갔는데 굉장히 유명한 발레 선생님이 계시더라고요. 그분한테 발레를 배우면서 대학까지 가게 된 겁니다. 그런데 경희대 김백봉 선생님은 고전무용 대가셨어요. 다시 고전무용을 했죠. 그때만 해도 ‘대학 졸업하면 무용 선생님이 되나보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대학 1학년이던 1967년 우연히 친구가 친하게 지내는 오빠를 만나게 됐는데, 그분이 다짜고짜 CF를 찍자는 겁니다. 그 당시 저는 CF가 뭔지도 몰랐거든요. 찍으면 돈 준다고 하길래 찍었죠(웃음).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 틀어주던 예식장 광고였어요. 그걸 찍고 나서 학교에 갔더니 글쎄 친구들이 배우가 왔다고 아우성이더라고요. 그 일이 있고 난 뒤 어느 날 충무로를 지나가는데 누군가 ‘배우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배우가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얼마 뒤에는 저보다 네 살쯤 많은 이모가 ‘TV에서 뭘 뽑는다’면서 (지원서를) 내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배우가 됐는데 지금까지 하고 있네요.” 김창숙은 1968년 TBC 5기 공채 탤런트에 합격했다. 동기로는 노주현 등이 있다. 올해로 연기 인생 52년째다.

‘원조 미인’이라는 애칭 때문일까요? ‘김창숙’ 하면 조금 차갑고 도도할 거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1977년 5월 2일 거행된 김창숙의 결혼식.
“저는 굉장히 여성스럽지 못한 사람이에요(웃음). 호탕하고 뒤끝도 없고 바른말도 툭툭 내뱉고 그래요.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격이 가탈스럽지 않아요. 아침방송 MC를 할 때도 제 성격대로 진행했던 것 같아요.”

SBS는 1991년 12월 개국하면서 [생방송 행복찾기]란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주부를 주 시청자로 하는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김창숙은 최선규 아나운서와 공동 MC를 맡아 99년 10월까지 만 8년 동안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은 지금까지도 SBS를 대표하는 장수 프로그램으로 기억되고 있다.

77년 결혼 후 은퇴했다 82년 브라운관으로 복귀


▎한창 때인 1976년 김창숙의 화사한 모습.
지금까지 출연하신 작품(드라마·영화) 수는 얼마나 될까요?

“몰라요, 세보진 않아서. 영화는 처녀 때 많이 출연했지만 결혼 후에는 드라마에만 주로 나갔죠. 저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연기를) 했어요. 그래도 꽤 많이 했겠죠?”

김창숙이 50여 년 동안 출연한 드라마는 80여 편, 영화는 50여 편에 이른다.

가수에게 특별히 애착이 가는 곡이 있듯이 배우에게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겠죠?

“아무것도 모르고 데뷔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TBC 5기 공채 탤런트 중에서 제가 가장 어리더라고요. 어느 날 최상현 TBC PD가 저를 앉히더니 분장사에게 화장을 해주도록 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런대로 한 세상]에서 동기(童妓) 배역을 맡게 됐는데, 첫 방송 이후 방송국으로 ‘저 배우가 누구냐’는 문의가 많았던가 봐요. 돌아보면 제가 초창기에 출연했던 드라마의 배역은 주로 본부인이 아닌 역할이었어요. [서울이여 안녕]이란 드라마가 있었는데 거기서도 그런 역이었어요. 그땐 아무것도 모르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심각한 역할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동료들 가운데 특별히 친하신 분은 누구신가요?

“주로 옛날에 TBC 시절 함께 출연했던 동료들이죠. 선배로는 강부자·사미자·김민자씨 같은 분들, 후배로는 유지인씨 같은 분들과 자주 만나서 식사도 하고 운동도 합니다.”

연기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인가요?

“처녀 때는 빨리 (배우 생활을) 그만뒀으면 했어요. 1977년에 결혼하고 나서 애들 키우면서 집에 있다보니 무료하고 허전하더라고요. 아무것도 안 하고 산다는 게 무의미한 것 같기도 했고요. 연기라는 게 성취감이 있거든요. 그런데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고 82년부터 다시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어요. 그렇게 지금까지 온 거죠. 생각해 보면 연기는 제 운명인 것 같아요. 하고자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시켰고, 어디서부터인지 달란트(재능)가 주어지고….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잖아요? 사실 저는 노력도 별로 안 했어요. 간신히 대사만 외워서 나갔거든요(웃음). 연기 인생의 보람이라면 내 인생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은 거라고 할까요? 그 시절만 해도 대부분 아줌마들이 주부로만 살았지만, 저는 연기를 할 수 있었고 거기에서 경제적 이익도 얻었잖아요? 돌아보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인생 후반전엔 마음 비우는 게 중요


▎김창숙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만이 즐길 수 있는 취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너무 열심히 안 했던 거죠. 근데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어요. 아무리 고생한 역을 해도, 시골 아줌마 파마머리를 해도, 펑퍼짐한 바지를 입어도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기억하지 못해요. 부잣집 사모님·귀부인으로만 기억하는 것 같아요. 사실 사모님 역을 그렇게 많이 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런데도 저에게는 그런 이미지가 강해요. 그게 아쉬워요. 억척스러운 할머니, 고생하는 어머니 같은 역을 곧잘 소화하는 배우들도 있는데, 반면에 저는 주로 사모님으로만 인식되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부분이죠.”

김창숙의 말처럼 그가 늘 사모님으로만 출연했던 건 아니다. 최고 시청률 57.3%를 기록했던 MBC 일일드라마 [보고 또 보고](1998년 3월~1999년 4월)에서 김창숙은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배정자로 분(扮)했다. 꽤나 억척스러웠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김창숙’ 하면 귀부인으로만 떠올린다. 김창숙은 “연기자로서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 보지 못한 건 아쉽다”고 고백했다.

연기철학이나 인생철학이 있으신가요?

“연기철학 같은 건 특별히 없어요. 주어진대로, 역할과 인물에 맞게 하려고 할 뿐입니다. 인생에서는 소통과 나눔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 혼자 뭘 하려 하기보다 남들과 함께 그리고 묻어가는 게 좋아요. 다 같이, 다 같이.”

건강관리법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저는 아무거나 잘 먹어요. 진짜 잘 먹어요. 남들이 저를 보면 ‘무슨 여배우가 저렇게 잘 먹느냐’고들 해요(웃음). 안 먹으면 안 되잖아요? 예전에는 고기에 맥주도 곧잘 먹었답니다. 그리고 수산시장 같은 데 들러 회를 푸짐하게 떠서 집으로 가져와 먹곤 했죠. 나이 들고서는 운동을 좀 합니다. 헬스클럽 같은 데 가서 걷기도 하고 에어로빅도 해요. 아무래도 무용을 했기 때문에 남들보다는 좀 낫죠.”

무용을 그만두신 지 오래됐는데 여전히 그 ‘감’이 살아 있나요?

“(자세가) 나와요. 헬스클럽 같은 데 가면 엄마들이 다들 에어로빅 하잖아요? 그런데 어려서 (무용 같은 걸) 배운 사람들은 자세가 달라요. 나이 들어서 배운 사람들은 아무래도 유연하지 못해요. 좀 딱딱한 거죠.”

인생 100세 시대라고들 합니다. 그를 기준으로 하면 인생 후반전을 살고 계시는데, 어떤 마음가짐인가요?

“다 내려놓는 것?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해요. 욕심을 버리라는 겁니다. 건강·돈·연기 같은 데 너무 욕심을 부리면 자신만 힘들어져요. 예전에는 남들과 비교하면서 자책도 했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상대적 박탈감이란 누구나 있는 것 같아요. 좀 무심하게 내려놓고 살아야죠. 후반전이라면 정리할 때 아닌가요? 옷도 잘 안 입는 건 누구를 준다거나 버리는 겁니다. 잘 비우는 게 중요해요.”

요즘에는 아이들을 배우로 만들려는 부모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대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긴 한숨을 쉬며) 답은 없어요. 아이의 재능을 어려서부터 키워 준다는 건 좋은데, 그게 빨리 발견돼서 빨리 잘되면 좋겠죠. 배우라는 직업은 뽑히는 직업이에요. 그리고 시대에 따라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어요. 요즘 젊은 남자 배우들 보면 여자들보다 더 (얼굴이) 뾰족하고 (몸매도) 날씬하잖아요? 부모가 시킨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청소년 프로(드라마)도 많이 해봤기 때문에 잘 알아요. 사실 어린 아이들인데도 함께 일하는 PD나 성인 연기자들은 같은 프로로 여겨요. 그래서 아이들이 NG 내면 싫어하는 거죠. 그러면 부모는 애들 불러서 야단치고, 애들은 질리게 되는 겁니다. 방송에 출연하다 보면 애들은 ‘나도 TV에 나온 배우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좀 자란 뒤로는 안 뽑히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그럴 때 생기는 상실감·우울증 같은 건 정말 감당하기 어렵죠. 그리고 어려서 배우를 하다보면 나중에 다른 일을 하기 힘들어져요. 부모 욕심만 생각할 게 아니라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신중하게 진로를 선택해야 합니다.”

배우는 어떤 직업입니까?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직업이에요. 또 공인(公人)이다 보니 이익도 많고 손해도 많아요. 식당에 가면 하다못해 밑반찬이라도 좀 더 주잖아요? 대우도 잘해주고. 그런 반면에 뭘 잘못하면 혹독하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어요. 공인이 되면 많은 걸 접어야 해요. 설령 불이익을 당해도 말을 못 하는 경우가 있어요.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는 더 그러잖아요? 배우… 좋은 직업이죠, 그렇지만 늘 조심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배우는 좋은 직업… 그러나 늘 조심해야


▎1975년 상영된 영화 [잔류첩자]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는 김창숙(왼쪽).
배우는 인기를 먹고사는 직업이잖아요? 대중이 찾아주지 않을 때 느끼는 위기감이나 상실감은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저는 만 5년을 쉬었어요. 육아 문제 때문이었죠. 일 그만두고 3년쯤 지나고 나니까 좀 무료해지더라고요. 그래도 그 시대에는 여배우가 결혼해서 애 낳고 나면 그만두는 게 당연했으니까 그러려니 했어요. 사실 요즘에 제가 할 만한 역할이 많이 줄었어요. 할머니를 하겠어요? 젊은 자녀를 둔 엄마를 하겠어요? 지금 저는 배우로서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많이 했다. 할 만큼 했다. 그런데 뭘 더 바라는가’ 하는 느낌도 들어요. 얼마 전 누군가 ‘잊히기 전에 뭘 해보라’고 하던데, 잊힐 때가 되면 잊히는 게 이상한 일인가요? 우리는 모두 잊히는 것 아닌가요?”

배우의 길을 걸어오신 걸 후회하신 적은 없나요?


▎1976년 방영된 TBC 드라마 [天女花(천녀화)]에 출연한 김창숙.
“없어요. 천직이고 운명이에요. 나 자신만의 특별한 영역을 만들지 못한 게 아쉽지, 후회는 없어요. 사모님이나 단정한 엄마 역에 국한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젊었을 때는 행운이자 복이었어요.”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요?

“예전에 어떤 선배가 저를 보면 ‘창숙씨는 얼굴에 행복이라고만 씌어있지 그늘이란 건 조금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속으로 ‘이 아줌마 참 웃기네. 나라고 왜 일이 없겠어’라며 시큰둥했어요. 그렇지만 그 선배 말처럼 제 얼굴에 어두운 구석이 없다는 건 감사할 일이죠. 앞으로는 밝고 행복한 할머니 역을 해보고 싶어요. 칙칙한 할머니는 말고요. 근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배역이 드물어요. 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나이 들어서도 러브스토리가 있는데 말이에요. 얼마 전에 제인 폰다라는 배우가 나오는 시트콤을 봤는데, 70대에 남편과 이혼한 뒤의 스토리를 그렸더라고요. 우리는 너무 젊은 것만 좋아하고, 또 나이 들었다고 하면 치매·우울증같이 어두운 것만 그리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제인 폰다(82)는 전설의 배우 헨리 폰다와 뉴욕 사교계의 명사 프랜시스 세이무어 브로코의 딸이다. 그녀는 [바바렐라](1968) 같은 영화에서는 섹시한 아가씨 역할을, [황금연못](1981) 등의 작품에서 무거운 역할을 맡는 등 다양한 배역을 소화한 배우다.

“그늘 없는 얼굴로 비치는 건 감사할 일이죠 ”

남편과는 언제,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셨나요?

“(한창 잘나가던 때) 친구 오빠가 자기 친구를 소개해 주더라고요. 그 남자가 외국에서 공부하고 와서 그런지 굉장히 예절과 매너가 좋더라고요. 저는 왈가닥처럼 사람들을 편하게 대하는데 그 사람 앞에만 가면 아주 얌전해지더라고요(웃음). ‘이 사람이 내 임자구나’라는 느낌이 오더군요. 아들 둘, 손자 둘, 손녀 하나가 있어요. 큰아이는 마흔두 살, 작은 아들은 마흔 살인가?”

김창숙은 수년 전 SBS [좋은 아침]에서 남편과의 결혼 뒷얘기를 공개했다. 김창숙은 “나는 나보다 나이가 위인 줄 알고 속아서 결혼했다”며 “자기들(친구 오빠와 남편)끼리 부르는 호칭을 듣고 당연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다. 그런데 결혼 후 남편 주민등록증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남편은 주민등록증에 오류가 있다고 둘러댔다”며 “한참 후에야 시어머니가 진실을 밝혀줬다”고 말했다.

본인의 연기인생을 색깔로 비유한다면 어떤 색일까요?

“핑크색요. 왜 핑크색이냐고요? 화사하고 예쁘잖아요?”

반백 년 연기인생 동안 특별히 감사하는 분들은 누구인가요?

“지금 생각해 보면 TBC PD들이 대단히 감사한 분들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데려다 좋은 배역 주시고 스타 만들어 주셨어요. 돌아가신 김재형 PD는 처음 저를 보시더니 다짜고짜 서울 명동 이순재 선생님이 연극하시는 곳으로 데려가시더라고요. 대본을 앞에 두고 (연기 연습을) 시키는 겁니다. 밥까지 사 먹여 가면서요. 고성원 PD라는 분은 [마부]라는 드라마에서 저에게 농아(聾兒) 역을 맡기셨는데 참 고마웠죠. 다들 연극하시던 분들이었는데 제겐 잊을 수 없는 은인들이죠. 요즘에도 그런 PD들이 있을까요?”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금도 나이 드신 분들은 예전 TBC 드라마에 출연했던 김창숙을 기억하세요. 60대 이후 세대부터는 저를 잘 아시겠죠. 우리 나이에는 어쨌든 건강이 최고입니다. 어려워 말고 병원과 친해져야 해요. 그리고 나만을 위해 즐길 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노래를 배운다거나 여행을 한다거나. 남자들은 집에서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해야 합니다. 아내가 밥을 하면 남편은 설거지라도 해야죠. 어쨌든 즐겁게, 즐겁게 살아야죠.”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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