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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공개] 南에서 더 조명 받는 ‘북한의 3·1운동’ 

1919년 평양 인구의 45%가 저항에 동참했다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장로교·감리교·천도교의 주도… 차별에 항거한 학생·노동자까지 가세
3·1운동 놓고 ‘혁명’으로 격상하려는 한국, ‘봉기’로 축소하는 북한


▎길선주 목사가 지도자로 있던 장대현교회는 평양 장로교의 상징이자 1919년 3·1운동의 씨앗을 뿌린 곳이다. 사진은 1907년 열린 이 교회의 선교학교 졸업식 광경. / 사진:코넬대
E. H. 카는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를 ‘역사가와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로 정의했다. 결국 역사는 해석되는 것이고, 그 해석은 선별적일 수밖에 없다. 현재의 필요에 의해 과거의 총체적 역사 중 일부가 의도적으로 부각되거나 축소 혹은 은폐될 수 있다는 뜻이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대한민국 국민 절대다수는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서 거행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체포로 3·1운동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상징적 장면이기는 하겠지만 실체의 전부는 아니었다. 평양을 비롯해 의주·진남포·안주·선천·원산의 3·1운동도 격렬하고 장엄했다.

특히 평양은 서울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이 쓴 [평양에서의 3·1운동]에 따르면 ‘평양의 만세시위’는 소방대와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3월 6일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됐다. 이 책은 특히 “평양 시위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 그곳에서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습득한 사람들에 의해 3월 2일부터 만세시 위운동은 주변으로 확산됐다”고 기록한다.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1919년 기준) 시위횟수 12회, 시위 참여자 수 3만 명, 사망자 수 656명, 부상자 수 636명, 체포된 자 수 4680명, 소실된 교회 15개에 이른다”고 밝혔다. 당시 평양 인구는 약 6만7000명으로 추정된다. 대략 평양 총 인구의 45%가량이 3·1운동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정은 박사는 2009년 펴낸 [3·1독립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에서 “1919년 3월 1일부터 14일까지 전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276건 중 71.4%인 197건이 평안도·황해도·함경도 등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발생했다”고 밝혔다.

3·1운동의 공간엔 서울 탑골공원과 천안의 유관순 열사만 있지 않았다. 평양을 중심으로 북쪽에서도 치열한 조선독립의 외침이 있었다. 그동안 남과 북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방치’됐을 뿐이다.

신한청년단, 3·1운동의 모태


▎1900년 초반 촬영된 평양 대동문 주변 전경. / 사진:독일 상트오틸리엔수도원
최근 한 국내 은행에서 독립운동을 테마로 지면광고를 만들었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대표단의 단체사진이 그것이다. 그 사진 앞줄 가장 오른쪽에 앉은 이가 상해에서 파견된 김규식이다. 당시 김규식은 신한청년단 대표 자격이었다. 3·1운동의 정신은 이 시점을 전 후해 잉태됐다.

1910년 8월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강탈했다.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는 일제에 의해 조작된 소위 ‘105인 사건’에 의해 1911년 해체됐다. 변절자가 속출했다. 엄혹한 시국에 직면한 열사들 상당수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국외로 나갔다. 특히 중국 상해에 많이 모였다. 그곳에서 의기투합한 김규식, 여운형 등은 1918년 신한청년단을 창설했다. 신한청년단은 1919년 4월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태가 됐다.

당시 세계 정세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민족자결주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1918년 11월에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상하이에 특사 찰스 크레인을 파견했다. 이듬해 1월 열릴 파리강화회의에 중국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크레인의 연설회에 여운형이 참석했다.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가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할 기회라고 직감했다. 그렇게 김규식은 파리에 갔지만 가시적 성과는 거의 없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에 한정된 것이었다. 실제 승전국의 식민지 중 독립을 얻어낸 사례는 없었다. 이집트는 회의 참석을 시도했지만 영국의 반대를 넘지 못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도 호치민이 파리까지 왔음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6월까지 열린 파리강화회의 기간 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김규식은 외무총장이 됐다. 이 사이 3·1운동이 일어났고, [LA타임스]와 [뉴욕타임스]에 독립선언서가 보도될 정도로 국제적 반향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앞으로 이어질 국제연맹에서 논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서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평생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날”


▎1911년 간행된 평양시가전도를 토대로 재구성한 3·1운동 당시 장로교· 감리교·천도교의 동선. /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서 구절처럼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열사들의 활동과 좌절은 가시적 성과는 없었지만, 수많은 조선인들의 가슴에 불씨를 지폈다.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이 일어나자 한반도의 독립 열망은 임계점에 다다랐다.

김승태 소장은 “평양의 3·1운동은 상해 신한청년단에서 국내에 파송한 선우혁이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 길선주를 찾아간 순간, 태동했다”고 설명했다. 선우혁에게는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이승훈의 소개장이 있었다. 이들 셋은 모두 ‘105인 사건’의 동지였다.

이진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서북지역에서 3·1운동 준비가 유독 활발했던 것은 조직의 힘”이라고 말했다. 여기서의 조직은 종교 결사체를 의미한다. 예전부터 이 지역에 감리교와 장로교 등 기독교의 교세가 강했다.

조직의 속성이 으레 그렇듯, 당시 종교계도 신도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의 의중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이 연구사는 “당시 천도교는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곳이었다. 손병희 선생이 3·1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자 권동진, 오세창 등이 (민족대표 33인에) 동참했다. 위에서 순수하게 한 마디를 하면, 전체가 다 움직일 수 있는 분위기와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기독교계도 기본 구조는 천도교와 비슷했고, 감리교와 장로교 사이에는 유대감이 흘렀다. 이 연구사는 “기독교계에서 길선주(장로교 목사로 민족대표 33인) 이름이 들어가는 순간, 기독교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참하라는 뜻과 다르지 않게 된다”고 해석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평양을 활동 무대로 삼았던 지사들은 길선주(장로교 장대현교회 목사), 신홍식(감리교 남산현 교회 목사), 임예환(천도교 도사), 나인협(천도교 도사) 등이 있었다. 이들 모두 종교에 기반을 뒀다는 교집합을 가졌다.

1911년 출간된 ‘평양시가전도’를 통해 당시 평양의 지도를 살펴볼 수 있다. 장로교의 본거지인 숭덕학교, 감리교의 본거지인 남산현교회 그리고 평양 설암리 천도교 교구당의 위치를 추정 가능하다. 이들은 1919년 3월 1일 각각의 근거지에서 고종 황제의 봉도식에 이어 독립선언식을 열었다. 그리고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평양경찰서 방향으로 행진했다. 평양의 남문(주작문)을 거쳐서 일부는 서쪽 평양부청에서 형무소를 지나 서성리까지 나아갔다. 다른 일부는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도청·재판소 너머 평양역으로 향했다.

이날 저녁엔 숭실대학과 숭실중학 밴드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연합해 교정에 모였다. 행진곡을 연주해 교정을 한 바퀴 돈 뒤, 시내로 나갔다. 그러나 완전무장한 채 출동한 일본 군대의 저지로 해산됐다. 당시 평양 주재 일본군은 3월 1일 오후 10시 일본 본토로 긴급 전보를 보냈다. 일본이 상황을 얼마나 다급하게 봤는지를 짐작할 단서다.

일본군 200명 평양 출병


▎평양 감리교의 중심지였던 남산현 교회의 당시 모습. / 사진:감리회본부 역사정보자료실 소장
평양의 3·1운동에 관한 현장사진은 아직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일본의 통제가 그만큼 철저했다. 그러나 현장 목격자의 증언은 남아있다. 평양 장로교계의 본거지 숭덕학교에서 독립선언식을 지켜봤던 선교사 번하이젤의 기록 중 일부다.

“산정현교회 전도사 정일선이 연단에 올라서서 ‘오늘이 내 평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날이다.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읽지 않곤 못 배기겠다’고 말했다. 청중들은 굉장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사실상 한국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낭독이 끝나자, 한 사람이 올라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것을 설명했다. ‘불법적인 짓을 해선 안 되고, 모두 주어진 지시에 따를 것이며, 관헌에게 저항하지 말고 일본인 관리나 민간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했다. 몇 사람이 태극기를 한 아름씩 건물에서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커다란 태극기 하나가 연단에 걸리자,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태극기가 물결쳤다.”

평양의 3·1만세운동은 일본으로선 예기치 않은 사태였다. 김승태 소장은 [평양에서의 3·1운동]을 통해 일본 반응을 전달했다. 구도 에이이치 평안남도 도장관의 증언이다.

“그들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한국 만세’를 고창했고, 뇌동자들이 함께 했다. 부인, 학생(신도 및 사립학교생도)도 이에 가담해 남문통, 대화정, 부청, 도청, 경무부 앞을 행렬지어 돌아다녔다. 특히 경찰서 앞에 장로교, 감리교와 천도교 신도를 주로 하여 남녀 학생이 1000명에 이르렀는데 오후 3시경부터 군집해 ‘한국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가를 불렀다. 점차 그 세력이 늘어나 해산의 징조가 없었다.”

일본은 처음엔 경찰서 주변에 모인 시위 군중을 해산하기 위해 소방대를 동원했다. 이들은 비폭력 만세를 외치던 시위대를 향해 소방호스로 물대포를 뿌렸다. 소방용 갈고리까지 휘둘러대는 바람에 머리를 다친 부상자가 나왔다.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돌을 던져 맞섰다. 일본은 조선인들이 먼저 폭력을 행사해 군대까지 투입했다고 주장했지만 외국 선교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거짓이었다.

“(조선인들이) 돌은 던진 것은 소방대원들이 소방호스를 경찰서 앞에 있는 군중들에게 돌린 결과였다. 그러자 화가 난 군중들은 돌을 집어던져 유리창을 깨버렸다. 소방대원들이 긴 갈고리 장대로 군중을 몰아붙였다. 그러던 중 갈고리가 30세 이동근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의 상태는 심각해 반신불수가 됐다. 그는 기독교인이다.”

결국 일본은 경찰력으로는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경무부장까지 나선 끝에 일본군 200명의 출병을 결정했다. 일본군은 오후 7시경 도착했다. 민간인 살상을 개의치 않을 일본군이 나타나자 시위대는 해산했다.

독립투쟁과 차별철폐의 외침


▎평양 천도교 교구당의 당시 모습. 언론에 최초로 공개된 사진이다. / 사진:개인 소장
3월 2일부터는 게릴라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3월 3일 오전 10시에 숭덕학교로 집합하라”는 문서가 나돌았다. 이를 파악한 일본 경찰은 숭덕학교를 점거했다. 그러자 평양감옥과 평양신학교 부근에서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일본군이 출동한 뒤에야 흩어졌다. 3월 4일에도 신양리 미국인 저택 부근과 평양성 밖에서 시차를 두고 시위가 이어졌다. 학생들은 등교 거부와 동맹 휴학을 했다. 3월 5일 평양 부내 사립학교는 전부 휴교했다. 이날 평양부 성내의 한국인 상점은 절반 이상 문을 닫았다.

이후 일제 헌병·경찰은 3월 2일 새벽부터 평양 3·1운동 주동자 체포에 들어갔다. 3월 8일까지 무자비하게 잡아들였다. 평양 만세시위가 3월 1~6일에 집중된 뒤, 약화된 이유이기도 하다. 김승태 소장의 연구에 따르면 이때 검거된 인원수는 407명이었다. “그 가운데 154명은 태형 혹은 구류로 즉결 처분했다. 주동자로 판단된 48명은 기소를 위해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넘겼다. 그 중 학생 9명, 상업 10명, 직공 3명, 기독교계 목사 11명, 교사 9명, 기타 6명이었다.” 평양 3·1운동이 각계각층의 연대와 지지로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평양 3·1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 등 종교계의 주도로 방아쇠가 당겨졌지만 날이 갈수록 학생과 노동자 계층이 주도했다. 세대와 직종을 불문한 조선인들의 내면에는 공통된 응어리가 새겨져있었다. 어딘가에서 불씨를 당기자 한마음으로 호응한 배경이다.

그 근본적 원인에 관해 이진현 연구사는 이렇게 분석했다.

“조선이란 식민지는 특이했다. 가령 영국이 인도를,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 지배했지만 2만 명 이하의 인구가 건너왔다. 그러나 조선엔 60만 명의 일본인이 들어왔다. 섞여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법 집행 등에서 차별을 했다. 일본이 소위 문화정치를 해서 (조선인들을 향한 가혹 행위를) 다소 완화한 것은 1920년대부터였다. (1919년 3·1운동은) 조선인들의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것이었다.”

결국 3·1운동은 어떻게든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이들과 일제 치하에서 살더라도 차별에 저항하는 이들의 의기투합이었다.

北에서 ‘혁명’은 김일성의 전유물?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9·19 평양공동선언’에서 “남북은 3·1운동 10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하고, 그를 위한 실무적인 방안을 협의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여권에선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으로 부르자”는 ‘정명(正名)론’이 등장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명명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3·1운동의 바른 이름 붙이기에 관해 제안한다”고 불을 지폈다.

분명 3·1만세시위엔 혁명적 요소가 있다. 이진현 연구사는 “기존엔 유생은 유생들만, 천도교는 천도교인들만, 노비는 노비들만 했었다면, 3·1만세시위는 모든 계층이 함께 했다. 민주공화국을 선언한 임시정부의 근간이었다”고 평가했다.

혁명(revolution)은 운동(movement)보다 격상된 위상을 갖는다. 학술적 토론의 범주에 해당될 ‘정명론’에 정치권이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는 가볍지 않은 함의를 지닌다.

북한 역시 정치적 의미에서 3·1운동을 바라본다. 북한은 3·1운동을 ‘기미년 인민봉기’라 칭한다. 그다지 국가적 관심이 없다. 김일성의 행적 이외의 사건에 ‘혁명’이란 용어를 붙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3·1운동 10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려는 한국 정부에 북한이 그다지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는 근원적 이유로 풀이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3월 1일부터 5월 26일까지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서울과 평양의 3·1운동’을 기획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북한 측 자료는 협조받지 못하고 있다. 박물관 측에선 남북역사학자협의회를 통해 ‘3·1운동 100년을 기념하자’는 제안서를 보냈는데 아직도 ‘검토 중’이라는 답변 밖에 온 게 없다고 한다.

북한은 ‘김일성 혁명’ 이전의 역사를 비중 있게 취급하지 않는다. 굳이 의미를 둔다면 김일성의 아버지 혹은 김일성(1919년 당시 7살)이 어렸을 때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정도다. 실제 북한에서 3·1운동 관련 전시회가 열렸다는 이렇다 할 보도는 없었다. 북한의 일반 주민들은 3·1운동을 모른다고 봐야 할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학자들이 학술적으로 3·1운동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역사 해석은 정치적 문제와 결부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의미를 키우고 싶은 한국의 집권여당과는 근본적 지향이 다르다.

북한이 3·1운동 전시회에 적극 협조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국이 주도하는 UN의 대북제재에 있다. 전시회 멤버인 이진현 연구사는 “북한 유물들이 한국에 오려면 실질적으로 북한에 지급돼야 하는 부분들이 발생한다. 보험도 장애요소”라고 지적했다.

이런 현실에서 2018년 7월 출범한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통일부가 추진하는 남북공동행사는 기념식 장소부터 미정이다. 북·미 정상회담이 2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되는 상황이라 더 묻힐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답보 상태를 딛고 극적으로 9·19 평양공동선언의 약속은 지켜질 수 있을까? 아울러 정치를 초월해 실체적 진실인 평양 등 북한 지역의 3·1운동은 재조명될 수 있을까? 100년 전의 3월 1일 북녘땅에서도 만세를 부른 사람들은 있었다.

-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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