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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22)] 타르사막의 여명과 한밤의 빗줄기 

무위에 고립된 존재의 허약함이여! 

새벽부터 일몰까지 변화무쌍한 풍경에 취해 온종일 작품에 몰입
극심한 몸살 뒤 깨달은 나약함과 사막 가족들의 따뜻한 인간애


▎찰나의 순간을 담기 위한 과정은 무척 지난하기만 하다. 시시때때로 빛이 변하는 일몰의 광경을 사진에 담고자 온종일 사막을 누벼야 했다.
보마(Bhoma)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모든 사람을 위해 짜이(chai: 우리말의 차. 서양말의 tea, tay, chaa가 모두 ‘짜이’에서 유래되었다)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 속에 든 카페인·밀크·설탕은 우리의 에너지를 보충시켜 주었고 생강이나 독특한 스파이스는 몸을 덮여주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다디야(Dadiya)는 납작하고 효모가 들어가 있지 않은 짜파티(chapati)라고 부르는 빵(아니 호떡이라 해야 할 것 같다)을 만들었다.

기성품이 아닌 원재료들을 써서 즉석에서 만든다. 밀가루·소금·물만으로 반죽한 것을 양 손바닥으로 왔다갔다 두드려가면서 둥그런 종이처럼 얇게 만드는데 그 과정이 아주 흥겨운 콧소리에 맞추어 리드믹하게 이루어진다. 완전히 편편하게 펴지게 되면, 타와(tawa)라 부르는 둥근 오목쇠판이 장작불에 달아오를 때, 그것을 탁 던져 호떡을 구워낸다. 사막 한가운데서 그토록 맛있는 빵을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기술은 참으로 놀라웠다.

주 요리는 채소 카레다. 감자·캐비지·양파를 먼저 기름에 볶아 물을 붓고 향신료를 넣어 끓인다. 구성물은 매우 단순했지만, 사용하는 향신료들이 요리를 매우 맛있게 만들었다. 물론 시장이 반찬이라는 배고픔 덕도 있었겠지만, 나는 두 접시를 가득히 널름 다 먹었다. 짜파티로 접시를 훑어가면서 싹싹 비웠다.

그날의 노동으로 고갈된 에너지를 채울 만큼은 충분히 먹었다. 해는 이미 기울고 있었고, 그날 저녁에 작품사진을 찍을 수 있는 에너지나 시간은 어차피 없었다. 나는 우선 지역의 모래언덕을 여기저기 찍어보았다. 나는 그곳이 우리가 사막의 이미지로 떠올리는 순결한 모래로만 구성된, 식물이 없는 능선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타르사막은 강우량이 꽤 있는 곳이고, 내가 본 어떤 사막보다도 야생식물군이 형성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사람들의 공동체나 농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타르사막은 전 세계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사막으로 꼽힌다. 인구밀도가 1㎢당 83명 정도다. 사하라사막의 인구밀도가 1㎢당 1명인 것에 비하여 매우 높은 편이다.

다음날 사진작업을 해야 할 적절한 장소를 찾아내기에는 너무 지친 상태였다. 나는 그냥 멀리 있는 모래언덕과 농원들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늘은 장밋빛으로 변해갔고, 모래는 머스터드 색의 따스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해가 저문 지 얼마 안 돼 나는 깊고 깊은 잠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주 단순한 침낭에 하나는 깔고 하나는 덮는 두 개의 두꺼운 담요뿐인 원초적 수면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막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머리 위로는 쏟아질 듯 광막한 별들이 나를 덮고 있었다.

최고의 낙타시리즈를 사진에 담은 날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타르사막의 모래는 진한 겨자색으로 물든다.
나는 다음날 아침 매우 일찍 일어났다. 분홍과 자줏빛으로 하늘을 물들인 해가 솟기 시작하자 재빠르게 오렌지색깔의 노란빛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순식간에 카메라장비들을 챙기고 촬영하기에 이상적인 장소를 찾기 위해 잠자리를 떠야 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아침의 오염되지 않은 선명한 조명의 시간을 놓칠 수가 없다. 최상의 조명 조건의 카이로스는 역시 촉촉한 아침 햇살이다.

다디야는 발빠르게 움직여주었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실현시켜 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나는 다디야에게 단 한 마리의 낙타라도 우선 준비시켜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일출의 아름다운 광채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광채는 너무도 빨리 중천으로 떠버리는 태양과 더불어 매우 맛없는 깔깔한 직사광으로 변해 버리기 때문이다.

다디야가 나와 같이 움직이면서 나의 촬영을 도와주고 있는 동안에 보마는 나머지 낙타들과 짐들을 관리하면서 뒤에 처져 있었다. 보마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여성의 나체를 직접 본다는 것이 그들의 문화관습에 부적절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곧 다디야와의 작업을 매우 편안하게 느끼게 되었다. 다디야는 완벽하게 프로페셔널했고 고도의 집중력을 소유한 조력자였다. 한바탕의 작업을 완수한 후 나의 만족도는 높아져갔다.

여명에서 일몰까지, 순결한 모래가 있는 두 지역에서 일고 여덟 장소로 이동했다. 물론 이 작업현장은 관광객들이 미칠 수 없는 곳이었다. 아마도 나의 사진작업 역사에 있어서 가장 다산(多産)의 하루였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다디야는 여태까지 내가 만난 어떠한 조수보다도 더 효율적인 감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훈련된 사진작업의 전문조수보다도 몇 배 더 나를 편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 지역 사막의 시각적 언어를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내가 사막의 한 지점을 가리킬 때, 그는 내가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지를 정확히 직감하고 있었다. 모두 밋밋하고 층층이 전개되는 모래언덕 지역에서 그 포인트를 정확히 숙지하는 것은 놀라운 감각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카메라의 전경 시야에 낙타의 발자국이 자연스러운 모래사막의 주름을 흩트리면 안 되기 때문에 그 포인트까지 낙타를 데리고 우회해서 포인트에 갑자기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 어려운 작업을 그는 항상 정확히 수행했다.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장소에 그는 신속히 카메라의 뷰파인더 안에 등장하곤 했다. 그러면 내가 카메라의 상태를 다 조정해놓고, 다디야가 낙타를 데리고 있는 곳까지 가서 옷을 벗고 낙타와 포즈를 취하고 있는 동안 다디야는 카메라로 돌아와 셔터를 눌러댔다. 이런 작업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다디야는 실수 없이 내가 원하는 그림을 잡아냈다.

사실 카메라에 나타나는 2차원적 평면 영상의 한 지점이 실제로 어디를 의미하는지를 기억하고 그 장소로 신속히 이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광학적인 환각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실제 거리보다 시각상의 거리는 매우 가까운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리의 표준으로 삼을 만한 아무런 스케일도 없으니 더욱 난감하다. 그러나 다디야는 항상 내가 막연하게 가리키는 그 지점, 정확히 그 지점에 기적적으로 나타나곤 했다. 그것은 지리감각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나의 마음을 읽는 독심능력(讀心能力)이 탁월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초막 한 칸에 의지한 사막의 ‘우중야(雨中夜)’


▎해가 지는 사막은 여명과 달리 명암이 더욱 짙어진다.
나의 낙타시리즈 작품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영상을 창조해 낸 그 위대한 날, 해가 가라앉은 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흥분이나 감격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저녁을 먹고, 짜이를 마시고, 조금 쉬었다 곯아떨어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토록 많은 작업을 한 날, 손흥민이 그라운드를 열심히 뛰어다닌 것처럼 열심히 뛰어다닌 그날, 저녁 일찍 곯아떨어진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한밤중에 추위와 습기를 느끼며 일어나야 했다. 사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아무 것도 알지를 못했다. 점차 눈이 떠지고 정신이 들자, 비가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디야는 일어나서, 매우 널찍한 투명한 플라스틱시트를 가져와 펼쳐놓고 담요를 움직여 빠듯하게 플라스틱시트 속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잠자리를 한 플라스틱이불 속에 다 집어넣는 것이다. 빗속에서 이런 식으로 잠을 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는 명약관화하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너무도 지쳐있었기 때문에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비닐(플라스틱)시트 속으로 비비고 들어가 한동안 곯아떨어져 잤다.

그러나 그 놈의 비닐시트는 구멍투성이였고, 비는 계속 쏟아졌다. 모래바닥 양쪽으로 물이 스며들었다. 다시 정신 차리고 깨어났을 때 비는 계속 쏟아졌고, 담요는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내 머리와 옷이 모두 질척거렸다. 다디야는 나를 두드리더니 일어나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는 그 플라스틱시트를 머리에 이고, 한 십오 분가량을 우중에 걸어갔다. 그리고 곧 쓰러질 것 같은 작은 오두막에 도착했다.

오두막은 4개의 나무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한 면은 개방되어 있었는데, 지붕은 초가집처럼 사막의 초목으로 이엉을 엮어놓았다. 3면의 벽도 빗자루 만드는 풀과 같은 것으로 대충 엮이어 막혀 있었다. 지붕과 벽에서 빗방울이 계속 떨어지기는 했지만 사막에 누워 비를 맞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보마는 낙타를 보러 나갔다. 우리의 모든 짐도 빗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다디야와 나는 오두막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사막에서 한밤 중에 비를 맞고 아무런 보호막 없이 덜덜 떨고 있었던 그 감각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것이 젖었다. 체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두 손으로 무릎을 껴안고 품안의 온도라도 유지하는 길 밖엔 없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연적 환경으로부터 내 몸 하나라도 보호할 수 있는 단순한 주거 형태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토록 절감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인간은 진실로 무위(無爲)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긴 하지만 이미 그 무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유위(有爲)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도록 진화된 동물이라는 사실을 살아생전 처음 실존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 오두막에서 추위와 싸우며 고문당하듯 긴 시간을 보내다가, 나는 무릎을 두 팔로 감싼 채 그냥 기절해버렸다. 내가 다시 두 눈을 떴을 때는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고 비가 그친 뒤였다. 나는 그날 아침 무엇이 나에게 그런 무지막지한 에너지를 주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전에 미친 듯이 또 하나의 작품 촬영판을 벌였다. 마치 그 전날 숙면을 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사람처럼 건강하게 활동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나는 모든 짐을 꾸려서 나의 유순한 낙타를 타고 다시 자이살메르로 가는 여행을 묵묵히 감행하였다. 두 시간 동안 낙타를 타고 갔다. 그리고 30분가량 기다리니 자이살메르로 가는 지프차가 왔다. 수라즈빌라스호텔(Hotel Suraj Vilas)에 도착했을 때야 비로소 나는 심각하게 아프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작품을 완성해야 한다는 집념에 열중하고 있었던 그 과정의 집요함 때문에 고열이 있다는 것조차 인지 못하도록 의식에 강렬한 커튼을 쳤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의식이 나의 편치 못함을 수용하는 순간에 체온이 갑자기 치솟았을 수도 있다.

드디어 나는 방에 왔고 침대로 왔다. 그 유위의 환경이 의식을 느슨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좌우지간, 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위에 나무토막 쓰러지듯 쿵 하고 쓰러졌다. 저 하데스의 침울 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무서운 한기가 나의 몸을 주체할 수 없도록 떨게 만들었다. 아주 끔찍한 한기와 열기였다.

온전히 쉬고 잠을 청하기 위해서는 몸부터 씻어야만 했다. 사막여행으로부터 때가 덕지덕지 끼어 불편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나는 비실비실 욕실로 걸어 들어가 더운물 꼭지를 틀었으나 이내 그곳에 더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 더운물을 달라고 요청했다. 아무도 없었고 홀쭉한 랄라(Lala)라는 10대 소년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호텔 매니저인 치미(Chimmy)의 동생이었다.

존재의 나약함에 흘린 눈물


▎사막에서 밤비를 맞고 지독한 몸살에 걸렸을 때 아니켓의 엄마가 필자를 위해 손수 만들어준 따뜻한 음식.
랄라는 나에게 항상 아침을 서브해주었던 매우 친절하고 명랑한 소년이었다. 그는 항상 팝음악이나 그가 좋아하는 서양의 풍물에 관하여 나에게 묻곤 했다.

그에게 더운물 좀 달라고 했더니 더운물을 끓여서 한 양동이를 이층으로 올려 보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몸을 질질 끌면서 간신히 계단을 올라와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한 양동이의 물을 가지고 올 때까지 억지로 눈을 뜨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한 양동이의 더운물을 지친 몸으로 기다렸으나 결국 그 소년은 오지 않았다.

30분이 지났고, 또 한 시간이 지났다.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베란다 회랑으로 나아가 내부의 코트야드를 내려다보았다. 분노의 기운조차 없었지만, 아래층을 향해 그냥 소리쳤다. 그제서야 10분가량 지나자, 랄라는 드디어 한 양동이의 더운물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일층에서 이층 베란다 쪽으로 밧줄을 던져 난간에 걸쳐놓았다. 그리고 나 보고 그 밧줄을 잡아당겨 양동이를 끌어올리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나는 그 밧줄을 당길 힘이 없었다. 불가하다고 말하자, 그는 계단을 올라와서 그 양동이를 잡아 올렸다. 나는 그것을 기다리는 동안 서러움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눈물은 아마도 내 몸의 고열, 더운물조차 얻을 수 없는 문명의 결여로부터 발생하는 극심한 불만, 집이라는 안락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생겨난 것이리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물이 터져 나온 것은 존재의 허약의 느낌 때문이었다. 신체적 한계가 불러일으키는 존재의 허약처럼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 무서운 고문을 견뎌낸 많은 투사들의 의지를 생각하며 나란 존재의 초라함은 더더욱 눈물을 자아냈다.

내 뺨으로 눈물이 죽죽 흘러내리는 것을 목격한 랄라는 순간 당황해했다. 자기가 잠자느라고 더운물을 잊어버리고만 사실 때문에 내가 우는 것인지, 그는 걱정스러워했다. 나는 말했다. “걱정마! 나는 정말 너무 아프단다.” 그리곤 빨리 방문을 닫았다. 한 손에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어 더운물을 쏟고 또 남은 한 손으로 몸을 문질러대는 것이 매우 불편했으나, 어쨌든 찬물 샤워보다는 나았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잠자리에 누웠으나 몸의 고열과 근육통은 눈물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어둡고 고립된 방 속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 없이 홀로 누워있어야만 했다.

얼마 지나고, 나는 목구멍이 칼칼하고 따끔따끔하면서 찾아온 극심한 갈증을 느끼며 일어났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회랑으로 나아가 난간에 기대어 인도할머니처럼 소리를 쳤다. 랄라가 코트야드에 나왔을 때, 그에게 생강을 꿀과 함께 달여 올려줄 것과, 또 한 주전자의 끓인 맹물을 같이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 놀랍게도, 생강과 꿀이 준비되어 있었고, 또 달인 물은 제대로 된 강렬한 맛이 있었다. 나는 하룻밤 지나는 동안 여러 번에 걸쳐 생강차를 요청했고 두꺼운 이불 속에서 흥건하게 땀을 배출했다. 긴급 자가치료는 효용이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오후를 지내면서 그래도 고열은 좀 가라앉은 것 같았다.

정성 가득한 도시락이 전해준 인류애


▎수백 개의 계단이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어낸 지하우물 찬드 바오리.
같은 날 저녁 9시경, 아니켓이 의외의 방문을 했고, 내 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만든 홈메이드 디너를 가지고 왔다. 그 저녁은 내가 중학교 때 한국에서 가지고 다녔던 몇 층으로 된 원통형 도시락과 비슷한 통에 아주 예쁘게 담겨져 있었다. 아니켓은 나의 방문 밖에 있는 회랑 휴게실에다가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를 놓았다. 내가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그는 두 개의 접시와 은수저를 가져와 도시락 속 음식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완두콩을 넣은 쌀밥과 짜파티, 카레로 볶은 채소요리, 납작한 렌즈콩으로 만든 걸쭉한 수프, 도넛처럼 생긴 튀긴 빵이 펼쳐질 때 나는 또다시 울 뻔했다. 물론 이번 울음은 나를 돌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고마움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리라. 울음은 존재의 허약함으로부터도 생겨나지만, 또한 존재의 포만감으로부터 생겨나기도 하는 것 같다. 랄라가 아니켓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심하게 아프다고 이야기한 것 같다. 그래서 아니켓의 어머니가 두 사람을 위한 저녁도시락을 만들어준 것이다. 사실 이 지구상에는 인간이라는 공통분모로 인하여 최소한의 온정과 사랑을 베푸는 따스한 감정이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다. 이 문명인들은 나에게 너무도 친절했다.

병상(病狀)으로부터 완벽하게 회복하는 데 하루를 더 누워있어야 했다. 그 다음날에야 비로소 다시 사막으로 갈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다. 2013년 2월 7일, 나는 다디야에게 다시 갔다. 우선 아니켓이 관장하는 관광객들과 함께 다시 이전에 갔던 코스로 사막으로 향했다. 그것은 곧 버려진 쿨다라 마을에 다시 들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내가 주목하지 못했던 새로운 유적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지하로 뚫린 직사각형의 기다란 통로였는데 계단이 매우 깊은 데까지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계단의 끝은 너무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쿨다라 마을의 계단우물에 새겨진 힌두교의 신 가네쉬.
나는 낙타작품사진 시리즈 이전에 전 세계 대도시들의 지하세계를 다룬 작품들을 전시회[갤러리 현대, 강남 스페이스, ‘나도(裸都)의 우수(憂愁)’-Naked City Spleen, 2009. 8. 25~9.13] 테마로 삼았었기 때문에 지하세계에 관해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그 계단이 지하터널로 연결된 것이라 생각하고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았는데, 그 계단은 벽으로 막혀 있었다. 그 벽 한가운데 있는 벽돌 하나에는 가네쉬 신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가네쉬는 두상은 코끼리형상이고, 그의 발 주변에는 항상 쥐 한 마리 혹은 뒤쥐(shrew)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가네쉬는 모든 장애를 제거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또 동시에 장애를 설치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기묘한 구조물에 깊은 인상을 받고, 다시 밖으로 나와서 아니켓에게 그 지하계단이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를 물어보았다.

지하우물에서 목격한 인도문명의 신비


▎금속 장신구로 한껏 멋을 낸 다디야의 부인.
그것은 인도문명의 신비로운 현상 중 하나인데, ‘우물’을 의미한다고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단우물(stepwell)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계단우물은 우리의 평범한 상상력을 초월하는 매우 정교한 구조물로서 엄청난 돌계단의 기하학적 구조로 이루어진 지하샘물이다. 샘물 하나를 만들기 위해 강남의 고층빌딩을 짓는 것보다 더 많은 수공을 들이는 것이다. 나는 도대체 왜 인도인들이 단지 물의 공급을 위해 그토록 거대한 계단구조를 만드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계단우물 주변에도 단순한 원통의 우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계단구조는 지진으로부터 수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까?

아무래도 물을 긷는 사람들은 여성이 주류이고, 이들이 계단을 내려갔다 올라가는 행위를 통해 신과 교섭하는 제식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돌계단에는 힌두신들이 새겨져 있고, 또 많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는 장식이 많다. 인도에서는 이 계단우물을 ‘바오리(baori)’라고 부르는데, 인도 전역에 수천 개가 있다. 서부 지역에 많으며 파키스탄까지 퍼져있다. 그 옛날의 모습은 정말 찬란했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쓰는 사람이 없고, 파손된 채로 있고, 쓰레기와 더러운 물로 가득 차있다.

관광명소로 지정된 것들은 아직도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데 제일 유명한 계단우물이 찬드 바오리(Chand Baori)라 부르는 것이다. 개방된 직사각형의 우물이며 사방의 벽은 반복되는 기하학적 형상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8세기 때부터 시작되어 18세기 무굴제국시대에까지 내려오는 이 우물은 13층 350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깊이는 30m에 이르며 그 아래에 내려가면 평상 온도보다 5~6도가 낮기 때문에 여인들이 그곳에 앉아 담소하기에 너무 좋은 곳이었다. 버려진 쿨다라의 우물은 그러한 메이저 사이트에 비하면 작고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바오리문화 전체를 이해하고 나니 쿨다라의 우물도 강렬한 오오라를 풍겼고 나에게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다.


▎다디야 형의 오두막집. 세 채의 오두막에서 여섯 명의 일가족이 모여 산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나는 다디야가 낙타를 데리고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자동차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낙타가 두 마리밖에 없었다. 한 마리는 다디야 자신을 위한 것이고, 또 한 마리는 내가 타기 편한 유순한 브라운 색깔의 낙타였다. 한 시간 정도 모래언덕을 가로질러 평평한 지형에 3세대가 같이 살고 있는 오두막 공동체에 도착했다. 그 마을은 둘러쳐 있는 모래언덕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이러한 작은 지역공동체를 라자스탄에서는 다아니(dhani)라고 부른다.

진흙으로 빚어낸 여섯 가족의 작은 보금자리


▎사막의 촬영을 도와준 다디야의 오두막집과 부인, 자녀들.
다아니에는 단지 세 개의 전통적 진흙집이 있었다. 이 진흙집은 매우 단순하고 작은 원통형의 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정면에는 대문에 해당하는 입구가 그냥 뻥 뚫려 있다. 그리고 집 안에는 몇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유리문 같은 것은 일체 없다. 이 구멍들은 창문으로 기능하는데, 광선과 통풍, 그리고 밖을 나가지 않고도 다양한 각도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 그리고 원통형의 벽 위로는 나무로 엮은 원뿔형의 천정이 있고, 그 천정 위로 초가 이엉이 얹혀져있는 것이다. 원뿔형의 천정은 더운 공기를 위로 빼어내어 실내의 온도를 낮추는 기능이 있다. 이 원초적인 진흙 원통형의 집은 너무도 작고 귀엽게 보여 꼭 만화에 나오는 곳 같았다.

그러나 그 작은 공간 속에서 한 세대의 모든 삶이 펼쳐지고 있다. 대여섯 식구의 침실과 부엌이 극히 좁은 공간 안에다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오두막집은 같이 붙어있다. 그리고 진흙으로 만든 담이 한 집마다 독자적으로 둘러 쳐져 있다(진흙벽은 겉으로 진흙을 발라 안 보이지만 진흙 벽돌로 쌓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중 한 집은 직사각형의 창고를 오른편에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 창고는 시멘트 벽돌과 철문으로 지어졌다. 그러니까 시멘트 벽돌 창고는 그 두 집 옆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사람이 자지 않는다.

제3의 진흙집은 창고헛간으로부터 50m 가량 떨어진 곳에 동떨어져 있다. 나는 결국 이 세 집이 다디야와 다디야 두 형제들, 세 핵가족을 위한 아기자기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전통의상과 보석으로 치장한 노년의 부인이 창고헛간이 있는 가운데 오두막으로부터 나와, 웃으면서 매우 시끄럽게 뭐라고 말했다. 두 십대의 소녀들이 마당에서 일하는 중에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흘끗 쳐다보았지만, 가까이 와서 말을 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운데 집 노부인(형수)과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에 다디야는 나를 50m 밖에 떨어져 있는, 진흙담이 둘러쳐져 있지 않는 제3의 오두막집으로 데려갔다. 다디야의 부인은 짙은 색 피부의 매우 잘생긴 여인이었다. 건장한 몸매에 아주 짙게 수놓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옷에는 아주 많은 거추장스럽게 보이는 무게감 있는 보석이 장식되어 있었다. 이토록 원초적인 소박한 환경에서 여인의 몸에 보석이 그토록 찬란하게 장식되어진 상황은 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문화적 심층을 드러내고 있다 할 것이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903호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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