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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대한노인회중앙회 공동기획 同行(2) | 존경받는 시니어, 골드보이가 간다] 포크가수 ‘외길’ 양희은의 집념 

“내 인생에 절정은 아직··· 그래도 ‘아침이슬’ 넘긴 어려워”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1971년 송창식 추천으로 서울 명동 ‘오비스 캐빈’에서 데뷔
2014년부턴 후배들과 ‘뜻밖의 만남’ 통해 제3의 전성기 달려


▎2월 26일 서울 용산 호텔플렉스(Hotel-plex) 서울드래곤시티 26층 라운지에서 월간중앙과 만난 양희은.
양희은(67)은 대뜸 사진 걱정부터 했다. “이 인터뷰가 봄에 (월간중앙에 기사로) 나가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두꺼운 털목도리를 하고 있어서….”

양희은을 만난 건 겨울의 끝자락인 2월 26일이었다. 이미 한낮에는 봄기운이 완연해졌다.

49년차 가수 양희은에겐 두 가지 철칙(鐵則)이 있다. 목 보호를 위해 소금물 양치를 자주 하는 것, 또 하나는 목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다.

“삼복더위에도 머플러를 하고 다녀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기도 하지만 저는 습관이 돼서 그런지 별로 덥지도 않더라고요. 가수에겐 목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요?”

서울 가회동에서 3녀 중 장녀로 태어난 양희은은 서울재동초등학교·경기여중·경기여고를 거쳐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선친은 육사-보병학교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며, 양희은이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다.

대학교 1학년이던 1971년 ‘아침이슬’로 데뷔한 양희은은 “양희은이 먹고살려고 노래를 시작했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환상이 깨진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건 사실이다. 나에겐 홀어머니 그리고 두 동생과 함께 먹고사는 문제가 너무 절실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요?

“1월 19일까지 전국 12개 도시를 돌며 콘서트를 했어요. 그게 끝나고 나니까 긴장이 확 풀리면서 좀 멍한 상태가 됐어요. 48년 동안 공연을 했지만 12개 도시를 근 석 달 만에 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동하는 데 힘이 들었던 것 같고요. 기차로 갈 수 있는 곳은 다행이었지만, 기차가 닿지 않는 곳까지 가는 데는 더 힘이 들었어요. 저는 (공연을 마치고) 늘 당일에 귀가하거든요. 주말마다 새벽 1~2시는 돼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죠. 저는 10시쯤 자고 6시쯤 일어나는 게 루틴입니다. 그게 깨지니까 힘들더라고요.”

“이 돈 받으면 5만원짜리 가수가 되잖아요?”


▎1971년 양희은의 데뷔 앨범 재킷.
1971년 데뷔면 근 50년입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50년, 진짜 실감 안 나요. 찰나 같아요. 사실 몇 년 안 됐죠(웃음).”

데뷔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1987년 거행된 조중문·양희은 부부의 결혼식.
“대학교 1학년 때 송창식(72) 선배의 추천과 소개로, 아르바이트 학생 신분으로 무대에서 노래하게 됐어요. 당시 집안이 너무 어려웠거든요. 어머니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온가족이 거리로 쫓겨날 판이었습니다. 밥·등록금·회수권 모두 궁했어요. 그런데 저한테 데뷔 계기를 묻는 분들 중에서 ‘양희은이 돈 때문에 노래를 불렀다’고 하면 환상이 깨진다고 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이 세상에서 먹기 위해 일하는 것처럼 절실한 건 없어요. 저는 하루도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어요. 하루 빠지면 그만큼 돈이 적게 나오니까요. ‘오비스 캐빈’이라는 업소는 노란 봉투에 돈을 담아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월급을) 줬는데, 빠지는 날만큼 돈도 빠졌죠. 이종범씨가 그 업소의 상무였는데 그분이 오디션에서 저를 뽑으셨어요. 그분 역시 바리톤 출신의 성악가셨고요. 그분 아버지가 이지재 선생이란 분인데 동아방송이 광화문 네 거리에 있던 시절에 큰 다방을 운영해서 돈을 번, 그 업계의 재벌같은 분이셨어요. 6·25 때도 때 LP판만 가지고 피란했을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70년대 모든 방송사 PD들이 그곳(오비스 캐빈)에 가서 방송 자료나 음반을 빌려가곤 했어요. 업소 3층엔 신중현 사단, 2층엔 통기타와 피아노 무대 등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PD들도 거기로 가야 (가수) 섭외가 가능했던 거죠. 어느 날 라디오 PD들이 제 노래를 듣고 ‘음반으로 내주면 어떨까’라고 제안했고, 저를 킹레코드사에 소개하면서 음반을 취입하게 됐습니다.”

1969년 무렵 통기타 문화는 서울 무교동에서 명동으로 옮겨갔다. 국내에 생맥주가 상륙하던 무렵이었다. 명동 일대에 생맥주 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던 청년문화에 생맥주가 가세한 시점이었다. 그 중심에 ‘오비스 캐빈’이 있었다.

‘오비스 캐빈’이 자리한 건물의 주인은 자유당 시절 ‘정치 주먹’으로 유명했던 이정재의 사촌동생 이지재씨였다. 이지재씨의 차남 이종범씨가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의 ‘오비스캐빈’ 건물을 맡아 운영했다. 한양대 음대 출신이었던 그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오비스 캐빈’에서 고정출연 제안이 들어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대기업 신입사원 월급이 1만8000원쯤이던 시절, ‘오비스 캐빈’의 하루 저녁 출연료가 500원이었다. 유명 가수가 고정 출연할 경우 월 2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발표하신 음반과 곡은 다해서 얼마나 될까요?

“기억 안 한 지 오래됐어요. 킹레코드사가 무너지고, 그 아저씨(사장)가 힘들었을 때 제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모든 자금을 빌려드렸어요. 그랬는데 그분이 갚지 않았고, 1971년부터 제 (앨범) 원본을 저한테 주는 것으로 (채무 변제를) 대신했죠. 1971년 데뷔 앨범 작업을 마치고 나니까 그 아저씨가 저한테 5만원을 주더라고요. 당시 대학 등록금이 7000~1만5000원쯤이었을 때니까 큰돈이었죠. 하지만 저는 그 돈을 안 받았어요. 아저씨가 굉장히 놀라더라고요. 햇병아리도 못 되는 주제에 ‘아저씨, 그 돈을 받으면 제가 5만원짜리 가수가 되잖아요. 저 안 받을래요’라고 거절했어요. 아저씨는 제게 ‘너는 우리나라에서 누가 최고 여가수라고 생각하니? 김추자? 펄시스터스? 네가 그들을 능가하게 될 거야’라고 하셨죠.”

양희은이 발표한 음반은 정규 앨범 기준으로 20장 가까이 된다. 반세기 가수 인생에 비해 많다고 하긴 어렵다. 그만큼 양희은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발표 앨범이나 곡 수는) 기억한 지 오래됐다”는 양희은의 한마디가 많은 걸 함축하고 있다.

특별히 아끼시는 곡이 있나요?

“1972년에 나온 ‘백구’ 라는 노래를 굉장히 아껴요. 사실 그 노래의 가사는 양희정이라는 내 막냇동생이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은 글인데, 거기에 김민기 선배가 곡을 붙여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작권 같은 데 관심이 없었던 시절이라 그냥 김민기 작사·작곡으로 발표한 거죠. 그 노래를 들으면 아버지 살아계실 때 우리 집 풍광이 아련히 그려져서 참 좋아요. 어린 시절 내 마음속의 스틸(still) 사진이라고나 할까요?”

아버지가 일찍 떠나셨죠?

“네, 제가 13세이던 1964년에 병환으로 먼저 가셨죠. 작년 10월 2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날이 아버지 54주기였어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지만 저에겐 좀 특별했죠.”

늘 밝고 에너지 넘치는 양희은이지만 지난날, 특히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떠올릴 땐 눈물이 맺혔다. 안경테가 빨간색이라 그런지 양희은의 눈은 유난히 빨개 보였다.

꽤 오래전부터 젊은 후배들과 협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이대로라면 밀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옛날 노래만 부르고 싶지도 않았고요. 사람들은 늘 ‘아침이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상록수’, ‘한계령’ 같은 노래들을 신청하잖아요? ‘한계령’만 해도 1985년에 발표한 노래입니다. 언제까지나 추억만 팔고 싶진 않았어요. 돌파구를 고민했죠. 그런데 저는 낯을 많이 가려요. 늘 작업하는 친구들하고만 해왔어요. 1990년대 제가 만든 노래의 대부분은 양희은 작사, 김영국 작곡이에요. 제가 콘서트를 시작한 94년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음악가가 김영국씨입니다. 2013년 어느 날 김영국씨가 ‘누나, 다른 포맷으로 갈 필요가 있어요’라고 제안하더라고요. 그 제안을 받아들여 2014년부터 후배들과 협업을 시작했어요. 윤종신·이적·이상순·강승원·김창기·악동뮤지션·성시경 씨 등과 함께했죠.”

양희은이 이른바 ‘뜻밖의 만남’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2014년. 음악적 색깔이 전혀 달라 보이는 음악인과 손을 잡았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양희은이 1991년 발표한 앨범 [양희은 1991]과 유사한 점이 있다. [양희은 1991]은 기타리스트 이병우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 유학 시절 미국에 있는 양희은에게로 날아가 합작한 앨범이다. 다른 악기를 배제한 채 기타와 목소리만으로만 앨범을 채웠다. 이 작품은 한국 대중음악의 명반(名盤) 중 하나로 평가된다.

성시경이 만든 곡 ‘늘 그대’를 들어보면 귀를 의심하게 됩니다. ‘양희은 노래 중 이렇게 낮은 음으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었나’ 하고요.

“맞아요. 그런데 저는 시경씨한테 어떻게 해달라고 요청한 게 없어요. 저는 제작에 관여 안 합니다. 관여하면 ‘뜻밖의 만남’이란 의미가 없어요. 아마도 시경씨가 ‘양희은다움’을 삭히고 싶었나 봐요. 어떤 이들은 ‘양희은의 음역(音域)을 배려하지 않은 곡’이라고도 하지만 저는 재미있었어요. 낮은 소리 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이상순의 ‘산책’을 들어보세요. 더해요.”

제재와 금지에 의기소침… 라디오에 숨어 살아


▎데뷔 20주년이던 1991년에 발표한 [1991] 앨범 재킷.
가수 인생 50년 중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일까요?

“지금은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보람된 일이 별로 기억나지 않아서(웃음). 인상 깊은 공연은 있죠. 2016년 11월 촛불집회 때, 그때가 나에게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무대가 아니었나 싶어요. 무대에서 바라보는 객석이 참 아름다웠어요. 사람들은 제가 무대에 실제로 서지 않고 음반이 틀어지는 걸로 생각했나 보더라고요.”

가수로서 후회된, 아쉬운 일이 있다면요?


▎데뷔 35주년을 맞은 2006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양희은.
“라디오에 숨은 거요. 가수로서 활동을 굉장히 열심히 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1970년대 제 노래들이 (금지곡이라는) 된서리를 맞다 보니 가수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어요. 나는 (노래에 시대 상황을 담으려고) 의도한 적이 없었거든요. 가까운 사람들이 만들어서 주니까 불렀을 뿐인데…. 1978년 대학 졸업하고 ‘늙은 군인의 노래’가 나왔는데 문화공보부 장관도 아닌 국방부 장관이 군인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전국에 깔려 있는 앨범을 전부 수거해서 파기했어요. 판이 전멸한 거죠.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어요? 암 수술하고 1983년에 ‘하얀 목련’이 나왔는데 학교를 벗어나서 양희은이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첫 번째 노래였던 것 같아요. 1985년에 ‘한계령’을 내놓으니까 킹레코드사 사장이 ‘제발 장사될 노래를 불러줘. 70년대 내가 남산(중앙정보부)에 얼마나 많이 불려간 줄 아니?’라고 하소연하더라고요. 가수 인생에서 후회되는 점이라면 제재와 금지에 지지는 않았지만, 의기소침 내지 방향을 상실했던 거라고 생각해요.‘아침이슬’로 시작했기 때문에 어떤 노래를 불러도 ‘아침이슬’을 넘어설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라디오에 숨어서 살아왔던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떤 면에서는 양희은의 명(命)이 긴 것은 라디오 진행을 쭉 해왔기 때문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배낭여행, 암 수술, 결혼 빼고는 1971년부터 쭉 생방송을 하고 있거든요. 당시 제 방송을 들었던 중고생들이 지금은 50대 후반, 60대니까, 그 사람들 기억 속에는 내 목소리가 있겠죠.”

예전에는 TV 출연은 좀처럼 하지 않았죠?

“TV에 나가면 화장도 해야 하고, (PD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하니까 나답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이렇게 겁만 내지 말고 맞불을 놓자’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때마침 TV에서 (출연) 제의가 왔을 때 수락했어요. 대신 스튜디오 안에 나를 가두지 말고, 내가 다닐 때마다 카메라 몇 대가 따라다니는 식의 프로그램이면 좋겠다고 했죠. [잘 먹고 잘 사는 법] [시골밥상] [행복한 수다] 같은 프로그램들을 재미있게 진행했던 것 같아요. [시골밥상]은 유명한 식당이 아닌 시골 할머니들을 찾아가 그분들이 시키는 대로 음식을 만드는 거잖아요? 참 좋은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들은 저를 TV에서 보신 적이 없더라고요. 목소리만 기억하시는 거죠. 어떤 할머니가 ‘어, 양희은이 입이 비뚤어졌네?’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가장 큰 고비는 남편이 앓아 누웠을 때


▎1973년 카메라 앞에선 양희은(오른쪽)·양희경 자매. 양희경은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양희은이 발표한 노래는 유독 금지곡이 많았다.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할 때 ‘아침이슬’을 비롯한 양희은의 곡들이 많이 불리었기 때문이다. 30곡 이상 금지곡으로 지정됐었다. ‘아침이슬’은 1973년 정부가 선정한 건전가요에 선정됐다. 그런데 그 다음 해인 1974년 가사 중에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대목이 대한민국의 적화(赤化)를 암시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는 이유만으로 금지곡 리스트에 올랐다. 양희은의 금지곡들은 1987년 6·29선언 직후 대부분 해금(解禁)됐다.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는 언제였을까요?

“암 수술도 두 번 하고, 시집가서 미국으로 떠났고, 교통사고도 수도 없이 당했고…. 사람들은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인생에서 가장 속상했을 때는 1997년 남편이 앓아 누웠을 때예요.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얼굴만 빼고 전신이 마비된 채 옴짝달싹할 수 없었거든요. 그렇게 절망적일 때는 없었어요. 그걸 옆에서 본다는 게 참 힘들었어요. 지금은 일상생활이 다 가능하지만 그래도 불치병이라…. 그래서 ‘당신만 있어준다면’(양희은 작사, 김영국 작곡)이란 노래가 나왔어요.”


▎1985년 TV에 출연해 열창하고 있는 양희은.
본인도 건강이 안 좋았잖아요? 어떻게 이겨냈는지요?

“안 이겨냈어요. 그냥 있었어요. ‘내가 살 사람이면 (의사가) 죽겠다고 하더라도 살 것이고, 내가 죽을 사람이라면 살겠다고 버둥거려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대신 친정어머니가 고생하셨죠. 몇 시간 버스 타고 가셔서 유기농 채소 사다 먹이고, 일본 책 사다 무염식·저염식 식단 만들고…. 어느 날 어머니가 시장에 갔을 때 오이지랑 멸치볶음을 먹었는데 눈이 번쩍 뜨이더라고요. 그날부터 환자식단을 거부했어요. 대신 1981년부터 언제나 도시락은 싸가지고 다니고 있어요. 그때부터 사람들과 잘 안 만나게 된 것 같아요. 시커먼 현미밥 싸가지고 다니니까 회식이 쉽지 않았죠. 그걸 계기로 자연스럽게 사람 정리가 되더라고요. ‘많은 거 필요 없다. 대어 한 마리면 된다’(웃음). 내 나이 서른에 가족 위주로 인간관계가 정리됐어요.”

사람들과 교제는 드문 일이겠네요?

“저녁 때 일 없으면 곧장 집으로 들어옵니다. 밖에서 남들과 식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남편도 건강이 힘들었고, 치매 증상 있는 친정어머니가 계시니까요. 누구랑 밥을 먹어서 일을 풀어본 적이 없어요. 교제나 사교 목적으로, 일을 따기 위해 밥 먹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뽑혀야 뽑히는 직업이잖아요? 노력한다고 뽑아주는 게 아니고.”

‘포크가수의 대명사’ 격이시잖아요? 포크음악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요?

“자유로움이죠. 격식 같은 데 얽매지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자유롭게 노래하는 거죠.”

포크음악 아닌 다른 장르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 같은 건 없는가요?

“송창식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양희은은 아침이슬에 갇히지 않았다면 더 큰 가수가 됐을지도 몰라’라고. 그분의 관점이니 모를 일이죠(웃음).”

“노래 안 해도 마음에는 노래가 쌓이더라”


▎2000년쯤 자리를 함께한 김세환·윤형주·양희은·송창식(왼쪽부터).
가수는 인기를 먹고사는 직업입니다. 대중에게 잊힐 때 어떻게 극복해 왔나요?

“나는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를 보지 않아요. 그 눈동자는 언제든 더 매력적인 곳을 향하게 돼 있거든요. 인기라는 건 반드시 굴곡이 있어요. 어떤 인기도 10년 계속되는 건 못 봤어요. 10년 대운(大運)이 들었다고 하잖아요?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나는 내 인생에 절정이라는 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20대 때 양희은 정말 매력 있었어. 그땐 살도 찌지 않았고’라고 하는데…. 저는 등록금이 없어서, 두 번의 휴학과 한 번의 자퇴, 그리고 한 번의 재입학을 통해 만 7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때가 양희은의 절정이라고들 해요. 노래를 열심히 하려고 할 때마다 철퇴를 맞았는데 뭐가 절정인가요? 40대부터는 좀 편해진 게 ‘아침이슬을 능가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돌아보면 화장을 고치는 것도 가계부를 쓰는 것도 다 노래인 것 같아요. 미국에서 살았던 7년 동안 노래는 안 했어요. 그러다 제 자비를 들여서 ‘아침이슬’ 20주년 기념 앨범 [양희은 1991]을 냈어요. 집에 놀러 온 선배가 노래를 듣더니 ‘희은아, 너 그동안 노래 많이 했구나’라고 하더라고요. 난 그 말 믿어요. 노래 안 한다고 노래 안 하는 게 아니예요. 마음에는 노래가 쌓이고 고이거든요.”

MBC 라디오 [여성시대] 진행을 꽤 오래 하고 계시죠?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준 프로그램이죠. 1999년 (배우) 손숙 선배의 대타로 1일 MC를 봤는데 그게 인연이 됐죠. 나중에 들어보니 그 자리에 들어가려고 로비가 엄청났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담당 PD가 인터넷 투표로 새 MC를 결정하기로 했는데 제가 된 거죠.”

[여성시대]는 어떤 매력이 있나요?

“[여성시대]는 손보는 원고가 거의 없어요. 손본다는 건 중복되는 얘기를 좀 줄이는 정도? 이 세상에서 기댈 데가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익명으로 라디오에다 털어놓는 프로그램입니다. 어느 대학보다 기막힌 공부를 한 곳이 여성시대(大)예요. 사실 처음에는 괴로웠어요. 아침마다 그렇게 아픈 이야기를 읽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더구나 저는 극소심 A형이거든요. 제가 읽었던 사연들이 잊히지가 않아요. 방송은 9시5분에 시작되는데 6시40분에 나와 한강 둔치에 앉아서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곤 했죠. 10년쯤 지나면서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았어요. 오는 6월이면 어느덧 만 20년이네요. 1~2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어쩌다 20년이 됐는지…. 그때 콘서트가 굉장히 잘될 때였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MC를 하게 됐어요. 지금도 겨울에 눈이 오면 자다가 1시간 간격으로 커튼을 열어보고 그래요. 시집간 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다가도 제가 진행하던 프로그램 시간이 되면 ‘어머, 내가 지금 어디에 있지? 뭐하고 있지?’ 하면서 깜짝 놀라곤 했어요. 난 언제나 그 시간에 스튜디오 안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제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겁니다.”

“생각만 하지 말고 잘할 수 있는 걸 준비해라”


▎데뷔 초기 김민기와 양희은. 김민기와 양희은은 1970년 한국 포크의 성지로 평가받는 서울 명동 YWCA 청개구리홀에서 처음 만났다.
남성 파트너도 여러 명이었죠?

“김승현·전유성씨 다시 김승현씨 그리고 송승환·강석우·서경석씨예요. 파트너 가운데 서경석씨와 나이 차이(19년)가 가장 많이 나지만 경석씨가 가장 편한 것 같아요. 우리 남편도 ‘요새 당신 얼굴이 가장 편해. 경석씨랑 잘 맞는 것 같아’라고 해요. 나한테 말은 안 하지만 경석씨가 많이 참는 것 같아요(웃음).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과 매일 아침 2시간 동안 함께 이야기를 한다는 건 대단한 인연입니다. 이 프로그램에는 원고도 없잖아요? 자기 경험과 마음으로 진행하는 거예요. 거짓부렁은 금방 들통나요.”

어떤 취미를 갖고 있나요?

“(20년 동안) 아침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방송을 한다는 건 한가한 생활은 아니죠. 그래서 틈나면 집에서 조용히 쉬는 게 취미라고나 할까요? 저에게는 ‘열린 직업의 폐쇄성’ 같은 게 있어요. 일 없으면 집에서 편한 옷 입고 그냥 뒹구는 게 좋아요. 그리고 가끔 여행을 가는 정도?”

건강은 어떠세요?

“요즘 건강은 좋아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물 속에서 아쿠아로빅을 합니다. 물에서 운동하면 무릎에 무리가 안 가서 좋은 것 같아요.”

인생 100세 시대, ‘후반전’을 살고 있습니다. 동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미리 준비하고 실천하라, 생각만 하지 말고. 또 자격증이든 뭐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

어떤 분들과 친한가요?

“저는 어려서 꿈이 코미디언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코미디언들과 친해요. 송은이·박미선·이성미씨는 좋은 동생들이죠. 전유성 선배와도 가깝게 지내고 있어요.”

언제까지 노래하고 싶은가요?

“모르겠어요. 내가 맨날 나한테 하는 질문인데 아직까지 답이 없네요(웃음). 아마도 (젊은 후배들과 협업하는) ‘뜻밖의 만남’으로 마무리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좌우명이 궁금합니다.

“분수를 알라. 네 자신을 알라. 사람은 분수를 지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올해도 콘서트 계획이 있는지요?

“네, 몇 차례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콘서트 준비하면서 50주년(2021년)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가겠죠.”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요?

“가수 생활을 잘 마무리해야죠. 그리고 쉬면서 내 노년을 계획해 봐야 할 테고요. 저 같은 경우는 우리 어머니가 (요단)강 건너 가시면 많은 게 달라질 것 같아요. 우리 가족은 진짜 노령 가족입니다. 어머니 90세, 남편 71세, 나 68세, 개 두 마리 12세니까요. 개 나이 12세를 사람으로 치면 노인 중의 노인이에요. 매일 심장약 먹이고 녹내장약 (눈에) 넣어주고 있어요. 저에게는 돌봐줄 식구들이 많아요.”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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