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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역할론 대 책임론’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 

文 신뢰 업고 ‘남북 FTA’ 군불 땐다 

차재원 부산카톨릭대 초빙교수 jwhn20@naver.com
임명 직후 2차 북·미 회담 결렬 ‘김칫국 마신 격’
“UN대사 때 북한 배워”… 통일 이슈에도 의욕 내비쳐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이 4월 9일 청와대에서 한·미 정상회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한 ·미 정상회담 소식이 전해진 4월 12일 자유한국당은 강한 질타를 쏟아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왜 갔는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뜬구름 정상회담’”이라고 혹평했다.

그런데 다소 이례적으로 회담 ‘실패’의 원인으로 한 사람을 지목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하 김현종)이었다. 그는 “김 차장이 ‘실무회담이 잘 되고 있다’고 예고한 것과 완전히 다른 결과였다”며 ‘김현종 책임론’을 공개 거론했다. 특히 “통상 전문가를 안보 2차장에 임명한 문재인 정부의 아마추어 외교 참사”라고 직격했다.

여야의 대치점, 조국과 김현종

반면 여당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이해식 민주당 대변인은 “한·미는 동맹으로서의 공조를 굳건히 하고 그 바탕 위에서의 북한 비핵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재확인했다”며 “한·미 정상회담은 큰 성과를 남기고 끝났다”고 논평했다. 이 말대로라면, 정상회담 준비를 도맡아온 김현종은 ‘역적’이 아닌 ‘공신’인 셈이다. 청와대 역시 비공개 브리핑에서 북·미 간 중재를 위한 우리 정부의 역할과 관련해 “(두 정상 간) 아주 구체적인 방안들에 관해 아주 허심탄회한 논의가 있었다”며 여운을 남겼다.

그러자 오는 4월 27일 1차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계기로 4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또는 대북특사 파견설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최소한 현 여권의 기류만으로 봤을 때 ‘김현종 책임론’은커녕 오히려 ‘김현종 역할론’이 더 커질 공산이 높다. 외교안보 부처를 오랫동안 출입한 한 전직 언론인은 “국내 정치에서 여야 간 대치점이 조국 민정수석이라면, 안보적 측면에선 김현종을 놓고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한국당이 김현종에 대해 발끈하는 표면상의 이유는 ‘안보 문외한’이라는 점이다. 사실 김현종은 자타 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통상협상 전문가다.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 세계무역기구(WTO) 수석법률자문관, 40대 나이에 장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 발탁, ‘제2의 개항’이라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을 이끈 장본인, 정권을 바꿔가며 통상교섭본부장 재발탁까지. 가히 통상 분야에선 전설로 통하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전임 남관표 안보실 2차장이 북핵 위기 타결을 위해 미국·일본·중국 등 ‘안보외교’에 주력했던 것을 감안하면 한국당의 우려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청와대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김현종의 안보 차장 발탁에 대해 당시 김의겸 대변인은 “통상 전문가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이력을 한번 보시면 (미국) 콜롬비아대학에서 국제정치학으로 학사·석사 과정을 하신 분”이라며 “(여기다) 유엔대사를 하면서 정무적인 감각, 일반적인 국제정치에 대한 감각과 경험을 쌓았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을 상대로 교섭도 하고 새롭게 펼쳐지는 한반도 상황, 동북아 정세 속에서 미국을 직접 상대하면서 우리의 의견도 전달하고, 조율을 해야 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 역할에 적임자”라고 덧붙였다.

정작 한국당이 주목한 부분은 바로 이 부연 설명이었다. 김현종 역할의 초점이 북한이 아니라 미국 설득에만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안보 차장 기용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미 정상들이 북한의 비핵화 담판을 벌였던 2월 28일 낮에 발표됐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낙관한 청와대가 대북제재 완화와 그 이후 본격화할 남북 경제 협력을 위한 미국과의 줄다리기를 감안해 ‘깜짝 발탁’ 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공교롭게도 그의 인사 발표 직후 북·미 정상회담 결렬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당은 물론 언론도 “김칫국부터 마신 꼴” “지나친 낙관이 빚은 인사실패”라고 비판했다. 청와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새누리당 출신 한 전직 의원은 “한국당으로선 북·미 정상회담 무산이라는 상황 변화에도 오로지 남북관계 발전으로 돌파구를 찾겠다는 대통령의 ‘마이 웨이’가 문제라고 보고, 이의 저지를 위해서라도 과거 정권 핵심과의 끈끈한 인연에 바탕한 김현종의 저돌적 스타일부터 확실히 제압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과의 숨겨진 인연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9월 24일(현지시간) 열린 한·미 FTA 개정안에 서명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사실 김현종과 문 대통령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그가 2010년 펴낸 책 [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에는 미국 로펌과 WTO 등 줄곧 해외에서 활동하다 참여정부에 몸을 담게 된 사연이 잘 소개돼 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요청으로 통상 현안 브리핑을 위해 잠깐 귀국했던 김현종은 인상적 브리핑에 마음을 빼앗긴 당선인 측으로부터 동참 제의를 받는다. “내부 회의를 했는데 40대 중반도 안 된 사람을 장관급으로 임용하기는 좀 힘들다는 의견입니다. 그런데 그 밑에 차관보급인 통상교섭조정관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맡아주실 수 있는지요?”

하지만 김현종은 거절한다. “‘부(副)’자가 들어가는 자리는 여러모로 애매한 것 같습니다. 고시 출신이 아닌 제가 그런 자리에 들어가면 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선인 측은 집요했고 그는 마지못해 수락했다. 비슷한 얘기가 [문재인의 운명]에도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현종의 브리핑을) 흡족해 했고, 그를 통상교섭본부에서 일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관료 출신인데다 경력이나 연령을 고려했을 때 바로 본부장에 임명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본부장 바로 밑에 조정관으로 임명했다. 나는 그때 그에게 통상교섭본부에 적응하고 융화하고 평가받는 과정으로 여겨달라고 당부했다.(중략) 충분한 실력과 검증을 받게 한 후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김현종은 밝히지 않았지만, 토라진 그의 마음을 되돌린 사람이 문 대통령임을 알 수 있다. 또 당초 약속대로 ‘적응기’를 거쳐 장관급인 본부장이 되는 데도 나름 노력했음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이 당시 김현종을 민 데 이어 자신이 집권한 후에도 계속 중용하는 이유가 단지 인연과 ‘검증된 실력’ 때문이었을까. 노무현과의 만남을 회고한 김현종의 인터뷰에서 또 다른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김현종은 TBS(교통방송)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노무현 대통령님과는 첫날부터 딱 통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꽂힌 이유로 김현종은 ‘노무현의 애국적 분노’를 꼽으며 “억수로 좋아했다”고 털어 놨다.

특히 보수진영의 정치적 러브콜을 물리친 사연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장수가 주군을 한 분을 모시지 두 분을 모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안 갔습니다.” 노무현에 대한 ‘일편단심’의 속내를 밝히자 반응은 뜨거웠다. 이날 인터뷰의 유투브 동영상에 달린 1500개가 넘는 댓글이 그 증거다.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라는 감동 글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영웅” “야! 이 분, 물건이네” 등 ‘다시보자! 김현종’식의 글이 넘쳐났다. 문 대통령의 공식 팬 카페 ‘문팬’ 동향에 밝은 한 인사는 “김현종에 대한 친노, 친문 진영의 인식은 뉴스공장 인터뷰를 계기로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참여정부 발탁 때부터 곁에서 지켜봤던 문 대통령은 김현종의 정치 코드를 모르고 있었을까. 김현종은 2012년, 2017년 두 차례의 대선 때 열 일 제치고 달려가 도왔다. 그런 그에게 진작부터 정치적 동지의식을 넘어 인간적 신뢰를 느끼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여권의 한 관계자는 “남들이 보기엔 문 대통령이 김현종 만을 너무 중용한다고 시기할 수도 있지만, 김현종 입장에선 다소 섭섭하게 생각할 구석도 있다”고 말했다. 장관급이긴 하지만 통상교섭본부장은 정식 국무위원이 아니다. 특히 통상교섭본부가 외교부에서 산자부 소속으로 편제가 바뀐 뒤 자체 인사권을 박탈당하는 등 파워도 현저히 약화됐다. 때문에 또다시 본부장 제의를 받았을 때 썩 내켜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현종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여기다 이번에 맡은 청와대 안보실 2차장은 차관급이다. 외형상 직급이 좌천된 셈이다. 이 관계자는 “그만큼 두 사람 간 서로 믿음이 없다면 하기 힘든 인사”라고 말했다.

‘검은 머리 외국인’에서 한국인으로


▎2007년 8월 28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한덕수 국무총리, 문재인 비서실장, 김현종 UN대사 등과 한·미 FTA 유공자 오찬장으로 걸어오고 있다.
김현종에겐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는 별명이 하나 있다. ‘검은 머리 외국인.’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외교관인 부친(김병연 전 노르웨이 대사)을 따라 학창시절을 미국과 일본 등 외국에서 보냈다. 요즘도 꿈을 영어로 꿀 만큼 우리말보다 영어가 편하다고 한다.

이런 이력 탓에 참여정부 시절 한·미 FTA 총대를 메자 정권 내부에서조차 ‘친미주의자의 매국’ 행위로 보는 시선이 팽배했었다. 이제 이런 시각은 많이 가셨다. 협상에 임하는 자세와 과정에서 보여준 결기가 나름 진정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협상가가 민족의 운명을 개척한다.” 최근의 한·미 FTA 재협상까지, 그가 상대와 마주 앉을 때마다 어김없이 인용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다. 그만큼 민족의식으로 스스로 무장한다는 얘기다. 미국과의 감정적 마찰도 불사한다.

“당신이 그렇게 우긴다면 이제 남은 것은 ‘고통 없는 죽음(painless death)’뿐이다.” 2007년 막판 협상 때 쌀 시장 개방을 물고 넘어지는 미국 수석대표의 말문을 닿게 만들었던 에피소드는 지금도 회자된다. 무엇보다 대미 무역흑자가 FTA 가동 직전 116억 달러(2011년)에서 불과 5년 사이에 233억 달러(2016년)로 급증하는 등 우리 경제에 큰 이익이 됐다는 점도 이제 그를 ‘검은 머리 한국인’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현종을 바라보는 일부의 시선에선 여전히 불편함이 묻어난다. 현 정부 산자부에서 함께 일한 고위 관료의 말이다. “정말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잘한다. 추진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그러나 인사와 조직 관리에선 미국식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번 눈 밖에 나간 사람에겐 기회를 주지 않는다. 직원들 사이에 불만이 적지 않았다.”

최근 김현종의 청와대행 인사를 전한 한 분석 기사 역시 비슷한 평가를 전했다. “비즈니스 친화력과 달리 성격은 ‘지랄 맞다’ 싶을 정도다. 퇴임사에서 직원들에게 ‘욕먹으면서 영어 배우고 싶으면 청와대로 찾아오라’고 해 화제가 됐다.”

지난 1월 산자부 통상교섭본부 내 1급 고위직 3명이 줄줄이 옷을 벗거나 사의를 밝힌 언론 보도에 대한 그의 처신도 입방아에 올랐다. 언론이 조직 내 불협화음을 원인으로 꼽자 김현종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책임을 떠넘겼다. ‘통상 수장’인 자신에게 “참여정부와 달리 인사권이 없다”는 점과 “외교부와 산업부를 오가는 통상 조직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며 “구조적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FTA의 홈스틸은 바로 남북 FTA”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오른쪽)과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이 3월 4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 시작 전 대화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관가 일각에선 그의 승승장구 배경으로 호남 배후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저의 뿌리는 대한민국 전남 순천 해룡면 신성리입니다. 제 외가는 목포 신안군 팔금면이고요. 순천 사람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김현종이 지난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한 대목이다. 외국 물을 오랫동안 먹었던 만큼 자신의 ‘뿌리’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 정권 내 호남 인맥의 득세를 염두에 둔 처신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역시 김현종을 둘러싼 가장 큰 의구심은 과연 안보 차장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안보는 워낙 특수한 분야로 이쪽에서 오랫동안 일하지 않으면 메커니즘과 정서를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면서 “통상하던 분의 입장에선 욕심을 내기보다 끝까지 고사하는 게 맞았다”고 말했다.

김현종은 마치 이런 지적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지난해 [김어준의 뉴스공장]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2009년 삼성전자 사장을 관둔 뒤) 한 3년 동안 실업자가 됐었죠. 그때 제가 통상을 전문적으로 공부했었는데 다른 분야를 좀 하고 싶어서 통자 돌림에 뭐가 있나 찾아보니까 통일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북한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했었습니다. 사실 유엔대사 시절 때부터 북한에 대해서 공부를 좀 했고요.”

그러나 그는 북한에 대한 나름의 전략을 그 이전부터 갖고 있었다. ‘남북 FTA’가 바로 그것. [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에 나오는 얘기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번트를 대고 열심히 뛰어 슬라이딩까지 해가며 1루에 진출했다. 그것이 칠레·싱가포르와의 FTA였다. 1루에서 2루까지의 도루는 흔히 있는 법이다. 캐나다, EFTA, 그리고 아시안 10개국과의 FTA가 그것이다. 2루에서 3루까지 도루하는 것은 흔치 않지만, 국부를 늘리고 경쟁력을 갖춰 통일을 준비해야 하기에 2루에서 머물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중국·아세안을 합친 시장보다 더 큰 미국과 FTA를 체결하고, EU와 협상을 시작했으며 중국과 예비협상을 개시했다. 그러나 3루까지 도루해도 홈스틸을 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FTA의 홈스틸은 바로 남북 FTA였다.”

노무현 대통령도 “통일로 가는 길이 여러 가지 있는데 FTA도 그중 하나”라는 김현종의 제안에 무릎을 쳤다고 한다. 하지만 남북 FTA는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70년 분단을 강요해온 남북 간 시각 차이, 주변 열강의 복잡한 이해관계, 여기다 여야의 극명한 대립까지 온통 장벽 투성이다. 그래도 김현종은 통일이라는 홈을 향해 과감히 몸을 던질 수 있을까. 아니면 도전도 해보기도 전에 견제구에 걸려 주루사(走壘死)할까. 분명한 사실은 그게 김현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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