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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부자 보고서’로 읽는 한국 부자들의 생각 

“주가 안 오르고 부동산 막혀도 버틴다”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상업용 부동산 매력 떨어져도 부동산 비중 자산의 50% 이상
비관적 경기전망 속 예금 등 안정형 상품 선호


▎부자들도 2019년 투자처를 놓고 고민이 많다. 불확실성이 클수록 안정성을 중시하고 있다.
부자(富者)는 ‘재물이 많아 살림이 넉넉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많다’와 ‘넉넉하다’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정의할 수 없음에도 정의가 필요한 것이 부(富)의 속성이다.

하나은행과 하나금융연구소는 ‘금융자산(주식·채권·예금·신탁 등) 10억원 이상 보유자’를 부자의 범주에 넣는다. 부동산 같은 실물자산은 제외한 숫자다. 국민은행과 KB경영연구소도 동일한 기준으로 ‘한국 부자’를 분류했다.

하나은행은 2018년 10~12월, PB(Private Banking, 거액 예금자 대상으로 컨설팅을 해주는 은행의 전문가) 서비스 이용고객 922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 ‘2019년 부자 보고서’를 발간했다. 조사에 참여한 부자들의 총 자산은 평균 133억4000만원. 가구 연 평균소득은 4억5000만원으로 집계됐다. 국민은행도 2018년 금융자산 5억원 이상 보유자 600명, 금융자산 10억원 이상 보유자 400명을 분석한 ‘2018 한국 부자 보고서’를 내놓았다.

2018년은 주가와 부동산 자산가격의 변동성이 극심했다. 특히 국민은행 보고서가 나온 상반기는 주가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부동산 열풍도 불었다. 그러나 ‘9·13 대책’이 나온 뒤 부동산은 기세가 꺾였다. 주가도 11월 하락세로 돌아섰다. 이즈음 한국의 부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2019년 초에 나온 하나은행 보고서에 그 추이를 가늠해볼 단초가 담겨 있다. 하나은행과 국민은행에서 수집된 두 보고서를 통해 문재인 정부를 사는 부자들의 ‘의식의 흐름’을 들여다볼 수 있다.

안성학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위원은 2019년 가장 주목할만한 부자들의 행동 변화로 “상업용 부동산 비중의 감소”를 꼽았다. 안 연구위원의 관찰에 따르면, 부자들은 연령에 따라 일정한 투자 패턴을 갖는다. 젊을수록 주식·펀드·채권 등 금융자산 비중이 높은 편이다. 그러다가 거주 혹은 투자 목적의 주택 구입 선호도가 올라간다. 더 나이가 들어 은퇴를 고려할 때, 등장하는 수순이 상업용 부동산, 소위 상가 건물이다. 노후를 대비하는 안정적 자금 확보를 겨냥한 확실한 수단으로 통했다. 마지막 단계가 공기 좋은 곳에 별장 짓고 여생을 보내려는 토지 투자였다.

더 이상 조물주 위 건물주 아니다?


▎기준 금리가 동결된 상황에서 은행 PB들도 자산관리전략이 여의치 않다. / 사진 : 우리은행
부자들의 부동산 포트폴리오 중 상업용 부동산 비중을 보자. 40대 38%, 50대 42%, 60대 50%, 70대 이상 51%로 나타난다. 그러나 1년 전 조사에 견줘 상업용 부동산 비중은 전체적으로 5% 포인트 준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 불문하고, 상업용 부동산의 매력을 다소 낮게 보고 있다는 징표다. 반면 거주 목적 주택은 6% 포인트, 투자목적 주택은 4% 포인트 증가했다.

실제 향후 부동산 종류별 투자 의향에서 건물·상가는 36.5%를 얻었다. 2017년의 57%, 2018년의 47.6%인 점을 감안하면 매년 10% 포인트씩 뚝뚝 내려가고 있다.

왜 상업용 부동산 ‘불패신화’가 흔들리는 걸까. 안 위원은 “상업용 부동산 선호 패턴이 빗나가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풀어 쓰면, 그 동안의 부동산 폭등으로 건물 가치가 상승했다. 값이 오르면 부자들한테 좋은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건물은 세입자가 가득 차야 이윤이 커진다. 문제는 현 경제 상황에서 장사하고자 입주할 세입자들이 많지 않다는 데 있다. 공실률이 오르면 건물주의 유지비 부담이 커진다. 한국감정원 자료에 따르면, 중대형 및 소형 상가의 공실률은 2017년을 저점으로 점차 증가하고 있다. 반면 임대수익률은 계속 하락 추세다.

정작 건물 값은 비싸졌는데, 그 건물이 지니는 투자 매력은 떨어지는 모순적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렇다고 부자들이 건물 값을 인위적으로 내리기도 선뜻 내키지 않는 노릇이다. 결국 상업용 부동산을 사들일 구매자가 시장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다. 거래가 안 되니 투자처로서의 매력이 반감된 것이다. 그 대신 자본이득을 취할 목적의 주택 및 아파트 투자 수요가 소폭이나마 증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부자들은 상업용 부동산의 대안으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을까. 하나은행 설문에 응한 부자들 중 46%는 “현재의 자산 구성을 유지할 것”이라고 답했다. 부자들은 2016년 50%, 2017년 51%, 2018년 53%로 나타났듯 최근 3년간 총자산 중 부동산 자산 비중을 50% 이상 가져가고 있다.

부자들이 향후 부동산 시장을 낙관하는 것도 아니다. 향후 5년간 부동산 경기 전망 답변에서 39%가 ‘현 상태로 정체’, 34%가 ‘완만하게 침체’를 예상했다. ‘빠르게 침체’란 비관론은 11%였고, ‘완만하게 회복될 것’이란 기대론은 15% 수준이었다. ‘빠르게 회복’은 0%가 고작이다.

부자들은 향후 5년간 금리 전망에 관해 ‘완만한 상승(69%)’에 베팅했다. ‘현 상태로 상당기간 유지’도 21%에 달했다.

향후 5년간 실물경기 전망에 대해서도 32%가 ‘완만하게 침체’, 24%가 ‘빠르게 침체’라고 답했다. 최근 3년간 조사 중 가장 높은 수치였다. ‘완만하게 회복’은 단지 10%에 머물렀다.

종합하면 2019년을 살아가는 부자들에게 금리, 실물경제, 주식, 부동산, 어느 한군데 우호적인 곳이 없다.

그렇다고 고수익 투자자산으로 각광 받는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를 보는 부자들의 의구심은 일반인보다 더 견고하다. 국민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부자의 암호화폐 투자 경험률(24%)은 일반 투자자(14%)를 웃돈다. 향후 암호화폐에 투자할 의향이 있는 한국 부자의 비중은 2%에 불과하다’고 정리돼 있다. 암호화폐의 미래 성장성을 아직 믿지 못하겠다는 시각이다.

금리는 올랐지만 여전히 저금리 국면이다. 예금과 국공채가 답이 될 수 없음을 뜻한다. 2018년 코스피와 코스닥 지수 상승률은 각각 -17.7%, -16.8%를 기록했다. 주식은 변동성이 높았다. 부자들의 2018년 평균 금융자산 수익률은 1.86%로 나타났다. 전년도 대비 4.75% 포인트나 내려갔다.

부자들은 2019년 투자할 금융상품으로 ELS, ELT 같은 지수연계 금융상품을 1순위로 선택했다. 중위험·중수익 상품을 대체재로 고른 셈이다. 금융권 일각에선 이를 PB효과로 보기도 한다. 익명을 요청한 국내 은행 종사자는 “부자들은 PB를 통해 정보와 서비스를 얻는다”면서 “PB들이 이런 상품을 권하면 하나 정도는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즉 부자들이 확신을 갖고 투자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부자들이 현재 선호하는 투자처는 1년 미만 정기예금이나 MMDA, MMF, CMA 같은 단기 금융상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이 1년 이상 정기예금, 외화예금으로 점쳐진다. 안정추구적인 부자들의 성향이 녹아 있다.

부자들은 견디는 힘이 강하다


▎외환보유액이 증가해도 부자들의 달러 선호도는 여전하다. / 사진:연합뉴스
부자들은 수익·안정·절세 중 전 연령대에 걸쳐서 압도적으로(50% 이상) 안정성, 즉 원금보장을 중시했다. 이는 그만큼 부자들이 불확실한 금융 환경을 예상하고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부자들이 즐겨 찾던 브라질 채권은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안성학 위원은 “절세 효과가 있지만 브라질 정치가 어지럽다”고 그 이유를 풀이했다. 이어 그는 환율 변수를 들었다. “아무리 올라봤자 환율에서 마이너스가 발생하면 반감된다. 위험 자산일 수 있어서 부자들이 두려워한다.”

국내 투자의 대안으로써 해외 신흥국보다 선진국 주식 및 채권이 2019년에는 부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하나은행 조사에서 부자들 중 40.2%는 ‘향후 외화 자산 투자 비중을 확대하겠다’고 응답했다. 이는 전년 대비 8.7% 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부자들의 외화자산 투자 비중은 외화예금(44.6%), 외화 구조화 상품(16.8%), 외화채권(4.5%)의 차례를 보였다 .외화자산 투자, 보유 목적을 보면, 투자 다양성 확보(39%), 유학 및 해외송금 등 사용자금 대비(23.9%), 투자수익획득(19.4%), 정치경제적 위험 대비(15.8%) 순으로 나타났다. 부자들에게 외화자산은 단순 투자 목적을 넘어서 만약의 사태를 염두에 두는 위험 대비용의 성격도 갖는 셈이다.

월간중앙이 만난 안 위원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전했다. “최근 달러 현금을 많이 가지려는 부자들이 눈에 띈다. 전쟁까진 아니어도 한반도 정세가 불안해지거나 금융위기가 다시 오게 되면 달러 가격이 확 올라가는 경험을 거쳤으니까 수요가 몰린다.” 부자들의 달러 선호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 은행권 인사는 “달러는 금과 비슷한 효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돈을 더 벌기 힘들어서 그렇지 부자들 여건은 훨씬 좋다.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체질 자체가 서민과 다르다.

지난해 11월 한국은행은 ‘2018년 3분기 중 가계신용’을 발표했다. 사상 최초로 9월말 가계부채가 1500조원을 넘어섰다. 2018년 12월 공개된 가계금융복지조사에서 국내 가구 중 부채 보유 가구 비율은 63.7%로 나타났다. 평균 부채 잔액은 7531만원이었다.

그러나 하나은행 조사 대상 부자 중 51.7%는 대출이 없는 것으로 집계됐다. 2019년 대출 계획에 관해서도 61.6%가 ‘없다’고 답했다. 부자들은 견딜 수 있는 힘이 서민에 비해 훨씬 강하다는 말이다. 정부가 아파트 다주택자를 억제하기 위해 대출 규제를 가해도 정작 부자들은 영향을 덜 받는 구조다.

또 정보력과 자금력에서도 부자들은 차원이 다르다. 그만큼 돈 벌 기회에 잘 노출돼 있는 것이다. 가령 하나은행 조사에 응한 부자들 중 87.6%는 2017년 ‘8·2 대책’ 이전에 임대 사업자로 등록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부자들의 촉(觸)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앞질러가는 형국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다주택자의 세제 부담을 강화하는 방향성은 강한데, 정작 설문에 응한 부자들의 6.8%만이 기존 보유주택을 매각했다. ‘향후 2~3년 내 매각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도 9.3%에 그쳤다. 부동산 정책이 아무리 강력해도 부자들은 견디겠다는 표시로 풀이된다.

국민은행 보고서에서 ‘한국 부자’의 숫자는 해마다 증가한다. 2014년 이후 10% 이상씩 늘어나고 있다. 2017년에는 27만8000명으로 추산했다. 보고서는 ‘0.54%의 한국 부자가 가계 총 금융자산의 17.6%를 보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자가 불어나는 주된 이유로 전문가들은 고령화를 꼽는다. 즉 부자 아버지가 생전에 장성한 자식들에게 재산을 증여해주면 부자의 숫자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하나은행 보고서에서 부자들 중 57.3%가 ‘상속, 증여를 받은 자산이 있다’라고 답변했다. 자산 이전을 경험한 응답자 중 20.3%가 ‘40~44세 때 받았다’고 답했다. 35~39세(19.8%), 30~34세(15.4%)까지 포함하면 40대 중반 이전에 상당 규모의 자산 이전이 이뤄졌다.

증여와 상속, 부자로 가는 추월차선


▎부자들은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의 투자가치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부자들은 보유 자산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한 투자형태로 부동산(27.2%)을 들었다. 부동산 투자의 사이즈를 생각했을 때, 40대 중반 이전에 상속, 증여 받은 자산이 활용됐음을 추론할 수 있다. 사업 소득, 금융자산 투자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즉 부자들은 부자의 플랫폼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상속·증여뿐 아니라 교육의 기회까지 포함하면 더욱 그렇다.

부자들 중 52.7%는 재산의 일부를 이미 자녀 또는 손자·손녀에게 증여했다고 밝혔다. 증여의 형태는 현금이나 예금이 51.9%로 가장 높았다. 이어 상업용 부동산(20.1%), 주거용 부동산(16.9%)이 뒤를 이었다. 부자들은 절세를 노려 미리 자녀에게 증여를 시작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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