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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초대석] 국내 유일 화폐 영정 작가 이종상 화백 

“독도·혁명까지 붓으로 그려내련다” 

글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 사진 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미술학도 시절부터 4·19혁명 주도, 독도지킴이 활동 등 현실에 적극 참여... 한국 미술의 우수성 세계에 알리며 학문 경계 허무는 통섭 원리 주창

미술 작품 하면 으레 화려한 미술관이나 유명한 화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림은 생각보다 우리 생활의 밀접한 곳에 늘 있다. 그것도 거장의 혼이 담겨있는 수작(秀作)이 말이다. 지갑 속에 들어있는 지폐 이야기다. 지폐에 그려진 인물은 국혼(國魂)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화폐 영정은 당대 최고의 화가가 붓을 잡는다. 당대의 걸작을 우리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셈이다. 5000원권과 5만원권에 그려진 율곡 이이, 신사임당 모자(母子)의 영정을 그린 일랑(一浪) 이종상(81) 화백은 살아있는 국내 유일의 영정 화가다. 화폐 영정뿐만 아니라 수백, 수천 년 전 역사의 인물들이 그의 붓놀림을 통해 화판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의 인생은 오로지 그림에 열중하는 태평한 예술가의 삶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고뇌하는 철학자, 실천가에 가깝다. 이 화백을 만나 그의 인생을 들었다. 인터뷰는 3월 26일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카페 모뜨에서 3시간 동안 진행했다.


▎이종상 화백이 자신이 그린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화폐 영정 기념첩을 살펴보고 있다.
이종상 화백을 처음 만나는 순간, 그동안 가졌던 화가에 대한 고정관념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다부진 어깨, 180㎝가 넘는 키의 풍채 좋은 노신사였다. 개성 넘치고 자유분방한 화가의 모습을 기대했던 게 무안할 정도로 말쑥했다.

이 화백을 만나기 전, 미리 살펴본 그의 이력은 취재진을 압도했다. 1961년 서울대 미대 3학년 재학 중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1982년부터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명칭 변경) 3년 연속 특선. 국전 사상 최연소(24세) 추천작가 입문. 1977년(당시 36세) 5000원권 지폐에 들어갈 율곡 이이 영정 작가로 위촉. 천부적인 재능이 있지 않고서야 이토록 화려한 이력을 쌓을 수 있을까. 재능의 원천이 궁금했다.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듯합니다.

“어릴 때 두 발 달린 동물들을 키우는 작은 동물원이 있었어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원예학자가 된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거였죠. 아버지는 틈만 나면 우리 안에서 움직이는 새나 동물들을 그리곤 하셨어요. 그게 크로키였어요. 보통 사람에게 잔재 영상은 16분의 1초밖에 남질 않아요. 이걸 16초, 16분으로 늘리는 게 화가의 능력이에요. 그 능력을 키우는 연습이 크로키예요. 아버지 옆에서 크로키를 흉내 내면서 자연스레 그림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지요.”

그림에 눈을 뜨게 한 사람은 아버지였지만, 그가 미술학도의 길로 들어서게 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대전고등학교 교장 박관수 선생이다. 박 선생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을 지내고 미술평론가로도 활동했던 박래경 선생의 부친이다.

“박관수 선생님은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스승이셨어요. 조회 때마다 ‘여러분의 취미가 직업이 되는 사회가 반드시 올 것이다’고 하셨어요.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도전하라는 말씀이셨죠. 당신의 따님을 서독으로 보내 미술사를 공부하도록 하기도 하셨고요. 그때 미술부였던 제게 용기를 북돋워 주셨어요. 덕분에 서울대 미대에 진학할 수 있었죠.”

대학생 때 국전 추천작가 선정돼


▎이종상 화백은 4·19혁명 이후 열린 국전 출품작에 제2의 혁명을 암시하는 민중의 역동성을 담았다. [장비], 1963년 국전 출품작.
미술학도의 캠퍼스 생활은 낭만이 넘칠 만도 한데 그의 대학생활 중에는 특이한 이력이 있었다. 4·19혁명 유공자. 이념이나 데모와 거리가 멀 법한 미대생이 4·19 유공자라니.

“대학교 2학년 때 4·19 혁명이 일어났어요. 그때 서울대 문리대생들 대열의 맨 앞에 제가 섰어요. 데모에 참여했던 미대생은 아마 한두 명이나 될까. 난 유도를 했고, 덩치가 커서 앞에서 경찰과 맨몸으로 맞섰어요.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는데 다리에 총을 맞았어요. 지금도 총알 맞은 자리가 불편해요. 권력과의 불화로 학교도 못 다닐 줄 알았는데 며칠 뒤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해서 다행히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도 받고 학교도 다니게 됐지.”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지만 이 화백은 실망이 컸다. 혁명 때 분출했던 민중의 요구를 품을 만한 그릇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아서다. 나름의 방법으로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우리가 피 흘린 덕분에 민주당이 집권을 했는데, 수권 태세가 안 된 상태야. 사람만 바뀌었지, 부정부패는 그대로고 무능한 민주화였던 거죠. 그러더니 난데없이 군사정권이 떡하니 들어선 거야. 너무 속상해서 다시 이것들을 쓸어버려야겠다, 생각을 했어요. 그때 국전이란 등용문이 있었어요. 이걸 이용해서 혁명을 일으키자는 메시지를 보내야겠다고 작정했어요.”

쇳물을 틀에 붓고 용광로 주변에서 바삐 움직이는 대장간 노동자들, 흑소의 발굽에 편자를 박는 노동자의 경쾌한 몸 놀림… 이 화백의 국전 출품작들에는 ‘민중의 역동성’이란 일관된 메시지가 녹아있다. 누군가가 ‘삐라’ 같은 전단지를 찍어 민중을 독려했듯이, 그의 무기는 그림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 화백이 숨겨둔 코드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드물었다. 두 번째 혁명은 꿈에 그쳤다. 비록 ‘새로운 혁명을 준비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3년 연속 최연소 국전 추천작가에 선정되면서 한국의 미술계 역사를 새로 썼다.

혁명에 실패하고서 낙심하진 않으셨는지요.

“문화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961년부터 우리 회화의 자생성과 문화 족보를 찾아 나섰어요. 고구려 벽화 연구를 시작한 거지. 당시 고구려는 일종의 금기(禁忌) 같은 거예요. 북한을 찬양하는 빨갱이로 몰던 때였어요. 나도 끌려가서 간첩 아니냐, 취조도 많이 당했어요. 내가 주장한 건 ‘문화영토론’이에요. 그때에는 중국을 ‘죽의 장막’이라고 했어요. 우리 고구려, 고려 미술이 다 38선 넘어에, 심지어 중국 땅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고구려 문화 지키기 운동’이란 NGO를 결성했어요.”

고구려 벽화 연구하며 문화영토론 주창


▎2001년 10월 독도에서 스케치에 열중인 이종상 화백(오른쪽).
특별히 고구려 미술에 천착한 이유가 있었나요.

“전 세계에 가보지 않은 벽화가 없어요. 그런데 고구려 벽화에는 독특한 기법이 있어요. 나는 그 기법을 연구해서 그대로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수천 년 전 기법이 이어져 내려왔으니 이걸 자생문화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은 고구려 벽화의 형상만 갖고 공부를 하거나 가르치지 그 질료가 무엇인지, 어떤 기법을 썼는지는 관심을 갖지 않아요. 그런 점이 아쉬워요.”

고구려 문화에 대한 그의 천착은 대한민국 대표 영정 화가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 오랜 연구 끝에 1977년 광개토대왕의 국가 표준영정을 맡아 그렸다. 그가 그린 광개토대왕은 면류관을 쓰고 용포를 입은 모습이 아니라 비늘갑옷에 투구를 쓰고 칼을 찬 장수의 모습이다. 북방을 호령한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의 기상을 담아내기 위한 이 화백의 뜻이 담겨있다. 물론 여러 고구려 고분에서 찾아 연구한 벽화와 북방 유목민의 생김새, 그들의 생활상을 반영했기에 사실에 기반했다.

뒤이어 그린 원효대사의 표준영정. 이 과정이 또 범상치 않다.

“원효대사의 영정을 그리려고 동국대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원효의 혼을 온전히 담으려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원효의 기신론을 공부해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국내 화가 중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건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영정을 그리기 위해 그렇게까지 공들여 탐구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초상화는 이름, 성을 몰라도 실제와 똑같이 그릴 수 있어요. 하지만 영정은 달라요. 영정은 그림자 영(影) 자에 족자 정(幀) 자를 써요. 그림자가 있는 건 실체고, 그림자가 없는 건 환상이에요. 귀신을 봤다, 그러면 그림자가 있었느냐고 묻잖아요? 그림자는 돌아가신 분이 남겨둔 유업, 혼을 말하는 거예요. 그림자, 즉 그분의 혼을 액자 속에 모시는 게 바로 영정입니다. 영정을 그리기 위해선 그리려는 분의 혼과 접신을 해야 해요.”

영정 화가는 목숨을 걸고 그린다


▎이종상 화백의 작품인 [독도의 기II], 1982, 89×89㎝
접신이라면 무당의 신내림을 말하는 겁니까.

“맞아요. 옛날에는 어진(御眞)을 그린 화가한테 나라에서 첨배례(瞻拜禮)를 성대하게 해줬어요. 임금의 혼이 화가에게서 무사히 빠져나오도록 해준 거죠. 그걸 안 하면 접신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해 목숨이 위태로워져요. 나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경험이라니, 언제였나요.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이 찾아와서 영정을 그려달라고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하기 싫었는데 핑계거리가 있어야지. 여덟 번째인가 찾아왔을 때 그 유골을 좀 봤으면 좋겠다. 조상의 묘를 파묘할 수 있겠냐고 했죠. 그랬더니 종친들이 그렇게 하겠다는 거예요. 고산의 친형 무덤을 파묘해서 해골을 가져왔지 뭐예요. 더는 물러설 수 없어서 윤선도와 신접할 정도로 공부해서 표준영정을 만들었어요. 여기에 4년을 매달렸어요. 영정을 완성하고 나서 몸무게가 30㎏이나 빠졌어요.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하고 싶어도 못할 거예요.”

그렇게 영정화의 전문가가 된 이 화백은 1977년, 5000원권 지폐의 도안이 바뀔 때 처음 화폐 영정 제작을 맡게 된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여섯 살 때다. 5000원권에 새겨진 정자관(程子冠)을 쓴 덕망 있는 선비의 모습을 한 율곡 이이의 영정이 그의 작품이다. 그가 화폐 영정 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다.

꽤 젊은 나이에 영예로운 중책을 맡은 셈이네요.

“원래는 순종 어진을 그리신 조선의 마지막 화원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 선생께서 그리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이당 선생님이 병환으로 그릴 수 없게 되자 원로가 아니라 청년 작가인 저를 추천해 주셨어요. 내로라하는 제자들도 많은데 저를 택해주셨어요.”

더 큰 영예는 5만원권 화폐 영정을 그린 것이죠.

“율곡의 영정을 그린 지 꼭 31년 만에 모자(母子)의 만남이 성사된 거죠. 전 세계에서 화폐에 모자를 그린 건 유일하대요. 신사임당 이분은 잔다르크 같은 영웅도 아니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희생하신 분도 아니에요. 그저 주부이면서 아들 잘 가르친 화가였어요. 이런 분이 최고액권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건 우리나라의 높은 문화 수준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 화백은 여러 강연을 다닐 때마다 사람들이 자신을 화폐 영정 화가로만 기억하는 게 못내 아쉽다고 했다. 그가 화폐 영정 화가로 대중의 인기를 얻은 건 사실이지만, 그의 인생에서 화폐 영정 제작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화 영토를 확장하는 일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실천가로서 자신이 기억되기를 내심 바라는 눈치였다.

독도와 루브르에서 민족 자존심을 지키다


그의 일생을 가르는 대표적인 활동으로 독도 지킴이 운동이 있다. 1977년에 처음 독도 땅을 밟은 이래 지금까지 30여 차례 독도를 드나들며 500점이 넘는 독도화를 남겼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체험관과 울릉도 독도박물관 등에 그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2005년에는 60명의 작가들을 모아 ‘독도문화의병’을 조직하기도 했다.

“처음 독도에 들어갔을 때에는 국토 진경에 몰입해 있을 때였어요. 아무도 관심 없던 독도를 그려 보겠다고 천신만고 끝에 찾아갔어요. 그때 그렸던 독도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었어요. 그 그림들이 울릉도 독도박물관에 있어요. 그때부터 전 세계에 독도를 알리고 다녔어요. 북한의 국보급 화가인 선우영(1946~2009) 화백도 독도 그림을 그렸어요. 그분과 일본에서 평화미술전을 함께 열기도 했어요. 서울대 1600명 교수들 중에 1호로 평양에 초대받아서 가기도 했죠.”

왜 그렇게 독도에 애착을 갖게 됐나요.

“저는 애국자가 아니에요. 거기가 내 나라, 내 땅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리는 거죠. 화가니까 그림을 그려서 독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거예요. 독도는 풍수지리학적으로 한반도의 좌청룡이에요. 우리 왼팔인 거죠. 독도는 일본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줬어요. 반대로 서쪽에는 강화도가 중국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있어요. 예술가의 작품이 역사의식을 잃는다면 문화적 정체성을 잃은 것과 같아요.”

일본에서 독도 전시회가 무산된 적이 있었죠?

“2008년 7월에 도쿄의 뉴오타니 호텔에서 ‘아시아 톱 갤러리 호텔 아트페어’란 대형 전시회가 열렸어요. 화가들에게 방을 하나씩 배정해서 그림을 전시하도록 하는 거예요. 독도를 알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만약에 일본인들이 작품을 찢거나 먹물을 뿌린다면 온통 신문에 날 것이고, 국제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독도 그림을 전시한다는 얘기가 새어 나가는 바람에 주최측에서 독도 그림은 못 건다고 통보했어요. 그래서 내 방은 걸어 잠그라고 하고 불참했어요. 그 뒤로는 내가 일본에 갈 때마다 혹시 독도 그림을 갖고 있지 않은지 짐을 유심히 살피더라고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가졌던 전시회도 큰 화제가 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1997년이었어요. 프랑스 문부성 초청으로 5개월간 루브르 미술관에 설치벽화 개인전을 열었어요. ‘마리산’이란 작품인데, 세로 6m에 가로 71m짜리 대형 벽화예요.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왔던 병인양요의 장소인 강화도를 그린 작품이에요. 사상 유례 없는 세 차례 앙코르 요청에 관람객이 무려 127만 명이었어요. 루브르 측에서 작품을 사서 영구전시하겠다는 제안이 왔어요. 나는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달라는 조건을 걸었어요. 결국 거래가 성사되진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다고 생각해요.”

젊은 시절의 이 화백은 시대와 함께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금기에 접어든 뒤 그가 이뤄낸 일생의 대표작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주저 없이 ‘순교미술관’을 첫손에 꼽았다. 이 화백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그의 본명(세례명)은 예수의 아버지, 목수 요셉이다.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에 가면 천주교 순교 성지가 있어요. 한국의 천주교가 잉태된 곳이에요. 2017년에 병인순교 150주년을 기념해 이곳에 순교자미술관이 건립됐어요. 여기에 제가 1000호 정도 되는 그림 13점과 다섯 성인의 영정을 그렸어요. 그림을 완성하는 데 3년이 걸렸어요. 내 신앙의 결정체이기도 합니다.”

화폭에서 깨달은 통섭의 원리

학문적 연구부터 사회 참여에 신앙 고백까지, 보폭이 여간 넓은 게 아니네요.

“더 재미있는 얘길 해줄까요. 제가 젊을 때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님의 초대를 받아서 전경련 재벌 회장들 앞에서 ‘경영’에 대해 강의한 적이 있어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거였지. 난 미술과 사업의 본질이 같다고 봐요. 화가는 화판에서 공간을 계산하고, 붓질을 최소화해요. 이걸 감필법(減筆法)이라고 합니다. 경영도 마찬가지예요. 경영이란 ‘최소력 행사의 법칙’이에요. 가장 적은 자원으로 최대 효과를 보는 거예요. 이게 가능하려면 다양한 학문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해요. 전공이란 건 세워놓은 꼬챙이의 정점이 아니라 넓은 바닥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피라미드의 정점이어야 해요. 바로 이게 원효의 기신론, 통섭(統攝)의 원리입니다.”

통섭이란 무엇입니까.

“통(統) 자에는 실 사(絲) 변이 있어요. 섬유질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키는 것이에요. 섭(攝)자에는 손 수(手) 변에 귀(耳)가 3개나 있어요. 듣고 듣고 또 듣는다는 겁니다. 사과나무의 열매가 제각각 색깔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지만 거슬러 내려가면 가지가 나오고 줄기가 나오고, 나무의 둥치·뿌리·대지와 만납니다. 이게 통섭의 원리예요. 원효의 기신사상이고, 인연설인 거예요. 서로의 직업과 전공을 초월해서 실타래처럼 서로 연결되는 거예요.”

통섭을 제대로 실천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전공을 세세하게 나누는데 잘못된 거예요. 지금 대학이 그래요. 회화가 서양화·동양화로 나뉘고, 동양화가 다시 수묵화와 채색화로 나뉘어요. 나중에는 문인화·북종화·사군자로 나뉘더니 사군자에서도 서로 잘났다고 싸워요. 자기 전공이 아니면 그리질 못하는 거예요. 통섭이란 ‘스미고, 번지는’ 겁니다. 서로를 적시고 서로에게 물들며 조화를 이루는 거예요.”

통섭이 이뤄지는 사회는 어떤 곳일까. 유토피아에 가까울 테지만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교차로에서 보면 좌회전하는 차를 위해 완만하게 굽어진 유도선이 있어요. 좌회전할 때 이 선을 따라가면 급브레이크를 밟을 일 없이 원심력에 의해서 자기 차로를 갈 수 있도록 한 거예요. 최소한의 에너지로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이기도 해요. 이 선을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사람의 진로를 방해하게 되고, 결국 교통 흐름의 맥이 끊기게 돼요. 자기 혼자 빨리 가려다 전체가 늦어지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통섭이 이뤄지는 사회에서는 맥이 끊길 일이 없습니다. 서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에요.”

어느덧 약속한 인터뷰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가 성취해낸 여러 업적들 중에서도 가장 간절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지막 질문에 대한 그의 답.

“대학교 2학년 때 하루는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 선생님께 심부름을 갔어요. 그때 선생께서 지인들과 얘기를 하시다가 본인이 그리지도 않은 가짜 그림이 자꾸 나돌아서 속상해 죽겠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느냐, 아직 전공도 정하지 않았는데 난 언제 나를 사칭하는 가짜 그림이 나올까 하는 생각에 청전 선생이 무척 부럽더라고요. 그런데 60년 후에 내가 가짜 그림으로 이렇게 고생하고 있잖아요? 헛된 삶은 아니었구나, 싶습니다. 허허허”

※ 이종상 화백은 - 1938년 충남 예산 출생, 대전고, 서울대 미대 회화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철학박사,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교수, 서울대 미술관, 박물관 관장,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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