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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 총력진단] 한국 성장동력의 아킬레스건 ‘상속세 쇼크’ 

사회적 대타협, 재벌 결단이 영속적 기업승계의 열쇠 

■ 사모펀드 공격 받는 한진 비롯해 삼성·현대차도 ‘상속의 덫’에 걸려
■ 스웨덴 발렌베리와 인도 타타, 공익재단 통해 소유·경영권·존경 확보
■ 상속세 유지와 인하 논쟁 너머 대기업의 사회적 가치 재설정할 시점


▎사진:gettyimagesbank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4월 25일 열린 2019 한국포럼에서 기업의 위기를 논했다. “우리 기업은 기업 경영과 지배구조, 두 가지 측면에서 위기에 봉착해 있다. 경영 측면의 위기는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 한국 경제가 과거와 같은 역동성과 성장의 기회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다. 지배구조 측면에서는 ‘3세 승계’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할아버지(1세대)와 아버지(2세대)는 아무것도 없던 조건에서 성공을 이뤄낸 강렬한 도전정신을 가진 기업가였다면, 이미 완성된 왕국에서 태어난 3세대가 이 도전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김 위원장 발언과 결이 다른 맥락에서 3세 이후 경영자들은 지배구조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기업을 승계하는 경영인들이 온전히 출발선에 서려면 ‘경영권이 위협받지 않는 범위에서, 상속세를 납부’하는 것이 전제된다. 그러나 갈수록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가 버거워지고 있다. 기업이 커질수록 상속세 부담이 올라가는 데 비해, 증여·상속세를 줄일 ‘우회로’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기업승계를 편의적으로 봐주자’는 맥락이 아니라, 이런 구조가 지속되면 기업 총수 가문과 국가 경제 사이의 이해관계가 배치되는 상황이 잇따를 수 있다. 기업의 역량이 고용과 생산 같은 국가 경제 차원에 투하되는 것이 아니라 상속 문제(경영권 유지)로 분산될 수 있다는 우려다. 이는 한국 사회 전체의 손실일 수 있다.


▎2011년 3월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이 참석한 전경련 회장단 회의가 열렸다. 이들에게 기업의 영속성은 실적뿐 아니라 승계의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해 11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한국 경제상황을 “국가비상사태”라고 규정했다. 장 교수는 해법으로 “정치권과 대기업의 대(大)타협”을 제시했다. 그는 스웨덴을 하나의 롤모델로 꼽았다. “소득 분배가 세계에서 가장 평등하지만 기업 집중도도 최고 수준이다. 발렌베리그룹은 한 가문이 6대째 경영하고 있고,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한다. 삼성과 현대차는 그에 비할 수도 없다.”

장 교수는 “우리 현실에 맞는 모델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좌우 진영 논리부터 깨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기업의 상속을 옹호 혹은 부정하는 논쟁에 함몰돼 있기에는 투자와 신기술 부족이 누적된 작금의 한국 경제상황이 위태롭다는 진단이다.

실제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 시대에 접어들 수 있다”는 불길한 예언이 대기업에서도 흘러나오고 있다. 반도체 등 주력 산업 사이클은 호황기를 마감한 국면이다. 글로벌 경기가 주춤하는 와중에 터진 미·중 통상전쟁으로 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불확실성이 증폭되고 있다. 대외적으로 국제유가와 환율이 요동치는데, 안으로는 최저임금 인상과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기다리고 있다. 법 개정의 필연성에 대한 가치판단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기업은 위협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상법 개정은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할 수 있어서 사모펀드에 공격 빌미를 제공한다. 경영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장 교수의 견해다. “삼성과 현대차 지배구조를 어떻게 하라는데, 해외 투기자본에 잡아먹히면 기업이 붕괴되고 新산업을 키울 여력이 없어진다.” 즉 대타협론은 정부와 대기업, 시민사회가 한국적 자본주의를 재설정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부는 경쟁력 있는 기업의 영속성을 제도적으로 고려하고, 기업은 이익의 사회적 가치 실현을 생각하자는 방향이다. 기존의 천민자본주의를 탈피해 한국적 자본주의의 품격을 높이려는 이런 담론의 중심에 상속세 화두가 존재한다.

상속세는 정치적이다


▎조원태 한진 회장은 2000억원으로 예상되는 상속세를 마련해야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다. 사진은 한진그룹 본사. / 사진:연합뉴스
한국조세정책학회 회장인 오문성 한양여대 세무회계과 교수는 “상속세 및 증여세는 굉장히 국민정서에 흔들리는 대목”이라고 규정했다. 세계적으로 한국의 증여·상속세율은 높은 편에 속한다. 상속세(피상속인 사망 시)와 증여세(피상속인 생존 시)의 세율은 동일하다. 1억원까지 10%, 5억원까지 20%, 10억원까지 30%, 30억원까지 40%가 추징된다. 그리고 30억원 초과면 50%가 추징된다. 예를 들어 300억원의 상속의 발생했다고 가정하면, 30억원을 제외한 270억원이 50% 추징구간에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공제 항목들은 제외하고 계산했다. 30억원 초과는 상속재산의 절반(50%)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데 여기 더해 상속 지분에 기업 경영권이 포함되면 최고 65%까지 ‘할증’이 붙는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에 따르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평균(26.3%)의 2배를 웃돈다. 기업승계가 여의치 않은 구조다.

오 교수는 “한국은 기본적으로 상속세, 자본이득세를 병과하는데 캐나다와 호주는 자본이득세만 과세한다”고 말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OECD 35개국 중 스웨덴·노르웨이 등 13개 나라는 상속세를 과세하지 않는다.

이와 대비되는 한국적 현실의 연원에 관해 오 교수는 “우리 국민 심리가 기존에 부를 축적했던 이들에 대해 반감이 있다”며 “예를 들어 ‘기업이 노력보다는 국가의 비호를 받고 컸는데, 상속세도 안 내려고 하느냐. 너희들이 (사회적 가치를 위해) 기여한 것이 뭐가 있느냐’는 시각이 있다”고 봤다. 과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와 경영을 다 움켜쥐려 한 한국 기업의 탐욕이 상속세를 견고하게 만든 셈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회적 불평등은 더 심화될 것”이라는 진보진영의 시각도 성립된다. 현행 상속세율의 취지를 긍정하는 한 회계사는 “대한민국에 30억원 넘게 자식에게 물려줄 부자가 얼마나 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보수 진영에서 자꾸 중소기업 가업승계의 어려움이라는 프레임으로 상속세를 공격하는데 실질적으로 상속세는 대기업의 문제”라는 관점이다.

다른 한편에서 상속세는 존재의 타당성부터 의심받는 세금이다. ‘이미 세금 낼 거 다 내고 남은 재산을 처분하는데 왜 또 매기느냐’는 주장이다. 이중과세 논란이다.

또 하나의 논쟁은 상속세 부담과 기업가 정신의 상관관계다. 재벌닷컴은 4월 28일 ‘국세청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2008~2017년 상속세 집계 결과를 발표했다. 5만9593명이 사망하며 물려준 상속재산이 98조7712억원에 달했고, 납부된 상속세만도 17조597억원이었다. 진보성향 언론은 이를 토대로 ‘이 기간 평균 실효세율은 17.3%에 불과했다’는 헤드라인을 뽑았다. ‘상속세 부담이 기업가 정신을 죽인다는 명제는 틀렸다’는 논지를 전개한 것이다.

그러나 과세 미달자를 제외한 사망자 전원의 상속세를 상속재산으로 나눈 세율로 ‘기업가 정신을 죽이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무리다. 왜냐하면 사망자 전원이 기업가 부자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실제 재벌닷컴에 따르면 500억원 초과 상속재산에 따른 실효세율 추이가 따로 나와 있다. 그 실효세율은 매년 30%를 웃돌았다. 이 비율이 높으냐 아니냐는 가치판단의 영역이겠지만 적어도 17%보다는 높다. 500억원 초과 상속재산에 따른 실효세율에 근거해 상속세 부담과 기업가 정신을 연계시키는 게 합리적이다.

LG 9215억, 오뚜기1500억 그리고 한진 2000억


▎1500억원에 달하는 상속세 납부를 선언한 함영준 오뚜기 회장(오른쪽)은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다.
상속세는 대기업 등 소수 자산가들에 국한된 사안이긴 하나 국가 경제를 감안할 때 그 여파가 다수에 미치는 독특한 세금이다. 장하준 교수가 2019년 2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이씨, 정씨 집안이 삼성과 현대차에서 쫓겨나면 국민이 하루 즐겁지만, 글로벌 금융자본에 먹히는 형태가 되면 국민이 20년 고생하게 된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일 터다. 그는 더 나아가 “이건희 삼성 회장이 사망할 경우, 상속세를 주식으로 국민연금에 기탁하게 하면서 세율을 60%에서 25%로 대폭 깎아주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라며 “국민연금이 국가 경제 차원에서 경영권을 지켜줄 수도 있다”는 파격 발언까지 했다. 재벌이 예뻐서가 아니라 국가 산업 차원에서 상속(승계)의 문제를 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이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4월 8일 별세했다. 고인을 향한 추모와 별개로 시장은 냉엄하게 한진의 기업승계 구도를 주시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고(故) 조양호 전 회장이 보유한 한진칼 지분 17.84%의 향배가 핵심이었다. 한진칼은 그룹 전체를 컨트롤할 수 있는 지주회사에 해당한다.

관건은 이 17.84%의 한진칼 지분 가치가 대략 4000억원으로 추정되는 현실이다. 50% 상속세율을 적용하면 2000억 원의 상속세를 마련해야 지분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조 전 회장 슬하의 3남매가 5년에 걸쳐 분납을 하더라도 연 400억 수준이다. 만약 한진칼 주가가 더 상승하면 그만큼 내야 할 상속세도 올라간다.

이 상속세를 내지 못하면 한진그룹 경영권을 상실한다고 봐야 한다. 조 전 회장의 자녀인 조현아(장녀, 2.31%), 조원태(장남, 2.34%), 조현민(차녀, 2.30%)의 보유 지분은 미미한 편이다. 다 합쳐도 조 전 회장의 지분을 상속받지 못하면, 소위 ‘강성부 펀드’라 불리는 행동주의 사모펀드 KCGI의 지분(14.98%)에 대적할 수 없다.

KCGI는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기업 가치 증대’를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메기로 키우려 했는데 알고 보니 고래였다”는 말처럼 사모펀드가 대기업의 경영권을 자칫 삼킬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다만 사모펀드가 내건 기업 지배구조 개선은 사회운동이 아니다. 기업 가치 증대에 방점이 찍힌, 주주자본주의에 입각한 공격적 투자 행위다.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이 모비스와 글로비스 합병을 통한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승계가 걸린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에 반대한 것도 같은 원리다.

한진이 당초 5월 8일 공정위에 제출하기로 했던 동일인(총수) 지정을 연기한 것도 기업승계의 험난함을 암시한다. 자녀들이 조 전 회장 지분을 어떤 방식으로 상속할지, 상속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지 등을 놓고 숙고할 상황이다.

한진뿐 아니라 삼성·현대차·LG·신세계·오뚜기 등도 상속(기업승계) 이슈가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LG그룹 지주회사인 ㈜LG는 지난해 11월 2일 ‘2018년 5월 20일 타계한 고(故) 구본무 회장이 보유했던 주식 11.3% 중 8.8%를 장남 구광모 대표가 상속 받았다’고 공시했다. 구 회장의 ㈜LG 총 지분율은 15.0%로 최대주주가 됐다.

이에 따라 구광모 대표를 포함한 자녀 셋에게 발생한 상속세 총액은 9215억원으로 신고됐다. 구 대표는 상속세를 5년에 걸쳐 나눠 내기로 했다. 그해 11월 29일 약 6분의 1에 해당하는 1차 상속세액을 납부했다. 9215억원은 대한민국 역대 최대 상속세액이었다. 그럼에도 LG가 잡음 없이 기업승계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지주회사 지배구조가 꽤 오래전부터 정착됐고, 그만큼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던 덕분이었다. LG 관계자는 “다른 소리 안 나게 잘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속세는 기업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창(窓)이기도 하다. LG가 꼼수 부리지 않는 정공법을 택했듯, 신세계도 2006년 정용진 부회장과 정유경 신세계백화점 총괄 사장의 승계 과정에서 3500억원 상당의 증여세를 감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뚜기 역시 상속세 1500억원을 5년에 걸쳐 분납 중이다. 중견기업인 오뚜기는 일약 ‘착한 기업’의 상징처럼 떠올랐고, ‘갓(god)뚜기’란 애칭까지 얻었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7월 함영준 오뚜기 회장을 청와대에 초청하기도 했다.

스웨덴 사민주의에서 존중받는 발렌베리 재벌


▎1. 150년 역사의 인도 최대기업인 타타그룹의 라탄 타타 회장. 1991년부터 그룹을 이끌고 있다. 2.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의 핵심 인사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 160년 역사의 발렌베리 가문은 모두가 공감할 만한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한진 기업승계 방식에 관한 안상희 대신지배구조연구소 본부장의 말이다. “조양호 전 회장 지분을 총수 일가의 영향력이 미치는 공익법인에 맡겨두는 방식도 고려할 수 있다. 공익법인은 특정 기업 총주식의 5%, 성실공익법인이라면 10%까지 보유하는 것은 기부로 보고 증여·상속세가 면제된다.” 실제 이렇게 실행될지 여부는 두고 봐야겠지만 한진그룹 내에는 정석인하학원, 일우재단, 정석물류학술재단 등 공익법인이 존재한다. 이는 스웨덴 발렌베리재단 모델의 변용이라고 할 만하다.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 정치학과 교수는 “사회민주주의의 나라 스웨덴에서 발렌베리 가문은 존경받는 재벌로 인정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대 통신장비 업체 에릭슨을 비롯해 항공·방위산업체 샤브와 스웨덴 2위 규모의 은행까지 소유한 발렌베리 가문은 국내총생산의 약 3분의 1을 책임진다. 한국의 ‘문어발’ 재벌보다 더한 구조인데도 발렌베리 가문이 존경받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노혁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김지평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법무부 용역을 받아 2015년 ‘주식신탁의 활용방안 연구’란 논문을 발표했다. 이 중 ‘해외에서의 주식신탁 활용 : 사업재단 및 자선신탁을 중심으로’를 다룬 장(章)에 발렌베리 재단과 인도 타타그룹의 사례가 등장한다.

발렌베리 가문의 기업경영은 1856년 시작됐으니까 16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5대째인 마쿠스 발렌베리와 야콥 발렌베리의 공동 대표 체제를 거쳐 현재 6대에 이르고 있다. 다른 나라 재벌들과 달리 발렌베리 가문은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는 독특한 원칙을 지켜오고 있다. 실제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인베스터AB 산하 사업자 회사의 면면을 보면 SEB(은행), 에릭슨(정보통신), 샤브(자동차), 일렉트로룩스(가전), 아틀라스 콥코(산업공구업), ABB(자동화설비), 아스트라제네카(의약) 등 업종을 불문하고 발렌베리란 네이밍이 붙지 않는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한, 각 사업 회사들이 발렌베리 집단 소속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발렌베리 가문 지배 하에 있는 기업들을 편의상 ‘발렌베리그룹’이라고 호칭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발렌베리 가문은 상속세의 덫에 걸리지 않고, 이런 거대 기업집단을 160년 이상 지배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스웨덴 시민들의 존경까지 얻으면서 말이다.

그 핵심은 공익재단이 지주회사를 지배하는 구조에 있다. 다시 말해 발렌베리의 각종 사업 회사들로부터 지주회사 인베스터AB는 배당을 받는다. 이 배당수익이 발렌베리 가문이 운영하는 공익재단들로 올라가는 구조다. 재단들이 공익 목적에 부합하게 이 돈을 쓰는 한, 증여·상속세가 면제됐다.

크누트&앨리스 재단이 1917년 최초 설립된 이래 마리안느&마커스 재단, 마커스&아말리아 재단 등을 통칭해 발렌베리 재단이라고 일컫는다. 이들 재단이 지주회사 인베스터AB의 대주주다. 이 재단들은 250억 크로나(한화 약 3조780억원) 이상의 기부활동을 해왔다. 각각 학술연구, 의약·법률·사회과학, 인문학·교육·아동 활동 등 재단마다 기부 영역이 다르다.

발렌베리 모델, 한국에서도 가능하려면


▎서초동 삼성전자 본사.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은 만만치 않다. / 사진:연합뉴스
재단 이사회는 발렌베리 가문 사람들과 우호세력으로 구성돼 있다. 즉 발렌베리 가문 사람들은 주요 재단의 이사, 지주회사 인베스터AB의 이사, 주요 사업 회사들의 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소유와 경영을 동시에 갖는 구조다.

그럼에도 사회적 비판을 받지 않는 이유는 발렌베리 가문의 개인 주머니로 돈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투명성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가족들과의 경영권 분쟁도 우리 재벌들의 ‘형제의 난’처럼 극한까지 치달은 적은 없었다.

이런 구조에선 소유한 기업이 아무리 경영을 잘해도 공익 재단의 자산이 증가할 뿐이다. 가문 구성원들이 배임 등 사익 추구 행위를 저지른 사실도 알려진 바 없다. 이를 두고 논문은 “사회적 분위기, 법적 강제수단, 문화적 배경, 공익적 재단 운영에 따른 도덕적 보상 및 자존감 등 스웨덴 및 발렌베리 가문의 특유한 요소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은 발렌베리 기업들의 경영이 방만하지 않다는 점이다. 경영 성과가 내 주머니로 들어오는 인센티브가 없다면 굳이 열성을 다할 필연성이 떨어질 법하다. 그런데 발렌베리는 이 상식을 뒤집고 있다.

오히려 세 가지 장점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단기성과에 함몰되지 않으니까, 종업원들을 쥐어짜지 않는다. 북유럽의 노사문화는 이런 토대에서 생성된 것이다. 둘째 소유와 경영이 일치하니까 장기적 성과를 시야에 넣는 경영이 가능하다. 셋째 우리 대기업처럼 계열사들이 얽혀있는 것이 아니라 사업 회사들의 독립경영을 보장하는 발렌베리의 구조는 경제 위기 시 부실을 제한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한마디로 안정적 경영 문화가 정립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발렌베리 모델을 적용할 순 없을까. 안상희 본부장은 “기업승계의 방법론으로 우리도 생각해볼 영역이지만 변질될 수도 있다”고 가능성과 경계심을 동시에 드러냈다. 발렌베리 모델이 성립하려면 세 가지 대전제가 필요하다.

하나는 정부 차원의 제도 변경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가들이 소유와 경영을 얻는 대가로 사회적 가치에 책임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우리 사회 전체가 한국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업가와 기업승계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바꿀 수 있느냐다.

일례로 최태원 SK 회장이 ‘사회적 가치’를 화두로 내세우고, 지난 2월 그룹 지주회사인 SK㈜의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나 경영과 감시를 분리한 시도는 음미할 만한 발걸음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몇몇 재벌처럼 소유와 경영을 놓지 않으면서도 증여·상속세를 어떻게든 회피하려는 탐욕을 비치는 한, 한국의 발렌베리 모델은 요원하다. 기업이 만든 재단들이 탈세의 온상처럼 비치는 인식을 탈피하는 것도 현안이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에서 기업승계가 이토록 까다로워진 것은 그동안 재벌들이 자초한 ‘업보’일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투명한 기업승계를 통해 사회적 이미지를 바꾸는 결단의 영역도 재벌의 몫이다. 그럴 때 비로소 상속의 통로는 보다 유연해질 수 있다.

중소기업 가업상속 공제는 본질이 아니다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왼쪽 두 번째)이 5월 14일 크로아티아의 전기차 작업 현장을 참관하고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실적과 더불어 3세 경영자로서 그룹 지배력을 유지해야 한다./사진:현대기아차
스웨덴 같은 북유럽 선진국만이 아니라 인도에서도 장수기업이 있다. 1868년 파르시 타타 가문이 창설한 타타그룹이다. 섬유업에서 출발해 철강·시멘트·출판·항공·화학·가전·상용차·화장품·금융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원래 인도에서 시작된 그룹이지만 이제 수익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가져온다. 영국에서 가장 많은 근로자가 근무하는 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타타그룹의 시장가치는 2011년 7월에 1000억 달러를 넘겼다.

타타 역시 타타선즈라는 지주회사가 있고, 그 위에 도라비 타타 트러스트(신탁)와 라탄 타타 트러스트라는 두 개의 자선 신탁이 존재하는 지배구조다. 두 신탁은 수익을 자선 목적에 사용하도록 되어있다. 설립자의 후손들은 신탁 이사와 수탁자 그리고 그룹 경영자를 겸임한다.

발렌베리와 타타 공히 공익재단, 자선신탁을 통해 사업 회사들을 지배하는 구조이기에 사모펀드 등이 경영권을 위협할 틈이 거의 없다. 가문 사람들 간 분쟁이 터지지 않는 한, 그룹 지배력이 와해될 가능성이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상속세는 본질적으로 대기업을 겨냥하는 제도인데 정작 중소기업 가업 상속 공제가 상속세 프레임의 전장(戰場)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보수진영은 ‘과도한 상속세로 기업승계가 끊어지는 사각지대’로서 중소기업을 부각한다. 상속 개시일부터 10년 동안 업종·지분·자산·고용 등을 유지할 시 100%(최대 500억원) 상속세를 면제해주는 가업상속 공제의 사후관리 요건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주장이 반영됐는지 “기존 10년 기준을 7년 전후로 단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밝힌 바 있다. 실제 회사 자산 증식을 개인재산 증가가 못 따라가는 중소기업의 기업승계 여건이 대기업에 비해 열악한 것은 대체로 맞다.

신상철 중소기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이런 구조를 인정하면서도 과장된 측면도 지적한다. “가업상속 공제를 시행 중인 중소기업이 70개 정도다.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서? 정책수요 측면에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사전 요건은 차등화돼 있어서 어렵지 않다. 가업이라면 최대 500억원 세금을 깎아주는데 최소한 10년은 하는 게 맞지 않나? 사후 요건은 총임금과 종업원 숫자 유지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개선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답은 상속세에 있지 않다”


▎5월 8일 열린 ‘문재인 정부 2주년 경제부문 성과와 과제’ 회의에서 발언하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그는 중소기업 지원책으로 가업상속 공제 조건 완화를 추진 중이다. / 사진:연합뉴스
반면 진보 진영은 상속세를 내는 사람은 매년 1만 명도 안된다는 근거를 든다. 그나마 이 중 90%가 과표 20억원 미만 구간에 속한다. 과표 10억원 미만이면 배우자 상속 공제, 기초 공제 등이 포함될 때 상속세를 거의 안 낸다고 한다. 즉 극소수 계층을 대상으로 삼는 세금이고, 중소기업을 위한 공제 시스템까지 있는데 상속세를 공격하는 목적은 대기업의 편의를 염두에 둔 보수 진영의 포석이라는 반박이다.

다만 극소수 대기업들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1주 1의결권’의 예외를 둬 대주주의 주식에 대해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차등의결권 도입, 상속세 납부를 늦춰주는 과세 이연 방안 등이 나오고 있다. 적대적 M&A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하는 체계를 마련해줘서 실적과 고용에 전념하도록 유도하자는 ‘대기업 활용론’이다.

그러나 상속세법을 유지하든, 인하하든 그 자체가 한국적 자본주의의 답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제도 이전에 사회적 대타협(공감대)이 이뤄져야 한다는 시선이다.

김용민 연세대 법무대학원 교수는 5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조세정책세미나에서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은 배당금의 80%를 자선사업에 쓴다. 우리 기업이 이것을 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신상철 수석연구위원은 영속성을 담보하는 한국적 자본주의의 조건에 관해 이렇게 정리했다. “사회가 투명해지고 있다. 이 말은 (기업이 더 이상 꼼수로 상속세를 피해갈 수 없는) 조세 인프라가 갖춰지고 있다는 의미다. 앞으로 기업들은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기업승계를) 해결해야지, 세법 구조를 바꿔서 해결하려고 들면 안 된다.” 상속 등 기업승계에 관한 제도 변경이 현실화하려면 기업들이 우리 사회의 인정을 받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영속적 기업승계의 근본적 답은 사회적 대타협에 있는 것이지 상속세법 규정에 있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201906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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