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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1부)] 진흥왕, 한강 유역을 점령하다(6)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설파 

“오직 필요한 때 필요한 짐승만 살생하라” 

불교의 불살생 윤리를 삼국시대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재해석
살생유택·임전무퇴 정신은 신라 화랑과 젊은이들에게 정신적 귀감


▎신라는 관산성 전투 승리로 한강 유역을 장악하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게 됐다. 영화 <황산벌>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백제군(위쪽)과 신라군.
554년 12월의 관산성 전투 대승은 신라 진흥왕에게 한반도 주도권을 선사했다. 신라 역사상 최초로 장악한 한반도 주도권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가 늘 보여주듯 주도권 장악에는 위기와 기회가 뒤따랐다. 당연히 신라의 대승은 백제·가야·일본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칫 백제·가야·일본에 더해 고구려까지 반(反)신라 동맹에 가담할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도 위기에 내몰린 백제가 고구려에 접근할 가능성이 컸다. 고구려 역시 기왕의 주도권을 되찾고자 백제에 접근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고구려·백제·가야·일본이 반신라 동맹을 구축한다면 관산성 대승은 신라에 기회가 아니라 오히려 위기가 될 수도 있었다.

진흥왕은 반신라 동맹 가능성부터 차단해야 했다. 당시 상황에서 백제와 고구려는 한강 유역의 신라 영토를 매개로 반신라 동맹을 구축할 가능성이 높았다. 예컨대 백제는 한강 하류의 경기도를 점령하고, 고구려는 한강 중·상류의 강원도와 충청북도를 점령한다는 조건으로 반신라 동맹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한강 하류의 경기도는 백제 고토(古土)이고, 한강 중·상류의 강원도와 충청북도는 고구려 고토이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백제와 고구려가 반신라 동맹을 맺고 한강 유역을 분할해 점령한다면 신라는 주도권은커녕 생존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자면 한강 유역 방어를 대폭 강화하는 동시에 백제가 구축한 반신라 동맹을 와해시키는 수밖에 달리 대안이 없었다.

진흥왕이 백제의 반신라 동맹을 와해시키려면 가장 약한 부분부터 이탈시켜야 했다. 반신라 동맹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은 가야였다.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10개 소국의 가야연맹은 상황에 따라 친(親)신라 정책과 친백제 정책을 오갔다.

따라서 위협과 동시에 평화를 들어 공작한다면 무력 침공 없이도 가야를 반신라 동맹에서 이탈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이와 관련해 볼 때, 관산성 대승 직후인 555년 1월 진흥왕이 창녕에 하주(下州)를 설치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은 아주 중요하다.

반(反)신라 동맹 와해에 나선 진흥왕


▎경북 고령 대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국보 138호).
당시 신라의 지방제도는 주(州)-군(郡)-성(城)-촌(村)으로 편제됐는데, 그중에서 최상급 단위인 주에는 군사령관인 군주(軍主)가 파견됐다. 신라가 새로 개척한 영토 중에서도 핵심 군사 거점에 주(州)가 설치되곤 했다. 예컨대 진흥왕은 한강 하류를 장악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로 파견했었다.

따라서 555년 1월 창녕에 하주를 설치했다는 것은 창녕 지역이 한강 하류의 신주 못지않게 중요한 군사거점으로 중요시됐다는 의미나 같았다. 창녕이 그렇게 중요시된 이유는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었다.

진흥왕 당시 백제의 반신라 동맹에 가담한 가야연맹의 핵심은 고령의 대가야였다. 관산성 전투 때도 대가야는 주력군을 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관산성 패전 직후 대가야는 신라의 침공을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을 게 분명하다. 아마도 대가야는 신라의 침공을 예상했겠지만 별다른 대안은 없었다. 성왕 전사 이후 백제는 위기 상황이었고, 대가야의 주력군은 관산성에서 전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흥왕은 고령의 대가야를 침공하는 대신,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가야와 마주한 창녕에 하주를 설치했다. 이것은 명백히 두 가지를 목표로 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연맹을 백제의 반신라 동맹에서 이탈시키기 위한 군사적 압력이었다. 진흥왕은 창녕에 하주를 설치하면서 대가야에 반신라 동맹 탈퇴를 강요했을 것이다. 신라의 무력 침공을 두려워하던 대가야와 그 이외 가야 소국들은 반신라 정책에서 친신라 정책으로 선회할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관산성 승전 이후 신라는 몇 년 동안 대가야를 침공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대가야가 반신라 동맹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라고밖에 달리 찾을 수 없다.

둘째는 만에 하나 친신라 정책으로 돌아선 대가야가 또다시 친백제 정책으로 선회할 경우 무력 응징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당시 진흥왕이 하주만 설치하고 대가야를 무력 점령하지 않은 이유는 백제와 고구려 때문이었다. 자칫 대가야와 전쟁을 벌이다가는 신라의 지나친 팽창을 우려한 고구려가 반신라 동맹에 가담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진흥왕은 대가야 정복을 뒤로 미루고 하주를 설치하는 선에서 멈췄던 것이다.

그 대신 진흥왕은 한강 유역 방어에 심혈을 기울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은 555년 10월 한강 하류의 북한산에 순행했다. 당시 북한산은 신라의 신주 중심지였다. 진흥왕은 북한산에 가기 위해 충주·여주·광주(廣州) 등 한강 중·하류 지역을 거쳤는데, 통과한 지역의 1년 세금을 탕감하고 죄수들을 대사면했다. 한강 중·하류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즉 관산성 승전 이후 진흥왕이 북한산에 순행한 이유는 한강 중·하류 지역에 대한 영유권과 방어를 강화하고 그것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의 밀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평가할 수 있다. 뒤이어 557년 1월 진흥왕은 충청북도 충주를 소경(小京)으로 승격시켰다. 충주를 수도 경주에 버금가는 중요 군사 거점으로 육성함으로써 백제 수도 사비를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백제가 구축한 반신라 동맹을 와해 시키고 한강 유역 방어를 대폭 강화한 진흥왕은 560년을 전후로 대가야 정복에 착수했다.

‘복수의 칼’ 위덕왕… 가야연맹소국 10국의 멸망


▎2016년 9월 공주와 부여 일원에서 열린 제62회 백제문화제. 공주 공산성 앞 금강 신관공원에서 웅진 천도 475년을 의미하는 475척의 황포돗배와 유등(油燈)이 가을밤을 밝히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라는 561년에 아라가야의 파사산(波斯山)에 성을 쌓고 일본 침공에 대비했다고 한다. 파사산은 현재 경남 함안의 성산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함안의 파사산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본다면 신라는 561년 이전에 아라가야를 정복한 것이 확실하다. 아마도 관산성 패전 직후인 555년쯤 아라가야가 자발적으로 신라에 귀부(歸附)했을 텐데, 560년 전후로 신라가 무력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몇 년에 걸쳐 관산성 패전의 후유증을 극복한 백제 위덕왕이 신라 침공을 본격적으로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의 태자는 관산성에서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이후 여러 신하들에게 “돌아가신 부왕(父王)을 위해 출가해 수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언급은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출가(出家)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때 백제 신하들은 “만약 원로대신들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바라건대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 속세를 떠나는 수고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며 말렸다고 한다. 그래서 태자는 패전의 책임을 뉘우치는 의미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있다가 557년 3월에야 즉위했는데, 그가 곧 위덕왕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위덕왕이 554년에 즉위한 것으로 기록돼 [일본서기]와 3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차이는 위덕왕이 554년 12월 성왕 전사 직후 즉위하기는 했지만, 성왕의 3년상이 끝나는 557년 3월까지는 자숙하느라 왕권을 행사하지 않았기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그 사이 신라 진흥왕이 창녕에 하주를 설치하고 대가야를 백제의 반신라 동맹에서 탈퇴시켰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백제 위덕왕은 자숙하느라 진흥왕에게 대응할 수 없었다. 그렇게 3년상 동안의 자숙 기간을 끝내고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위덕왕은 부왕인 성왕의 복수를 위해 또 추락한 백제의 위상을 끌어올리기 위해 신라 침공을 준비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 위덕왕은 관산성 패전 직후 동생을 일본에 파견해 성왕 전사를 알리면서 복수에 필요한 병력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때 일본에서는 병력 파병 대신 조상신을 잘 모시면 국가가 평안해질 것이라 말할 뿐 파병하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신라의 보복공격이 있을까 우려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557년 3월 성왕의 3년상을 끝낸 위덕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또다시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이렇게 신라 침공을 준비하면서 위덕왕은 가야연맹을 다시 반신라 정책으로 선회시키는 공작을 했을 게 분명하다. 그 공작에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연맹이 신라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호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상황을 눈치챈 진흥왕은 561년 2월 창녕으로 순행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혹시라도 대가야가 백제의 반신라 동맹에 가담한다면 무력 침공하겠다는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진흥왕은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고자 560년쯤 아라가야를 점령하고 561년 파사산에 성을 쌓았다고 이해된다. 이 모든 조치는 백제와 일본의 침공의 대비이기도 하고, 혹시라도 대가야가 다시 백제의 반신라 동맹에 동참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준비이기도 했다.

신라, 한강 하류 통해 본격 대중국 교류에 나서


▎경북 청도 운문사 입구에 건립된 화랑오계(세속오계)비.
그런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562년(신라 진흥왕 23, 백제 위덕왕 9, 고구려 평원왕 4, 일본 긴메이 천황 23) 1월에 신라가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연맹소국 10국을 급습해 멸망시켰다고 한다. 이 기록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백제 위덕왕은 마치 성왕이 그랬던 것처럼 신라 침공에 필요한 일본군의 파병을 요청하는 한편, 가야연맹에 대해서도 반신라 동맹에 동참할 것을 공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연맹은 진흥왕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백제 위덕왕에게 동조했을 것이다. 이를 명분으로 진흥왕은 562년 1월 선제공격을 감행해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연맹소국 10국을 점령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백제 위덕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562년 7월 신라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아직 백제는 관산성 패전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위덕왕이 신라를 공격할 때 일본의 긴메이(欽明) 천황은 대장군과 부장군(副將軍)을 파견해 백제군을 돕게 했다고 한다.

당시 파병된 일본군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일본군이 파병된 사실 자체는 분명하다고 판단된다. 마치 554년에 백제 성왕이 신라를 공격하려고 가야 병력과 일본 병력을 동원했듯 백제 위덕왕 역시 가야와 일본의 군대를 동원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진흥왕이 대가야를 선제 공격해 점령하고, 뒤이어 백제군과 일본군이 신라군에 패배함으로써 위덕왕의 신라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562년 9월에 대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흥왕이 이사부와 사다함을 파견해 토벌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때의 가야 반란이란 다름 아니라 562년 1월 신라 공격 때 이미 멸망했던 대가야가 562년 7월 백제 위덕왕의 신라 공격 때 또다시 백제에 가담해 신라에 대항하려 하다가 무력 응징당한 사건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진흥왕이 대가야를 무력 점령함으로써 신라는 백제와 벌이던 가야 쟁탈전을 최종 승리로 장식하게 됐다.

이 같은 최종 승리는 궁극적으로 법흥왕과 진흥왕의 과감한 결단과 치밀한 전략의 산물이었다. 이런 면에서 법흥왕과 진흥왕은 신라의 위대한 정복군주일 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사의 위대한 영웅이라 평가할 수 있다. 대가야가 완전히 멸망함으로써 가야는 한국사에서 사라지고,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신라·백제·고구려의 삼국시대가 전개됐다. 삼국시대 동안 세 나라는 상호 견제 속에서 장기간 대치하게 됐다.

한편, 한강 유역과 대가야를 정복함으로써 삼국시대를 열어젖힌 진흥왕은 한강 하류를 이용해 본격적으로 대중국 교류에 나섰다. 564년에 진흥왕은 화북의 북제(北齊)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567년에는 강남의 진(陳)에도 사신을 파견했다. 이처럼 진흥왕은 중국의 남조와 북조 모두와 교류함으로써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이는 그 무엇보다도 한강 하류를 장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흥왕의 대중국 교류에 힘입어 수많은 신라인들이 해외 유학을 다녀오게 됐다. 한국사를 되돌아보면 해외유학의 계기는 삼국시대 불교 수용이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중국의 전진(前秦) 왕 부견(符堅)이 스님 순도(順道)를 파견해 불상과 불경을 보냄으로써 한국에 불교가 전해졌다.

백제는 침류왕 1년(384) 중국 진(晋) 나라에서 온 스님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불교가 수용되자 학문적 또는 종교적 열정에 빠진 고구려인과 백제인은 불교를 깊이 공부하려고 중국 유학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한국인 최초의 중국 유학생은 신라 스님인 각덕이었다. 유학을 떠난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법흥왕 후반이나 진흥왕 초반쯤이었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시대로서, 각덕은 남조의 양나라에 유학했다. 각덕에 뒤이어 신라의 명관 스님이 남조의 진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각덕과 명관 스님이 어떤 계기로 출가했는지, 또 어떻게 중국에 유학을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개인 차원에서 유학을 간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간 듯하다. ‘입학승’이라는 표현이 그렇고, 중국의 사신과 함께 귀국한 사실이 그렇다. 각덕 스님은 진흥왕 10년(549)에 귀국했고, 명관 스님은 진흥왕 26년(565)에 귀국했다. 두 스님은 귀국할 때 모두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스님 각덕이 귀국할 즈음 진흥왕은 관청에 명해 백관으로 하여금 예를 갖추어 흥륜사 앞길에 나가 맞이하게 했다. 귀국 후 각덕 스님은 불법을 전도하는데 앞장섰다. 물론 진흥왕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명관 스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륵이라고 모든 살생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진흥왕은 재위 14년(553)에 황룡사 창건에 나서 27년(566)에 완공했으며 35년(574)에는 유명한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해 황룡사에 모시기도 했다. 진흥왕은 황룡사 외에도 여러 사찰을 창건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법운(法雲)이라 칭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왕이기에 차마 출가하지는 못했지만 여생을 스님처럼 살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진흥왕 사후에 왕비 역시 출가해 영흥사(永興寺)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하는데, 영흥사는 신라 최초의 비구니 사찰이었다. 진흥왕 이후 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을 거치면서 신라 왕실의 불교 지원은 더욱 강화됐고 사찰은 점점 더 많이 세워졌다.

신라에서 불교 신앙과 불교 수요가 높아질수록 또 왕실의 지원이 강해질수록 중국에 유학하려는 스님들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실제로 스님 각덕과 명관 이후 유학승들이 대거 늘어났다. 초기의 유학승 중에서 대표적인 스님이 원광법사였다.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원광법사는 각덕·명관 그리고 지명(智明) 스님에 이은 네 번째 유학승이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원광법사를 박씨라 하면서 ‘조상의 전통이 오래 계승됐다’고 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원광법사는 신라의 박씨 왕족이자 진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3세에 출가한 원광법사는 진평왕 11년(589) 25세의 나이에 중국 남조의 하나인 진(陳) 나라 금릉(金陵, 현재의 남경)으로 갔다. 장엄사(莊嚴寺) 민공(旻公)의 제자에게 설법을 듣고 심취한 원광법사는 아예 중국에서 불교 공부를 하다가 일생을 마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진나라가 수나라에 멸망 당한 후 원광법사는 장안으로 가서 공부하다가 유학생활 11년 만인 진평왕 22년(600)에 귀국했다. 원광법사 역시 귀국할 때 진평왕은 물론 전 국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당시 불교 이해가 급속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오히려 신라인들은 정신적으로 혼란 상황에 빠져들었다. 불교의 불살생(不殺生) 교리 때문이었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할 때는 전륜성왕을 돕는 젊은 미륵이라는 논리로 불살생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전륜성왕을 돕는 미륵이라고 해도 모든 살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즉 전륜성왕을 돕는 미륵은 모든 살생에서 자유로운가? 아니면 전륜성왕을 돕는 전쟁 때만 살생에서 자유로운가? 아니면 전륜성왕을 돕는 전쟁이라고 해도 특별한 때와 장소에서만 살생에서 자유로운가? 하는 문제들이 제기됐던 것이다. 별것 아닐 것 같은 이런 문제들이 당시 신라 젊은이들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중요 문제였다. 언제 무엇을 살생하는 것이 괜찮은지에 대한 문제가 해결돼야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전쟁터에서 적군을 살생할 수도 없었고 살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런 문제는 진흥왕 이후 진지왕·진평왕 대에 삼국 간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불살생에 대한 명쾌한 불교 논리가 확립되지 않는다면 신라 젊은이들은 정신적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화랑 귀산(貴山)과 화랑 추항(箒項)이었다. 당시 귀산과 추항은 진골 출신의 젊은 화랑이었다. 그들 역시 불교의 불살생 교리로 고민했는데, 원광법사가 고승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두 화랑은 법사를 찾아 “저희 세속인은 미련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한 말씀을 주셔서 종신토록 지킬 교훈으로 삼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법사는 이렇게 답했다. “불계(佛戒)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는데, 그 종목이 열 가지이다. 하지만 너희들 세속 신하는 아마도 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는 사군이충(事君以忠)이요, 둘째는 사친이효(事親以孝)이며, 셋째는 교우이신(交友以信)이요, 넷째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이며, 다섯째는 살생유택(殺生有擇)이다.” 그러자 두 화랑은 “다른 것은 가르치신 대로 하겠습니다만, 말씀하신 살생유택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가을·겨울 전쟁터에서는 적군을 살생해도 된다!

원광법사가 언급한 세속오계는 대부분 유교의 오륜과 관련됐다. 즉 사군이충은 오륜의 ‘군신유의(君臣有義)’와 관련되고, 사친이효는 오륜의 ‘부자유친(父子有親)’과 관련되며, 교유이신은 오륜의 ‘붕우유신(朋友有信’과 관련된다. 마지막 임전무퇴는 전쟁에 임하는 군인에게 너무나 당연한 전투 윤리였다. 그래서 화랑 귀산과 추항 역시 사군이충·사친이효·교유이신·임전무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심이 없었다.

하지만 ‘살생유택’은 그렇지 않았다. ‘살생유택’은 유교의 오륜과도 관련이 없었고 불교의 불살생 계율과도 관련이 없었다. 게다가 ‘살생유택’이라는 말 자체가 애매모호했다. ‘살생을 하되 가려서 하라’는 뜻의 ‘살생유택’은 불교의 불살생을 가르치는 것인지 아니면 특별한 살생을 가르치는 것인지 불분명했다.

그래서 화랑 귀산과 추항은 “말씀하신 살생유택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즉 살생유택이 무슨 뜻인지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의미였다. 이에 대해 원광법사는 “6재일(六齋日)과 봄·여름에 살생하지 않는 것이 살생유택이니, 이는 때를 가리는 것이다. 부리는 짐승을 살생하지 않는 것이 살생유택이니, 이는 말·소·닭·개를 살생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작은 짐승을 살생하지 않는 것이 살생유택이니, 이는 고기가 한 끼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짐승을 살생하지 않는 것”이라며 “부리는 짐승을 살생하지 않는 것과 작은 짐승을 살생하지 않는 것은 생물을 가리는 것이다. 이처럼 때를 가리고, 생물을 가려 오직 필요한 때와 필요한 짐승만 살생해 많은 살생을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살생유택은 가히 세속의 좋은 경계라 할 만하다”고 했다.

위에서 원광법사가 언급한 ‘6재일’은 매달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의 6일이었다. 그 6일에는 제석천이 중생들의 선악을 조사하고, 심판하는 날이므로 근신하면서 살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6재일이었다. 또한 봄·여름은 만물이 생육하는 계절이므로 살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이었다.

따라서 원광법사는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서 6재일과 봄·여름에는 살생하지 말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아울러 가축 및 작은 생물도 살생하지 말라고 가르쳤는데, 이는 거꾸로 말하면 가을과 겨울의 6재일을 제외한 날에는 가축이 아닌 큰 생물이라면 살생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즉 가을과 겨울에 벌어지는 전쟁터에서는 거리낌없이 적군을 살생해도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이 같은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는 유교와 불교의 윤리 특히 불교의 불살생 윤리를 삼국시대의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세속오계에 따라 신라의 화랑과 젊은이들은 정신적 혼란을 극복하고 가을과 겨울의 전쟁터에서 용감한 전사가 될 수 있었다.

화랑 귀산과 추항 역시 602년(진평왕 24) 가을 백제와 벌어진 전쟁터에서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에 따라 임전무퇴 정신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화랑 귀산과 추항이 목숨으로 지켜낸 살생유택과 임전무퇴 정신은 신라 화랑과 젊은이들의 영원한 정신적 귀감이 됐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906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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