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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6)] 대륙제국과 해안왕국의 양 날개, 인도 

“육로와 해로를 통해 6개 대륙으로 침투한다” 

촐라 왕국, 아라비아와 동남아 연결하는 중세 인도양 해상무역의 지배자
뭄바이 등 해안도시는 면직물 수출기지, 카스트 제도 속에서도 경제 발전


▎촐라 왕국의 라자라자 1세가 1010년 힌두교의 신 시바에게 바치려고 남인도 탄자부르에 세운 브리하디스와라 사원. 왕국의 부와 권력을 상징한다. / 사진:위키피디아
21세기 인도는 미래의 경제 세력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이 개혁개방 40년 동안 경제대국으로 급격하게 부상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인도 또한 1980년대부터 경제 발전이 궤도에 오른 덕분이다. 인구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현재 세계 1위의 인구 대국은 14억 명인 중국이며 그 다음이 인도로 13억 명이다. 하지만 출산율을 비교해 보면 중국은 1.6명에 불과해 고령화가 빨리 진행되고 있는 반면, 인도는 2.2명 수준으로 젊은 층도 두텁고 절대 인구도 곧 중국을 추월할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와 중국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두 나라 모두 하나의 대륙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이 두 나라와 국토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과 러시아 정도인데 인구를 보면 미국 3억 명, 러시아 1억4000만 명에 불과하다. 또한 중국과 인도는 모두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서 긴 역사를 자랑하며 뿌리 깊은 문화 정체성을 갖고 있다. 중국의 한어(漢語)와 유불선(儒佛仙) 문화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영향을 미치듯이 인도의 힌두교와 산스크리트어는 남아시아 세계를 지배하는 지주(支柱)다.

물론 인도와 중국은 역사적으로 다른 점도 있다. 중국은 진시황의 통일 이후 한 나라로 권력이 집중되는 상태를 유지했지만 인도는 권력이 항상 다양하게 분산된 체제였다. 중국은 한나라(B.C.206~A.D.220)부터 1912년 청나라가 막을 내리기까지 2000여 년 간 대부분 통일 왕조였지만 인도는 한 번도 전국을 통합하는 정치 체제를 경험하지 못했다. 19~20세기 영국의 식민지 시기에도 수많은 왕국과 정치 단위가 존재했고, 1947년 독립 이후에도 인도와 파키스탄·스리랑카·네팔·부탄·방글라데시 등 여러 나라로 분리됐다.

흔히 인도하면 막연하게 인도라는 특정 국가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 역사를 살펴보면 인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형성했고, 현재는 다수의 국가로 구성된 집합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부국굴기의 풍요로운 경제라는 관점에서 인도는 중국, 그리고 이슬람 세계와 함께 줄곧 유라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존재해 왔다. 테레사 수녀가 빈민운동을 펼쳤던 인도, 19~20세기 빈곤의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인도의 이미지를 잠시 접어두고, 화려하고 부유했던 과거의 인도로 여행을 떠나보자.

몬순이 가져다 준 富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살펴보면 지구 한가운데 삼각형 모양의 인도가 쉽게 눈에 띈다. 인도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동쪽의 중국과 서쪽의 유럽 가운데쯤에 위치하는데 인도양이라는 대양의 중심에 불쑥 튀어나온 듯 보이는 땅이다. 아라비아에서 중국까지 가는 바닷길에서 인도는 중심 고리인 셈이다.

인도의 지리는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인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한 부분이지만 사실 히말라야와 힌두쿠시 산맥 등으로 어느 정도 분리·고립된 모습이다. 산맥 너머 지역과 교류나 침략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쉽게 통일될 정도는 아니다. 인도의 북부는 두 개의 큰 강인 인더스와 갠지스를 중심으로 광활한 평야가 펼쳐지면서 거대한 공간을 형성한다. 중국에서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위치한 중원이 문명의 중심이었듯이 인도에서도 인더스·갠지스 평야는 문명과 제국의 발판이었다.

삼각형 모양의 인도 남부는 데칸고원이 지배하는 특수한 지형이다. 다수의 강이 동쪽 고원에서 발원해 서쪽 코로만델 연안으로 흐르면서 벵골 만의 바다와 만나는 형국이다. 북쪽부터 마하나디, 고다바리, 크리슈나, 펜네르, 코베리 강 들이 코로만델 연안으로 흘러가고 나르마다와 타피 강은 동쪽 말라바르 연안을 통해 아라비아 만으로 향한다. 말라바르 연안은 이슬람 세계를 바라보고, 코로만델 연안은 동남아를 향한 문이라고 할 만하다.

장기적인 역사의 관점에서 인도 경제를 연구한 티르탄카 로이(Tirthankar Roy)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세계 경제에서 인도]라는 저서에서 ‘대륙제국’과 ‘해안왕국’의 정치·경제를 구분했다. 인도 역사에서 유명했던 거대한 제국은 예외 없이 대륙 내부에 중심을 둔 세력이었다. 고대의 마우리아 제국(기원전 4~2세기)이나 굽타 제국(4~6세기), 중세의 델리 술탄 제국(13~16세기)이나 근세의 무굴 제국(16~18세기)은 기본으로 인더스·갠지스 평야를 발판으로 삼았다. 이들은 농업 중심의 군사제국이었고, 농산품에 대한 징세를 통해 정치체제를 유지했다.

해안왕국은 지리적으로 내륙에서 벗어나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역에 위치했다. 인도는 인도양의 중심에 머리를 불쑥 내밀고 있는데 대양에는 몬순(monsoon, 여름과 겨울에 거의 정반대 방향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부는 바람)이라 불리는 계절풍이 강하게 불어 해양 운송에 상대적으로 수월한 조건을 가졌다. 폭풍으로 항해에 수반되는 위험도 컸지만 계절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일정하니 예측 가능성이 높아 해운이 발전했던 것이다.

로이 교수에 따르면 인도에서 배를 통한 물류 비용은 육지의 수레 비용보다 2~3배나 저렴했다. 육지로 운송할 경우 길이 험해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소에 직접 물건을 실어 캐러밴(caravan) 운송을 해야 하는데 이 경우 수레보다 비용이 2~3배나 더 들었다. 결국 배를 사용하는 것보다 육지로 산을 넘어 물건을 운반하려면 4~9배의 비용이 들었다는 의미다. 따라서 해안에 위치한 작은 규모의 왕국들이 내륙의 제국보다 상업을 통해 경제가 발전할 가능성이 당연히 높았다.

실제 인도 동부의 코로만델이나 서부 말라바르 연안의 도시들은 고대부터 동서양을 잇는 무역을 통해 혜택을 누리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인도 연안에서 발견된 수많은 로마의 금화와 은화는 인도와 지중해의 활발한 무역을 보여주는 증거다. 물론 내륙 제국에서도 교류는 이뤄졌다. 마우리아 제국에서 인더스 강역의 탁실라(Taxila)와 갠지스 강의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를 잇는 도로는 제국의 핵심 ‘고속도로’에 해당했다.

길고도 화려한 인도의 역사에서 부국의 모델로 삼을 만한 사례나 시기를 꼽아내기는 쉽지 않다. 인도의 역사에서 대륙 제국은 화려한 궁궐과 사원을 짓기는 했지만 이는 정치권력을 통해 농촌의 부를 착취한 결과다. 막스 베버가 구분했던 다양한 자본주의 가운데 무력으로 부를 약탈하는 정치적 자본주의에 해당한다. 반면 해안 왕국들은 수공업을 통해 상품을 만들어 수출했고, 해운을 발전시켜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전통적 상업자본주의 유형에 가깝다.

중세에 인도 남부 코베리 강 유역에서 출범한 촐라 왕국(850~1279)은 점차 주변으로 세력을 넓혔고 바다를 건너 스리랑카와 몰디브까지 점령한 것은 물론, 저 멀리 말라카와 수마트라, 자바 등 동남아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물론 이때 제국이라는 개념은 19~20세기처럼 해외 영토와 주민을 직접 지배하는 체제는 아니었다. 정치 지배보다는 자국의 종교·문화적 위상을 높이고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인도양의 왕자’ 촐라(Chola) 왕국

역사학에서는 촐라 해양제국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다. 한편에서는 촐라 제국이 무력을 통해 스리랑카나 몰디브, 동남아 지역을 약탈했던 세력이라고 본다. 바다를 통해 먼 지역에 진출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륙의 제국과 다르지 않은 속성을 가졌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약탈의 성격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지속적으로 무역을 통해 자국 상인들의 부(富)의 축적을 장려하고 세수(稅收)를 늘리려는 동기 역시 강했다고 주장한다.

촐라 제국의 성격을 드러내는 몇 가지 지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제국의 번성기에 인도양을 통한 국제 해양무역이 그 어느 때보다 왕성했다는 점이다. 10세기를 중심으로 송나라가 경제적 부를 누리면서 대대적인 무역에 나섰고 이슬람 세계 역시 활발한 경제 발전을 바탕으로 국제 교류에 몰입했다. 그 한가운데 자리 잡은 촐라 제국이 약탈과 무리한 징세로 일관했다면 동서양을 잇는 해양 무역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촐라 제국은 동서양 무역의 길목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무력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기보다는 개방성을 가진 무역체제로 부를 획득하려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슬람의 상인들이 인도를 통과해 중국까지 무역망을 확장시켰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인도에서 도시화가 활발하게 이뤄졌다는 점이다. 인도 역사에서 첫 번째 도시화는 고대 인더스 문명에서 이뤄졌고, 두 번째 도시화는 갠지스 강변으로까지 도시 문화가 확장된 시기에 일어났다. 그 다음으로 세 번째 도시화는 중세에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진행됐다. 과거 도시의 핵심 기능은 정치였지만 중세의 도시는 종교와 상업의 기능이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예를 들어 촐라 제국의 수도 탄자부르(Thanjavur)나 판디아(Pandya) 왕조의 수도 마두라이(Madurai)에는 주요 시바 사원들이 세워지면서 왕실 종묘의 역할을 하게 됐다. 이들 사원은 많은 성직자들을 필요로 했고, 주변 지역의 순례자들이 모여들면서 도시의 기능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해안의 왕국들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델타 지역에 농지 확장을 위해 거대한 개간 사업을 진행하면서 새로운 농촌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수백여 개의 마을로 형성된 이들 지역 공동체는 공동회의를 통해 정치·경제·사회적 문제를 관리하고 해결했다. 특히 촐라 왕조의 코베리 강역이나 팔라바(Pallava) 왕조의 팔라르(Palar) 강역은 이런 새로운 농업 발전의 대표적 사례다.

중세 인도의 분산된 해안왕국의 주요 도시에서 상인은 사회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대표적인 집단이다. 이들이야말로 중세 세계 무역의 역군이라 할 수 있는데 인도에서 아라비아와 동남아를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이 상인들은 원래의 거점 도시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예컨대 다양한 사원을 짓는데 경제적으로 기여했고 이 사실을 돌에 새겨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유명한 상인 길드는 일명 ‘아야볼루(Ayyavolu)의 500 귀인’이라 불린다. 아야볼루는 찰루키아(Chalukya) 왕조의 내륙 도시였는데 이곳 출신 상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정신이나 문화, 그리고 사회적 기여를 수백 개의 석조 기록으로 남겼다. 그 가운데 1055년의 기록은 이들의 개척자 정신을 잘 표현했다.

“진실·순수·선행·예의·겸양·조심 등의 수많은 좋은 자질을 갖춘 그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 다양한 나라를 떠돌기 위해 태어났다. 지구는 배낭이고 뱀은 가방 줄이며, 보따리는 비밀 주머니이고 지평선은 빛이다 … 그들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6개 대륙의 각 지역으로 침투한다. 커다란 코끼리와 살찐 말, 큰 사파이어와 월장석(月長石)·진주·루비·다이아몬드 … 카르다몸·정향·샌들·사향·사프란 그리고 다른 향료와 약품을 갖고.”

사업에 필요한 다양한 자질이나 세계적 떠돌이가 가지는 적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기록이다. 게다가 당시 거래하던 상품의 명단도 흥미롭다. 실제 말은 인도가 아라비아로부터 수입하는 주요 상품이었고, 코끼리의 상아는 아프리카에서 수입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중국은 도자기와 비단을 수출했고 동남아는 다양한 향신료를 통해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세계를 무대로 삼는 아야볼루 상인들이 낭만으로 유명하다면, 비슷한 시기 마니그라맘 상인 공동체의 기록은 다문화적 성격으로 놀라움을 선사한다. 이들은 동판(銅版)에 비문을 새겨 남겼는데 콜람(Kollam) 항구에서 거래하기 위해 해당 지역 정치권력과 합의한 조건을 타밀어·아랍어·히브리어·페르시아어 등 4개 언어로 적어놓기까지 하였다. 이 동판은 아직도 인도 남부 케랄라주(州)의 시리아계 기독교 공동체가 보관하고 있다.

11세기 중세 국제경제의 척추


▎라자라자 2세가 다라수람에 건설한 에라바테스와라 사원의 조각들은 촐라 왕국의 문명 발달을 보여주는 증거다. / 사진:위키피디아
인도 자체의 기록도 기록이지만 당시 외부인들이 관찰한 내용도 아직까지 전해진다. 우리는 이슬람 세계의 번영을 묘사하며 중세 이집트에서 이뤄진 ‘파티미드의 기적’을 언급한 바 있다. 일명 게니자(Geniza) 기록이라 불리는 사료가 카이로의 유대교회에서 발견됐는데, 11세기 무렵 인도가 중세 국제경제의 척추 역할을 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 기록은 특히 인도의 수출 품목을 기록해 뒀는데, 이를 통해 당시에 이미 인도는 비단과 면직물, 철과 동 제품, 진주와 개오지조개 등을 해외로 수출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인도 사람들은 무역을 통한 대금을 금이나 은으로 받기를 원했다. 이집트나 홍해 지역에서는 중세 인도 면직물도 발견돼 당시의 활발했던 무역을 증언해 준다.

세계 자본주의가 활개 치는 21세기에 브랜드와 스타일은 지구촌을 하나로 묶는다. 삼성과 애플이 스마트폰 시장을 놓고 세계 시장에서 맞겨루는 한편, 두 브랜드의 디자인이 얼마나 유사한지 송사(訟事)가 벌어지기도 했다. 유럽 명품 디자이너의 유행은 세계 패션에 거대한 모방의 파도를 불러일으킨다. 바로 이런 스타일의 세계화를 처음으로 주도한 것이 인도의 섬유 제품이다.

비단은 중국, 디자인은 인도


▎여전히 대도시로 기능하는 인도 뭄바이. 이곳의 해안가 거리는 일명 ‘여왕의 목걸이’라고 불린다.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거리 무역의 전통에서 인도의 특산품을 꼽으라면 단연 섬유 제품이다. 특히 면을 재료로 만드는 면직물과 이를 다양하게 염색하고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하는 능력에서 인도는 탁월했다. 고대부터 중국은 비단으로 유명했지만 인도는 비단을 도입한 뒤 면과 비단을 조합하는 능력을 키웠다. 중세에 이르러 인도의 해안 도시가 발달하고 무역이 부흥하면서 면직산업은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13~14세기 중국의 기록에는 촐라 제국의 도시 나가파티남(Nagapattinam)으로부터 의류 수입을 언급하며, 인도 직물의 다양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그건 아마 현대 소비자가 벤츠와 렉서스의 차이를 잘 아는 것과 유사한 일일 것이다.

유럽 중심의 대항해시대는 인도의 전통적 우위를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장시켰다.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을 선두로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 유럽 세력들이 다투어 인도양에 진출하면서 무역은 더 멀리, 더 빨리, 더 많이 이뤄지게 됐다. 이 시기 중국이나 일본의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듯 인도 직물에 대한 국제적 수요도 폭발했다. 영국·네덜란드·프랑스의 동인도주식회사들은 인도가 생산한 천과 옷을 일본에서부터 유럽까지 유통시켰다.

유럽인들이 처음 눈독을 들인 것은 동남아의 향신료인데 특히 후추와 정향을 원했다. 유럽으로 가져가서 팔기 좋은 상품인데다 세계 어디서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남아에서 향신료를 구매하자면 현지인이 가장 선호하는 상품인 인도의 직물을 가져가야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주식회사는 인도 구자라트의 직물로 수마트라의 후추나 금을 얻었고, 코로만델의 면직물로 반텐의 후추를 사는 식으로 이윤을 남기며 아시아 역내 무역에 열중했다.

시간이 지나자 인도의 직물은 세계 전역에서 색상의 화려함과 아름다움, 디자인의 우아함과 세공의 정밀함으로 명성을 누리게 됐다. 그러면서 점차 각 나라가 자신의 문화를 반영하는 디자인을 인도에 주문했다. 예컨대 태국 왕실은 의류의 정확한 디자인을 주문해 인도로 보냈고, 일본도 자국 문화를 반영하는 독특한 무늬나 디자인을 요구했다. 유럽의 대표적인 강대국이었던 영국이나 프랑스는 여성의 드레스를 인도 직물과 디자인으로 만들다가 점차 주문생산으로 진화했다. 일본의 기모노부터 유럽의 드레스까지 인도가 천과 옷을 만드는 세계 자본주의의 정형이 16~18세기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뭄바이·마드라스·콜카타, 자본주의의 관문


▎일본에 수출된 인도의 면직물. 알록달록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 사진:Interwoven Globe
인도의 장기 역사에서 살펴보았던 세 차례의 도시화는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새로운 단계를 맞는다. 촐라 제국 시기의 제3차 도시화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델타 지역에 개간 사업을 통해 농업 공동체를 만들어 도시를 먹여 살리고, 내륙과 해외를 연결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해당 지역의 정치·행정 세력이 경제적 이점까지 취득하면서 운영하는 도시였던 셈이다.

17~19세기 도시화의 특징은 영국의 동인도주식회사 주도하에 국제 무역이 지배하는 대도시화 현상이다. 아라비아해를 향한 뭄바이, 벵골 만의 콜카타, 그리고 코로만델 연안의 마드라스(현재 첸나이)는 17세기 영국이 국제무역의 중심으로 만들었던 도시들이다. 과거 강을 낀 도시는 내륙과의 연결을 중시했다. 하지만 새로 만들어진 도시들은 내륙 교역을 무시하고 대양으로 향하는 국제 무역을 위해 존재했다. 콜카타가 유일하게 강을 끼고 있었지만 내륙과의 교역은 여기서도 제한적인 수준이었다.

뭄바이·콜카타·마드라스는 세계가 인도에 주문하는 섬유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기지의 역할을 담당했고 인도와 유럽의 경제적 이익이 긴밀하게 엮이는 장(場)이 되었다. 특히 18세기부터 무굴 제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되면서 정국은 불안해졌다. 인도의 많은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치안의 안정과 법의 질서가 서 있는 세 개의 대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실제 18세기가 되면 내륙에서 해안 대도시로 거대한 인구 이동이 일어나면서 인도의 중심이 바뀌었다.

1680년대 내륙의 델리·아그라·라호르의 인구를 합치면 120만이었는데, 1800년에는 그 수준이 30만으로 축소됐다. 반면 같은 기간에 마드라스·뭄바이·콜카타의 인구는 각각 10만이나 기껏해야 20만 수준에서 도합 100만 명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물론 내륙에서 해안으로의 인구 이동이 기존 도시를 향하기도 했다. 말라바르 연안의 수라트(Surat)나 코로만델의 마술리파트남(Masulipatnam) 등은 전통적 해안 도시였다. 하지만 이들 도시는 인도의 전통세력이 지배하는 강한 정부를 갖고 있었지만 명확하고 믿을 만한 상법을 보유하지는 못했다. 예측가능한 상법이 지배하고 강한 해군력으로 안보가 보장된 신생 대도시에 비해 매력이 떨어졌던 셈이다.

19세기에는 영국의 동인도주식회사를 매개로 인도와 중국의 자본을 연결하는 범(汎) 아시아적 비즈니스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인도의 면직물과 중국의 도자기 교역은 물론 중국의 차 재배가 인도로 확산됐고 인도의 아편도 중국으로 수출됐다. 그 과정에서 싱가포르나 홍콩과 같은 새로운 대도시가 동남아와 중국에서도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근대를 여는 뭄바이·마드라스·콜카타의 세 도시는 여전히 인도 10대 도시에 속하며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세계를 향하는 관문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중세 촐라 해양 제국의 시대나 16~17세기의 무굴 제국, 그리고 동인도주식회사가 지배하는 18~19세기까지 인도는 대륙의 정치적 자본주의와 해양의 상업적 자본주의가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19세기가 되면 영국을 비롯한 유럽 세력의 영향으로 해양의 상업적 자본주의가 우세하게 되지만, 20세기 중반 독립한 뒤에는 다시 사회주의체제가 들어섰다. 즉 내륙 중심의 정치적 자본주의 색채가 강화된 것이다. 1980년대 시작한 개혁의 영향으로 21세기 인도는 다시 해외로 향하는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 인도가 이제는 대외지향성이 확고해 본격적인 경제 발전의 궤도에 오른 것으로 보이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항상 조심스럽다.

카스트 제도는 경제 발전의 걸림돌인가


▎대형 빨래터와 판잣집들이 얽혀 있는 뭄바이 시내의 카스트 계급 최하층 거주지 도비가트.
과거 인도의 화려한 번영은 우리들의 흔한 편견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들은 카스트 제도에 기초한 인도의 전통문화가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의견을 피력해 왔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전통문화가 더 철저했던 시기에는 경제 번영이 불가능했어야 당연하다. 하지만 인도는 고대부터 직물과 의류를 수출하면서 세계 무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인도의 도시들이 품고 있는 화려한 사원과 궁전, 예술과 기록들은 과거의 물질적 풍요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똑같은 사회제도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것일까. 이는 인도라는 세계의 퍼즐을 푸는 데 사회과학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촐라 제국의 번영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가설은 인도 남부와 북부의 차이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지금부터 3000여 년 전 아리안 족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침투해 들어오면서 만들어졌다. 그 때문에 북부에서는 강한 카스트 구조가 자리 잡았지만 남부 드라비다족의 영역은 보다 평등한 사회구조가 남았다. 촐라 제국의 기록 가운데 이 지역에는 크샤트리아(무사)나 바이샤(상인과 농부)가 거의 없었고 인구의 대부분이 수드라(하급 노동)였다는 점이 언급되며, 그 때문에 수드라를 교육시켜 크샤트리아와 바이샤의 직업을 수행하게 했다는 사실은 괄목할 만하다.

근세에 와서도 무굴 제국은 중앙아시아 출신 이슬람 세력의 정권으로 인도 농촌의 기존 사회구조를 방치하며 도시를 중심으로 정치권력을 세웠다. 영국의 동인도주식회사는 해양 무역의 주체로 새로운 대도시를 만들면서 근대 질서를 인도에 도입한 셈이다. 인도의 북부나 남부 모두 농촌을 계속 지배하는 것은 전통적이고 불평등한 공동체였지만 도시에서는 외부인들이 수립한 새로운 질서,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졌던 셈이다.

자본주의 발전이란 결국 창조적 파괴의 연속이다. 그것은 물질세계에 적용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차원이다. 인도는 도시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창조적 파괴를 통한 경제 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이를 사회 전체로 확산하는 데는 실패한 셈이다. 농촌의 전통 공동체가 그만큼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사회 조건의 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이만한 성과를 얻었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면, 인도 사회 전체가 평등 속에서 자본주의 게임에 돌입한다면 얼마나 엄청난 에너지가 발산될지 상상해 볼 수 있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1906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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