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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19)] ‘일본 경제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인(仁) 

“참된 효용 살펴야 백성이 행복해진다” 

새로운 레이와(令和) 시대 맞아 1만 엔권 주인공으로 등장
500여 기업에 관여하면서도 경영권 위임, 인적 네트워크 확장에 힘써


▎서울~인천을 잇는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선 개통식(1899년). 이 사업을 주관한 사람이 시부사와 에이이치다.
동양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기에 바빴던 서구가 동양을 앞서기 시작한 시점에 관한 연구는 다양하다. 대체로 정설은 대항해시대를 거쳐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시점으로 보는 게 유력하다. 그때 목도되는 비약적 자본주의의 발달은 신대륙과 동양의 물산을 선취하려는 자본가의 모험정신에 기인했다. 이런 현상이 이뤄지게 되는 배경에는 자본의 공동 출자와 배분이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있었다.

일본은 서구식 주식회사라는 제도를 동양에서 가장 먼저 받아들여 경제 발전을 이끈다, ‘일본 경제의 설계자’라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 1840∼1931)는 서구를 시찰하고 그들의 앞선 문명에는 자신들에게 결여돼 있는 차별성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시부사와는 유럽 순방 중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를 접견한다. 국가의 발전은 공업의 발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자국의 철강 제품 구매를 요구하는 국왕의 모습을 보며 상업이란 그저 이익을 추구하는 장사꾼의 놀음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기에 이른다. 시부사와는 상업을 진흥시키지 못하면 일본이란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봤다.

2019년 레이와(令和) 시대라는 새로운 연호의 시대를 연 일본은 이에 발맞춰 2024년을 목표로 화폐의 새로운 디자인을 계획하고 모델의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의 최고액권인 1만 엔권의 주인공으로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확정됐다.

그는 1867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도쿠가와 정권의 마지막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이복동생인 도쿠가와 아키다케(徳川昭武) 공자를 수행하기에 이른다. 이 공적인 여행에서 그가 목도한 것은 서구 자본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주식회사 제도였다.

그는 어려서 배운 [논어]를 비롯한 동양의 한학을 바탕으로 일본적 세계관을 키웠고 드넓은 세계로 나아가서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익히기에 이른다. 시부사와의 경제 철학은 [논어와 주판]이라는 그의 강연집을 엮은 저서의 제목이 상징하고 있다.

[논어]가 동양적 사고의 기층을 이룬다면 그 위에 덧입힌 견문으로 넓힌 생계의 방편이 주판이다. 주판은 그의 평생을 지배한 먹고사는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경제 시스템은 그의 이런 이론에서 출발한다. 시부사와는 윤리나 근엄한 철학을 강조할 것 같은 [논어]를 끌어들여 경제관념에 대한 동양적 사고의 새로운 지평을 열면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가 된다.

그는 1840년 사이타마현 후카야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구두법(句讀法)을 배우고 [대학] [중용]을 읽고 [논어]까지 배웠다. 7세부터는 그의 종형(從兄)인 오다카 이쓰타다(尾高惇忠)에게서 [사서오경]과 [일본외사]를 비롯한 동양의 고전을 익혔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시부사와는 암기하려 하기보다는 12세가 될 때까지 4, 5년 정도는 오로지 읽기만 했다. 12세 정월에 세배를 다녀오는 길에도 책을 읽다가 구덩이에 빠져 설빔을 버려서 어머니에게 야단까지 맞는 일도 있었다.

시부사와는 14, 15세까지 독서·검술·습자 등 학업에 전념한다. 검술은 오가와 헤이베(大川平兵衛)로부터 신도무념류(神道無念流)를 배운다. 어느 정도 학업을 마치자 아버지로부터 농업과 장사에 힘을 기울이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시부사와는 보리를 재배하거나 염색을 위한 쪽(藍)을 만들었다.

섬나라 일본의 지평을 확장하다


▎프랑스 화가 조르주 가랑의 작품 ‘만국박람회 당시 조명을 밝힌 에펠탑’(1899).
시부사와의 집안은 쪽의 제조·판매와 양잠을 함께 경영하고 쌀·보리·야채도 생산하는 호농(豪農)이었다. 원료의 매입과 판매를 담당하자면 일반적인 농가와 달리 항상 주판을 다뤄야 하는 상업적 재능을 필요로 했다.

시부사와는 14세 때부터는 혼자 쪽 잎 구입에 나섰다. 이때의 경험이 유럽 경제 시스템을 이해하고 훗날 현실적인 합리주의 사상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일본의 정신에 서양의 기술을 배운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말이 있는데 시부사와는 그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인 ‘논어와 주판’이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시부사와는 검술 수행의 한 방편으로 근왕지사(勤王之士)와 교우를 맺는다. 청년시절 시부사와는 당시 청년들이 열병처럼 앓던 ‘천황을 세우고 오랑캐를 쫓아낸다’는 존왕양이(尊王洋夷) 사상에 빠져 있었다. 실제로 시부사와는 도막(倒幕, 막부를 쓰러뜨림)을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것은 다카사키성(高崎城)(지금의 군마현)을 탈취, 무기를 조달해 요코하마에 있는 외국인 거주지를 습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결국 존왕양이파의 만류에 의해 무산되고 만다. 시부사와는 그대로 고향에 있으면 위험하다고 보고 교토로 피신한다.

시부사와는 젊은 시절에는 꽤 과격한 성격이었다. 결국 아버지와 의절하고 교토로 올라와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밑으로 들어간다. 이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관직에 올라간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덕분에 막부의 관료가 되는 등 극적인 변신을 시도한다.

비재벌 기업 성장에 크게 기여


▎병자수호조약 140년에 즈음해 2016년 부산근대역사관에서 개최된 ‘근대 부산항 별곡’ 특별기획전을 관람하고 있는 시민들.
아이러니컬하게 그는 자신이 타도하려고 했던 집단의 녹을 먹게 됐다. 27세가 되던 해에는 프랑스 만국박람회에 맞춰 유럽을 방문하고 유럽의 금융제도와 산업에 관해 공부했다.

시부사와가 파리 만국박람회와 유럽 각국 순방을 마치고, 도쿠가와 아키다케가 파리에서 유학하는 사이, 1867년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한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뤄진다. 이에 따라 게이오 4년(1868) 5월 새 정부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고 9월 4일(1868)에 마르세유에서 귀국길에 올랐으며, 그해 11월 3일(12월 16일)에 요코하마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후에는 시즈오카(静岡)에서 근신하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만난다. 요시노부로부터 “이제부터는 네 길을 가거라”는 말을 듣는다. 그 뒤 프랑스에서 배운 주식회사 제도를 실행하고 메이지 2년(1869) 1월 시즈오카에 상법회소를 설립했다.

시부사와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설득 끝에 10월에는 대장성에 들어가게 된다. 시부사와는 대장성 관료로 개혁안의 기획 입안을 실시하거나 도량형 제정 및 국립은행 조례 제정에 관여했다. 전국적으로 통일된 금은복본위제(金銀複本位制)를 전제로 하는 신화폐조례를 제정한다.

시부사와는 1872년 지폐공사의 책임자로 취임한다. 독일에서 인쇄된 메이지 통보(통칭 게르만 지폐)를 발행했는데 위조지폐 사건이 터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예산 편성을 둘러싸고 당시 최대 실력자였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다 메이지 6년(1873) 상관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함께 퇴임했다.

시부사와는 메이지 8년(1875) 상법 강습소를 설립한다. 1887년께는 시부사와를 존경하는 경영자와 관리직이 모여 류몬샤(龍門社)를 조직한다. 쇼와 초기에는 회원 수천, 수만 명에 이르렀다.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1912) 등으로 인해 미·일 관계가 악화될 때는 미국의 보도기관에 일본의 뉴스를 보낼 수 있는 통신사 설립 법안을 입안한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것이 현재의 지지통신과 교도통신의 기원이 됐다.

그는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거론된다. 1926년과 1927년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추천 사유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 중요한 공통점은 미·일 양국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고자 시부사와가 열정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만약 시부사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면 일본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시부사와는 재계 은퇴 후 ‘시부사와 동족주식회사’를 창설했다. 이를 중심으로 하는 기업군(群)이 훗날 ‘시부사와 재벌’로 불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는 사후 재산 다툼을 방지하고자 편의적으로 지주회사화한 것으로 시부사와 동족 주식회사가 보유한 주식은 회사의 주식 20% 이하였다. 그처럼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부사와는 쇼와 6년(1931)에 사망한다. 향년 91세.

시부사와가 전도유망한 대장성의 관리를 그만두고 실업계에 나가 처음으로 맡은 일은 일본 최초의 은행인 제일국립은행(현 미즈호은행)의 총감 역이었다. 그 뒤 오사카 방적사와 도쿄가스, 전원도시(현 도쿄급행전철), 도쿄증권거래소, 각 철도사와 500여 개나 되는 기업의 설립에 관여한다.

시부사와는 주식회사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로서는 주식회사의 형태를 취하는 건 매우 선진적인 선택이었다. 일본에서 주식회사 제도가 발달하기 시작한 때는 메이지 시기 이후부터다. 시부사와는 일부 재벌 산하 회사를 주식회사화해 나가지만, 본사와 자회사 사이에 주식 소유를 근거로 한 강한 결합을 전제로 한 폐쇄적인 것이었다. 이 같은 조직 본연의 형태를 콘체른(konzern, 기업 연대)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은 재벌에 대해서는 폐쇄적이었지만 비재벌이 형성하는 주식회사는 발달하고 있었다. 어쨌든 재벌이 급성장하는 시대이며, 그들이 큰 사업 경영체를 만들어 경제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시부사와는 몇 개의 기업을 성공시키면서도 여타 재벌들과는 노선을 확연히 달리했다. 그는 비재벌의 주식회사에 계속 관계한 드문 인물이기도 하다. 만약 시부사와가 없었다면 비재벌 기업은 오늘날 이처럼 성장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사실 그는 기업가로서 일찌감치 성공한 사람이다. 제일국립은행이나 오사카방적회사(현 동양방적)이라고 하는 대기업의 시작이 그 예다. 하지만 당시 재벌들과는 대조적으로 일관되게 개방적인 경영을 추구했다. 영어의 ‘bank’를 은행(銀行)으로 번역한 사람이 시부사와였다. 그는 회사뿐만 아니라 도쿄주식거래소, 도쿄수표교환소 등의 설립에도 관여했다. 시부사와가 일본의 경제계에 준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시부사와가 일생 동안 500여 개나 되는 기업에 관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경영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선적으로 경영을 지휘하는 게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경영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이 시부사와는 경영 측면에서는 자신이 신뢰하는 유능한 사람을 판별해 적절히 배치해 갔다. 자신의 컬러를 강하게 드러내지 않고,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넓혀간 것도 시부사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하나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차례로 다른 기업에 관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부사와에게 중요한 키워드는 인(仁)이었다. 바로 남을 사랑하고 어질게 대하는 ‘사회를 위한’, ‘타인을 위한’ 삶이다. 개인의 행복 증진에 몰두하는 현대인들과는 자못 다른 모습이었다.

고도 경제 성장기나 안정 성장기 때는 일본의 경제 자체가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자사의 이익만 챙겨도 어느 정도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경제 성장이 한계에 봉착한 상황에서는 자사의 이익만을 보는 게 아니라 다른 기업들과의 협력을 통해 일본 경제 전체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을 사랑하고 어질게 대하라


▎서울 명동 한국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반관반민의 회사로 1909년 출범했으나 1917년 본점을 도쿄로 옮기고 주주를 일본인으로 제한했다.
시부사와는 다이쇼 5년(1916)에 [논어와 주판]을 저술한다, 저서를 통해 시부사와는 ‘도덕경제 합일설’라는 이념을 내놓았다. 그는 유년기에 배운 [논어]를 기반으로 윤리와 이익의 양립을 실천하려 했다. 경제를 발전시켜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 부는 공유하고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논리다.

[논어와 주판]에는 시부사와의 이념이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부의 근원은 인의 도덕이다. 올바른 도리의 부가 아니면 그 부는 완전히 영속되지 못한다.”

그리고 도덕과 동떨어진 기만, 부도덕, 권모술수적 상업적 재능은 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시부사와는 말한다. 또 이 책에 실린 다음과 같은 말에는 에이이치 경영 철학의 진수가 담겨 있다.

“어떻게 하면 이치에 맞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그 이치에 맞게 하면 국가·사회의 이익이 될까를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에게도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생각해 봤을 때 만일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는 아니지만 도리에도 맞고, 국가·사회에도 이익이 된다면 나는 단연 자기를 버리고 도리가 있는 곳을 따를 것이다.”

시부사와는 에도막부 말기에 정치 개혁에 나선 양명학자 야마다 호고쿠(山田方谷)의 문인(門人)으로 ‘의리합일론(義利合一論)’을 논한 미시마 추슈(三島中洲)와 의기투합하게 된다. 시부사와는 미시마의 사후(死後)에 그가 창립한 니슈가쿠샤(二松学舎)의 경영에도 깊게 관여한다.

또 시부사와는 평생 동안 약 600여 개의 사회사업에도 종사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사회복지사업의 선구가 된 양육원(현 도쿄도 건강 장수의료 센터)의 초대원장을 맡은 것을 들 수 있다. 이어 일본 적십자사의 설립 등에도 관여했다. 사회사업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가 헌신했던 분야다.

기업인으로서 냉정한 시각


▎‘일본 경제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레이와 시대를 맞아 1만 엔권 모델로 확정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부사와는 공익을 추구하는 ‘윤리’와 합리적 판단의 기저에 있는 ‘이익’의 양립을 테마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부사와는 이를 ‘논어와 주판’이라고 표현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공익이나 사회공헌을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이익을 올려가는 것이다. 이익을 올리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게 아니라 나라나 일본 경제에 환원해 나가는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논어]를 배웠다. [논어]의 정신을 살려서 공익을 추구했다. 동시에 ‘주판 손익계산’을 소중히 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논어]와 주판의 손익 계산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시부사와는 이를 양립시킨 인물이다.

1908년 중앙자선협회 출범식의 연설자는 시부사와였다. “즉흥적인 자선이나 평판을 얻기 위한 자선은 자선사업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도리를 지키면서도 조직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확장해야 한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였지만, 사회사업가로서의 측면도 뛰어났다. 시부사와는 1916년 76세로 경제계를 은퇴하기까지 500개가 넘는 회사의 설립과 경영에 관여했다. 하지만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은 사망 직전까지 참여했을 만큼 대단한 열정을 보였다.

사람·재화·돈·정보 등 경영의 4자원 중에서도 정보를 특히 중요시한 시부사와는 20세기 들어 무섭게 성장한 미국을 몇 차례 방문하면서 그 노하우를 흡수했다. 그는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를 응시하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늘 고민했다.

1902년부터 1904년까지 대한제국에서 발행된 초기 제일은행권의 1엔, 5엔, 10엔권에는 당시의 경영자였던 시부사와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경제 침략에 앞장선 인물로 비치고 있다.

1876년에 조선과 일본은 병자수호조약을 맺는다. 이때 시부사와가 세운 제일은행이 부산에 지점을 낸다. 군대를 앞세운 침략 이전에 대기업들이 먼저 들어온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를 미국인의 손을 거쳐 부설권을 획득한 사람도 시부사와였다. 시부사와는 경인철도합자회사 사장으로 경인선을 부설한다. 이어서 경부철도주식회사를 같은 방식으로 만든다.

시부사와는 1896년 경부철도주식회사를 만들어 사장에 오른다. 조선이 일본의 정치적 식민지가 되기 전에 철도를 비롯한 경제를 장악한 것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 경제 침탈의 선봉에 선 사람일 수밖에 없다.

중국 CCTV가 3년에 걸쳐 제작한 역사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大國屈起)]의 7편인 일본의 [백년유신(百年維新)] 편에서는 일본이 세계의 경제 강국으로 등장한 배경에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유상(儒商) 정신을 거론한다. 일본을 굴기시킨 비결로 높게 평가한 것이다.

세계의 수준 높은 문명을 접한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놀라다가 나중에는 서구의 문화에 심취하고 결국에는 미친 듯이 그들의 문명을 배워 능가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선진문물의 적극적 수용과 심화·발전이라는 일본 특유의 외부 문명 수용자세인 셈이다.

왕성한 호기심으로 동양의 고전을 섭렵하던 소년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도막파의 열혈자사가 됐다가 자신이 타도하려고 했던 조직에 출사하는 등 변신했다. 또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에 체류하며 선진문물을 익힌다. 그사이 그가 몸담았던 도쿠가와 정권은 실각하고 망국의 신하가 돼 귀국하지만, 다시 메이지 신정부의 경제관료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본인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베푼다


▎일본을 근대화한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
그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또 변신을 시도해 실업계에 투신, 초기 일본 자본주의 토대를 다진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맞춰 언제나 능동적으로 대처한 변신의 귀재답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을 따라 사는 것이 멋진 인생이다.”

그는 천대받던 상업에 성인의 가르침과 부합한다는 이론을 내세우며 영리 추구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2000년 동안 스승으로 받들던 중국의 정신인 [논어]의 가치를 단번에 물리치지 않고, 새로운 스승으로 등장한 서구의 가치와 접합하는 놀라운 편집 솜씨를 보여줬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도 시부사와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경영의 ‘사회적 책임’을 논한 역사적 인물 중, 그 위대한 메이지를 구축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필적할 만한 인물을 알지 못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일찍 경영의 본질은 바로 ‘책임’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시부사와는 주자학적인 인의 도덕의 편중과 공리공론적 해석을 반대했다. 원전으로 들어가 공자의 가르침을 보자고 외쳤다. 또 이익과 참된 효용을 살펴야 백성이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논어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충서(忠恕)다. 간략하게 말하면 본인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베푼다는 의미다.

시부사와는 자본주의라는 끝없는 욕망을 분출하는 괴물을 제지하는 엄격함을 논어로부터 인용해 자기 수양을 하듯이 경영에 임했다. 시부사와의 일생은 ‘호기심과 견문’의 일생이며 평생 자기 수양을 도모한 꼿꼿한 사무라이의 풍모가 엿보인다. 구미를 순방하며 그들의 문명에 감탄과 수용의 결연한 의지를 내비치면서도 자신이 평생 곁에 두고 읽었던 [논어]의 나라에 가서는 그들의 조숙해서 시들어 버린 문명의 쇠락과 타락한 배금주의에 실망한다.

오늘날 향전간(向錢看, 돈만 쳐다보고 가자)하는 중국의 굴기를 보면서 덩샤오핑이 말한 같은 발음의 향전간(向前看, 미래를 바라보자)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해 본다.

바로 시부사와가 말한 돈에 따르는 책임의 문제가 아닐까. 그는 인의도덕과 생산 이익이 일치하지 않으면 진정한 부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인의도덕과 생산 이익의 일치, 즉 ‘논어와 주판’의 통일은 부동의 신념입니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1907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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