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선비 정신의 미학(40)] 도학(道學) 개척한 ‘소학동자’ 김굉필 

김종직과 조광조 잇는 유학사의 정맥 

21세에 김종직에게서 받은 '소학' 가르침 평생 실천
유배지서 17세 조광조에게 학문 전하고 갑자사화 참형마저 의연히


▎김백용 종손이 도동서원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굽은 도로를 따라 고갯마루 다람재에 오르자 발 아래로 낙동강이 보였다. 조심스레 내려가니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산자락에 도동서원(道東書院)이 나타난다. 5월 17일 서울에서 초로(初老)의 관광객 수십 명이 서원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으로 들어섰다. 사흘 전 도동서원 등 서원 9곳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유력하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면서 방문객이 크게 늘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사전 심사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한국이 신청한 서원을 ‘통과’를 뜻하는 ‘등재 권고’로 알려왔기 때문이다.


중정당은 우람하다. 전면에 굵은 민흘림기둥 여섯 개가 먼저 눈길을 끌었다. 기둥마다 윗부분에 흰 종이 띠를 두르고 있다. 도동서원이 자랑스러워하는 이른바 ‘상지(上紙)’다. 서원 아래 낙동강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도 이곳이 경의를 표해야 할 곳임을 알게 하는 표식이다. 국내에는 서원 650여 곳이 있다. 이 흰 띠 상지를 두른 곳은 도동서원이 유일하다고 한다.

흰 띠 도동서원에 모셔진 인물은 누구일까. 주인공은 바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선생이다. 한 번쯤 그 이름을 들었을 유학자다. 선생의 20대 손인 김백용(75) 종손이 취재팀을 안내했다. 이야기는 상지의 유래에서 시작됐다.

한훤당은 조선시대 5현(五賢)의 한 사람이다. 한훤당 김굉필을 비롯해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등 유학자 다섯 명을 가리킨다. ‘동방오현’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모두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배향됐다. 여기서 한훤당은 이들 오현 중 다시 첫 머리에 꼽히는 ‘수현(首賢)’이라는 것이다. 종손은 “흰 띠는 바로 수현의 표시”라고 말했다. 도동서원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없다. 말을 타고 서원 인근을 지나다가 이 상지를 보면 말에서 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지에 관한 별도의 기록은 없다고 덧붙였다.

스승 김종직 '소학'을 건네다


▎드론으로 촬영한 하늘에서 내려다본 도동서원 전경. 서원 앞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종손은 이를 두고 미묘한 논란도 있음을 내비쳤다. 특히 생전에 점필재 김종직(1431∼1492)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일두 정여창(1450∼1504)은 한훤당보다 나이가 4년 위다.

도동서원 중정당은 상지와 함께 받침돌인 기단석도 주목을 받는다. 모양과 색상, 재질이 서로 다른 돌들이 4각형, 6각형, 8각형 등으로 다듬어져 위아래와 좌우로 빈틈없이 맞물려 있다. 전국의 사림이 한훤당을 추모하기 위해 저마다 돌을 골라 보낸 것이라고 한다. 정성이 절로 느껴진다. 한훤당은 어떤 길을 걸었기에 그런 추앙을 받는 것일까.

한훤당의 생애 기록은 크게 연보와 행장(行狀)에 남아 있다. 행장은 두 편이 전한다. 문인 이적이 먼저 썼고 1572년 기대승이 다시 썼다.

한훤당이 태어난 곳은 서울 정릉동이다. 본관은 황해도 서흥. 한훤당의 증조부는 수령 등을 지내다가 부인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으로 이주했다. 도동서원이 있는 대구 달성군이다. 조부는 또 한양에도 연고를 둬 한훤당은 서울에서 출생하게 된다.

행장에는 어렸을 때 김굉필이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을 채찍으로 때렸다고 적혀 있다. 처음에는 행동이 거칠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자라면서 분발해 글을 배웠다. 19세에 합천군 야로현 순천 박씨 집에 장가든다. 그는 처가 옆 개울 건너 작은 바위 아래 서재를 마련해 한훤당(寒暄堂)이라 이름 붙였다. 김굉필은 이후 이곳에서 글을 읽고 가야산을 왕래했다.

21세. 한훤당은 그해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함양군수로 있던 점필재 김종직을 찾아가 제자가 된 것이다. 점필재는 기뻐하며 [소학(小學)]을 건넨 뒤 훗날의 대성을 기대했다. 한훤당도 스승의 당부를 명심하고 그때부터 [소학] 공부에 몰입한다.

[소학]은 아동들을 가르치기 위해 주자(朱子)의 제자 유자징이 편찬했다. 주자는 여덟 살이 되면 [소학]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소학]은 물 뿌리고 쓸며(灑掃) 남을 응대(應對)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進退) 등 몸가짐과 예절로 시작한다. 성격 형성에 필요한 수신서다. 그러나 뒷부분 ‘가언(嘉言)’ ‘선행(善行)’ 등에는 사서오경과 선현의 행적을 적은 문집과 역사서 등을 인용한 글이 나온다. [논어] [맹자] [사기] [효경] [춘추좌전] [회남자] 등 출처가 다양하고 수준이 높다. [소학]만 떼면 웬만한 명문(名文)을 섭렵할 수 있는 구조다. 주자는 [소학]은 집 지을 때 터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것이며 [대학]은 그 터에 재목으로 집을 짓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한훤당은 평소 첫닭이 울면 머리를 빗고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한 뒤 사당에 절하고 부모를 문안했다. [소학]은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 그는 27세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한 시기 문장가(文章家) 공부에 힘쓰는데 [소학]을 읽다가 곧 깨닫고는 이렇게 시를 지었다.

글을 읽어도 천기(天機)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도리를 다하련다/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

한훤당은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 거창한 공부에 앞서 어제 저지른 잘못을 돌이키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상의 공부를 중시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했다. 사람들이 혹 나라 일을 물으면 “[소학]을 배우는 동자가 어찌 큰 대의(大義)를 알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는 나이 30이 넘어서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다고 한다.

한훤당이 [소학]에 전념해 수신 위주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튼튼히 한 것은 후일 대성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는 [소학]이 학문의 기초인 동시에 인간 교육의 절대적인 원리가 됨을 역설했다. 이후 제자인 조광조를 비롯해 김안국·이황 등 도학의 실천을 강조한 사림파도 [소학]을 강조하게 됐다. 한훤당은 이렇게 [소학]을 유치한 아동의 공부 과정으로만 여기던 학풍을 바꿔 놓았다.

유배된 김굉필 찾아간 17세 청소년


▎도동서원 뒷산에 모셔진 한훤당 김굉필의 묘소. 뒤로 부인의 묘소가 보인다.
서원의 강당 중정당을 찬찬히 살폈다. 중정당에는 ‘道東書院(도동서원)’ 편액이 안쪽 벽면과 앞 처마 등 두 곳에 걸려 있다. 한훤당을 제향하는 서원은 본래 1568년(선조 1) 대구 비슬산에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건립됐다. 건물은 임진왜란 시기 무너졌다. 서원은 160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보노(甫老)’로 이름을 바꿔 중건됐고 1610년 다시 ‘도동’으로 사액됐다. 도동(道東)이란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다. 한강 정구는 도동서원 중건을 사실상 주도했다. 한강은 한훤당의 외증손으로 당시 영남학파를 이끌고 있었다.

편액 두 개 중 안쪽 것은 선조 임금이 경상도 도사 배대유의 글씨를 받아 내렸으며 앞쪽 편액은 한강이 스승 퇴계의 글씨를 집자했다. 퇴계가 생전에 한훤당 서원의 편액을 직접 쓰고 싶어 한마음을 집자로 대신한 것이다. 중정당 마루에 걸터앉아 앞을 바라봤다. 중정당 앞 누각 수월루(水月樓)에 가려 낙동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종손은 “수월루가 불에 타 1974년 다시 지었는데 고증이 잘못돼 건물이 높아졌다”고 안타까워했다.

한훤당은 생원시를 거쳐 성균관에 입학한다. 그는 온건했지만 사림파의 일원으로 현실에 대한 개혁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다. 33세 한훤당은 당시 이조참판에 오른 스승인 56세 김종직의 처세를 비판하기에 이른다.

겨울에는 갖옷 입고 여름에는 찬물 마시는데 도(道)가 있는 것이다/ 날이 개이면 다니고 비가 오면 그친다고 어찌 일을 다했다고 할 수 있으랴/ 난초가 시속 따라 끝내 변한다고 할 것 같으면/ 소가 밭을 갈고 말은 타는 것이라 해도 누가 믿을 것인가

스승 점필재가 요직에 있으면서도 당시 정국의 혼잡함을 개혁하려는 건의 하나 하지 않음을 풍자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점필재는 사림파의 영수답게 제자의 충언을 받아들이는 아량을 보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한훤당은 점필재와 소원해졌다.

이후 한훤당에게도 관직의 길이 열린다.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의 천거로 그는 41세에 종9품 미관말직 남부참봉을 시작으로 전생서 참봉, 군자감 주부 등에 제수되고 사헌부 감찰을 거쳐 44세엔 형조 좌랑에 오른다. 그러나 불운이 닥친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난다. 45세 한훤당은 점필재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곤장 80대를 맞고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됐다. 그러나 전화위복이 되는 걸까. 한훤당은 거기서 정암 조광조(1482∼1519)를 만나 자신의 학문을 전한다. 17세 청소년 정암은 찰방으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어천에 갔다가 인근에 유배된 한훤당 소식을 듣고 찾아간 것이다.

정암은 한훤당으로부터 학문하는 근본 방법을 듣는다. 우리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만남이다. 2년 뒤 한훤당은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된다. 운명은 또 한 번 요동친다. 1504년(연산군 10) 다시 화가 닥쳤다. 마지막이었다. 한훤당의 목숨을 앗아간 갑자사화다. 기대승은 행장에 그 최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선생이 사형의 명령을 받고는 목욕하고 관대를 바로 하고 나가면서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천천히 수염을 입에 물면서 말하기를 ‘신체와 머리털과 살은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이것마저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며 형장으로 나아갔다….”

한훤당은 순천 유배지에서 무오년 당인(黨人)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목이 베이고 저자거리에 효수됐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중정당 뒤 가장 높은 위치인 사당에 들렀다. 참배했다. 위패엔 흰 바탕에 ‘증우의정문경공한훤당김선생’이라 적혀 있었다. 선생은 사후 우의정으로 추증됐고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당 좌우 벽면에는 한훤당의 시 ‘선상(船上)’과 ‘노방송(路傍松)’을 그린 벽화가 있었다. 오른쪽에는 서원을 건립한 한강의 위패가 종향돼 있다.

한훤당은 일생 ‘치인(治人)’보다 ‘수기(修己)’에 주력했다. 그 덕분에 20여 명에 이르는 그의 문도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의 문인들은 후일 개혁정치를 주도하는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한다.

한훤, 겉은 엄격하고 속은 따뜻하다


▎도동서원의 중정당을 떠받치는 기둥 위쪽에 감긴 흰 종이 띠 상지(上紙).
윤사순(83) 고려대 명예교수는 “의리가 핵심인 성리학적 실천유학을 도학(道學)이라 부른다”며 “한훤당은 일찍이 그 중요성을 깨닫고 몸소 모범을 보이려 힘쓴 학자”라고 평가했다.

한훤당은 학문적으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특히 정여창과 함께 사장(詞章)보다 경학(敬學)을 강조했다. 그래서 퇴계는 “오로지 위기(爲己)를 일삼아 진실한 실천으로 학문을 닦은 사람은 오직 한훤당 선생뿐이었다. 이에 정암 선생이 난세를 당해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한훤당 선생에게 배웠다. 정암 선생이 뒷날 도(道)에 나아간 정성과 뜻의 높음이 저와 같은 것은 실로 그 발단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라고 정리했다.

서원을 나와 왼쪽 길로 800m 떨어진 한훤당 묘소를 찾았다. 서원 뒤 소나무가 울창한 대니산(戴尼山) 중턱이다. 산 이름은 도동서원이 들어선 뒤 공자의 자(字) ‘중니(仲尼)’에서 따 ‘공자를 받드는 산’으로 고쳐졌다고 한다.

묘소에 예를 표했다. 봉분 옆으로 충절을 상징하는 배롱나무가 서 있다. 봉분은 큰 편이었다. 왕릉과 일반 분묘의 중간쯤이다. 한훤당 묘소 바로 위에 또 하나 큰 묘가 있었다. 한훤당의 부인 묘소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종손은 “가끔 ‘역장(逆葬)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며 “문헌을 보니 당시는 역장 개념이 없었다”고 했다.

한훤당(寒暄堂)이라는 호의 유래를 물었다. 한자 훤(暄)은 ‘온난하다’는 뜻이 있다. 종손은 “한훤이란 가르칠 때 등 겉은 냉철하고 엄격하지만 속은 따뜻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도동서원 앞 한강이 서원 중건 뒤 심었다는 은행나무를 뒤로 하고 종택으로 향했다. 낙동강을 따라 동쪽으로 9㎞쯤 떨어진 현풍 못골이다.

종손이 여섯 살 때의 아픈 기억을 더듬었다. 6·25로 마을에 소개령(疎開令)이 내려져 집안이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100리나 떨어진 청도로 피난했다. 한 달 뒤 돌아오니 마을은 인민군 주둔지가 돼 폭격을 맞아 기와집 대부분이 부서져 있더라는 것이다. 주변에 흩어진 시신을 수습하는 데만 한 달 반이 걸렸다고 한다.

한훤당 종손의 현대적 소학 실천


▎도동서원에 임금이 내려준 [춘추](왼쪽)와 그 경위를 기록한 문서.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한훤당고택에는 ‘소학세가(小學世家)’란 편액이 걸려 있다. 소학의 가르침이 내려오는 집이다. 종손은 그 정신을 살리고자 대구광역시와 공동으로 고택 안에 인성교육과 토론 등 용도의 한옥을 새로 지어 운영하고 있다. 또 소학을 주제로 시회(詩會)를 열기도 한다. 종손은 “한훤당 선조의 가르침대로 따르려고 하지만 실천이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잘한 것은 있다”고 덧붙였다.

종손은 2004년 중학교 교감으로 정년을 마친 뒤 사회 활동을 접고 종택으로 돌아왔다. “종가를 지켜야 할 것 아니냐”는 어른들 말씀을 듣고서다. 그리고는 대구에 사는 아들도 종택으로 불러들였다. 4대가 모인 것이다. 이후 일주일에 두 차례 4대가 나란히 밥상에 앉았다. 종손의 바로 윗대(김병의)는 지난해 99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햇수로 4년 정도 4대가 밥상을 같이 했어요. 아버지는 그렇게 앉아 이야기하는 걸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한원당의 후손다운 실천이다. 잊을 만하면 인륜을 거스르는 험악한 뉴스가 들려오는 시대다. 도동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 기념비적인 서원 건물과 함께 그곳에 배향된 한훤당이 다름 아닌 사람의 도리를 잘 실천한 인물임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박스기사] “절대로 서로 따지지 말라” - 기대승의 행장 통해 드러난 자녀 교육

한훤당 김굉필은 자녀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4남5녀를 뒀다. 기대승이 쓴 행장에 관련 이야기가 전한다. 한훤당은 여러 아들에게 이렇게 훈계한다. “너희들은 마음으로 공경하라. 또 게으른 생각을 가지지 말며, 남이 혹시 자신을 비난하더라도 절대로 서로 따지지 말라.”

또 옛말을 인용해 훈계를 덧붙인다. “남의 나쁜 점을 말하는 것은 피를 입에 물고 남에게 뿜으면 내 입이 먼저 더러워지는 것과 같으니 너희들은 이 말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

여러 딸에게는 이렇게 가르쳤다. “감히 말을 많이 해 남의 비난을 초래함이 없게 하라. 특히 남편을 섬기고 동서를 대우할 때는 반드시 공경하고 조심해야 한다. 재산이나 이득 관계는 많고 적은 것을 따지지 말고 다만 형제간에 즐거운 마음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라.”

자상한 아버지 한훤당이 극형을 받고 순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자식들은 졸지에 ‘역적’ 신세가 됐다. 그래도 아들 언숙·언상·언학과 사위 하박·이장배·정응상 등은 제자들과 함께 세상의 눈을 피해 목숨 걸고 시신을 대구까지 운구했다.

김백용 종손은 “우리 성씨는 숫자가 아주 적은 편”이라며 “사화를 겪으며 성을 바꾼 게 한 원인일 것”이라고 보았다. 서책이나 자료도 불살라 많이 남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다행히 자식들은 중종반정으로 귀양에서 돌아왔고 이후 복권이 됐다.

기대승의 행장에는 한훤당과 일두 정여창의 관계도 언급돼 있다.

“…정 선생 일두와는 뜻이 같고 도(道)가 합일해 특별히 서로 잘 지냈다. 만날 적마다 함께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의 일을 토론하다가 밤을 새우기까지 했다. 선생이 학문하는 것이 정밀하고 실천함이 오래 되었는데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인 두 사람은 서로 마음과 학문이 통하는 지기(知己)였다. 대구 달성군 구지면 내리에는 무오사화에서 같이 화를 당한 두 사람이 유상곡수(流觴曲水)와 강학으로 서로 교류한 이노정(二老亭)이란 정자가 남아 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907호 (2019.06.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