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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복거일 소설 ‘이승만’ | 물로 씌여진 이름 (제1부 광복) 

제17장 국치일 행사 (2) 

갑신년의 정변이 실패한 지 10년인 갑오년 (1894년) 1월 10일 전라도 북서부의 작은 고을인 고부에서 인민들이 봉기했다.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은 착취가 유난히 심한 수령이어서, 이미 무척 어려워진 인민들을 모질게 침학했다.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무리하게 징수하고 죄 없는 인민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재물을 수탈했다. 부친의 송덕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을 거두기까지 했다. 극도로 부패한 사회에서 수령들의 착취에 시달려온 농민들에게도 그의 착취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했다. 인민들의 분노는 민란으로 이어졌다.
봉기를 촉발한 것은 부당한 수세(水稅)의 징수였다. 1892년에 부임하자, 조병갑은 동진강에 보를 새로 쌓았다. 동진강의 지류인 정읍천엔 이미 보가 있어서, 만석보(萬石洑)라는 이름이 붙은 새 보는 쓸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게다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한 사업이어서, 모두 이 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조병갑은 만석보가 완성되면 첫해엔 수세를 거두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막상 보가 완성되자, 그는 700석가량의 수세를 거두었다. 수세를 낮추어 달라는 농민들의 진정을 그가 거듭 무시하자, 분노가 폭발한 농민 1000여 명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고부 관아를 습격했다. 그들은 관아의 무기로 무장하고 부당하게 거둔 수세미(水稅米)를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사건은 지배 계급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린 피지배 계급의 봉기였다. 흔히 민란(民亂)이라 불린 이런 봉기들은 조선조 말기에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진주민란(晋州民亂)이 일어난 1862년엔 무려 71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고부 민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인 1893년만 하더라도, 2월에 평안도 함종에서 일어난 민란을 비롯해 경기도 인천, 충청도의 황간과 청풍, 경기도 개성, 황해도 재령, 평안도 중화 등지의 민란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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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호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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