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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 단독입수] 日 자민당 선거 전략에 투영된 한·일 관계 

참의원 선거에서도 강제징용 보상 문제는 살아있다 

선거 앞두고 의원들에 배포한 정책자료집에 관련 논리 전개
한·일 협정과 자국 최고 법원도 인정한 개인 청구권 “소멸됐다” 주장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아베 정권의 주장에 한·일 법조계는 “정치적 해석”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 ·일 청구권협정 문제가 일본 선거 국면에서도 쟁점의 하나로 다뤄지고 있다. 일본의 집권여당인 자민당이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 관계자들에게 배포한 자료에 이 문제가 등장했다.

월간중앙은 7월 21일에 치러지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이 소속 의원들에게 배포한 정책 자료 일부를 입수했다. ‘거짓 정보가 판치는 일본, 어처구니없는 야당과 미디어의 비상식’이란 제목의 100여 쪽짜리 책자의 제3장 ‘안보 정권의 진실은?’ 편에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이란 내용의 2쪽짜리 리포트다. 자민당이 펴낸 이 자료는 소속 의원들에게 선거 전략을 설명하고, 주요 정책을 숙지시켜 야당과 비판적 여론에 대응토록 하려는 취지를 담고 있다.

리포트는 지난해 10월 30일 우리나라 대법원이 내린 일제 강제징용 피해 배상 판결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강제징용 피해자 여운택씨 등 4명이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1인당 1억원씩 손해를 배상하라고 한 판결이다.

자민당 자료집에는 징용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이 끝났다”는 주장을 펼쳤다. 또 “아베 총리 역시 ‘국제법에 비춰봤을 때 절대 있을 수 없는 판결이다. 일본 정부로서 의연하게 대응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어 “일본인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서 이미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해결이 종료된 상황이며, 이는 매우 부당한 판결이라는 인식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일 청구권 협정에 관해선 아베 정부의 입장을 강조했다. 자료집에는 [협정 제2조 ‘양 체결국 및 그 국민(자국민 포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 그리고 양 체결국과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과의 평화조약 제4조에 규정된 것을 포함해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점을 확인한다’]는 내용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일본은 ‘양국 간의 청구권은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당연한 일이다. 한국은 협정에 근거해 경제 협력을 얻는 대신 청구권을 포기한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이는 정서의 문제도, 감정의 문제도 아니며, ‘이웃 나라니까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번 판결이 한·일 관계에 플러스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그렇다고 해서 일본 스스로 청구권 협정의 의미를 부정해선 안 된다”고 내부 결속을 강조했다. 한·일 관계 악화를 감수하더라도 청구권 협정과 강제징용 판결에 관한 입장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일관계 플러스 안 돼도… 의연히 대처”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이 의원들에게 배포한 내부 선거 전략 정책 자료집. 안보 분야에 한·일 청구권 협정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자민당의 자료집에 한·일 청구권 협정과 강제징용 판결이 등장한 것은 한·일 관계가 일본 정치에도 영향을 준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자료집 내용은 논쟁적인 주장을 품고 있다. 양국 법조계는 한·일 청구권 협정이 체결됐더라도 강제징용당한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우리 대법원뿐만 아니라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례에도 나와 있다. 지난 2007년 4월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니시마쓰건설 주식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일본 최고재판소는 “개별 청구권에 대해 채무자 측에서 임의로 자발적인 대응을 하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판시했다.

최고재판소는 일본이 각국과 맺은 협정을 통해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하더라도 이는 법적 소구(訴求)의 권리가 소멸됐을 뿐, 개인 청구권의 실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해석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 기업을 상대로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 행사라는 점을 처음 명문화한 것이다. 다만 이 배상 책임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이에 따라 “개별적인 청구권에 대해 채무자(전범 기업) 측이 자발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아무런 장애가 없으니 피해자들의 피해 구제를 위해 노력하라”고 권고했다.

이 판결에 앞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견해는 일본 정부가 여러 차례 밝힌 입장이다. 아베 정권 들어서도 지난해 11월 고노 다로 일본 외상은 중의원 외무위원회에 출석해 ‘일본 정부도 개인 청구권의 존재를 인정해오지 않았느냐’는 고쿠타 게이지 공산당 의원의 질문에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전문가 중에는 아베 총리와 자민당의 ‘개인 청구권 소멸’ 주장이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보기도 한다. 더욱이 일본 정부가 기업들에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거부하고 협상에 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린 것은 자국 최고재판소의 판결 취지를 무시하겠다는 발상이란 지적이다. 최봉태 변호사(대한 변협 일제 피해자 인권특위 위원장)는 “과거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외교적 보호권만 사라질 뿐 개인 청구권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개인 청구권도 소멸됐다고 입장을 번복해 양국 관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양국의 대표 법조인 단체인 대한변호사협회와 일본변호사연합회도 2010년 12월 공동선언을 통해 “한·일 청구권 협정의 완전 최종 해결 조항의 내용과 범위에 관한 양국 정부의 일관성 없는 해석·대응이 피해자들을 위한 정당한 권리 구제를 방해하고 불신감을 조장해 왔다”고 지적했다. 일본 법조계는 정부를 상대로 한·일 협정문 전부를 공개하라는 정보공개 소송을 진행 중이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1908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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