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심층취재

Home>월간중앙>특종.심층취재

[특별기획 - 현장르포] 서울시 자사고 8곳 탈락하던 날 교육계 풍경 

아무도 만족하지 않는 정부의 결정 

보수는 “조희연 교육감 개인의 정치적 신념이 교육을 유린한다”고 격분
진보는 “문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뭐가 다른가”며 반발


▎박건호 서울시교육청 교육정책국장(왼쪽 둘째)이 7월 9일 오전 관내 자율형사립고 13개교에 대한 운영평가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7월 9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정문 앞. 학교 비정규직 파업과 관련한 현수막만 나부낄 뿐, 한산한 모습이었다. 이따금 서둘러 점심을 먹으러 가는 공무원들만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30분 전만 해도 이곳은 전국의 시선을 독점한 핫플레이스였다. 이날 11시 서울시 교육청이 관내 자율형사립고 8곳을 지정 취소하겠다고 밝혔기때문이다.

이런 고요는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 12시 40분 피켓을 든 시민들이 격앙된 표정으로 교육청을 찾았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등 32개 단체로 이뤄진 서울교육단체협의회 관계자들이었다. A4용지 크기 널빤지에 코팅도 안 된 종이를 갖다 붙인 피켓은 급조된 듯 완성도가 떨어져 보였다. 보도자료를 나눠주는 관계자에게 ‘식사는 하셨냐’ 묻자 “입장문을 작성해서 바로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자사고 완전 폐지를 주장하는 측에서도 이번 결과를 예상 못한 듯했다.

섭씨 35도를 넘나드는 더운 날씨에 격한 발언들이 쏟아졌다 이들은 8곳이 탈락한 사실보다는 5곳이 재지정 된 결과에 분노했다. 조연희 전교조 서울지부장은 “수차례 학교 비리가 적발돼 감사받은 학교조차 심사를 통과했다”며 “이로써 조희연 교육감이 내세운 자사고 폐지 공약은 무용지물이 됐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종훈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사무총장은 “이번 자사고 심사에서 선행학습 지표를 뺐다”면서 “(교육청에서) 자사고가 입시학원이라고 인정한 꼴”이라고 다그쳤다. 이 사무총장은 나아가 “문재인 대통령은 밥이 넘어 가나. (자율형사립고를 도입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뭐가 다르냐”고 직격했다.

30분여에 걸쳐 교육청과 정부를 성토한 이들이 자리를 비우자 이번엔 자사고 재지정 취소를 ‘교육농단’으로 규정하는 일행이 들이닥쳤다.

이종배 ‘공정사회를 위한 국민모임’ 대표는 “자사고 폐지된다고 해서 일반고 황폐화 등 교육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단 건 조희연 교육감도 잘 알 것”이라며 “(조 교육감) 개인의 정치적 신념이 교육을 유린한 결과”라고 소리를 높였다. 정부와 교육 당국에 화살을 돌리기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사흘 뒤 자사고 심사에 참여한 평가위원 명단을 공개해달라는 내용의 정보공개청구서를 서울시교육청에 전달했다.

“문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뭐가 다른가”


▎서울자사고학부모연합회 소속 학부모들이 7월 5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자사고 폐지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마치 릴레이 경주라도 하듯 이날 오후 4시 국회의원회관에선 자사고 등으로 상징되는 수월성 교육의 대안을 찾는 행사가 열렸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의원(교육위원회 소속, 인천 연수갑)은 자사고 재지정 결과 발표 당일 고교학점제 점검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과목 선택권을 갖고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이수하는 제도를 말한다. 자사고가 아닌 일반고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지난해 8월 17일 김상곤 당시 교육부 장관은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을 골자로 한 고교체제 개편과 함께 고교학점제를 대안으로 묶은 고교교육 혁신안을 내놓은 바 있다.

자사고 관련 논의가 활발하리라는 기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참석자들 중에서 자사고 문제를 거론한 이는 단 한 명에 그쳤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교수에게 자사고 논의를 자제하기로 한 것이냐고 묻자 “(오늘 발표로) 이미 끝난 이야기를 여기서 굳이…”라며 말을 아꼈다.

이날 저녁 기자는 경기도 안양시 평촌으로 이동했다. 서울 대치동의 모 학원이 평촌에서 초·중등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입시 설명회를 개최한다는 정보를 접했다. 고등학교 입시 계통에서 수위(首位)를 다투는 곳이라고 주장하는 이 학원이 개최한 ‘초등부터 준비하는 특목고 합격 입시 전략’ 설명회는 빈 자리를 찾기 어려울만큼 인파로 북적였다.

참석자들은 정부의 중·고등학교 교육 방침에 상당한 불만과 이의를 제기했다.

예컨대 정부는 자사고를 없애는 대신 과목 선택권을 확대한다고 하지만 정작 선택할 과목이 없는 게 요즘 학교의 현실이다. 서울 대치동에서 사교육 업체를 운영한다는 한 참석자는 “의대를 가고픈 학생이 고급생명과학 과목을 신청해도, 신청한 학생이 한 명뿐이면 수업을 열 수 없지 않냐”며 “그래서 학부모들이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끼리 모아놓은 자사고를 보내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방청석에선 “의대 가고픈 마음이 잘못인가”“의사가 꿈이 된 사회가 문제라면 사회구조를 바꿔야지, 학교에 그런 꿈을 가진 아이들이 많은 게 무슨 잘못이냐”와 같은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상위권, 하위권 다 잠 자는 교실

이날까지 전국적으로 자사고 11곳의 지정이 취소됐다. 그래서인지 이날 설명회는 진보 성향 교육감 한 성토장과 다를 바 없었다. 일부 참석자는 전주 상산고 지정 취소의 부당성은 이미 많이 알려졌다며 전북교육청을 비난했다. 심지어 확인되지 않은 얘기들이 쏟아지기도 했다. “상산고 공격에 인근 J고 출신들이 앞장서고 있다. 비평준화 시절 전북 인재들은 J고로 모였는데, 이제 상산고가 뺏어간다는 것이다. 대단한 명분 때문에 전북교육청이 버티는 게 아니다.”

분위기가 격장되자 이 설명회를 준비한 학원장인 K씨가 “여권에서도 전북 상산고는 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며 학부모들을 진정시키기에 이르렀다.

한국 중등 교육의 하향 평준화를 우려하는 지적도 쏟아졌다. 한 참석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고 교실에서 수업하면 도대체 몇 등 학생에게 초점을 맞춰서 진행해야 할까. 선생님들한테 물어보면 13등한테 초점을 맞춘단다. 그러면 10등부터 20등까진 수업을 듣는다는 거다. 그런데 상위권은 이미 배운 거라서 자고, 하위권은 모르는 이야기라서 잔다.”

과거 정부가 자율형사립고를 지탱했던 명분 가운데 하나는 강남 8학군 억제였다. 자사고가 대거 지정된 2009년을 기점으로 강남구 전입 학생이 크게 줄었다는 결과가 이를 뒷받침했다. 지금도 자사고 존치론의 한 근거로 강남 8학군이 부활이 제시된다. 소위 말하는 풍선효과다. 과연 사실일까.

앞서 자사고 폐지 반대 집회에 나섰던 이종배 ‘공정사회를 위한 국민모임’ 대표는 ‘강남 8학군’ 부활을 우려했다. 이 대표는 “자사고를 선호하는 학부모들의 수요가 여전히 있다”며 “자사고 폐지되면 강남·목동·노원 교육특구의 특정 명문고가 자사고 역할을 할 것이고 특히 강남 학군이 각광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서울의 자사고가 무더기로 재지정에서 탈락하던 날 찬반 양측이 모두 불만을 표했다. 이처럼 이념에 따라 분열돼 있고 동일한 사안을 놓고서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한 곳이 바로 한국의 교육계라는 점도 새삼 확인하게 됐다.

-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201908호 (2019.07.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