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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전문기자의 ‘젊은 작가 列傳’(7)] 등단 17년 만에 첫 산문집 낸 소설가 김애란 

“깊은 생각, 정직하게 쓰기 아름다운 문장은 덤이더라” 

[두근두근 내 인생] 45만 부, [바깥은 여름] 20만 부… 작품마다 돌풍
“사소한 자극에도 감각 열고 생각의 밀도 높여 부족한 경험 극복”


▎김애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에서는 픽션의 가면 뒤에 가려져 있던 김애란의 민얼굴, 가족사나 작품의 씨앗을 만날 수 있다. / 사진:박종근 기자
1980년생 작가 김애란은, 그의 빛나는 소설 문장들에 비하면 구태의연할 수밖에 없는 수식어이겠으나, 지금 한국문학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 중 하나다. 주요 작품들의 판매 수치가 그걸 증명한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2011년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이 지금까지 45만 부, 2017년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네 번째 소설집 [바깥은 여름]이 2년 동안 20만 부가 팔렸다. 나머지 소설책들, 그러니까 2005년 출간한 생애 첫 소설책이자 첫 번째 소설집인 [달려라, 아비], 2007년 두 번째 소설집 [침이 고인다], 2012년 세 번째 소설집 [비행운]도 이 험난한 문학 위축 시기에 죽지 않고 나란히 살아남아 해마다 2, 3쇄씩 판매 부수를 늘려가고 있다. 예외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적어도 독자의 반응 측면에서 김애란은 2019년 여름 현재 정점에 올라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열림원)을 출간한 그는 지난 7월 2일 인터뷰에서 그런 상황을 소개하며 “고마운 일”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독자에게 고맙다는 얘기.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김애란이 고마워할 일은 아니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 무언가가 있으니까 독자들이 사보는 것일 테니 말이다. 오히려 독자들이 고마워할 일이다. 우리 곁에 존재해줘서, 작품을 써줘서 고마워, 이런 식으로 말이다. 김애란 소설이 과연 어떻길래 그러는지는 그의 아무 작품이나 펼쳐 읽어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장담이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기자의 생각은 그렇다. 아니면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김애란은 대표작의 제목뿐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인상 깊은 문장들이 상당수 독자들의 뇌리에 각인된 흔치 않은 작가 중 하나라고 말이다. 당장 [달려라, 아비]에 실린 표제작 단편소설 ‘달려라, 아비’의 제목과 도입부가 그렇다.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기억이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는 건지도 모르지만.

“내가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였을 때, 나는 내 안의 그 작은 어둠이 무서워 자주 울었다.”

‘달려라, 아비’의 이 첫 문장을 마주쳤을 때 허둥댔던 기억 말이다. 한국 문학에 ‘감수성의 혁명’을 불러일으켰다고 얘기되는 김승옥 소설의 어떤 문장들, 황석영이나 이문열 소설의 훌륭한 문장들과 마주쳤을 때와 결은 사뭇 다르면서도 신선함의 강도는 비슷했다고 할까. 아직 엄마 뱃속에 들어 있는 태아가 품고 있는 자궁이라는, 지금까지 그 어떤 작가도 건드린 적이 없는 영역 안으로 성큼 발 들여, 장차 여성으로 성장할 태아가 자신 안의 생명의 근원, 여성성의 상징이 두려워 울었다는, 진화와 계통 발생을 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어떤 ‘최초’와 마주하게 하는 장면 아닌가. 소설 첫 문장을 그렇게 읽을 수 있다면, 이어지는 문장들은 이후 이 작가가 보여준 예민하고 화사한 언어 연금술사적인 행보를 예감케 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장들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작았던 시절-조글조글한 주름과, 작고 빨리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던 때 말이다. 그때 나의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말을 모르는 뭄뚱이가, 세상에 편지처럼 도착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사랑 ‘애(愛)’에 빛날 ‘란(爛)’. 그의 소설 빛깔만큼이나 익숙하면서도 아름다운, 한 세대 이전 이름을 한 그는 인천에서 태어났다. 성장과정의 대부분을 충남 서산에서 보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를 다니던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작가 이력 초창기라고 할 수 있는 2007년, 지금은 폐간되고 없는 계간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발표했다가 소설집 [침이 고인다]에 끼워 넣은 단편 ‘칼자국’ 역시 김애란 문장의 매력을 얘기할 때 빼놓기 어려운 작품이다. 조금 길지만 첫 문단을 고스란히 옮기면 이렇다. 어디 한 군데를 덜어내기가 마땅치 않을 만큼 긴밀하게 뭉쳐 있어서다.

한예종 재학 중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


▎(왼쪽부터) 2005년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 2007년 소설집 [침이 고인다] 2011년 첫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인생] 2012년 소설집 [비행운] 2017년 소설집 [바깥은 여름] 2019년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건강하고 아름답지만 정장을 입고도 어묵을 우적우적 먹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음식을 우적우적 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촌부.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이런 문장들에서 어떤 정서가 느껴지시나. 기자에게는 김훈의 어떤 문장들이 떠오른다. 어딘가 유물론 냄새가 나는 문장들 말이다. 그뿐인가. 어머니가 해준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재료에 생기게 마련인 칼자국, 아마도 어미의 몸 어딘가에도 똑같은 크기와 깊이로 새겨졌을, 칼의 상처를 자신이 함께 받아들였기 때문에 어미를 떠올릴 때 통증 없이 떠올리기 힘들다는, 이런 매력적인 발상은 어떻게 생겨나는 건가. 이런 문장들은 단지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수사(修辭)일 뿐인가. 아니면 수사는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표면적인 결과일 뿐 수사 이전에 그런 수사를 가능하게 하는 좋은 생각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인가.

김애란의 산문집은 작가 연치(年齒), 지금까지 출간한 소설책이 다섯 권에 이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금 늦은 편이다. “경험도, 공부도 부족한데 소설보다 맨 목소리로 사적인 글을 쓴다는 게 부담스러웠다”는 게 산문집을 지각 출간한 데 대한 김애란의 변명 아닌 변명이다. 어쨌든 독자 입장에서는 김애란의 산문집이 반갑다. 픽션의 가면 뒤에 숨어 있던 작가의 민얼굴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사적인 면모뿐 아니라 김애란 소설의 현재 모양과 부피가 생겨져 나온 작은 씨앗들도 찾아볼 수 있는 게 산문집일 텐데, 마침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은 대목도 있다.

“새 글을 쓸 때마다 나는 내가 가진 한정된 카드로 짝을 맞추고 패를 가른 뒤 ‘빈 문서’에 펼쳐보곤 한다. 그러곤 각 낱말의 소리와 뜻, 온도와 질감을 가늠하며 그 조합의 결과가 만들어낸 우연과 리듬, 서사의 당위를 고민한다. 물론 그 말과의 씨름에서 자주 지지만. 그 실패가 종종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해주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자주 호출한 이름 중 하나가 바로 내 ‘가족’이었을 거다.” ([잊기 좋은 이름] 110쪽)

김애란은 자신의 소설을 크게 두 부류로 분류했다. 작가가 아는 얘기와 독자가 아는 얘기가 만나서 작가·독자 모두가 아는 얘기로 가는 경우. 이게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예상되시나. 작가가 모르는 얘기와 독자가 아는 얘기, 혹은 둘 다 아는 얘기로 만났는데 둘 다 몰랐던 곳에 도착하는 경우, 라고 김애란은 소개했다.

“공부 부족한데 민얼굴 드러내는 산문집 부담”


조금 어지러운 분류법을 단순하게 정리해, ‘모르는 얘기’ ‘몰랐던 곳’을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 예상 밖 서사, 라고 치자. 뻔한 얘기를 뻔하게 쓴 소설, 뻔한 얘기지만 참신하게 쓴 소설, 김애란 소설의 두 부류를 이렇게 바꿔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분류법을 따를 때 ‘달려라, 아비’는 후자에 속한다고 김애란은 밝혔다. 아내 뱃속에 딸이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무작정 달리기 시작한 소설 속 아버지가 결국 미국에 정착한다는 만화 같은 설정, 탈주의 서사라고 할 수 있을 파격이 ‘모르는 곳’에 도달한 경우에 해당된다는 얘기다. 반면 같은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 실린 ‘나는 편의점에 간다’ 같은 작품은 주제가 워낙 명확한 기획소설이라고. 이런 작품은 안정적이고 튼튼한 대신 약간의 불만이 남는다. 뻔한 내용, 뻔한 결말이어서 그렇다는 소리일 게다.

김애란은 “단편 한 편 쓰는 데 갈수록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다. 익숙해질수록, 무르익을수록 소설 쓰기가 수월해지냐는 질문에 대한 청개구리식 답변이었다. 주로 가족, 남이라고 해봤자 가까운 친구 얘기를 쓰다가 본격적으로 타인의 얘기를 쓰는 쪽으로 보폭을 넓히다 보니 시간이 더 걸리더라고 했다. 자료 조사하는 데서부터 타인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아무래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주변 얘기에서 타인 얘기로 소설 관심사가 넘어간 분기점으로 2012년 세 번째 소설집 [비행운]을 꼽았다.

네 번째 소설집 [바깥은 여름]의 맨 앞에 실린 단편 ‘입동’은 그런 변화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쪽은? 인물이나 작가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이런 궁금증을 떠올리게 하는, 여름이라는 계절을 지시하는 제목의 소설집 첫머리에 김애란은 하필 ‘입동’이라는 겨울 제목의 소설을 배치했을까. 결론을 당겨 말하면, 짐작했던 것처럼 작가의 마음은 혹은 누군가의 마음은 겨울처럼 찬바람 분다는 얘기다. 바깥은 여름일지라도 말이다.

2017년 출간 당시 읽어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입동’을 다시 읽었다가 또다시 울컥했다. 김애란은 이번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에도 포함시킨 산문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을, 2014년 가을 출간된 세월호 공동 산문집 [눈먼 자들의 국가]에 보탰다가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랐지만 세월호 참사를 직접 작품으로 다룬 적은 없다. 흔히 [바깥은 여름]이 세월호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세월호 영향권 아래 있는 작품집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에서 “[바깥은 여름] 출간 당시 소설집 안에 실린 작품들이 세월호의 자장 안에서 쓰였다고 적극적으로 밝힌 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동’은 명백한 세월호 소설로 읽힌다. 주인공들인 젊은 부부가 세상에 나온 지 52개월이던 아들 영우를 잃은 계절이 우선 세월호와 같은 어느 해인가의 봄이다.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량에 치여 숨진 아이 앞으로 나온 보험금을, 부부는 차마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쓰지 않고 방치해 두지만 어느 순간부터 남편이 보험회사에 다닌다는 이유 등이 작용해 자식의 죽음 앞에 돈 밝히는 부모라는 질시의 대상이 된다. 어린이집은 추석을 맞아 원생들 가정에 복분자 원액을 선물로 보낸다.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풍성한 한가위 맞으세요’라는 문구를 박아 넣은 카드와 함께다. 그런데 이 원액이 영우네 집에도 잘못 배달된다. 아내는 영우네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냈다면 나쁜 거고, 모르고 보냈다면 더 나쁜 거라며 흥분한다. 독자는, 이런 과정을 통과하며 차마 울음을 터뜨리지 못하고 비어져 나오는 신음 소리를 낼 뿐인 아내의 기막힌 슬픔을 바라보며 눈물을 참기 어렵다. 소설 속에 펼쳐지는 너무나도 참담한 슬픔의 지도 앞에, 자신이 왜 우는지도 모르고 운다.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김애란은 도대체 어떻게 마법을 부린 건가. 어떤 기술들을 사용해 소설을 썼길래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읽는 이를 몰아넣나.

정확한 문장만 쓰려고 노력해도 리듬 생겨

이런 궁금증에 대한 김애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역시 산문집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지만 동시에 그것이 노련하게 전달되길 원한다.”

‘부사와 인사’라는 글에 나오는 문장이다. 진실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부사(副詞)의 사용을 자제해야 하지만 반대로 글을 흥미롭고 맛깔나게 하기 위해 적절히 사용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을 담은 글이다. 결국 노련하게,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세련되게? 아무튼 그렇게 쓰는 게 중요하다는 대목에 시선이 꽂힌다. 그렇다면, 그런 글은 또 어떻게 쓰나.

읽을 때마다 감탄한다. 문장이 아름답다. 그런 얘기 많이 듣지 않나?

“20대 초반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때, 개인사가 드라마틱 한 것도, 그렇다고 전쟁을 겪은 것도 아니고, 경험이 적으니까 감각을 열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보따리가 작은 대신 사소한 자극이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풍부하게 느껴 얻는 밀도로 경험 많은 사람들의 부피를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거다. 그래서 어떤 단상이 머릿속에 떠오르거나 어떤 표현이 생각나면 그것들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곤 했던 것 같다. 서사는 평범하더라도 감각적이거나 새로운 표현들로 독자들이 재미있고 아름답게 느끼게 끔 작품을 써보자, 그런 생각이었다.”

문장의 새로움을 얻기 위해 골똘히 생각에 집중한다고 해서 누구나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닐 게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타고난 예외적인 재능을 인정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다만 언어라는, 작가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진 재료 앞에 정직하려는 김애란의 자세가 무엇보다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잘 쓴다는 게 꼭 아름답게 써야겠다는 게 아니라 재료를 잘 이해해 경제적으로 쓰면서 덤으로 아름다우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쓴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라 정확한 문장만 쓰려고 노력해도 문장에 기본적인 리듬은 조금 생기는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수를 쓰나. 아름다워 보이는 글을 쓰기 위해, 소득도 없이 말이다.

※ 신준봉 문화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 1993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신문사에서 10년 가까이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상식의 눈에는 괴짜인 문인들, 그들이 생산한 영롱한 것들을 초롱초롱한 독자들에게 중개하는 일, 제도로서 문학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많다.

201908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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