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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 특집 | 총력취재] 변화 요구 직면한 ‘65년 협정 체제’ 

해묵은 갈등이 반세기 믿음 깼다! 

국력 격차 컸던 냉전시대 모순… 양국 갈등 계기 수면 위로
달라진 현실에 맞춰 미래지향적 체제로 업그레이드 모색할 기회

룰이 깨졌다. 한·일 양국은 약속 파기의 책임을 상대에게 넘긴다. 근본을 잡아낼 때 비로소 처방은 효과를 본다. 한·일 관계 경색의 근본은 무엇인가. 1965년 한·일 협정으로 시작된 이른바 ‘65년 체제’의 균열이다. 국력의 격차가 컸던 냉전시대 현실을 감안할 때 협정의 불평등이 필연이었다면, 시대가 바뀌어 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요구는 순리이자 미래지향적이다. 65년 체제를 뛰어넘는 한·일 관계의 재설정은 과연 현재의 갈등 구조를 타개할 출구전략이 될 수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이 8월 15일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왼쪽). 같은 시각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도쿄도 ‘닛폰부도칸’(日本武道館)에서 열린 태평양전쟁 종전(패전) 74주년 ‘전국전몰자추도식’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과거를 성찰하는 것은 과거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딛고 미래로 가는 것입니다. 일본이 이웃 나라에게 불행을 줬던 과거를 성찰하는 가운데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이끌어 가길 우리는 바랍니다.”

8월 15일 제74주년 광복절 문재인 대통령의 경축사 중 일부다. 일본의 보복성 경제 규제 조치에 대항해 이순신 장군의 ‘상유십이척(尙有十二隻)’을 거론하며 강대강으로 맞받았던 최근까지 태도에 비하면 표현이 한결 순화됐다. 일본을 향해 과거사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메시지는 변함이 없지만 분명 이전과 결이 달라졌다. 양국의 가장 첨예한 쟁점인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일본을 자극하지 않고 대화의 장으로 불러내겠다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동시에 극일(克日)의 의지도 담았다. “오늘의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다”라거나 “일본의 부당한 수출 규제에 맞서 우리는 책임 있는 경제 강국을 향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라는 대목에선 자신감을 드러냈다. 남북의 평화 정착이 경제 강국의 길이라는 ‘평화경제론’을 극일의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일본에 올바른 역사 인식을 촉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최근의 한·일 관계가 진행돼 온 흐름에 비춰 보면 메시지는 분명하게 압축된다.

‘역사 인식의 전환’이 그것이다. 관계는 서로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인식의 전환은 곧 관계의 재설정을 의미한다. 일본과 갈등이 악화하면서 ‘65년 체제’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54년간 성역으로 여겨졌던 기존의 한·일 관계가 시대 변화의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65년 체제는 더 이상 성역이 아니다


▎1965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한일기본조약문에 서명하고 있다.
변화의 중심에는 전후 1, 2세대가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직접 겪었던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의 체감 기억은 확연히 다르다. 전후 세대에게 한·일 청구권 협정 덕분에, 일본이 준 돈 덕분에 우리나라가 발전했다는 이야기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합리적이지 않은 협정을 억지로 계승할 이유를 딱히 찾지 못한다.

이들은 65년 체제가 한국 사회에 기여한 바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한 대기업 부설 경제연구소에서 연구직으로 근무하는 이모(45) 박사는 “과거 일본이 우리를 도운 것은 자기들 이익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며 “국가 간 비즈니스를 은혜로 여길 필요는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이들에게 한·일 협정은 덩치가 커진 한국에게 맞지 않는 옷이다.

불가역적(不可逆的) 성역으로 믿어 왔던 65년 체제는 곳곳에서 균열을 드러낸다. 아쉬움은 있어도 최선의 합의였다는 믿음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 낮게는 갱신하자는 주장부터, 이번 기회에 낡은 체제를 완전히 청산하자는 급진적인 주장까지 다양한 요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다. 전문가 그룹은 물론 정치권도 가세했다. 시민사회의 감정적 여론에 그치지 않는 것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다.

이런 여론에 불을 붙인 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일본의 대응이었다. 일본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판결이 한·일 협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국내 여론은 분분하게 엇갈렸지만, 한·일 협정에 허점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이견은 거의 없었다. ‘65년 체제의 불완전성을 그대로 둘 것인가’란 문제 제기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 회의를 마치고 귀국길에 SNS를 통해 “우리는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고 있다”라고 했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조치로 양국 관계가 얼어붙은 상황이었다. 양국 관계의 변화를 암시하는 것으로 읽혔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7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 회동에서 지소미아(GSOMIA) 재검토 가능성을 언급했다. “지금은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으나, 상황에 따라 재검토할 수 있다”라는 말은 안보 관계 재설정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재로선 지소미아 파기 가능성은 낮지만 청와대가 가진 대(對)일본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치권의 언급은 더 구체적이다. 최재성 더불어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장은 수사를 걷어내고 “1965년에 엉터리로 만든 한·일 협정 청산이 우선”이라며 직접적으로 화두를 던졌다.

정의당은 대통령 직속의 ‘65년 체제 청산위원회’ 구성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8월 3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소녀상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65년 한·일 협정의 불평등한 요소를 수긍하고 수용해서 우리 국민의 인권을 짓밟는 결정은 절대 있을 수 없다”라며 이같이 밝혔다.

65년 체제 전환 여론의 씨앗은 8년 전에 이미 심어져 있었다. 2011년 8월 일본 극우파 의원들이 독도 인근 울릉도를 방문하겠다면서 인천공항에서 소란을 벌인 일을 계기로 반일 감정이 높아진 때였다. 당시에는 시민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됐다. 이부영 당시 민주평화복지포럼 상임대표가 주도해 ‘한·일 협정 무효화를 위한 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 결성을 추진했다. 일제 강점기 피해자와 재야 시민단체들이 참여했다. 이 상임대표는 국민행동 결성 선언문을 통해 “군사 독재 시대의 탄압 속에서 맺어진 한·일 협정은 우리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굴욕적이고 반민주적인 조약이므로 한국 국민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라면서 “이제 협정 무효화에 나설 때”라고 주장했다.

국민행동은 즉각 행동에 옮겼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피해자, 사할린 동포 등의 배상 청구권 행사에 나섰다. 이듬해 5월 24일 대법원에서 처음으로 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판결이 나왔다. 2005년에 징용 피해자 여운택씨 등 4명이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다. 이후 서울 고법의 파기환송심과 대법원의 재상고심을 거쳐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의 최종 승소 판결이 나왔다.

당시 국민행동에 참여했던 서울의 한 4년제 대학 교수는 “65년 체제는 왜곡된 한국 근현대사를 바로세우는 데 걸림돌이었다. 현재의 한·일 갈등과 우리 사회의 친일·반일 논쟁이 65년 체제의 산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된 마라톤 협상


▎1964년 5월 20일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상에 반대하는 시위 군중이 행진하는 가운데 트럭에 탄 경찰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물론 65년 체제가 부정적인 국내외 갈등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순기능도 분명히 있다. 한·일 협정의 대가로 일본이 지급한 자금 5억 달러(무상 3억 달러, 정부 차관 2억 달러)는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마중물이 됐다. 포항제철(현재 포스코)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의 자금으로 쓰였다.

다만 자금 규모가 충분했는지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협상 당시 우리 정부가 요구한 금액은 12억2000만 달러였다.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액수였지만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얻은 경제적 이익에 비하면 불합리한 요구라고 보기도 어렵다. 1950년대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병참기지로서 일본 내에서 생산된 미군 군수물품 금액만 25억 달러가 넘고, 일본이 누린 경제적 이익은 3억1500만 달러에 달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 참여했던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세월이 지나고 보니 국교 정상화는 필요한 일이었고, 자본 조달(청구권)도 평가할 만하다”라고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조건이 우리나라에 불리했다.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인 때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상이 시작됐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억제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동북아의 방패로 삼았다.

이를 위해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의 주권을 회복시켜 미군의 병참기지화했다. 이어 한·일 관계 개선을 유도했다. 당시 실무자로 협상에 참여했던 오재희 전 주일 대사는 2015년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남긴 증언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떠올렸다.

“1951년에 한·일 협상단이 접촉했다. ‘이제 화해하자’는 한국 대표의 말에 일본 대표는 ‘무엇을 화해하자는 거냐’고 반문했다. ‘청산할 과거가 없다’는 게 일본의 기본 입장이었다. ‘한국에 철도도 놔주고, 항만도 만들고, 교육도 하고, 학교도 만들고… 한국을 위해서 일본이 많이 했다’는 것이다.”

13년간 협상에서 가장 첨예하게 맞붙은 분야는 식민 지배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였다. 불법 강제 점유라는 한국의 주장에 일본은 당시엔 합법적인 병합이었다고 맞섰다. 결국 협정문은 양국이 주관적으로 해석할 여지, 즉 ‘회색지대’를 남기는 것으로 타협이 이뤄졌다.

‘한·일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했다. 여기서 ‘이미 무효’의 해석을 두고 한·일 간 입장이 갈라져 있다. 우리는 합병조약 체결 자체가 불법적이었으니 원인무효라고 해석한다. 반면 일본은 체결 당시에는 합법적이었지만, 65년 협정을 체결할 시점에는 무효가 된 것으로 해석하고 현재까지 이를 고수하고 있다.

잘못된 역사 인식 오류 자인한 일본의 자기모순


▎8월 15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아베 규탄 범국민촛불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촛불을 밝히며 ‘노(NO) 아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런 역사 인식 차이는 수십 년 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해석 차이에 내재된 문제의 심각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계기는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 소송이었다. 일본은 식민지배가 불법이 아니었으며, 강제징용도 불법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전제로 삼고, 설령 배상 청구권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한·일 협정을 통해 모두 해결됐다는 주장을 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이런 주장이 자기모순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일본은 청구권 협정에 의한 자금이 배상금이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라고 지적했다. 남 교수 지적대로 일본은 5억 달러의 유·무상 자금을 ‘경제협력자금’ 또는 ‘독립축하금’으로 규정했다. 이런 논리라면 청구권 협정을 이유로 강제징용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이 종결됐다는 일본 측 주장은 스스로 모순임을 고백하는 셈이 된다. 남 교수는 “이런 모순을 지적하고 바로잡자고 요구하는 건 우리에게 명분이 있다”라고 했다.

북·일 관계 정상화(수교)가 우리에게 65년 체제를 갱신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북·일 수교 협상은 1990년에 시작해 2002년까지 간헐적으로 지속했다. 1990년 9월 가네마루 신 일본 부총리가 방북해 물꼬를 텄다. 이를 계기로 북한 노동당과 일본 자민당·사회당이 ‘북·일 수교 3당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공동선언은 식민 지배 기간 외에 전후 45년간의 피해에 대한 보상 조항 등 전향적인 내용이 담겼다.

이후 2년간 교섭을 벌였지만 북핵 문제가 불거져 중단됐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평양선언을 내놨다. 1990년대 무라야마 담화 수준으로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 경제협력 방식의 보상책을 제시했다. 북한도 이를 수용해 협상이 진전되는 듯했으나 핵문제와 일본인 납치 문제가 불거져 다시 중단됐다.

하지만 북·일 수교 협상의 불씨는 언제든 되살아날 여지가 있다. 북·미 관계 개선이 북·일 관계 정상화를 견인할 가능성이 크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북한과 대화를 희망한다. 아베 총리는 지난 5월 언론 인터뷰에서 “조건을 붙이지 않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고 싶다”라고 했다. 아베 총리의 태도는 지난해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난 뒤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65년 체제 갱신이 북·일 관계 정상화 마중물 될 수도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선고 공판에서 원심을 최종 확정했다. 피해자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94)씨가 손 인사를 하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지난 7월 한 라디오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일본은 65년 박정희 정권과 한 것(한·일 협정) 이상을 (북한과) 절대 안 하려고 할 것이고, 북한은 여태까지 버텼으니 거기서 원칙적인 문제를 세우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그렇게 되면 우리가 1965년도에 잘못했던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남기정 교수는 “징용노동자 배상 문제가 불거진 지금이 근본 해결을 시도할 적기”라고 했다. 그의 제안은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남 교수는 “북한이 경제발전 논리에 매몰될 경우 자칫 우리의 65년 체제 역사를 반복할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65년 협정을 갱신해 북한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방안이 실효적이란 것이다. 이어 남·북·일 3자의 공동선언을 이끌어 낸다면 자연스럽게 65년 체제와 동북아 냉전 체제를 완전히 청산할 수 있다는 복안이다.

남 교수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일본의 몇 사람에게 이런 제안을 했더니 한국이 그렇게 정리하면 일본도 고민해 보겠다는 입장이었다. 서로 논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밝혔다. 그는 일본 내 진보 원로학자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제자다. 와다 교수는 최근의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한 양국 시민의 연대를 촉구하고 있다. 그 공로로 8월 12일 만해평화대상을 수상했다.

이 같은 구상은 단지 학자적 상상력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가깝게 중국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중국과 일본의 첫 관계 개선은 1952년 일본과 중화민국(대만)이 맺은 화평조약이었다. 장제스 정권은 중국 본토에 대한 대표권을 인정받는 대신 배상권을 포기했다. ‘덕으로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후 마오쩌둥에 의해 장제스가 축출되고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교 수립이 필요해졌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양국은 1972년 국교 수립에 이어 1978년 우호조약을 맺어 일·대만 화평조약의 체제를 갱신했다. 냉전시대, 국력의 격차가 상당했던 1960년대와 지금 세계 정세나 한·일 관계는 완전히 다른 시대로 보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중국이 일본과 수교할 때 배상권을 과감히 포기했던 사례가 우리에게 교훈이 될 수도 있다. 중국은 일본과 수교 당시 ‘배상을 요구할 권리는 있지만 요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일본은 여기에 화답해 최고재판소 판결을 통해 “개인의 배상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라는 법리를 명문화했다. 다만 재판상 권리를 뜻하는 소구(訴求)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기업이 피해자에게 자발적으로 피해 회복 노력을 하도록 권고했다. 일본 전범 기업은 사법부의 권고에 따라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 자발적인 보상을 실시했다.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국제 질서는 세계 곳곳에서 강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처지는 다르지만 미국은 자국 이해관계에 따라 각종 국제 협정과 조약을 수정하거나 폐기하기를 개의치 않는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 폐기, 파리협정 탈퇴, 러시아와 맺은 중거리핵전력조약(INF) 파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파기 경고, 미·일 안보조약 파기 가능성 언급 등이 트럼프 대통령 취임 뒤 폐기되거나 가능성을 열어 둔 체제들이다.

역사의 정의와 외교 현실의 균형 필요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2010년 8월 10일 도쿄 총리공관에서 ‘한일병합 100년에 즈음한 총리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사진:AFP/연합뉴스
이미 맺어진 한·일 협정에 대해 재협상하자는 요구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남 교수는 “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의 해석을 양국이 일치시키면 된다”라고 했다. 일본이 역사적 책임을 보다 명확하게 인정토록 하자는 거다. 그는 “2010년 간 나오토 담화에서 제시한 일본의 역사인식을 반영하면 크게 무리한 요구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간 나오토 당시 총리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한국인들의 뜻에 반해진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을 표명한다”라며 병합의 강제성을 우회적으로 시인했다.

외교관 출신인 장부승 관서외국어대 교수는 “우리의 목표를 먼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한·미·일 동맹을 굳건히 하는 것, 65년 체제를 그대로 살리는 것이라면 과거로 돌아가는 거다. 그럼 그걸 위해 일본과 타협을 하면 된다. 그게 아니라 자주성을 살리고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위상에 걸맞게 새로운 구조를 모색하겠다면 새로운 체제를 모색하면 된다.”

그렇다면 배상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남 교수는 “일본이 역사 인식에 합의하는 대신 우리는 그동안의 여러 경제적 조치들을 사실상의 배상으로 인정해 주면 된다. 지금 한 푼 두 푼 더 받자고 이러는 게 아니지 않느냐”라고 했다. 그는 “역사의 정의와 외교의 현실에서 균형을 잡는다면 못할 것도 없다”라고 덧붙였다.

위기는 기회의 동의어다. 최근의 갈등이 구체제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만큼, 양국 관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명분은 어느 정도 갖춰진 셈이다. 역사 화해를 가로막았던 냉전 논리와 경제개발 우선 논리의 덫도 사라졌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1909호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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