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심층취재

Home>월간중앙>특종.심층취재

[양영유 전문기자의 대학총장 열전] 114년 역사상 첫 공대 출신 정진택 고려대 총장 

“2030년 세계 50대 대학 목표 노벨과학상 고대서 나오게 하겠다” 

“전공·교과·강의·연구 경계 허물고 비교과 전인교육 강화… 4차 혁명시대 초연결사회 이끌 창의·융합형 인재 키울 것”

▎고려대 서울캠퍼스 본관 앞에 선 정진택 총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 고려대의 핵심가치를 창의성·융합·협력에 두고 있다”며 “교육·연구·학사 전 분야의 혁신을 통해 2030년 글로벌 50대 대학을 향해 달리겠다”고 강조했다.
고려대 114년 역사상 첫 공과대 출신 총장의 방은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여러 대학 총장실을 방문해봤고, 고려대 총장실도 처음은 아니었는데 딱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집무실의 ‘스탠딩 책상’이었다. 그 위에 놓여 있는 컴퓨터의 모니터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귀가 흐르고 있었다. “컴퓨터는 놀랍게 빠르고, 정확하지만 대단히 멍청하다. 사람은 놀랍게 느리고, 부정확하지만 대단히 똑똑하다. 이 둘이 힘을 합치면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된다.”

정진택 총장은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최초의 범용 컴퓨터인 ‘에니악(ENIAC)’이 나온 게 1946년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생전에 한 말이니까 1940대 말이나 1950년대 초쯤 될 겁니다. 인공지능(AI)시대를 연 컴퓨터는 인류 문명까지 바꾸고 있어요. 인간이 사실 AI 시대를 두려워하지만, AI를 만든 건 사람입니다. 아주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 매우 빠르고 정확한 기계와 합쳐지는 것이니까, 앞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어요. 아인슈타인이 70년 전에 한 말이 AI 시대에도 유효한 거죠.”

정 총장은 아무리 AI 시대가 와도 그 중심은 결국 사람이라고 했다. 공학도답게 4차 산업 혁명의 흐름에 밝았고, 대학 행정을 두루 경험해서인지 고등교육 방향에 대한 소신도 뚜렷했다. 총장 집무실의 색다른 모습에 대한 궁금증부터 풀어보기로 했다. 인터뷰는 8월 7일 고려대 총장실과 캠퍼스를 오가며 세 시간 동안 진행했다.

스탠딩 책상 위에 컴퓨터가 놓여 있는 총장 집무실은 처음 봅니다.

“2014년 미국 조지워싱턴대에 연구년을 갔었습니다. 제 대학 동기가 교수로 있었는데, 방에 가보니 책상도, 회의용 테이블도 다 스탠딩이었어요. 친구에게 ‘왜 서서 연구하고 미팅을 하느냐’고 했더니, ‘건강에 좋고 집중이 잘 된다’고 하더군요. 긴가민가하다 2015년부터 제 연구실에 스탠딩 책상을 들여놓았어요. 하루 6시간 이상은 서서 연구하고 컴퓨터를 했어요. 힘들면 잠깐 앉아 있기는 했어도. 친구 말대로 건강에도 좋고, 몰입도 잘 되더라고요.”

총장이 되고 나서도 계속 서서 일하시나요?

“지금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회의도 많고, 손님도 많고요. 그래도 컴퓨터를 이용하거나 각종 전자결재를 할 때는 서서 합니다. 스탠딩 미팅은, 글쎄요. 아직은 안 하고 있습니다.”

정 총장은 올해 2월 28일 취임했다. 고려대에서 기계공학 학·석사를 마치고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에서 기계공학 박사(유체공학 및 열공학) 학위를 받고 1993년 모교 교수가 됐다. 그 후 대외협력처장·공과대학장·공과대학원장·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 등을 두루 거쳤다. 취임식에서는 ‘창의 고대’ ‘사람 고대’ ‘화합 고대’를 키워드로 교육·연구·행정 전 분야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할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겠다고 선언했다.

올해 2월 28일 취임, 기계공학도로 행정 경험 풍부


▎정진택 총장은 학생식당을 찾아 학생들과 아침 식사를 하며 제20대 총장의 첫 일정을 시작했다. 고려대는 매월 1만원 이상 소액 기부 캠페인을 벌여 학생들의 아침 식사를 지원하고 있다. / 사진:고려대학교
1905년 개교한 고려대에서 114년 만에 공대 총장이 나온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대혼란과 격변의 시대입니다. 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제대로 꿰뚫지 못하면 곧바로 뒤처지거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변화의 순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고 했습니다. 공학을 전공한 총장으로서 감당해야 할 엄청난 무게와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114년만의 공대 출신 총장은 곧 혁신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혁신의 가치는 창의(創意)에서 나옵니다. 그러려면 캠퍼스 문화를 창의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교과과정과 강의, 연구는 물론 학사 행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창의적 혁명이 필요합니다.”

한국의 대표 사학에서 공대 출신 총장이 이제야 나왔다는 건 이상합니다. 폐쇄성 때문 아닙니까?

“역사적으로 고려대는 인문·사회계열이 강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공과대의 역사가 짧아서 그런 것도 있고요. 반면에 공대 출신 총장이 여전히 이른 게 아니냐는 얘기도 들려요. 공대 교우 중에서도 그럽니다. 공학은 그 자체가 혁신입니다. 우리 대학도 혁신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세계 고등교육 패러다임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는데 고려대의 미래를 어디에 두려고 합니까?

“4차 혁명시대에는 창의·융합형 인재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아는 것’에서 벗어나 ‘아는 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길러내야 합니다. 창의란 새로운 생각이나 개념을 찾아내거나, 이미 존재하는 생각이나 개념을 새롭게 조합해 내는 것입니다. 초연결사회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려면 통합과 통섭력이 중요합니다. 여러 학문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그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어요. 열린 마음과 열린 사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재를 길러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시도하고 있나요?

“밀레니얼 세대를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인재로 키우려면 혁신이 필요합니다. 저는 키워드로 이중 전공·융합전공 활성화, 기초교육 강화, 창업지원 확대, 비교과 활동 지원을 꼽았습니다. 문과와 이과, 전공과 전공 같은 이분법적 사고로는 21세기 초연결사회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어려워요. 여러 학문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합니다. 그래서 이중전공과 융합전공을 활성화해 전공을 넘나드는 다양한 교육을 하려 합니다. 이중전공자의 수강 신청 시 문제점을 개선하고, 이중 전공자와 융합전공자를 위한 커뮤니티를 만들 겁니다. 초학제적 융합전공 개설이 원활해지도록 적극 지원해야지요.”

정 총장은 고대인의 역량을 키우려면 탄탄한 기초교육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대표적으로 신입생 공통교양 과목인 ‘자유·정의·진리’를 소개했다. 온라인 수업, Q&A, 분반 토론, 조별 발표를 거치는 4단계 모듈화 수업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하나의 주제를 탐구해 자신의 의견과 관점을 표현하는 과정이다. 인문학·수학·물리학·의학·생물학 등 이공계 분야 지식이 융합된 12개 강좌가 진행 중이다. 특히 오는 10월 완공되는 SK미래관에서는 소규모 토론식 수업도 집중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실패 겁내지 않고 창업 도전하게 지원


▎정진택 총장(오른쪽 두 번째)이 학생들의 혁신적 창의교육 시설인 ‘X-Garage’에서 장비를 착용하고 설계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 사진:고려대학교
고려대생들이 창업에도 많이 나서고 있나요?

“실패 없는 성공은 없습니다. 겁먹지 말고 두드리도록 분위기를 바꿀 겁니다. 우수한 아이디어, 연구 성과와 기술이 창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멘토링과 시제품 제작, 경영 및 법률지원, 창업 인프라 확대를 종합적으로 추진합니다. 크림슨 창업지원단을 중심으로 스타트업 연구원과 세종 BT 융합 창업보육센터, 산학협력단 등이 유기적으로 움직일 겁니다.”

정 총장은 비교과 활동도 전인 교육의 중요한 포인트로 강조했다. 글로벌 리더로 성장하려면 책상을 박차고 나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총학생회와 협의해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지원하고, 교환학생·인턴십·현장실습·사회봉사 등 직접 경험의 기회를 넓히겠다는 구상이다. 끈끈한 동문의 사랑을 후배에게 심어주는 졸업생 멘토링 프로그램도 마련하고 있다.

AI 시대에도 결국 사람이 중심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정답이 없어지는 세상입니다. 미래의 리더들은 뭔가를 할 수 있는 기술이나 능력을 갖추는 것보다, 그 능력을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단편적인 지식이나 일방적인 신념을 가진 인재가 아닌, 통합적이고 윤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려 합니다. AI 시대에도 주체는 결국 사람이고 그 대상도 사람입니다. 도덕적 가치가 결여된 사회의 혼란은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전인 교육을 강화하려는 이유입니다.”

융합적 사고와 공감 능력이 중요한데 어떻게 키워 주려고 합니까?

“기본은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 즉 소통 능력입니다. 그래서 교양교육원에서 다양한 필수공통 과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쓰기 과목과 세미나 교육을 통해 소통 능력과 공동체 의식을 쌓아주고 있어요. 소통을 통해 개인과 단체의 발전에 시너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입니다.”

이중전공과 융합전공을 강조했습니다. 자칫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전공이 될 우려도 있습니다.

“제1 전공은 경제학이든 기계공학이든 자기 것을 하고, 제2 전공은 융합 성격에 맞는 전공을 선택하는 걸 말합니다. 특히 문과대생들은 취업에 대한 어려움이나 두려움이 많지 않습니까? 국문과 학생의 경우 전공이 너무 좋지만, 이것만으론 먹고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면 융합전공을 공부하면 되는 거죠. 그러면 졸업장에 제1 전공과 제2 전공이 동시에 기재되거든요. 스티브 잡스의 강연 중에 ‘LIBERAL ARTS(교양 학문)’와 ‘TECHNOLOGY(기술)’란 슬라이드가 교차하는 장면이 있어요. 융합이라는 게 한 사람이 기계공학도 연구하고, 심리학도 연구하는 게 아닙니다. 두 개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거죠. ‘TECHNOLOGY’와 ‘LIBERAL ARTS’를 전공한 사람들이 같이 머리를 맞대니 아이폰이 나오는 겁니다. 그게 그 슬라이드의 메시지죠. 기계공학도가 국문학 또는 사학을 공부한 사람과 일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제가 열린 마음, 열린 사고를 강조하는 까닭입니다. 그걸 훈련해야 합니다. 사교성이 좋은 학생도, 내성적인 학생도 있잖아요. 고대생들은 모두 열린 사고, 열린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제 교육 목표입니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AI”라고 했다. AI의 중요성은 아무도 부인 못 하는 시대의 대세가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글귀를 매일 가슴에 새기는 정 총장의 생각은 어떨까?

AI는 시대의 대세, 우리나라도 5년간 인재 1만 명 부족


▎고려대는 6월 25일부터 6주간 51개국 370여 개 대학 1800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국제하계대학(ISC)을 열었다. / 사진:고려대학교
미국 MIT대는 1조원을 투입해 AI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개교 158년 사상 최대 프로젝트입니다. 하버드대도 전 교육과정에 AI를 도입합니다. 중국의 변신도 빨라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전 세계적으로 70만 명의 AI 인재가 부족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그러자 미국·영국·중국 등은 AI 인재를 선점하려 AI대학을 설립하는 등 대규모 투자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미래사회를 주도하기 위한 필연적인 대응입니다. 우리나라는 향후 5년간 약 1만 명의 AI 인재가 부족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고려대도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있습니다. 2014년에 컴퓨터학과가 단일 학과인 정보대학을 신설했어요. AI 관련 교육과정은 문·이과를 떠나 모든 분야에 필요해요. 교양 교육과정에 부전공 수준의 AI 교육 과정을 설치할 필요성도 있고요.”

2학기부터 AI대학원을 운영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정부의 AI대학원 지원사업의 하나로 국내 최초로 설립했어요. 석·박사통합과정 및 박사과정을 연간 50명 이상 선발하고, 재학생 전원에게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 일부를 지급합니다. 핵심 연구 분야(딥러닝·컴퓨터 비전·자연어 처리·음성인식·빅데이터·신경망 등)와 AI+X 분야(헬스케어·금융·지능형 에이전트·게임·자율주행·국방 등) 중심의 AI 특화 교육과 연구를 진행합니다. 3개월 이상 국내외 AI 관련 대학·연구소·기업들과의 공동연구나 인턴십 특화 프로그램도 있어요.”

핵심은 AI 전문가, 즉 교수 확보입니다. 서울대도 인력 확보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전문가 확보가 승부를 결정합니다. 세계적으로도 유치 경쟁이 치열합니다. 우리나라 대학 입장에선 AI 전문가들의 높은 몸값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최고 수준의 AI 전문가에겐 최고 수준의 연구 환경과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합니다. 하지만 등록금 동결 등의 여파로 지원 가능한 예산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

동문과 독지가의 기부가 많기로 유명한 고려대도 재정 압박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 총장은 서울과 세종캠퍼스를 합친 연간 예산은 1조2000억원(의료원 제외) 규모로 경직성 경비를 빼면 투자 여력이 많지 않다고 했다. 서울캠퍼스의 등록금 수입이 연간 3500억원인데 전체 인건비 3000억원에다 경상비를 더하면 옴짝달싹 못 한다는 것이었다. 1년에 1100억원 정도인 기부금도 용도가 정해져 있어 다른 분야에는 쓸 수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고려대도 배가 고프니 다른 대학은 어떻겠습니까? 이왕 등록금 얘기가 나왔는데.

“솔직히 현실화했으면 좋겠어요. 공무원들도 물가상승에 따라 적으나마 봉급이 인상되고 있지 않습니까? 대학 입장에선 최저 임금도 맞춰야 하고, 새로운 투자도 해야 하니 참 힘듭니다.”

다시 AI 얘기를 정리할까요.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같은 인물을 키울 수 있나요?

“AI대학원은 7명의 전임교원으로 출발해 매년 2명 이상을 영입할 계획입니다. 2028년 이후에는 총 25명 이상의 전임 교원으로 구성되는 세계적 수준의 AI대학원을 완성할 계획입니다. 그에 앞서 지난해 2학기에 국내 최초로 학부 과정에 AI 융합전공을 개설했어, 이 융합전공을 기반으로 허사비스 같은 인재를 키워낼 계획입니다. 학부와 AI대학원의 연계 교육을 위해 융·복합 중점 교육도 진행합니다. 너무 서두르면 안 됩니다. 교육의 효과는 기다려야 합니다.”

오는 2학기에 데이터 웨어하우스(Data Warehouse)를 오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데이터 웨어하우스는 조직 내의 방대한 데이터에서 분산 운영되던 데이터를 시나리오에 따라 통합 관리하는 데이터 저장소입니다. 기존의 데이터에 더해 머신러닝과 AI 툴도 적용해 분석이 용이한 인텔리전트 데이터 허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교과개설과 장학금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찾아볼 수 있어요. 각 부서에서 따로 관리하는 졸업생 정보, 교우정보도 안전하게 인텔리전트 데이터 허브에 저장합니다. 학사 행정의 효율이 극대화할 겁니다.”

스마트 캠퍼스 변신, 2학기 데이터 웨어하우스 오픈


▎정진택 총장이 6월 24일 환태평양대학협회(APRU)에 참석해 미국 UCLA 제인 블락 총장(현 APRU 의장)과 기념촬영을 했다. / 사진:고려대학교
데이터 하우스 말고 다른 파격적인 변화가 있는지요?

“지난 7월 1일 자로 기초교육원을 교양교육원으로 확대·개편했어요. 인문사회계열과 이공계열, 외국인 학부생들이 전공 구분 없이 융·복합적인 지식의 향연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온라인 강의와 체험학습 등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교육의 장이죠. 교양교육원이 각 단과대의 융합을 아우르는 연결고리가 될 거예요. 특히 2학기에는 SK미래관에서 여러 실험을 시도해요. 대부분의 강의가 ICT로 이뤄집니다. 소규모 강의실과 세미나실에선 더 집중적이고 효율적인 학습이 진행됩니다. 클라우드 기반의 교육프로그램을 제한 없이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공대 출신 총장으로서 최근의 한일 경제대립에 대한 의견이 궁금했다. 정 총장은 “정치적인 것은 잘 모른다”면서 “중요한 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이라고 했다.

한·일 무역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대학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대응 방식을 놓고 대립할 때가 아닙니다. 방법론을 얘기해야지요. 우선 기업과 대학이 먼저 협력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대기업에만 맡기면 안 되잖아요. 대기업과 중소기업, 대학이 실질적인 협력을 해야 합니다.”

서울대와 KAIST가 중소기업 기술과 컨설팅 지원을 해준다고 합니다.

“우리 학교도 당연히 해야 하지만 실질적인 역할이 중요하지요. 고려대의 기업컨설팅센터(ECC)를 중심으로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넌 뭘 할 수 있니?’ ‘나는 뭘 하겠다’는 식으로 역할분담을 해서 실질적인 성과를 내려 합니다. 기술격차를 인정하고 그 갭(Gap)을 메워주는 역할이 실질적인 역할입니다. 우리가 일본을 앞서야 한다고 하지만, 일본이 가만히 손 놓고 있겠습니까?”

실사구시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얘기네요.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 극복해야죠. 합심하는 수밖에 없어요. 정부는 다른 목소리 내고, 대기업은 자기주장만 하고, 중견기업은 새우 등 터지고, 그래선 안 됩니다. 모두가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정부가 틀을 마련해 주고 소통해야 합니다.”

고려대의 입시 얘기를 안 할 수 없었다. 사실 고려대가 입시를 놓고 한바탕 홍역을 치렀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지난해 8월 공론화를 거쳐 현재 고1이 치르는 2022학년도 대입에서 수능 위주 정시 전형을 30% 이상 늘리겠다고 밝혔다. 대학들에는 “정시 선발 비율을 30% 이상으로 확대하지 않으면 ‘고교 교육 기여 대학 사업’에 참여할 수 없다”고 압박했다. 다만 고교 내신으로 뽑는 수시 학생부 교과 전형이 30% 이상인 대학은 예외로 했다. 그러자 서울 소재 대학들은 몸을 사렸다. 아예 1년 앞서 고2가 치르는 2021학년도 대입부터 정시를 확대키로 한 것이다. 서울대는 20.4%에서 21.95%로, 연세대는 27%에서 30.7%로, 이화여대는 20.6%에서 30.7%로 각각 늘리기로 했다.

그런데 고려대는 독자 노선을 걸었다. 정시를 늘리지 않고 학생부 교과 전형을 올해(2020학년도) 9.6%에서 내년(2021학년도)에 27.8%로 확대한 것이다. 고려대는 교육부가 학생부 교과 전형이 30% 이상인 대학도 재정 지원 사업에서 배제하지 않겠다고 한 규정을 믿었다. 그런데 교육부 생각은 달랐다. 김규태 고등교육정책실장이 4월 29일 고려대를 방문해 정 총장을 만났다. 그 후 고려대 입시에는 변화 조짐이 있었다. 이상했다.

올해 고려대 입시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고3이 치르는 입시에서는 총 4084명을 선발합니다. 9월 6일 시작되는 수시모집으로 83.6%, 연말에 시작하는 정시 모집으로 16.4%를 뽑습니다. 수시모집 중 학생부 위주 전형은 2993명(73.3%), 실기 위주 전형 421명(10.3%)입니다. 전년 대비 전형별 명칭과 성격은 큰 변화가 없습니다.”

2021학년도에도 그런 추세는 계속됩니까.

“그렇습니다. 정시와 수시 비율도 비슷합니다. 다만 고1이 입시를 치르는 2022학년도에는 교내외 의견을 수렴해 정시 비율을 조정할까 합니다.”

교육부 김규태 실장이 정시 30% 확대를 요청해 계획을 바꾼 거 아닙니까?

“김 실장은 요청하러 온 게 아니라 해명하러 왔었습니다. 김 실장이 오기 전에 교육부에 규정대로 학생부 교과 전형을 늘렸는데 뭐가 문제냐고 문의했어요. 그랬더니 학생부 교과를 예외로 한 것은 학생 충원이 어려운 지방대를 위한 것이지, 고려대 같은 최상위권 대학을 위한 게 아니라고 하더군요. 김 실장은 그걸 설명한 겁니다.”

교육부 고위층 관료가 직접 찾아온 건 차관의 30% 정시 압박 전화보다 더 강력한 시그널 아닙니까? 결국은 교육부에 굴복한 셈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국민 여론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대입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정시 30% 의견이 도출됐으니, 그걸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이해해 주세요. 사실 정시 확대는 대형 학원이 반기고, 내신 위주의 수시 확대는 작은 학원들이 반깁니다. 어찌 보면 이번 조치는 사교육 업체엔….”

자율형사립고 문제도 결국 대입, 바꿔 말하면 스카이(SKY) 캐슬 진입을 위한 입시 전쟁과 맥락이 같아요. 연세대 김용학 총장은 스카이 입시 열풍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정 총장 생각은 어떠신가요?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학령인구가 줄어들어도 좋은 대학 선호 현상은 여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율 선발권이 중요합니다. 10년 전 제가 대외협력처장으로 일할 때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1~2점을 갖고 학생을 뽑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수능 점수 1~2점보다는 심층 면접을 통해 학생의 포텐셜을 보는 수시를 늘려왔던 까닭입니다.”

‘스카이’ 깨려만 하지 말고 열 개, 스무 개 더 만들어야


▎정진택 총장이 2019학년도 입학식에서 홍명보 교우(체육교육과 87)와 함께 신입생들에게 격려 메시지를 전달한 뒤 교정을 걷고 있다. / 사진:고려대학교
스카이 대학이 나서 ‘제발 가만히 놔둬라. 우리가 정시로 100%를 뽑든, 수시로 100%를 뽑든 웬 간섭이냐’고 왜 말 못하나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솔직히 정부 재정지원 사업도 걸려 있고, 스카이대 입시가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적지 않게 있고. 서울대나 연세대도 마찬가지 입장일 겁니다.”

명문대에 가려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스카이 캐슬이 입시 블랙홀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요.

“스카이를 깨려고만 하지 말고 스카이를 진짜 열 개, 스무 개 더 만들어야 합니다. 특성화된 스카이 대학, 즉 다른 의미의 스카이 대학이 전국 곳곳에 생겨야 합니다. 그게 학령인구 감소 위기를 타파하는 길이기도 하고요. 미국에는 대학이 수천 개 있습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시골 대학을 다녀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자기 대학에 프라이드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도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느 지방대학이 고려대를 따라 하고, 연세대를 따라 하면 변화를 인정해줘야 합니다. 스카이가 문제라고 없애면 사라지겠습니까? 금방 그 밑에 있는 세 개 대학이 스카이가 되는데. 많은 대학이 그렇게 변화하고 발전하도록 이끌어주는 게 정부 역할입니다.”

스카이 대학으로 상징되는 고려대의 국내 위상은 확고하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는 갈 길이 멀다. 비록 2019 QS 대학 평가에서 세계 83위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보이고는 있어도 여전히 글로벌 파워가 약하다. 정 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2013년 QS 세계대학평가 145위에서 2019년 83위까지 6년 연속 상승세에 있습니다. 글로벌 파워를 키우려면 입체적인 연구 환경과 다학제간 융합연구를 활성화해 세계적 수준의 성과를 창출해야 합니다. 그런 여정에 시동이 걸렸습니다. 2030년에는 세계 50대 대학에 들어가는 게 목표입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서울대나 KAIST도 겨우 100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우주개발 얘기를 해보죠. 미국이 소련에 뒤져 최초의 우주인이 소련에서 나왔을 때 케네디 대통령이 충격을 받았죠. 그때는 냉전 시기니깐 위협도 위협이지만, 자존심 문제도 컸죠. 그때 미국이 세운 목표가 ‘Man on the Moon’이죠.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더 많았어요. 지도자는 목표를 설정하는 사람입니다. 목표가 있으니 해보자는 분위기가 생겼고 결국은 해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1700여 명의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도전하면 50위 안에 들 수 있어요. 최초의 노벨과학상도 고려대에서 나오게 하고 싶습니다. 목표가 중요합니다.”

구체적인 노벨상 프로젝트가 있습니까?

“학문 간 융합(science+science)을 넘어 초학제적 연구(transdisciplinary research: science+science+stakeholders)가 중요합니다. 기술의 최종 사회자인 시민사회의 참여를 강조하는 초학제적 연구는 기존 과학기술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다층적이고 복잡한 사회문제는 한 분야 연구로서 해결할 수 없다는 시대적 요청이죠. 교수 개인에 의존하던 대학 조직시스템을 협업과 융합이 가능한 유연한 조직으로 바꿔야 합니다. 나아가 대학이 산업체·지역사회 등을 위한 플랫폼이 돼 산학연이 호흡하면서 문제 해결을 하는 연구역량을 키워야지요.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4차 산업혁명 시대 모든 대학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2학기부터는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있는 교수를 선정합니다. HCR(Highly Cited Researchers, 세계 상위 1% 연구자 선정자), 세계 최고 학술지 논문 게재자, 스타연구자, 학술논문 정량평가 상위 연구자 등이 대상입니다. 선정위원회에서 종합평가해 1~2인을 뽑아 1억 원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고려대가 글로벌 대학이 되려면 해외로도 눈을 돌려야 합니다. 특히 동남아시아 고등교육 시장은 급팽창하고 있어요.

“2019년 7월 기준 동남아 지역 11개국, 51개 대학과 협정을 맺고 있어요. 동남아 국가들의 인구는 약 8억5000만 명으로, 이는 세계 전체의 11%가 넘습니다. 이 중 대부분 국가의 대학진학률은 40% 남짓하며 베트남의 경우는 30% 미만입니다. 동남아 진출을 위해 교육 콘텐트 수출, 우수학생 선발 홍보회 개최, 현지 대학과의 공동 글로벌 단과대 설립을 추진할 겁니다. 우수 강의 영어 무크(MOOC) 제작을 지원하고 해외 우수 대학과 공동 글로벌 단과대도 설립할 계획입니다.”

정진택 총장은 고려대 79학번이다. 기계공학과를 다니며 공과대를 수석으로 졸업해 총장상을 받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85년 석사학위를 마치고 특수전문요원으로 6개월간 군복무를 마쳤다.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유학, 그리고 고려대 교수로 이어진 길은 순탄했다. 큰 대학의 총장이 되려면 재수, 삼수가 일반적인데 첫 도전에 총장이 됐다. 그러니 평생 좌절을 모르고 살았을 법했다. “큰 좌절은 겪지 않았네요. 사실 제일 큰 충격은 대학생 때 운전면허 시험을 세 번 연속 떨어졌을 때 받았어요. (웃으며) 나중에는 창피해서 시험 보러 간다고 얘기도 못 하고 몰래 가서 봤죠. 물론 유학 가서 처음에는 어려웠고,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을 때 실망했죠. 그건 누구나 겪는 일이니….”

공대 수석 졸업, 아버지와 은사 김호영 교수에 영향

정 총장의 어릴 적 꿈은 과학자였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면서는 그냥 기업체에 취직하려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계기로 교수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인생에 영향을 미친 분이 있습니까?

“네, 아버지와 대학 은사인 김호영 공과대 명예교수 두 분입니다. 아버지는 영업 셀러리맨을 하시다 나중에 작은 기업을 운영하셨어요. 영업은 일반 회사원 일과는 좀 차원이 다르잖아요. 어쩌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어떻게든 물건을 팔아야 하니까.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고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셔서 그런지 저한테 유학을 가라고 권하셨어요. 강요는 안 하셨지만, 사실 유학 가는 게 두렵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냥 취직할까 생각을 하던 참이었죠. 그런데 기계공학과 은사이신 김호영 교수께서 막 역정을 내시는 거예요. ‘공부를 더 해야지 무슨 취직이냐. 취직하겠다면 내가 시켜주마’라며 화를 내셨어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어 엄청 자극을 받았죠. 결국 유학을 갔고, 교수가 되고, 총장이 됐으니 두 분이 저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신 것이지요.”

공대 수석 졸업을 했으니 원래 모범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수 정진택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웃으며) 왕년에 공부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수 때는 워크홀릭으로 불릴 정도로 재미없이 연구실에만 파묻혀 있었어요. 집에 거의 밤 11시 이후에 들어갔어요. 총장이 되고 나니 더 바빠져 그런 생활의 연속이네요.”

평생 좌절을 겪어보지 않으셨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못 찾아 좌절감이 심합니다.

“청년실업, 정말 큰 문제입니다. 그래도 거친 들판을 거침없이 달려가는 도전 정신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학교 강의를 통한 지식 습득에 안주하지 말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성공 가능성이 높아요. 안주하는 게 오히려 인생의 좌절이 될 수 있습니다.”

정 총장은 운동할 시간이 거의 없어 귀가 시간이 늦더라도 집 근처를 한 시간 정도 걷는다고 한다. 서서 하는 컴퓨터도 건강에 도움이 된단다. 36세 때인 1995년 결혼해 1남 1녀를 두고 있다. 세계의 명문 대학을 탐방하며 레거시(legacy)를 읽는 취미가 있다. 지금까지 본 대학 중에서는 미국 예일대를 최고 인상 깊은 곳으로 꼽았다. “대학들을 더 많이 탐방해서 책을 쓰고 싶어요. 예일대에 갔을 때 캠퍼스 건물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거든요. 그게 대학의 전통이고 살아 있는 정신입니다. 우리나라 대학들도 세계적인 명문 탐방 코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레거시의 시작입니다.”

※ 정진택 총장 약력
■ 1960년 대구 출생
■ 1979년 성남고 졸업
■ 1983년 고려대 공과대 수석 졸업(기계공학과)
■ 1985년 고려대 대학원 기계공학 석사
■ 1992년 미국 미네소타대 기계공학 박사(유체공학 및 열공학)
■ 1993년 고려대 기계공학과 교수, 교수학습개발원장, 대외협력처장, 공과대학장 겸 대학원장, 테크노콤플렉스 원장,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
■ 2019년 2월 고려대 제20대 총장~현재
■ 대외 활동
대한기계학회 평의원, 한국자동차공학회 평의원, 한국유체기계학회 회장


▎정진택 총장이 집무실에 있는 스탠딩 책상에서 컴퓨터를 하는 모습. 매일 컴퓨터를 켤 때마다 아인슈타인과 대화한다는 정 총장은 “AI 시대가 와도 그 중심은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 양영유 교육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고려대 영어교육학과를 나와 한국외국어대에서 교육저널리즘으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부터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교육데스크, 정책사회데스크, 사회1데스크, 행정국장, 사회 에디터를 거쳐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마음은 따뜻하고 시선은 엄정해야 한다는 저널리즘 소신을 갖고 있다. 공저[한국의 파워 엘리트]와 역서[멀티미디어 조직혁명]이 있다.

201909호 (2019.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