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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와 차 한잔] ‘웃픈’ 현실 풍자하는 코미디언 유병재 

“웃지 못할 순간에서 웃음을 길어내죠” 

성역 없는 블랙코미디로 ‘N포 세대’의 마음 어루만져
“스탠드업 이어 유튜브·소설로 ‘개그 플랫폼’ 넓혀나갈 것”


▎유병재는 “웃음도 권력에서 올 때가 많다. 지위에 따라 주변인들의 리액션이 달라지지 않나”라고 말한다. 웃음을 이해하는 그의 독특한 접근방식이다.
2017년 11월, 장르 불명의 책이 서점 매대에 올라왔다. 온통 시커멓게 칠해진 표지는 음산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유병재 농담집’이란 부제를 단 책 [블랙코미디]다. 뒤표지에 “코미디언 유병재가 보고 겪고 기록한 ‘자학의 시(詩)’ 138편”라고 소개 문구를 달았으나 시집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본문은 짧은 메모부터 시, 에세이까지 온갖 장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블랙코미디]는 출간된 지 1년 만에 10만 부가 판매됐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책머리를 장식한 글귀가 눈길을 끈다. 제목은 ‘변비’다. 단 두 문장으로 이뤄졌다.

“똥이 안 나온다/ 난 이제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

이 책과 관련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웃프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웃기면서 동시에 슬프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책에선 ‘알파고에 맞선 인간의 경쟁력은 최저임금 6470원(2017년 기준)’이라든지 ‘두 평짜리 고시원에 살면서 눈물 흘리는 연예인을 가엾어하는’ 현실을 파고든다. 어쩌면 한심하고도 황당하면서 괴로운 현실. 유병재의 웃음은 이런 현실을 비트는 데서 연원한다. 살아남는 데 허덕이던 ‘N포 세대’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냈다는 평가가 따랐다.

그런 재능 덕분에 유병재는 또래 코미디언들 사이에서도 승승장구했다. 2012년 케이블 채널의 예능 프로그램 [유세윤의 아트비디오]에서 시나리오 작가 겸 출연자로 데뷔한 그는 단독 콘서트인 [유병재: 블랙코미디](2017) [B의 농담](2018)을 이끌 정도로 체급을 키웠다. 이에 앞서 2015년엔 ‘3대 연예기획사’로 꼽히는 YG엔터테인먼트와 4년 전속계약을 맺어 주목을 받았다.

유병재는 올 5월,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샌드박스 네트워크’(이하 ‘샌드박스’)라는 매니지먼트 회사로 소속을 갈아탔다. YG가 ‘버닝썬 사건’으로 홍역을 앓던 시점과 겹쳐 여러 소문과 추측은 당연지사. 또 이적한 소속사는 유튜브 크리에이터 관리·지원을 전문으로 하는 다중채널네트워크(MCN) 기업으로, 기존 연예기획사와는 결도 달랐다. 어떤 생각에서 그는 변신했을까? 7월 2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샌드박스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새 출발을 앞둔 내면을 들여다봤다.

올 5월 ‘유튜버 소속사’ 샌드박스로 이적


▎유병재가 지난해 4월 스탠드업 코미디쇼 [B의 농담] 개최 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샌드박스로의 이적, 유튜브로 본격 진출하려는 포석인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튜브에 새롭게 뛰어드는 게 아니다. 2011년에 이미 유튜브에 제 이름을 붙인 채널을 열었다. 친구들이랑 랩하면서 뺨 맞는 동영상을 올린 게 있는데 그게 아마 시작이었던 것 같다. 저는 그걸 데뷔 시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방송도 하고 책도 쓰지만, 방송인 유병재의 뿌리를 말하자면 유튜브다.”

그 시절 웃음 포인트가 [유세윤의 아트비디오] 촬영할 때 반영됐나 보다.

“맞다. 할 거 없으면 만날 뺨만 때려서(웃음).”

2011년이면 아직 국내 1세대 SNS였던 싸이월드·네이트온이 건재할 때다. 그때 벌써 유튜브를 점찍을 정도로 앞서간 것 같다.

“그렇진 않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튜브는 외국 회사고, 동영상 올릴 때 용량 제한 없다는 장점뿐이었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메신저에) 콘텐트를 공유할 때 링크를 수월하게 딸 수 있다는 매력에 이끌렸을 뿐이다. 그 안에서 뭔가 즐긴다는 생각은 못 했다. 신문방송학과 수업에서 ‘모바일 시대가 올 거다’란 이야기를 들은 게 벌써 10여 년 전이다.”

샌드박스 같은 MCN 기업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크리에이터’들을 대상으로 동영상 제작·유통·수익화 등을 돕고 광고수익을 나눈다. 기존 연예기획사에 유튜브 채널 관리 역할을 더했다고 볼 수 있다. 샌드박스와 계약을 맺은 크리에이터는 300여 명이다. CJ ENM에서 운영하는 ‘DIA TV’ 다음으로 많다. 그러나 초창기 시장인 만큼 매출 규모는 크지 않다. YG(약 2400억원)에 견주면 10분의 1 수준인 중소기업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대기업에서 벤처기업으로 소속을 옮긴 셈인데.

“제가 방송 활동에 치중하는 사이 유튜브 플랫폼이 비약적으로 커졌다. 앞으로 예능과 엔터테인먼트는 물론 방송 산업 전반의 무게중심이 유튜브 쪽으로 이동하리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기획사인 샌드박스로 소속을 옮겼다. 다른 연예기획사에서도 제의가 왔지만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는 생각에서 결심을 굳혔다. 당장은 여기 계신 크리에이터들과 공동작업 하는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코미디 소재를 발굴할 때 주목하는 지점이 있나?

“전 지적 허영이 있다. 사회적인 이슈도 좋지만, (‘한국판 위키피디아’로 불리는) 나무위키나 포털 사이트 지식백과에 들어가서 ‘~ 이론’ ‘~ 효과’ 이런 글을 읽는 게 재밌더라. 거기서 웃음 포인트를 얻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더닝 크루거 효과’를 말한 적 있다. 무식한 사람일수록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자기확신에 빠지는 편향을 말한다. 말하자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거다.”

최근 유튜브 채널에 ‘웃지 않는 생일파티’란 콘텐트를 올렸더라. 서두에서 ‘웃음에 강박을 갖지 말자, 웃음 외 나머지 감정에 집중해보자’란 기획의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런 유머코드와도 연결이 되는 듯하다.

“(억지로)갖다 붙인 것 반, 정말 그런 것 반이긴 하지만(웃음). 서두에 그럴싸하게 의도를 밝혀야 더 재밌어지는 것 같다. 한편으론, 요즘엔 감정이나 감각에 집중을 많이 한다. 어떤 감정을 차단하니까 더 살아나는 듯도 했다. 하지 말라고 할수록 더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에 ‘말하지 않는 팬 미팅’도 했었다. 말이란 것도 음성언어를 차단하면 희한하고 재밌는 광경이 펼쳐지지 않을까. 문자언어나 비언어적 표현을 동원해야 하지 않나. 꼭 차단이 아니라 과장되게 활성화하는 방법도 있고.”

그밖에 코미디 소재를 찾을 때 원칙이 있나?

“많은 분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게 첫 번째 기준이다. 허무하더라. 많은 분이 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내가 느끼는 걸 느꼈나,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물어본다. 과반수가 괜찮다고 하면 그때 작업에 들어간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고 할까.”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얘기를 하다보면 자기 색깔을 잃는 일은 없을까. 유병재다운 ‘B급 정서’를 잃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저는 사실 B급을 지향해본 적이 없다. 제가 아는 B급은 쿠엔틴 타란티노나 로버트 로드리게즈 같은 감독이 종이잡지시대·동시상영시대 이런 과거 시대를 의도적으로 연출하는 것 정도다. 저는 그런 걸 의도하진 않았다. 사실 A급을 의도했는데 부족해서 그렇게 보여진 건 아닌지…. 내가 B급 정서를 가진 것 같지도 않은데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답하기 곤란한지 않을까.”

‘B의 농담’이란 이름으로 스탠드업 코미디 쇼도 열지 않았나?

“그때의 B는 여러 가지 뜻이었다. ‘병재’도 있고, ‘B급 정서’도 있고, ‘아닐 비(非)’도 있고. 다 섞어서 한 거다. 그런데 원래 코미디란 게 되게 멋있는 옷 입고, 멋있는 척하면서, 웃기는 경우는 없지 않나. 기본적으로 언더 독(Under Dog)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코미디 자체에 B급이 담겨 있는 거지. 제게 B급 정서가 딱히 내재해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있다면 영광이다.”

“방송인 유병재의 뿌리는 크리에이터”


▎유병재의 코미디는 ‘계산적’이다. 뚜렷한 기획의도와 사전 반응조사를 거친 끝에 작품을 낸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길목엔 늘 문화예술이 자리한다.

“만화가,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를 거쳐서 예능PD까지 꿈꿨었다. 말씀대로 항상 문화예술 쪽이었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만화잡지 [아이큐점프]를 사주셨던 게 출발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모님께서 연세가 있으신 편인데도 마음이 열려 있으셔서 [아이큐점프]를 2~3주에 한 번은 사주셨다. 그런데 공부 잘하는 사촌 만나면 싹 다 버리고, 왔다 갔다 하셨다(웃음).”

코미디언 유병재에게 가장 큰 영향 준 작품을 꼽자면.

“직접적으론 만화보단 영화였다. 주성치 영화를 많이 좋아했다. [희극지왕](1999)을 제일 좋아하고, [도학위룡](1991), [007 북경특급](1995)이 당장 생각난다. 사실 제 세대는 아니다. 사실 주성치 취향의 시작은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소림축구](2001)라고 할 수 있다. 아까 B급 코드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비친다면 아마도 주성치 식 개그코드에 영향을 많이 섭취해서 나온 결과가 아니겠느냔 생각도 든다.”

과거 인터뷰에서 조별 과제 발표를 못 할 정도로 부끄럼이 많았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런 학생이 온라인에선 우스꽝스러운 동영상들을 선보였다.

“제가 오늘 유일하게 잘난 척을 하게 될 것 같은데(웃음), 머리를 잘 썼다. 2011년 KBS 공채 코미디언 시험을 봤는데 낙방했다. 그러곤 다시 도전 안 했다. 행여나 붙었더라도 잘해 낼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수백 명 앞에서 공연해야 할 텐데, 적응도 잘 못하고 포기할 것만 같았다. 숫기도 없고 나서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 성격 탓이다. 동시에 주목받고 싶은 욕구는 이만큼 있어서 내면이 온통 전쟁터였다. 영상매체를 선택한 것은 카메라감독 한 명만 있으면 되니까, 그나마 덜 떨리더라.”

그렇게 유튜브에 올린 영상이 인기를 얻어 2012년 [유세윤의 아트 비디오] 제작진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운과 시기가 잘 맞았다. 유튜브에 동영상 올리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 지금처럼 이렇게 많은 분이 참여하시는 판이었으면 절대 주목받지 못했을 거다. 대학 다닐 때도 돋보이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학점이 2.0을 맴돌았다. 퇴학이나 제적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까진 달달 외워서 하면 되던 공부가 열심히 하려고 마음먹고 덤볐더니 되레 1.0으로 떨어지더라. ‘이건 노력의 문제가 아니구나, 두뇌 용량의 문제구나’란 생각이 들어서 다른 길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2017년 JTBC 예능 프로그램 [말하는 대로]에서 당시 대통령을 풍자하는 내용의 강연을 해서 주목을 받았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루는 데 거침이 없다. 보통 코미디언들은 ‘연기자로서의 나’와 ‘일상의 나’를 분리하는 것 같은데, 유병재씨는 하나로 가져가고자 하는가?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 모습을 지향한다. 물론 분리하고픈 마음이 없지 않다. 웃긴 사람이랑 일상의 나랑 구분하려는 노력을 선배들도 많이 하려하고 사실 저도 하는 것 같다. 카메라 앞에선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보여야 하고 비상식적인 말도 해야 하고, 위악적인 모습도 보여야 하고, 못난 모습도 보여야 하니까. 그래도 일상에도 코미디가 묻어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제겐 아직 너무 높은 경지다.”

요즘 시대는 스탠드업 코미디, 특히나 풍자성 강한 블랙코미디를 하긴 어려운 상황 아닌가?

“안일한 핑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관객을 탓하는 부류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 긍정적인 반응이든, 부정적인 반응이든 책임은 제가 지고, 최대한 잘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 제 역할이다. 또 인터뷰를 통해서 ‘사실 제가 어떤 생각이었다’며 해명하는 것도 코미디언으로서 바람직하진 않은 것 같다. 콘텐트로 관객과 대화하고 싶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다

유튜브 데뷔, 스탠드업 코미디 등장, 유튜브 크리에이터 기획사로의 이적 등등. 주류보단 비주류에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

“새로운 도전이라고 봐주시니 감사하다. 그런데 ‘아껴서 도전할걸’이란 아쉬움이 있다. 이건 5년 뒤에 하자, 이건 좀 더 준비하면 10년 뒤엔 할 수 있겠다. 스탠드업 코미디도 40~50대 어른이 되면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때그때 재밌는 걸 하는 게 직성이라 그런 것 같다. 아직까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할 만한 게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있긴 하다.”

소설가 데뷔도 준비한다고 들었다.

“긴 호흡으로 풀 만한 이야깃거리가 생각났다. 그런데 영상으로 풀지 글로 풀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일단 소설로 써보고 나면 감이 잡힐 것 같아서, 그렇게 말씀드렸다. ‘예능하는 사람들’이 소재다. 외피는 웃음을 목표로 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수천, 수만 개의 욕망이 꿈틀대고 있더라. 욕망이 많을수록 재미있는 판이 되는 것 같다.”

어떤 욕망인가?

“인정욕구가 직설적으로, 직관적으로 보이는 곳이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지도 않나. 스타가 되려는 욕망, 자리를 지키려는 욕망의 바다 아닌가. 얼마 전에 누군가 ‘웃음 앞에서 권력이나 권위는 없다’고 하더라. 정 반대가 아닐까. 웃음도 권력에서 올 때가 많다. 지위에 따라 주변인들의 리액션이 달라지지 않나. 그런 에피소드를 ‘웃프게’ 그려보려 한다. 소설판 블랙코미디다. 다만 [블랙코미디]도 쓰는 데 4년이 걸린 터라 빨리 완성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런 고민이 어제오늘의 것은 아닌 듯했다. 그가 쓴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치열했던 존재에 대한 고민이 사라진다. 존재의 고민은 더는 나의 몫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어차피 방송국 편집실, 포털 메인의 댓글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103p)

그에게 ‘코미디언 유병재도 예능 판 안에 있는 사람 아닌가. 소설 집필은 자신의 욕망을 규명하는 작업이기도 하겠다’고 물었다. 그 역시 “그럴 수도 있겠다”며 신중하게 답했다. 얼마간 골똘히 생각에 접어든 모습이었다.

어른들의 세계에 들어온 소년, 주류에 들어온 비주류로 자신을 생각하는 건 아닌가?

“소년이라기엔 시작한 지 꽤 돼서(웃음). 벌써 9년 차이지 않나. 그렇다고 내가 이 바닥 다 안다고 하긴 민망한 연차이고. ‘일말’(일병 말)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 글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201909호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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