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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2부)] 중세 중국화와 유교 수용의 주역들(1) 김춘추와 김유신의 ‘도박’ 

한반도 주류 문화 중국 문화로 전환되다 

김춘추 당 태종 직접 만나 병력 지원 간곡히 요청
백제·고구려 멸하고 한반도 주인공 등극 발판 마련


▎충남 논산시 부적면 계백 장군 유적지에서 재현된 황산벌 전투. 이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는 백제를 멸하고 삼국통일에 한 발 더 다가선다.
연개소문 집권 후 고구려와 당나라는 표면적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일촉즉발의 긴장관계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 태종은 “연개소문이 그 임금을 시해하고 국정을 천단(擅斷)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이 같은 언급은 꼭 죽이고야 말겠다는 뜻이나 같았다. 꼭 죽여야만 하는 이유로 당 태종은 ‘그 임금을 시해하고 국정을 천단하기 때문’이라 했지만, 그건 괜한 핑계에 불과했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당 태종이 연개소문보다 훨씬 끔찍한 흉악범이었다.

626년 7월 당 태종은 이른바 ‘현무문(玄武門)의 난’을 통해 형과 동생을 살해하고 부왕 당 고조를 축출한 후 권력을 장악했다. 형제 살해로 권력을 탈취한 당 태종이 유혈 쿠데타로 집권한 연개소문을 도덕적으로 비난한다는 것은 적반하장에 지나지 않았다.

이이제이 전략에 위장평화 전략 더해

당 태종이 연개소문을 꼭 죽이려 하는 실제적인 이유는 동북아 패권 때문이었다. 중국 역사상 당 태종은 한 무제(武帝)와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정복군주로 손꼽힌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전통시대에 중국과 더불어 동북아 패권을 다투던 유목민족을 제압하고 동북아 패권을 장악한 주인공이기 때문이었다.

수백 년간 지속하던 춘추전국시대 동안 동북아 패권은 흉노로 대표되던 유목민족에게 있었다. 그 흉노로부터 동북아 패권을 빼앗아온 황제가 한 무제였다. 그런데 한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라는 분열의 시대가 또다시 수백 년간 지속했고, 그동안 동북아 패권은 선비족·돌궐족 등 유목민족에게 가 있었다. 그 선비족과 돌궐족을 제압하고 동북아 패권을 장악한 주인공이 바로 당 태종이었다. 그런 면에서 당 태종은 제2의 한 무제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한 무제나 당 태종이 동북아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은 유사했다. 먼저 만리장성 너머의 북쪽 유목민족을 제압하고, 그다음으로 서쪽의 유목민족을 제압한 후 마지막으로 동쪽의 유목민족을 제압하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북적(北狄)이라 불린 북방 유목민족이 가장 강력하고, 그 다음으로 서융(西戎)이라 불린 서방 유목민족, 마지막으로 동이(東夷)로 불리는 동방 유목민족이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중국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을 위협하는 유목민족은 북적·서융·동이 순이므로 그 순서대로 제압하는 것이고,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은 곧 유목민족을 제압했다는 뜻이고 그것이 곧 동북아 패권을 장악했다는 의미였다.

626년 당나라 제2대 황제에 오른 당 태종은 마치 한 무제가 그랬듯 우선 북쪽의 유목민족을 공략하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630년 북쪽의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뒤이어 640년에는 서쪽의 고창(高昌)까지 멸했다. 다음 단계는 당연히 동쪽의 고구려였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는 “고창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고구려가 크게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642년 10월 연개소문이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던 것이다.

당시 연개소문이 당나라를 상대로 펼칠 수 있는 외교는 제한적이었다. 당나라의 패권을 인정하고 순응하느냐, 아니면 유목민족의 패권을 추구할 것이냐 둘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 연개소문은 유목민족의 패권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것은 곧 당 태종의 패권에 도전하는 것이나 같았다. 당 태종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따라서 거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연개소문과 당 태종의 충돌은 유목민족과 중국 농경민족 사이의 패권 경쟁이라 할 수 있었다. 이 패권 경쟁은 한쪽이 굴복하지 않는 한 중단될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는 당 태종과 그의 처남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나눴다는 대화가 기록돼 있는데 그 대화는 당 태종이 어떤 방식으로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했는지 알려 준다. 먼저 당 태종이 장손무기에게 “연개소문은 그 임금을 시해하고 국정을 천단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또 지금 나의 병력으로 연개소문을 잡는 것도 어렵지는 않다. 다만 백성을 괴롭히고 싶지 않으므로 나는 거란족과 말갈족으로 하여금 연개소문을 공격하게 하려는데 어떤가” 하고 물었다.

당 태종은 즉시 전쟁을 일으켜 연개소문을 죽이고 싶지만 오랜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또 동원하기가 부담스럽다는 뜻을 밝히며, 그 대안으로 고구려 주변의 유목민족들을 이용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물었던 것이다. 즉 중국의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인 것이다.

그러자 장손무기는 “연개소문은 스스로 죄가 큰 것을 알고 대국(大國)의 토벌을 두려워해 수비를 엄격하게 해놓았습니다. 폐하께서 좀 더 꾹 참고 계시면, 그는 스스로 안심해 반드시 다시 교만하고 게을러져서 그 악을 더욱 멋대로 행할 것이니 그렇게 된 후에 토벌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이제이 전략에 더해 방심 전략 즉 위장평화(僞裝平和) 전략을 추가로 조언했던 것이다.

그러자 당 태종은 “좋다”고 대답했다. 이 대화를 통해 당태종이 연개소문을 죽이기 위해 이이제이 전략과 위장평화 전략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외교적·전략적 책략이 부족했던 연개소문


▎SBS 사극 [연개소문]에서 주인공을 맡은 유동근(연개소문, 왼쪽)과 서인석(당 태종).
이이제이 전략이나 위장평화 전략은 공히 최후의 전쟁에 대비하는 외교 전략이었다. 그런 외교 전략을 [손자병법]에서는 ‘벌교(伐交)’라고 규정했다. 적대국을 무력침공하기 전에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전략이 바로 ‘벌교’였다. 당 태종이 ‘벌교’ 전략을 채택한 이유는 이미 북방 유목민족과 서방 유목민족을 제압했다는 자신감에 더해 고구려 주변의 유목민족들을 충분히 분열·회유·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연개소문이 당 태종의 ‘벌교’ 전략에 대항해 선택할 수 있는 전략 역시 ‘벌교’가 최선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열세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북방 유목민족과 서방 유목민족은 이미 당 태종에 의해 제압당했고, 동방의 유목민족 중에서도 거란족과 말갈족도 이미 당 태종의 영향권 아래 들어간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개소문이 당 태종의 ‘벌교’ 전략에 대항하는 방법은 사실 간단했다. 이미 당 태종의 영향권 아래 들어간 유목민족들을 이간·회유하고, 아직 당 태종의 영향권 밖에 있는 국가들과 확실하게 밀착하는 수밖에 달리 대안이 없었다.

예컨대 이미 당 태종의 영향권 아래 들어간 북방 유목민족과 서방 유목민족을 당 태종으로부터 이간시키고, 또한 고구려 주변의 거란족과 말갈족을 회유해 같은 편으로 만들며, 아직 당 태종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지 않은 신라·백제·일본 등과 확실하게 밀착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동북아 패권 사수(死守)’라는 공동 목표로 유목민족을 대통합해 당 태종에게 대항하게 만들어야만 했고, 그렇게 하려면 고도의 외교적·전략적 책략이 필요했다.

하지만 연개소문에게는 그런 책략이 부족했다. 제 발로 찾아온 김춘추를 적대해 되돌려 보낸 것이 단적인 증거였다. 만약 연개소문에게 외교적·전략적 책략이 풍부했다면 제 발로 찾아온 김춘추를 확실한 자기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겸손한 모습과 대범한 양보를 보여줘야 했지만 오히려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의 고구려 고토(古土)를 언급했다.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상대로 자존심과 자신감을 내세웠던 것인데, 그런 자존심과 자신감은 신라에 대한 원한에 더해 당분간 당 태종의 무력침공이 없을 것이란 확신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 같은 연개소문의 태도는 “폐하께서 좀 더 꾹 참고 계시면, 그는 스스로 안심해 반드시 다시 교만하고 게을러져서 그 악을 더욱 멋대로 행할 것”이라는 장손무기의 예언과 다를 것이 없었다.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적대해 되돌려 보낸 후 백제와 군사동맹을 강화하면서 신라에 대한 무력침공을 확대했다. 아마도 당시 연개소문은 하루속히 신라를 멸망시켜 고토를 회복함으로써 고구려인들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회복시키고, 나아가 백제와의 군사동맹을 강화해 당 태종에게 대항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성공할지는 미지수였다. 우선 신라를 멸망시키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고, 또 백제 의자왕이 신라 침공을 넘어 당 태종과의 전쟁에서까지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유지할지도 미지수였다. 고구려와 오랜 세월 적대관계를 유지해온 국가는 사실 신라보다는 백제였기 때문이다.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정복하려는 당나라의 야욕


▎당 태종 이세민의 초상. 중국 역사에서 ‘정관의 치’를 이룬 성군으로 평가된다.
아마도 당시 의자왕의 속셈은 일단 고구려와 동맹해 신라를 멸망시킨 후 다시 당 태종과 협력해 고구려를 제압하고 한반도 패권을 장악하는 데 있었을 듯하다. 그럼에도 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해 신라를 무력침공하는 데 몰두했는데, 결국 그것은 연개소문이 주변 민족과 국가에 대해 전략적 통합보다는 무력침공을 우선시했다는 뜻이나 같다.

이 같은 연개소문의 전략을 [손자병법]으로 판단하면 그것은 ‘벌병(伐兵)’ 전략이라 할 수 있는데, 손자는 ‘별병’ 전략을 ‘벌교’ 전략보다 하수로 평가했다.

그런데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 침공에 신라는 멸망 직전의 위기로 내몰렸다. 그런 상황에서 선덕여왕이나 김춘추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당 태종에게 구원병을 간청하는 것뿐이었다. 643년(선덕여왕 12년, 보장왕 2년, 의자왕 3년) 9월, 선덕여왕은 당 태종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백제의 무력침공을 성토하며 구원병을 간청했다. 하지만 당 태종의 반응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 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세 가지 대안을 제시했는데 다음과 같았다.

첫째, 당나라의 변방 군대가 거란족·말갈족과 함께 요동을 공격함으로써 신라에 대한 고구려 공격을 잠시 완화시키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아 더 큰 보복공격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었다.

둘째, 당나라의 군복(軍服)과 깃발을 신라에 빌려줘 마치 당나라 병력이 신라에 파병된 듯 위장해 고구려와 백제를 위협하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위장이 탄로 났을 때 대책이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셋째, 현재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무력침공을 받는 이유는 무능한 선덕여왕 때문이니 선덕여왕 대신 당태종의 친족 한 명을 신라 국왕으로 임명하고, 동시에 당나라 군대를 파병해 백제를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사실 신라가 원하는 방법은 당나라 병력이 백제를 무력침공하는 것이었다.

당 태종은 하나같이 신라가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런 조건을 내걸고 하나를 고르라 요구한 것이다. 당연히 신라 사신이 고를 수 있는 대안은 없었다.

신라 사신 입장에서는 당나라 군대를 파병해 백제를 공격하겠다는 세 번째 대안이 최선이지만, 조건으로 내건 선덕여왕 퇴위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 조건은 신라 사신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신라 사신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이에 당 태종은 신라 사신이 구원병을 요청할 만한 인재가 아니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그때 당 태종이 수용 불가능한 조건을 내건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고구려를 대상으로 ‘벌교’ 전략을 구사하는 당 태종 입장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무력침공해달라는 신라의 간청은 ‘벌교’ 전략 대신 ‘벌병’ 전략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하지만 당 태종은 그래야 할 현실적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당 태종 입장에서 본다면,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는 것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신라를 공격하는 고구려의 국력이 약화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사 신라가 멸망한다 해도 백제를 이용해 다시 고구려와 갈등하게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를 이간질해 양패구상(兩敗俱傷)하게 만든 후 당 태종이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면 한반도와 만주 전체를 정복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용 불가능한 조건을 내건 당 태종은 자신이 신라를 위해 ‘벌병’ 전략으로 전환했을 때 신라는 국가 생존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비해 당나라는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지 한번 제시해 보라는 뜻이나 같았다.

“흉악한 적들을 없애 주십시오”


▎645년 고구려와 당나라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안시성.
이런 면에서 본다면 당시 ‘벌교’ 전략을 구사하던 당 태종의 속셈은 고구려는 물론 백제·신라를 포함한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정복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속셈은 당나라 단독으로도 충분히 고구려·백제·신라 전체를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당 태종의 이런 자신감이 바뀌려면 먼저 당나라 단독으로는 절대 고구려·백제·신라 전체를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판명돼야 했다.

그럴 때 신라가 나당(羅唐) 동맹의 이점을 들어 설득한다면 그때 당 태종이 신라와의 동맹을 적극 고려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 전까지는 신라에서 아무리 간곡하게 구원병을 요청해도 성사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당 태종의 자신감이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645년 당 태종이 10만 대군으로 고구려 요동을 침공했다가 안시성에서 대패해 철군했던 것이다. 이로써 당 태종 단독으로는 고구려·백제·신라 전체는 커녕 고구려 하나도 멸망시키기 어렵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648년 김춘추는 셋째 아들 김문왕(金文王)과 함께 직접 당나라로 갔다. 당 태종과 담판하기 위해서였다. 김춘추가 당나라 장안에 도착한 때가 12월이므로 신라에서는 두세 달 전쯤에 출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춘추가 신라를 출발하던 648년 10월 즈음에서 정확히 1년9개월 전인 647년 1월에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진덕여왕이 즉위했다. 선덕여왕이 승하하던 시기에 신라에서는 후계왕을 놓고 커다란 내분이 일어났다. 비담으로 대표되는 일파는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 사이에는 또다시 여성 국왕이 등장하면 신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성골’인 진덕여왕을 내세운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진압당했다. 당연히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 옹립된 여왕이었고, 그래서 진덕여왕 재위 시 정치 실세는 김춘추였다. 진덕여왕 옹립 후 국내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김춘추는 직접 당나라로 갔던 것이다. 그때 셋째 아들 김문왕을 대동했는데 그 이유는 인질로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춘추는 왕은 아니었지만 국가 의사를 최종 결정할 수 있는 실권자였다. 즉 김춘추는 보통 사신이라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정치적·외교적 현안을 직접 결정하기 위해 직접 당나라로 간 것인데, 그때 인질로 쓸 아들까지 대동한 이유는 그 정도로 신라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삼국사기]에는 김춘추와 당 태종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춘추가 장안에 도착하고 며칠 지난 어느 날 당 태종은 연회를 베풀고 김춘추를 초청했다. 먼저 황금과 비단을 선물로 준 당 태종은 김춘추에게 “경(卿)이 가슴에 품고 있는 말을 해보겠는가?” 하고 물었다. 자신을 직접 찾아온 이유를 솔직하게 말하라는 뜻이었다.

이때 김춘추는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신의 나라는 멀리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됐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해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고 있으며, 더욱이 지난해에는 병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함락해 대국에 조회하는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대국의 병사를 빌려줘 흉악한 적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산과 바다를 거쳐서 조공을 드리는 일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기록은 김춘추가 왜 당나라에 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춘추는 의자왕의 공격으로부터 신라를 구출하기 위해 갔던 것이다. 김춘추는 당 태종이 군대를 파병해 의자왕을 없애준다면 신라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던 셈이다. 이 같은 김춘추의 발언은 643년 9월 당 태종에게 구원병을 간청하던 신라 사신의 발언과 다를 것이 없었다.

“평양 이남의 땅은 모두 너희에게 주리라”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성. 김춘추가 청병(請兵)을 위해 당으로 갔을 때 이곳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당시 당 태종은 자신의 친족을 신라 국왕으로 임명하라는 조건을 내걸며 무산시켰었다. 따라서 이번에 김춘추가 동일한 간청을 한 이유는 만약 당 태종이 유사한 조건을 내걸 경우 대처방안도 마련됐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김춘추의 간청에 당 태종은 아주 우호적으로 반응했다. 지난 5년 동안 동북아 국제정세가 확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당 태종은 고구려를 굴복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며, 그 노력은 고구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까지 나타났었다. 하지만 그 공격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방법을 바꿔 먼저 신라와 손잡고 고구려를 공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잘하면 고구려는 물론 신라와 백제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는 “짐이 지금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어 늘 침범을 당해 평안한 날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당 태종의 언급이 기록돼 있다.

이는 김춘추의 간청을 듣고 당 태종이 고구려 공격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음을 의미한다. 즉 그 당시 김춘추의 주요 관심은 백제 공격이었던 반면 당 태종의 주요 관심은 고구려 공격이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김춘추와 당 태종의 이해는 일치했다. 김춘추는 고구려 땅에 관심이 없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고, 당 태종은 백제 땅에 관심이 없다는 뜻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춘추와 당 태종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백제는 신라가 차지하고 고구려는 당나라가 차지하기로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김춘추가 당 태종을 만나 고구려는 언급하지 않고 오직 백제만 언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김춘추는 백제만 언급함으로써 신라는 고구려 땅에 전혀 관심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표시했고, 그 뜻을 알아챈 당 태종은 고구려 공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후 자연스럽게 영토 분할 문제까지 언급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 태종은 “산천과 토지는 내가 욕심내는 바가 아니며, 재물과 사람도 내가 충분히 갖고 있다. 내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 줘 영원토록 평안하게 하리라”고 했다.

이로 보면 당 태종은 김춘추와의 회담에 앞서 치밀한 준비를 한 것이 분명하다. 사실 그 당시 김춘추가 당나라에 간 이유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영토 분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핵심이었다. 이 문제에서 당 태종은 평양 이남을 경계선으로 제시했는데, 그것은 곧 대동강을 경계선으로 제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제안은 역사적 사실을 검토한 후 이뤄진 것으로 이해되는데, 바로 한 무제가 설치한 한사군 중 낙랑군의 경계가 대동강이었다.

한 무제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고조선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고 북쪽의 부여, 남쪽의 삼한사회를 분열, 회유함으로써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다. 한 무제의 동북아 패권은 이런 방식으로 유지됐다.

따라서 당 태종은 한 무제를 모범으로 해서 고구려 지역을 한사군 방식으로 직접 통치하고, 대동강 이남에는 친당(親唐)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동북아 패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생존 위해 친중국 노선 택하게 된 신라

또한 신라 영토가 대동강 이남에 국한된다면 당나라 패권에 도전할 만한 강대국으로 절대 성장할 수 없으리란 현실적 고려도 작용했을 듯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 무제와 당 태종이 만주와 한반도에서 추구했던 위와 같은 패권정책이 바로 중국을 대표하는 외교정책이었다.

이런 당 태종의 제안을 김춘추가 수용한다는 것은 신라가 당나라 패권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당나라 패권에 도전할 만한 국가로 성장하지 않겠다는 맹서나 같았다. 그 맹서는 결국 신라가 고구려와 달리 친유목(親遊牧) 노선을 버리고 친중국(親中國) 노선을 선택하겠다는 다짐에 다름 아니었다.

김춘추는 신라의 생존을 위해 친중국 노선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해 당 태종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주역이 됨으로써 그 후 한반도 역사에서는 중국 패권을 인정하고 나아가 중국 패권에 도전하지 않는 친중국 노선이 대세가 됐다.

그것은 연개소문으로 대표되던 친유목 노선이 몰락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나아가 향후 한반도의 주류 문화가 기왕의 유목문화에서 새로이 농경문화 또는 중국 문화로 전환돼 감을 의미하기도 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909호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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