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영삼의 한자 키워드로 읽는 동양문화(21)] 정(情): 순수한 마음, 정겨움의 본질 

다정하고 한(恨) 많음도 병인 양하여… 

목적·판단 배제된, 대상을 향해 가는 순수함 그 자체
중국이나 일본에선 찾기 어려운 가장 한국적인 특성


▎비 오는 날 할머니와 손녀가 함께 우산을 쓴 채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 있다.
1. 정(情), 한국적 정서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을 우리 국어사전에서는 정(情)의 한 측면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사람을 사랑하고 친근감을 느끼고 그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곳이 있겠냐만 유독 한국인은 ‘정’을 강조하고, 정에 울고, 정에 목숨을 내거는 민족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정(情)을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정(情)이 넓은 의미에서 사랑을 포함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사랑과 반드시 같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없어도 정 없이는 못 산다”는 말에서 정과 사랑은 동의어가 아니며, 여기서의 정은 남녀 간의 사랑과는 다른 종류의 애착(attachment)으로 보인다.

또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는 표현에서 보듯, 정은 남녀 간의 열정적 사랑(eros)과 같은 감정을 지칭하기보다는 이슬비에 옷이 젖듯,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하면서 생겨난 감정(affection)이나 애착(attachment), 혹은 감정의 연대(emotional bonding)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국 사천성에 있는 유비와 제갈공명의 사당 무후사.
반면 “정든 물건이라 버리지 못한다”라는 말에서는 정은 사람을 향한 마음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정든 대상이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정을 주는 대상이 사람일 수도 있고, 생물일 수도 무생물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밥을 한 술 주면 정이 없다”거나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라는 표현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정(情)이 쌓이기 위해서 반드시 오랜 시일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한 술만 주면 정 없다고 한사코 거절해도 한 술 더 얹어주는 어머니부터 오는 정을 먼저 받고 나서 정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정을 줘야 한다는 속담에 이르기까지, 정은 내가 주변 대상을 수용하고 오랜 시간 동안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서 일어나는 마음 상태를 지칭할 때도 있다.

2. 정(情), 동양적 정서


▎중국 난징의 옛 무덤에서 발견된 위진남북조 시대의 죽림칠현 벽화 모습. 왼쪽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던 혜강. 중간이 그를 아꼈던 완적이다.
한자를 사용하는 한자문화권에서 정(情)이 차지하는 비중은 특별하다. 예컨대 [시경]은 첫 구절에서부터 “관관저구(關關雎鳩), 재하지주(在河之洲), 즉 “끼룩끼룩 물수리는 황하강의 모래톱에서 울어대고”라고 시작한다. 즉 암수가 서로의 소리에 화답하는 사랑의 정을 노래함으로써, 사랑의 정이 중국 시정(詩情)의 상징이자 출발임을 알린다.

그런가 하면 중국 육조 시대의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한 명인 도연명은 국화에 대한 사랑과 정(情)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을 국화는 빛깔도 고와라”(秋菊有佳色, 추국유가색),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가, 그윽하니 눈 들어 남산을 바라다보네(采菊東籬下, 채국동리하, 悠然見南山, 유연견남산)” 등의 시 구절은 국화뿐만 아니라 자연과 벗하며 사는 은일의 정이요, 은자의 초연한 정서를 읊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조모 때문에 출셋길마저 포기했던 이밀

정(情)의 범위를 좀 더 넓혀서 충이나 효, 가족애와 같은 구체화된 감정을 포함시킨다면 중국에는 이러한 감성을 자극하는 명문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이밀(李密)이 관직을 사양하면서 황제에게 올린 ‘진정표(陳情表)’는 할머니에 대한 정(情)이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며, 제갈공명의 출사표 등은 나라에 대한 충정이 얼마나 깊은지, 당나라 한유의 ‘제십이랑문’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잘 보여주는 감성의 극점에 올라 있는 명문들이다.

이들을 처음 읽었던 옛 기억을 아련히 되살려 보면 ‘진정표’는 삼국시대 진(晉)나라의 이밀(224~287)이 당시의 무제에게 조모의 봉양을 이유로 황제가 내린 관직을 사양하면서 올린 글이다.

매우 어려서부터 처절한 고아가 된 자신을 키워준 조모에 대한 사랑과 이에 대한 인정의 보답으로서의 봉양의 마음은 구구절절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어 감성을 울린다. 절대 권력자였던 황제의 부름조차, 자신의 출셋길마저도 마다했는데도 오히려 황제를 감동시켰다. 아니 황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울렸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울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라고 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 181~234)의 ‘출사표’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 더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당시 촉한(蜀漢)의 재상으로서 그가 모셨던 황제 유비(劉備)의 ‘북방 수복’ 유언을 실천하고자 군사를 끌고 위나라를 정벌하러 떠나던 날 제2대 황제 유선(劉禪) 앞에 나아가 바친 비장한 글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신하의 임금에 대한 진정한 충정이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글을 읽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했다.

‘제십이랑문’은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당나라 한유(韓愈, 768~824)의 명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어 지극히 고독한 상황 속에서 함께 의지하며 성장해 온 조카 십이랑이 자신보다 일찍 죽자 그에 대한 슬픔의 정서를 표현한 글이다. 조카라지만 형제 이상의 절박하고 애틋한 사랑의 정이 구절구절 폐부를 찔러 온다. 그래서 이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형제의 정이, 가족의 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화된 문학작품으로서 구체화된 감정인 충이나 효 등을 표현하기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서 고대인들이 정(情)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어원을 통해서 살펴보자.

3. 정(情)의 어원: 순수한 마음


▎스승의 날을 맞아 한 대학교 학생들이 교수들의 입에 김밥을 넣어주는 등 사제지간의 정을 나누고 있다.
한자에서 정(情)은 心(마음 심)이 의미부고 靑(푸를 청)이 소리부로 깨끗하고 순수한(靑) 마음속(心)에서 우러나오는 ‘정’을 말하며, 이로부터 애정(愛情), 정서(情緖), 정황(情況) 등의 뜻이 나왔다. 여기서 심(心)은 원래 사람의 심장을 그린 글자로 심장이나 마음을 지칭하거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행위인 정서 등을 뜻한다. 나머지 청(靑)은 독음도 나타내지만 의미의 결정에도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다. 청(靑)은 무엇을 그린 글자이며, 무엇을 상징할까?

청이 블루(blue)보다는 그린(green)인 이유


청(靑)은 금문에서 (이미지1) 로 써, 丹(붉을 단)이 의미부이고 生(날 생)이 소리부인 구조였는데, 자형이 약간 변해 지금처럼 됐다. 생(生)은 싹(屮, 철)이 흙(土, 토)을 비집고 올라오는 모습이고, 단(丹)은 광정(井, 정)에서 캐낸 염료(丶, 주), 즉 색깔을 상징한다.

청(靑)은 [설문해자]의 해석처럼 중국의 전통사상인 음양오행에서 동방(東方)의 색을 말하는데, 동방은 초목이 생장하기 시작할 때의 상징이다. 그래서 청(靑)은 보통 ‘파랗다’는 뜻으로 풀이되지만, 바다나 하늘처럼 ‘파란색(blue)’이 아닌 봄날 피어나는 초목의 어린 싹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초록색(green)’을 말한다. 막 피어나는 새싹의 색깔보다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색이 있을까.

그래서 청(靑)은 막 돋아난 파릇파릇한 새싹처럼 자연의 순색을 말한다. 이 때문에 ‘순수(純粹)’와 ‘순정(純正)’의 뜻이 담겼다. 그런 순수함은 ‘깨끗함’과 ‘빛남’의 상징이며, 이로부터 젊음·청춘·청년을 지칭하게 됐다. 그렇다. 청(靑)은 피어나는 식물의 싹의 색깔을 지칭한다. 그래서 블루가 아닌 그린이다.

청(靑)으로 구성된 글자들은 대부분 ‘순수함’과 연관돼 있다. 그것은 단순한 ‘초록색’도 아니라 연한 초록색·연두색을 말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초목이 처음 피어날 때의 색깔, 연두색은 순수함과 깨끗함과 처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맑음’을 뜻하는 청(淸)은 水(물 수)가 의미부고 靑(푸를 청)이 소리부로, 물(水)이 깨끗해(靑) 맑고 명징함을 말한다. 이로부터 다른 불순물이 들지 않은 순수하고 정결함을 뜻하게 됐고, 분명하다, 조용하다, 깨끗하다, 청렴하다의 뜻도 나왔다.

또 ‘간청하다’는 뜻의 청(請)은 言(말씀 언)이 의미부고 청(靑)이 소리부로 찾아뵙다, 청하다, 모셔오다 등의 뜻인데, 순수한(靑) 상태에서의 말(言)이 무엇보다 간곡한 ‘청’임을 웅변해 준다. [설문해자]에서는 찾아뵙다(謁, 알)라는 뜻이라고 했다. 간청이나 부탁의 기본적인 정신이 무엇인지, 이때 가져야 할 진정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특별히 정(靜)은 주목할 만한 글자다. 정(靜)이 왜 정숙(靜肅)에서처럼 ‘조용하다’는 뜻이 됐을까. 정(靜)은 청(靑)이 의미부이고 爭(다툴 쟁)이 소리부인데, 원래는 화장의 농염을 표현할 때 쓰던 단어로 그런 순색(靑)을 다퉈(爭) 취함을 말해 자연색에 가까운 화장 색깔을 이르렀다.

화려한 화장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욕정을 움직이게 하지만, 그런 자연색에 가까운 화장은 안정되고 ‘정숙(靜肅)됨’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정(靜)에 맑고 고요하다, 정지하다, 안정되다 등의 뜻이 들었다. 청(靑)으로 구성된 이러한 글자들은 모두 청(靑)의 어원이 갖는 순수함을 기본적 의미로 갖는다.

또 다른 한 그룹은 ‘푸른색’을 말한다. 예컨대 청(晴)은 日(날 일)이 의미부고 청(靑)이 소리부이지만, 해(日)가 맑게(靑) 비추다는 의미를 그렸다. 그리고 청(鯖)은 魚(고기 어)가 의미부고 청(靑)이 소리부로 청어를 말하는데, 푸른색(靑)을 띠는 물고기(魚)라는 뜻이다. 청(菁)은 艸(풀 초)가 의미부고 청(靑)이 소리부로 푸른색(靑)을 내품는 풀(艸, 초)이 ‘우거짐’이나 부추의 꽃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푸름에서 파생된 푸른색을 뜻하는 글자들이다.

4. 성(性)과 정(情): 에토스와 파토스, 감정과 이성

동양에서 정(情)은 성(性)과 자주 결합한다. 성정(性情)이 그것이다. 성정은 ‘타고난 성질과 성품으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본성’을 말한다.” 그러나 성(性)과 정(情)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연결돼 있다.

성(性)은 心(마음 심)이 의미부고 生(날 생)이 소리부로 사람의 본성을 말하는데,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천성적인(生) 마음(心)이 바로 ‘성품(性品)’임을 보여준다. 이후 청성(天性)이나 사물의 본성(本性)·생명·성정(性情) 등의 뜻이 나왔고, 명사 뒤에 놓여 사상·감정이나 생활 태도, 일정한 범주 등을 나타내는 접미사로 쓰인다.

그렇게 본다면 성(性)은 ‘나면서부터 타고나는 성품’으로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속성을, 또 항구성을 지향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정(情)은 청(靑)의 어원에서 봤듯 초목이 처음 자라날 때처럼 순간적이며, 임시적인 속성을 지향하고 있다.

순간적이며 임시적인 속성을 지향

원래 생(生)과 단(丹)의 조합으로 이뤄졌던 청(靑)의 어원에서 보듯 생(生)은 초목이 처음 자라나는 모습인데 처음 자라난 초목은 점차 성장하게 된다. 그에 따라 처음의 색깔이었던 연두색이나 옅은 초록색도 점차 짙은 초록색으로 변하고, 다시 노랑이나 빨강색으로 변해 결국에는 떨어지고 만다. 이것이 자연의 속성이다. 그렇게 본다면 청(靑)으로 구성된 정(情)은 임시적이며, 항구적이지 않은 속성이다. 성(性)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그렇기에 성(性)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사단(四端), 즉 인(仁)에서 우러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 우러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우러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서 우러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를 말하는데, 이는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를 말한다. 즉 인(仁)·의(義)·예(禮)·지(智)라는 인간의 본성의 단서(端緖)가 되는 네 가지 마음을 뜻한다.

이러한 본성은 외물의 자극에 다양한 모습으로 현실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보통 7가지로 정의했다. 칠정(七情)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유학에서는 희(喜)·노(怒)·애(哀)·락(樂)·애(愛)·오(惡)·욕(欲)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철학서와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 정의가 보이기도 하는데 [예기]에서는 락(樂)이 앞의 희(喜)와 중복된다는 점에서 구(懼, 두려움)로 바뀌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性)과 정(情)은 서구의 에토스와 파토스와도 연계된다. 에토스(ēth)는 어원적으로 “ethnic” 즉 “민족적·종족적”인 것에서 근원해 종족 집단(Ethnic group)의 관습이나 행위, 행동거지 등을 지칭하게 됐으며, 이후 행위를 구속하는 도덕관이나 도덕 평가 기준 등의 의미로 확장됐다.

일반적으로 민족적·사회적인 관습을 말하는 에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중요한 철학적 개념이 부여됐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갖는 가능성이나 능력은 항상 상반하는 방향을 내포하고 있으나 동일한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한 방향으로만 지향하는 습관이 양성된다. 이 습관이 에토스이며 이에 의해 영혼의 선악 성격도 자란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토스는 지속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 일시적인 특성을 가진 파토스(path, 情意 또는 激情)와 대립된다.

에토스와 대립을 이루는 파토스(path)는 어원적으로 ‘-path-’(고통스럽다)에 ‘os’가 더해진 모습으로 ‘고통스러운 것’을 뜻한다. 그리스어에서 ‘path’는 (고통을) 참다·질병 등을 뜻하며, PIE에서 ‘pei’(상처를 입히다, 해치다)에서 왔으며, 이후 고통스럽다·동정하다·감염되다 등의 뜻으로 확장된 것으로 추정되며, ‘pathetic’이나 ‘patient’ 등과 동일한 어원을 가진다.

파토스는 철학적 의미에서 정념(情念)·충동 ·정열 등으로 번역되며 로고스와 상대되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어 등의 어원에 근거해 볼 때 파토스의 지향점은 외물로부터 ‘받은’ 상처와 이로부터 생겨난 고통에 있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어떤 사물이 ‘받은 변화 상태’를 의미하고, 좁은 의미로는 특별히 ‘인간의 마음이 받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대상의 자극을 받아서 생기는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또 파토스는 수동성과 가변성이 내포되며 그때그때 내외의 상황에 따라 인간의 마음이 받는 기분이나 정서를 총괄해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성의 판단과는 다른 원천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종종 이성의 명령에 반항하기 때문에 스토아학파에서는 이것을 병(病)이라고 하기도 했다. _[두산백과]

씁쓸하기 그지없는 청년백수시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에토스는 인간이 나면서부터 가지는 본성인 성(性)에, 파토스는 인간이 생활하면서 부딪히는 환경의 자극에 의해 생겨나는 정(情)에 가깝다. 다만 동양에서는 이러한 정(情)을 보통 7가지로 설정해 기쁨(喜)·분노(怒)·슬픔(哀)·즐거움(樂)·사랑(愛)·증오(惡)·욕망(欲) 등으로 다양하게 설정했고, 이들 다양한 감정이 인간적인 모습이지만, 언제나 ‘순수한 마음’을 지향하도록 설정한 것이 차이점이다.

그렇다면 한자에서 성(性)은 날 때부터 갖는 본성이고, 이것이 밖으로 체현된, 드러난 모습이 정(情)이다. 그래서 성(性)은 본질적이고 항구적인 요소이지만, 정(情)은 언제나 당시의 환경과 감정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비본질적이고 가변적이다. 비본질적이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의 순수한 모습’을 간직해야 한다. 그것이 정(情)을 구성하는 심(心)과 청(靑)의 본질적인 의미일 것이다.

5. 청(靑)의 특수 의미, 청백전과 청백안


▎청록파 시인 세 사람. 왼쪽부터 박두진·박목월· 조지훈.
청(靑)으로 구성된 한자는 다양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전히 새싹이 돋을 때의 푸르름의 순수함과 여기서 파생한 푸른색의 두 가지 뜻을 지향하고 있다. 예컨대 청산(靑山)·청매(靑梅)·청자(靑瓷)·답청(踏靑)·독야청청(獨也靑靑) 등의 청(靑)은 초록색을 뜻하며, 청춘(靑春)·청년(靑年)·청운(靑雲)은 초목이 막 싹을 틔우듯 사람의 젊은 시절을 뜻한다.

그러나 청군(靑軍)·청어람(靑於藍)·청천(靑天)·단청(丹靑) 등의 청(靑)은 ‘파랑’을 뜻하는데, 색의 인식에서 ‘파랑’과 ‘초록’이 혼재된 우리의 전통을 반영한다. 하지만 청(靑)을 초록색 이외에 파랑색으로 이해하는 색깔에 대한 특수한 인식 외에도 문화성을 반영한 몇몇 어휘는 주목할 만하다.

먼저 우리말에 존재하는 청백전(靑白戰)이 그것이다. 이는 운동 경기 따위에서 청군과 백군으로 편을 갈라 겨루는 싸움을 말하는데, 어릴 적 운동회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다만 최근에는 새로운 의미까지 더해져 청년 백수 전성시대(靑年白手全盛時代)의 줄임말로 쓰인다고 하니 이 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고통과 청년 실업의 심각함을 보여줘 씁쓸하기 그지없다. 우리 기성세대들의 책임과 회한까지 느껴지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청백전(靑白戰)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말에서만 사용되는 한자어라는 점이다. 중국에도 이런 말이 없고, 일본 한자어에도 없다. 중국에서는 ‘팀을 나누다’는 뜻의 ‘펀뚜이(分隊)’라는 표현을 쓰고, 일본어에서는 ‘홍백(紅白)’이라는 표현하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청백전(靑白戰)은 일본의 헤이안 시대 양대 가문 간에 벌어진 겐페이 전쟁(源平合戰)에서 유래한 홍백전 문화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에 넘어온 뒤 대한민국 정부의 왜색 척결과 반공사상 강화 차원에서 이름이 바뀐 것이라고 한다. 반면 청백전(靑白戰)은 우리 고유의 전통에서 근원한 것이라는 설도 만만찮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한국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 등에서는 아직 청백전(靑白戰)에 관한 유래를 찾을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다른 하나는 청백안(靑白眼)인데 청안(靑眼)과 백안(白眼)이 합쳐진 말이다. 그 유래가 재미있다. 극도로 혼란했던 중국의 위진 시기, 내일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답답한 현실에서 지식인들의 고뇌는 더욱 컸다. 다가올 미래는 생각보다 암울하고 절망적이었기에 그 안타까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던 그들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 시기를 어떻게 살았을까? 모두 산속으로 숨어들고, 술독을 지고 삽 하나 붙여서 산을 올랐다. 술을 퍼먹다 죽으면 그 자리에서 파묻힐 심산이었다.

당시 죽림칠현이 대표적이었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었던 완적(阮籍, 210~263)은 눈동자를 다르게 굴림으로써 그 힘든 세상을 견뎌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청안(靑眼)과 백안(白眼)이 그것인데, 그 난장판과 같은 세상에서도 명리를 초월해 자존감을 지키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혜강(嵇康)에게는 청안(靑眼)으로 대했지만, 온갖 아첨을 일삼으며 세상에 빌붙어 사는 혜강의 형 혜희(嵇喜)에게는 백안(白眼)으로 대했다고 한다. 백안은 눈동자 흰자위가 많이 드러나는 사시(斜視)의 일종으로 눈을 흘기는 동작이지만, 청안은 관심과 애정이 어린 그윽한 눈으로 따뜻하게 바라보는 행위다.

한낱 농기구에도 느꼈던 한국인의 고유 감정

이후 이는 사람을 대하는 서로 다른 눈길을 상징하게 됐다.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중기의 대문장가였던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도 이러한 유래가 흥미로워 따로 글을 지어 세상을 사는 지혜로 삼고자 했다. 그가 남긴 ‘청백안설(靑白眼說)’이 바로 그것이다.

“아, 선비가 이 흐린 세상에 살아가면서 한 점 사람의 눈을 가지고 끝없이 펼쳐지는 추잡하고도 괴이한 광경들을 보노라면 정말 곡마단 구경을 하는 것만 같을 것이다. (…) 위진 때의 완원도 이런 세상에 몸담고 있으면서 일단 높이 날아올라 멀리 피해 외물(外物) 밖에 우뚝 서지 못한 이상, 번거롭고 소란스럽게 눈에 날마다 비치는 것들이라곤 모두 이런 광경들뿐이었을 테니 어떻게 이들을 백안(白眼)으로 대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 이 청백안이야말로 세상과의 갈등을 호쾌하게 풀어 버릴 수 있는 장치가 됐을 뿐만 아니라 자기 몸을 보전하는 지혜의 측면에서 볼 때도 넉넉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혼란한 세상을 사는 법보(法寶)가 되기엔 너무나 소극적인 모습이지만, 처절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의 본성을 본다면 조금은 이해될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6. 다정(多情), 정이 많아 슬픈 민족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우리의 다정함을 잘 표현한 시다. 조지훈이 절친 박목월에게 지어줬다는 ‘완화삼(玩花衫)’이라는 시이다. ‘꽃을 즐겨 구경하던 선비’의 마음을 비유적으로 그렸다.

우리 문화에서 정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을 수 없는 가장 한국적인 특성이라고들 한다. 정을 나누는 상대는 사람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키우는 개나 밭일을 하던 소에게도 정이 쌓이고, 손때가 뭍은 농기구에도, 그리고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있듯이, 정은 낯선 장소에도 붙일 수 있다.

정은 사랑이나 친근감과 가장 비슷하기는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정과 사랑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안다. 정과 관련된 표현도 많다. “정을 나누다” “정을 쏟다” “정을 통하다” “정을 떼다” “정이 들다” “정이 없다” “정을 쌓다” 등등.

어떤 사람은 정이 많아서 탈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이 없다고 욕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정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말로 표현해야겠느냐고 되묻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우리의 고유한 정서인 정(情)은 내가 주변 대상을 수용해 일어나는 마음 상태나, 혹은 내가 다른 사람이나 대상과 내적인 관계를 능동적으로 맺기 위해서 이해타산을 생각하지 않고 순수하게 상대에게 주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다. [한국역대한자자 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

/images/sph164x220.jpg
201909호 (2019.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