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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42)] 시(詩)·서(書)·화(畵)에 통달한 ‘석재(石齋)’ 서병오 

한시에 취한 붓 휘두른 풍류객 

만석꾼 집안의 신동으로 허훈, 곽종석 문하에서 글 배우고 서화 겸비
대원군, 민영익 넘어 中·日 명사와도 교유한 대구 미술의 산파역


▎대구 동성로 작은 기념공간 앞에 선 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 장두영(왼쪽)·김진혁 부회장.
'무신년(1908년) 겨울, 나는 친구 긍석과 함께 중국 연경에 가게 됐다. 압록강을 건너는데 날씨가 살을 에듯 추웠다. 북쪽은 더욱 심해 나아갈 수 없어 안동현 한인 여관에 숙박했다. 주인은 김택준이었다. 그는 중국 유람을 두루 이야기했는데 마치 오래된 친구를 대하듯 정을 냈다. 그래서 섣달을 전후해 3개월 머물렀는데 나를 위해 주선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제 여장을 갖춰 떠나니 서운함을 누를 길이 없다. 이에 열 폭 묵화를 그렸으니 부족하나마 훗날의 증표로 삼고자 한다….’

한 시인묵객이 열 폭 병풍 작품 마지막에 남긴 화제(畵題)다. 뒤에는 다시 ‘청전(靑篆) 서훈(徐薰)이 등불을 돋우고 팔을 시험한다’고 적어 누구인지 밝혔다. 그러나 가명이다. 국경을 넘는 시기며 실명을 노출하지 않는 데서 짐작하듯 유람이 아닌 도피에 가깝다.

그의 실명은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6). 당대 대구 지역 시(詩)·서(書)·화(畵)의 삼절(三節)로 통한 인물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앞서 그해 8월 석재는 신령 군수로 임명됐다. 47세 때다. 하지만 10여 일만에 사직한다. 병을 핑계 삼았다. 그리고는 몇 달 뒤 제자 긍석 김진만과 함께 서둘러 중국으로 떠난 것이다. 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회장 장하석)는 7월 30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석재의 ‘그 위대한 여정’ 전을 열었다. 바로 석재·긍석 사제 서화전이다.

때는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시기다. 석재는 신령 군수가 되기 5개월 전 일제에 쫓기던 의병장 허위를 집에 숨긴 적이 있었다. 일경이 이 사실을 탐지한 것이다. 일제 경찰 기록에 나온다. 그의 이야기는 문집이 나오지 않아 김봉규가 펴낸 [석재 서병오]를 두루 참고했다.

숨겨 준 허위가 누구인가. 1907년 의병 연합부대인 13도 창의군 총대장으로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친 사람이다. 석재는 13세 무렵 허위의 형인 선산의 유학자 방산 허훈의 문하에 들어갔다. 석재는 허위보다 일곱 살 아래지만 함께 방산에게 글을 배운 사이다. 허위는 이후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08년 10월 교수형이 집행된 정치범 1호였다. 이 일만 봐도 석재의 바탕이나 교제 폭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석재가 압록강을 건넌 것은 그 직후다.

석재는 중국에서 상하이(上海)와 칭다오(靑島) 등지를 주유했다. 그를 수행한 긍석은 석재를 평생 보필한 제자로 서화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916년 대구 권총 강도사건 주모자로 체포돼 8년간 옥고를 치렀다.

석재의 중국 주유는 두 번째. 그는 이번에도 상하이에서 망명객 민영익이 머물던 천심죽재(千尋竹齋)를 거점 삼아 중국 서화가 포화(蒲華)·제백석(齊白石) 등과 교유한다. 석재는 혁명가 손문(孫文)과도 7일간 시와 술, 바둑을 나눴다. 당시 석재는 손문에게 “동아시아 5000년 역사를 다시 열라”는 한시를 남겼다.

동성로에 들어선 아쉬움 남는 기념 공간


호방했던 석재는 대륙이 체질에 맞았던 모양이다. 그는 10년 전쯤에도 김진만과 함께 청나라를 주유했다. 그때는 수년간 상하이·수저우(蘇州) 등지에서 서화가 등을 만났다. 석재는 중국 명사를 만나 자신의 능력을 알리고 서화 세계를 한층 가다듬는 계기를 만든다. 그때 상하이에 갑신정변으로 피신한 민영익이 머물고 있었다. 민영익은 그곳에 저택 천심 죽재를 마련한 뒤 포화 등 중국의 이름난 서화가들과 교유했다. 석재는 민영익과 구면(舊面)이다. 1879년 그가 대원군 이하응의 부름을 받아 운현궁 생활을 할 때 알고 지낸 사이였다.

둘은 의기투합했다. 두주불사(斗酒不辭) 풍류객 석재는 연회가 열려 대륙 명사들과 흥취가 일면 붓을 휘두르고 즉흥시 화제를 썼다.

석재의 두 차례 중국 주유는 이렇게 화려하다. 그러나 지금 고향 대구에 남은 그의 흔적은 빈약하다. 생가 등 유적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기념관도 없다. 석재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먼저 후손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석재를 다룬 책을 내거나 글을 쓴 연구자들도 잘 알지 못했다. 최근 [석재 서병오 필묵에 정을 담다]를 펴낸 이인숙 미술평론가는 “그래도 기념 공간 비슷한 곳은 있다”고 귀띔했다.

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는 2012년 발족됐다. 7월 22일 기념사업회 장두영·김진혁 두 부회장의 안내로 대구에 꾸며진 석재 공간을 둘러봤다. 대구시 중구 동성로 3가 8번지. 일대엔 최근 ‘애비뉴 8번가’라는 먹거리타운이 들어섰다. 2017년 타운 입구에 서병오 기념공간이 조성됐다. 생가 터란 표지와 함께 ‘한국 근대 서화의 태두’라는 제목을 붙였다. 빌딩 벽면에는 그의 서화 한 점이 3층 높이로 그려져 있다. 석재의 흉상도 세워졌다.

‘팔능거사’의 으뜸 능력은 한시


▎1. 석재 서병오가 만년인 68세에 쓴 글씨. / 2. 서병오가 사용한 각종 인장. / 사진: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
김진혁 부회장은 “실재 생가 터는 저 건너편”이라며 흉상 오른쪽을 가리켰다. 건축주가 기념 공간을 만든 건 좋았는데 고증이 아쉽다는 것이다. 그때 인근 음식점 주인이 일행을 찾아와 항의했다. 사람들이 이곳을 공원으로 알고 담배 피는 장소가 되고 있다며 철저한 관리를 당부했다. 그러나 공간은 기념사업회와 관련이 없다.

석재는 이곳에서 만석꾼 서상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중에 숙부 서상혜의 양자로 들어간다. 그 역시 만석꾼이었다. 서병오는 자라면서 신동 소리를 듣는다. 10세 전 사서삼경을 통달했다고 할 정도다. 부모는 가문을 빛낼 재목으로 아이를 뒷바라지했다. 서병오는 13세에 석학 허훈에 이어 면우 곽종석을 찾아가 문장을 배웠다. 또 글씨는 팔하 서석지가 스승이었다. 서병오는 매일 장지 8장을 앞뒤로 빼곡히 글씨를 썼다.

석재 앞에 붙는 수식어 가운데 ‘팔능거사(八能居士)’란 게 있다. 시·서·화는 물론 거문고·바둑·장기·의술·약재 등 다섯 가지도 능통했다는 뜻이다. 석재 제자 신대식은 스승이 8가지 가운데서도 한시 짓는 실력이 가장 능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한시를 하나 보자.

盡將恩怨付先天(진장은원부선천) 평생의 은원은 운명으로 돌려버리고/刊落芬華靜入禪(간락분화정입선) 꽃 같은 치장 지워버린 뒤 고요히 선에 들었네/造化若從浮世願(조화약종부세원) 조화의 신이 뜬세상 소원 들어준다면/花應不落月長圓(화응불락월장원) 꽃송이 마땅히 떨어지지 않고 달은 기울지 않으리

석재가 자신과 친하게 지내다 해인사로 출가한 기생 근영(槿英)에게 지어 준 한시 ‘진장은원’이다. 그는 시회나 술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시를 읊었다. 전하는 시만 370여 수에 이른다. 도학(道學)을 공부하며 시작한 그의 시는 자유로움으로 흘러갔다.

대구 서도인 리홍재는 “석재의 운필은 자연의 도를 본받아 신필(神筆)에 가깝다”며 “서화만이 아닌 시가 함께 있는 문인화의 진수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지금 석재를 만나고 싶어도 볼 수 있는 예술관이 없어 안타깝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널리 알려지지 못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서울 예술의전당이 내년에 대규모 석재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이후엔 석재가 주유한 중국·일본에서 해외 전시회도 예정돼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세 서병오를 운현궁으로 불러들였다. 풍류객 대원군이 신동 소문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서병오는 당대의 문사들 앞에서 시·서·화를 선보였다. 대원군은 “천출(天出)의 재주꾼을 보는구나. 석재(惜哉)다. 서동(徐童)아”라며 감탄했다. 대원군은 이후 마흔두 살 차이 손자뻘 서병오를 곁에 두고 시·서·화·바둑을 즐겼다. 호도 짓는다. 대원군은 “내 호가 석파(石坡)인데 ‘석’자를 떼어 너를 석재(石齋)로 한다. 너의 재능만은 누구도 깨뜨릴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칭찬했다. 대원군은 추사 김정희가 스승이다.

서병오는 평생 퇴계 이황과 추사를 존경했다. 교남시서화연구회가 설립 10주년을 맞아 석재 휘호전을 열 때 그의 약력에는 “유명한 퇴계 선생을 존경해 따랐고, 그 깊은 경지를 극진히 배웠다”고 적었다. 또 대원군을 통해 추사의 서법을 받아들이고 그를 흠모했다.

석재는 일본으로도 발을 넓혔다. 30대 중국 주유에 이어 40대엔 일본으로 세 차례 건너가 도야마 미쓰루 등 정계·문화계 인사들과 교유했다.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는 점차 기울고 있었다. 1906년 석재는 대구에서 최초로 설립된 자강운동 단체인 대구광문사 발기인으로 나섰다. 또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1912년 51세 석재는 유학자이자 한의학자인 석곡 이규준을 스승으로 모셨다. 석곡은 의서 [소문대요(素問大要)] 등을 썼다. 석재가 의술에도 능했던 배경이다. 석재는 [동아일보]를 발행한 김성수와도 친하게 지냈다. ‘인촌(仁村)’이란 호를 지어 주었을 정도다.

일제 선전(鮮展) 제치고 대구 전람회 먼저 열어


▎대구 학강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병오의 10폭 서화 병풍 작품. / 사진: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
1921년 12월 일제는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미술전람회(鮮展)를 창설했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걸까. 61세 석재는 1922년 1월 후진을 양성하는 ‘교남(嶠南)시서화연구회’를 창설하고 회장을 맡았다. 교남은 조령의 남쪽이란 뜻으로 경상도를 가리킨다. 교남시서화연구회는 넉 달 뒤인 1922년 5월 대구 뇌경관에서 제1회 전람회를 연다. 작가는 대구는 물론 서울·개성·평양·경주·안동·전주·광주·원산 등 전국에서 참여했다. 모두 이름난 작가들이다. 석재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일제가 주관한 제1회 선전은 한 달 뒤인 6월에 가서야 열렸다. 기념사업회 김진혁 부회장은 “대구 전람회가 선전에 선수를 친 것”이라며 “교남시서화연구회는 이후 전국의 명사와 문화계 인사가 교류하는 장이 됐다”고 말했다. 서울의 해강 김규진, 위창 오세창, 평양의 일재 김윤보, 광주의 의재 허백련 등이 대구를 찾았다.

제1회 선전이 열렸을 때 석재는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심사위원장 겸 운영위원장은 이완용이 맡았다. 을사오적의 그 이완용이다. 석재는 이후에도 서예·사군자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그러나 그는 한두 차례 심사에 참여하고 나중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석재를 둘러싼 친일 시비를 짚는다. 그는 일제 아래서 잠깐이지만 신령 군수를 지냈고 총독부가 민풍(民風)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조직한 교풍회(矯風會)에도 참여했다. 동시에 그 주변에 항일운동에 참여한 인물이 많다. 제자 김진만이 수감된 독립투사이며, 1930년에는 민족 시인 이육사도 서화 제자로 입문했다. 또 무엇보다 일제에 쫓긴 의병장 허위를 몰래 숨겨 주고 중국으로 도피한 이력도 있다. 옷도 평생 한복만 입었다. 그가 항일 구국을 위해 적지 않은 활동을 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자산가 등 당시 기득권자의 처신이 얼마나 어려웠을지를 짐작케 한다.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1933년 72세 고령의 석재는 지역 유지들과 함께 화가 이인성을 위한 전시회를 열어 줬다. 이인성은 석재와는 50년 나이 차가 나는 소년인 데다 전통 서화와는 거리가 먼 서양화의 기대주였다. 또 이듬해는 대구 서양화 연구단체가 미술전람회를 열자 석재는 교남시서화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기꺼이 서화를 찬조 출품했다.

석재는 이렇게 전통 서화의 맥을 이으면서 유화 등 새로운 미술에도 열린 자세로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덕분인지 대구는 이후 이상정·이여성·이쾌대 등 기라성 같은 근대 서양화가들을 잇달아 배출한다.

대구미술관은 2017년 작가 서병오를 본격 조명하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전시회의 제목은 ‘대구미술을 열다’였다. 석재를, 대구를 근대미술 요람으로 키운 대부(代父)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대규모 개간 추진하다 홍수 덮쳐 재산 거덜

부자가 3대를 가지 않는다던가. 풍류와 잦은 외유. 거기다 1914년 동생과 함께 재산의 거의 전부를 투자한 사업이 실패하면서 석재는 경제적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그해 53세 석재는 밀양의 황폐한 농업시험장 국농소(國農所) 땅을 불하 받아 개간을 시작했다. 2∼3년 개간하면 한 해 3만석은 너끈하다는 기대를 하면서다. 하지만 개간은 결실을 보기도 전에 홍수가 덮치면서 폐허가 됐다. 사업 실패로 석재는 99칸 집을 친구(이종면)에게 팔아넘기고 빈털터리가 된다. 이후 부호들 집을 전전하며 몇 달씩을 머물렀다. 서화도 팔았다. 조카들의 용돈도 받아썼다. 풍(風)으로도 고생했다.

1935년 그는 거처하던 동성정(東城町) 자택에서 다시 풍을 맞아 쓰러졌다. 석재는 추사가 쓴 병풍을 치고 대원군 글씨와 중국 포화의 대나무 그림에 둘러싸여 최후를 맞았다. 무덤은 대구시 동구 효목동에 있었다. 그러나 묘소 자리가 청구대학 부지로 팔리면서 유해는 화장되고 다시 강물에 뿌려졌다고 한다.

김진혁 부회장이 동성로의 생가 터를 둘러본 뒤 “근처 다방에 손자가 한 번씩 온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들러 보자”고 제안했다. 일행은 기념 공간과 붙은 시니어 전문 미도다방에 들렀다. 40년째 다방을 운영하는 주인은 그 말에 “손자 아닌 손부가 3년 전까지 가끔 들렀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석재의 아들(서복규)도 ‘아버지처럼 키가 크고 멋쟁이’로 기억했다.

만석꾼 집안의 수재로 태어나 시·서·화에 일가를 이룬 선비는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졌다. 만석 그의 가산은 70년 세월 한 점 구름처럼 흩어졌지만 그가 남긴 자유분방한 시·서·화와 지역 미술을 일으킨 발자취는 깨뜨릴 수 없는 돌이 되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풍류를 알았던 선비의 유산이 아닐까.

[박스기사] 술과 여자를 좋아한 호걸 - 기생 연홍과 함께 작품 ‘석란도’ 남기기도

풍류객에 술과 기생 이야기는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석재 서병오는 기생조합 대구 달성권번(券番)의 고문이었다. 그는 기생들에게 사군자와 가야금 등을 가르쳤다. 석재는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호걸이기도 했다.

풍류의 흥취는 1927년 작품인 ‘석란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해 어느 날 밤 석재는 서화가 학고, 기생 연홍(蓮紅)과 어울려 주흥 속에 서화를 나눈다. 흥이 오르자 석재가 먼저 괴석을 그리고 학고와 연홍에게 난을 치게 했다. 두 사람이 난을 그리자 석재는 즉흥시로 소회를 적고 작품을 마무리했다.

취한 붓 마음대로 휘두르면서/다만 항아리 속 술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네/창밖에 새벽달이 걸려 있는 줄도 몰랐다오

화제 뒤엔 “정묘년 3월 석재가 돌을 그리고 화제를 썼으며, 학고와 연홍이 난을 그렸다”고 적혀 있다.

석재는 또 기생을 다루는 솜씨도 뛰어났다고 한다. 김봉규의 [석재 서병오]에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석재가 경상도 관찰사의 초청을 받았을 때다. 기생과 시인묵객이 함께한 봄날 연회가 무르익어 갔다. 장난기가 발동한 석재는 마음에 드는 기생이 자신에게 술을 따르려 하자 상 아래로 그의 발을 슬쩍 건드렸다. 기생은 놀라 술을 쏟고 치마도 적시게 됐다. 기생은 당황했다. 그러자 석재는 기생에게 치마를 벗어 수양버들에 걸어놓으라고 한 뒤 잠자리 날개 같은 속치마만 입게 했다.

그렇게 놀다가 치마가 말랐을 무렵 석재는 기생에게 그걸 가져오게 한다. 석재는 그 치마에 붓을 휘둘러 난초를 그리고 그날 분위기까지 글로 쓴 뒤 치마 주인에게 건넸다. 기생 얼굴이 활짝 피었다. 다른 기생들은 술 쏟은 그 기생을 잔뜩 부러워했다.

진주에 한 달 간 머무를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진주에는 향전(香田)이란 명기가 있었다. 석재는 그러나 향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른 기생들만 띄우며 돈을 뿌렸다. 그런 뒤 석재는 대구로 돌아왔다. 자존심이 상한 향전은 곧 대구로 석재를 찾아왔다. 석재는 향전이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깊은 사이가 됐다. 둘은 동거에 들어가 딸을 하나 낳았다. 석재는 향전은 물론 대구 삼절로 불린 명기 염롱산을 애첩으로 삼는 등 여러 기생들과 동거했다고 한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909호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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