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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한반도 워치’] 동북아 역사적 전환기의 한국의 대응 

4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를 준비하자 

대미(對美) ‘예스맨’들 퇴출하고 전통적 한·미 관계 기본 틀 다시 짜야
한·일 관계 조속한 복원과 한·중 전략적 파트너십 강화도 긴요


▎6월 30일 판문점 남측 지역에서 회동한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미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 사진:노동신문
2019년 8월 25일, G7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 비아리츠.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었다.

트럼프_ “지난주 북한 김정은 위원장에게 훌륭한 편지를 받았다. 편지 속에서 그는 한국이 전쟁 게임(war games)을 하고 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내 모든 참모에게 워게임을 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지만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나는 완전한 돈 낭비 (a total waste of money)라고 생각한다.”

아베_ “우리의 생각은 명확하다. 최근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는 유엔 결의 위반으로 극히 유감이다.”

트럼프의 말은 균형을 잃었다. 그는 한·미 군사연습은 돈 낭비라고 비판하면서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과 초대형 방사포 시험발사에는 입을 다물었다. 아베는 우회적으로 이 점을 찔렀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안보리 결의 위반이라고.

트럼프는 8월 10일에도 트위터에서 “한·미 훈련은 터무니없이 비싸다. 마음에 든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올해 들어 북한은 벌써 미사일 시험발사를 열 번 했는데 트럼프의 이 트위트는 다섯 번째 시험발사 다음 날 나왔다. 트럼프는 아직 한 번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부정적인 내용으로 트위터를 날리지 않았다.

반면에 트럼프의 ‘졸’들은 한국이 8월 22일 지소미아(GSOMIA) 파기를 발표하자 일제히 한국 비판에 나섰다.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가 ‘실망’이다. 동맹국 간에는 잘 쓰지 않는 용어다. 워싱턴이 격앙했다는 의미다. ‘졸’들의 실망 역시 그 대상이 한국이다. 지소미아 파기의 원인 제공자는 일본이다. 실망은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향해야 균형이 맞는다.

미국은 한국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아베 정부의 한국에 대한 경제·역사 도발이 고조되는 가운에 한·미·일 안보협력의 근간의 하나인 지소미아가 위태로운 징조는 일찍부터 나타났다.

그러나 미국은 중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수수방관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베 정부에 대한 일방적 호감이다. 둘은 한국이 설마 지소미아 파기의 모험을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타성에 젖은 생각에서다. 미국의 관료들에게 한국의 미국 추종은 당연한 것(taken for granted)이었다. 미국의 한국 때리기(bashing)에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원초적 불신이 깔려 있기도 하다.

미국의 한국 경시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시의적절한 반발을 했다. 외교부 차관이 한국을 내려다보는 경향이 있는 미국 대사 해리 해리스를 외교부로 소환해 지소미아에 관한 미국의 비판을 자제하라고 요구했다. 인도·태평양 사령관을 지낸 미국 대사로서 체면이 깎인 해리스는 서울에서 한·미 안보 대화가 열리는데도 동남아의 섬나라로 훌쩍 여행을 떠나 버렸다.

미·중 무역전쟁 ‘바다’에서 승패 갈린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6월 27일 일본 오사카의 한 호텔에서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아직 반환되지 않은 주한미군 기지 26개의 조기반환을 추진하겠다는 한국 정부 발표 역시 미국에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미군기지 반환은 주둔 미군이 기지를 떠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에 미군 주둔비를 대폭 인상하라고 협박한다.

그는 한국에도 숨은 카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기지 반환 협상에는 환경평가가 필수적이다. 수십 년 땅속 깊이까지 오염된 기지를 반환 전에 정화하려면 미군 주둔비용 못지않은 비용이 든다.

영화 [괴물]은 미군기지의 환경오염이 어떤 상황에 와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줬다. 트럼프가 [괴물]을 본다면 미군기지 이전 조속 강행에 담긴 한국의 의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백악관과 국무부는 청와대 국가안보실 제2차장(외교안보수석에 해당) 김현종을 사실상 기피 인물로 생각하는 것도 한·미 관계의 완만한, 그러나 의미 있는 변화를 상징한다. 김현종은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 FTA를, 미국이 손해봤다고 한탄할 수준에서 체결한 사람이다. 그의 협상 태도는 거만하다 싶을 만큼 당당했다.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나온 스펙과 원어민 수준의 영어로 그는 협상을 주도했다. 미국의 외교 협상 역사상 이렇게 상대방에 휘둘린 전례가 없다. 그런 김현종이 노영민 비서실장과 함께 지소미아 파기를 밀어붙인 걸로 알려졌다. 지소미아 파기에 김현종이 실제로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미국이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은 지금까지 미국에 ‘예스’라고밖에 말할 줄 모르는 한국 외교관들, 대부분 미국통으로 알려진 인물들만 상대해 왔다. 그들에게 김현종은 당연히 외계인 같은 존재일 것이다. 한·미 관계의 재구축(reconstruction)이 불가피하다. ‘예스맨’들의 퇴출로 전통적인 한·미 관계의 기본 개념과 틀의 탈구축(deconstruction)이 선행돼야 한다.

트럼프가 내년 대선에서 재선된다고 해도 포스트 트럼프의 미국은 한·미 관계를 어떻게 운용할지 예측할 수 없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재집권하건 안 하건 ‘포스트 문’의 한국이 어떤 대미(對美) 스탠스를 취할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미 동맹의 나사가 하나씩 빠지고 있는 한·미·일 3각 안보체제가 지금 같을 수는 없다는 것,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북·미 관계가 한국의 중재·개입을 최소화하는 선으로 개선된다는 것, 아베의 일본이 개헌에 성공해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돼 북한과 독자적인 관계 정상화를 실현하고 말 것이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북·미 관계가 정상화돼도 중국은 잃을 것이 없다. 지소미아 파기는 일본이 한국을 퇴로 없는 코너로 몰아붙여 한국이 감정적으로 대응한 결과다. 세련된 외교가 아니었다. 그 결과 한국은 동북아시아에서 홀로서기를 해야 할 도전에 직면했다. 도전에 대한 응전에서 한국은 살길을 찾으면서 튼실한 중견국가로 성장할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정치·외교 지형이 이렇게 흔들리는 것은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 전환을 예상된 시기보다 앞당긴 것에 불과하다. 많은 학자는 2030년쯤을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의 일극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중국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본·인도 등이 그 주위를 둘러싼 다극체제가 도래하는 시점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역사적 전환의 시점, 더 구체적으로는 중국이 군사·경제적으로 미국과 대적할 수 있는 시기를 2030년보다는 훨씬 늦춰 잡아야 한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미·중 무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는 전쟁이다. 결국 승패는 군사력, 그중에서도 두 나라의 해군력이 가른다.

독자적 안보역량 강화되면 대미 의존도 줄어


▎지난해 10월 12일 제주민군복합항에 입항한 미국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의 비행갑판과 함교. /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중국의 치명적인 약점은 항공모함의 열세다. 중국은 2030년까지 4척 항공모함 체제를 갖출 예정이다. 그 정도로는 미국의 11척 항모 체제의 상대가 안 된다. 항모의 척 수 외에 무기체계의 성능과 작전 수행능력의 열세를 극복하는 데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훨씬 긴 시간이 걸린다. 미사일에서도 미국의 잠수함 발사미사일(SLBM) 사정거리가 1만2000㎞인 데 반해 중국의 SLBM은 7000㎞에 불과하다.

항공모함의 진수/보유 자체로는 항모 전력이 갖춰지지 않는다. 미국의 항모 전단은 항모 한 척을 중심으로 이지스 방공함 1~2척, 구축함 2~5척, 보급함, 공격용 원자력 잠수함으로 구성된다. 미국의 항공모함 운용의 경험을 따라갈 나라가 없다. 미국은 태평양 전역(戰域)에만 레이건, 칼 빈슨, 미국 최대의 핵전력인 니미츠 항모 전단을 배치하고 있다.

중국이 태평양에서 미국의 항모 전단과 맞설 항모 전단으로 무장하는 데는 앞으로도 20년 이상이 걸린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항모 전단이라는 하드파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항모 운용의 경험이라는 소프트파워다.

태평양의 이런 안보환경 변화에서 한국의 선택은 무엇인가. 지금의 추세를 보면 미국은 일본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도·태평양 안보전략의 린치핀(linchpin)으로 하고 그 둘레에 한국·필리핀·베트남·인도네시아·호주를 거느리고 손을 길게 뻗어 인도와 제휴하려고 할 것이다. 한국은 세 가지 길을 가야 할 것이다.

하나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안보의 미국 의존을 줄여 나가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독자적인 안보역량 강화가 선행된다. 북태평양의 긴장이 아무리 고조돼도 미국·중국·일본·한국·북한이 다른 어느 한 나라와 실제로 전쟁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마다 상대적인 군사력은 열세라도 최소한의 거부능력(deniability)은 갖추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은 대외적으로 통합된 방위력을 행사할 수준까지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북한 김정은도 한국을 소외시키고 미국과 직접 비핵화 협상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지만, 협상의 출구에서 북한 지원의 막대한 비용이 논의되는 단계가 되면 한국은 협상 주역에 가까운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셋은 한·일 관계의 조속한 복원과 한·중 전략적 파트너십의 강화다. 한국과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서 파생된 분쟁을 봉인하고 새롭게 전개되는 동북아의 정치적 지형에 맞는 양자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감정의 소모는 어느 쪽에도 이롭지 않다. 아베 정부가 일본을 사실상 1920~1930년대의 군국주의로 회귀시켜 놓으면 북태평양은 군비경쟁이 치열한 초긴장의 바다가 될 것이다. 한국은 미국의 중재와 중국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 대해 철저히 현실주의적·실용적 정책을 취하는 것이 현명하다.

볼턴 해임은 트럼프가 北에 보내는 고무적 신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여사가 6월 21일 평양국제비행장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펑리위안 여사를 환송하고 있다. / 사진:노동신문
중국과의 관계는 미국과의 관계에 연계돼 있어 항상 가변적이고 따라서 불안하다. 미국은 문재인 정부가 중국에 경사(傾斜)되고 있다고 경계한다. 섬세하고 세련된 외교가 요구되는 이유다. 반면에 중국은 한국을 미국의 중국 포위망의 필수적인 고리로 생각하고 작은 일에도 의도적으로 과잉반응을 보인다.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태가 좋은 사례다. 중국이 가장 민감하게 경계하는 것은 한국이 한·미·일 미사일 방어망(MD) 체계에 편입되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이미 MD 체계를 구축해 한국의 참가를 압박하고 있다.

역대 한국 정부가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MD 체계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현명한 정책이다. 한국이 MD 체계에 가입하면 미국의 중국 포위망은 완성되고, 중국은 사드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몇십 배의 보복을 가해 올 것이다. 한국이 감당할 수준의 보복이 아니다. 출구는 없는가.

한·미, 한·일 관계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한·중 관계는 북한 문제와 직결돼 있다. 김정은은 트럼프를 만날 때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을 만나 입장을 조율한다. ‘각본 시진핑, 출연 김정은’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대조적으로 한·미 관계는 점점 소원해지는 조짐이 도처에서 나타난다. 김현종 청와대 안보실 제2차장은 안보실이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거의 매일 지소미아 문제로 소통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가 미국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의 실망 표현이라면 분명히 소통 방법이 틀렸다. 지금 전개되는 동북아 신질서에서 한국이 한·미동맹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중국과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려면 소통의 방식을 재점검해야 할 것이다.

한·일 관계 복원과 미국의 한국에 대한 불신과 의혹 해소를 포함한 균형 잡힌 한·미, 한·중, 한·일 관계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충분조건은 남북관계의 정상화, 북한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정착이다.

이번 유엔 총회(9월 22~26일) 기간이 북한 문제 해결의 분수령이다. 아니, 마지막 기회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미국의 입장이 조율되고, 북·미 고위급 협상과 그 결과 기대되는 김정은-트럼프 4차 정상회담에서 북한 비핵화와 체제보장에 의견이 접근한다면 한반도 평화의 전망은 밝다.

트럼프가 김정은 체제를 위협하는 리비아 모델을 주장해 북·미 협상을 오랜 교착상태에 빠트린 안보보좌관 존 볼턴을 해임한 것은 트럼프가 북한에 보내는 고무적인 신호다. 북한 외무부상 최선희는 하노이 회담을 결렬시킨 볼턴이 그 자리에 있는 한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 트럼프도 볼턴의 리비아 모델 발언을 비판해 김정은을 달랬다.

여러 갈래의 강물이 하나의 바다에서 합수(合水)되는 지점, 그곳이 우여곡절 끝에 실현될 북·미 고위급 회담이요, 희망하기로는 북·미 4차 정상회담이다. 한국은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하면서도 4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 김영희 중앙일보 명예 대기자 - 1958년 22세 나이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필자는 82세가 된 지금까지 현장을 누비는 영원한 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 임원 등을 거치고 최근까지도 중앙일보 대기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외교·안보·국제 뉴스의 한 우물을 판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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